이미지와 표상(<관념) 그리고 이데아와 형상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중) 독서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의 황수영저 해석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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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라는 말의 좀더 직접적인 어원을 알아보자.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에서 모상을 둘로 나누는데 하나는 에이콘’(eikon)이고 다른 하나는 판타스마’(phantasma)이다에이콘은 대상의 형태를 실재와 비슷하게 나타내는 도상인데 현대의 아이콘(icon)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유래한다. 단순히 복사물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콘은 이데아계를 곧바로 모사한다고 간주되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승격된다. 한편 판타스마는 시뮐라르크라고도 불리는데, 복사물을 다시 복사한 것이며 우리 기억속의 심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데아가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을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판타스마로부터 에이콘을 잘 구별해내는 것이 올바른 인식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는 조금 사정이 달라진다. 이데아는 사실 플라톤이 만든 용어이고 당시 그리스의 일상어에서는 사물의 본질적 특성을 형상’ (eidos)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비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은 이데아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사물들의 내부에 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사물들의 형상을 인식한다. 한편 판타스마는 감각을 통해 우리안에 들어온 외부대상의 형상이 기억으로 남아있는 흔적, 즉 심상을 지시하기도 한다. 일상어에 충실한 상식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판타스마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심상들을 토대로 지성적 인식이 형성된다고 보는데, 이런 심상이라는 의미의 판타스마가 중세에 라틴어 이마고’ (imago)로 번역되었고,이것이 이미지라는 말의 직접적 기원이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정은 좀더 복잡해진다. 이데아와 판타스마는 중세를 거쳐 우여곡절끝에 근대철학의 중요한 개념들로 자리잡는다. 데카르트는 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알수 있는 것을 관념’(ide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단어자체가 보여주듯 이데아 또는 에이도스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같은 용어면서도 내용은완전히 다르다. 이데아나 형상이 우리 밖의 대상이 가진 본질적 특성을 의미하는 반면 관념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대상, 표상’(representation)을 의미한다. 표상은 대상을 마음속에서 재현한다는 뜻으로 관념보다 나중에 쓰인 말이다. 표상은 관념과 거의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구체적인 뉘앙스를 가질때는 마음속의 상, 즉 이미지를 의미하기도 한다아무튼 관념과 표상은 둘 다 어떤 내외적 원인으로 마음에 나타난 것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초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인식의 기초단위라 할 수 있다.

 

중략.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가 외부사물을 직접 인식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관련된다. 이데아나 형상은 사물의 본질을 직접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는 정신안에 있는 이성에 의해 투명하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이나 이미지는 마음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에이돌른이나 판타스마는 대상이 있고 그것의 복사물이라는 의미에서 이차적인 것이지만 관념이나 이미지는 대상과 관련이 없이 혹은 대상을 반영하는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2차적표상이다. 실재론자들이나 관념론자들에게도 이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따라서 실재론자들의 과제는 대상과 관념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고, 관념론자들은 이 과제를 무시했기때문에 종종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의 상식에서 관념과 이미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관념이 정신쪽에 가깝다면, 이미지는 불완전하지만 좀 더 생생하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사물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관념에서 표상으로 그리고 이미지로 감에 따라 추상성에서 구체성에 더 가까워진다. 베르그손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다. 즉 이미지는 정확히 대상의 실체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의 관념만도 아닌 중간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중략. 베르그손이 볼때 칸트의 문제는 인식을 현상으로 제한한 데 있다. 애초에 물질을 데카르트와 버클리가 주장하는 두 대립된 지점의 중간에 위치시켰다면 칸트의 비판은 불필요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한다. … 베르그손은 관념과 이미지 그리고 물질사이에 정도차이만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물질은 현상이나 이미지의 배후에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칸트는 반면 이것을 사물자체(물자체)’라고 부르고 우리 인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베르그손의 이미지는 그보다 더 심층적인 개념인 지속(duree)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곧 운동은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성소멸과 변화가 양태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생성소멸과 변화는 모두 시간속에서 일어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기보다는 그 자체가 시간적인 현상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시간적 본성으로 인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이 모든 운동과 변화를 진정한 존재로 볼 수 없다고 환상으로 내몰았다그후 플라톤의 비존재-참존재로 인해 운동, 변화를 실재로 취급하지 않는 서양의 전통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으로는 변화하는 것들이 더 구체적이고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것들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존재자의 본성에 종속되어 있고, 그 본성이란 불변의 자기동일성인 것인 한) 고정불변하는 것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신념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운동은 이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이 생각은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한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의 역설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있다라고 말하고 화살의 운동을 순간적 정지점들의 무수한 합으로 보고 있다. 정지점들의 합이 운동을 구성한다면 결국 운동은 정지와 동일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가정을 가지고 있다. 만약 화살이 어느 순간에 정지한다고 하면 그것은 더이상 운동이 아니다. 고무줄을 A에서 B지점으로 늘이는 경우에 이 늘어남이라는 과정을 정지점으로 분해할 수 있을까? 화살의 운동역시 고무줄의 늘어남과 마찬가지로 불가분의 과정이다. 이처럼 운동을 고정적인 사유와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그리스인들의 경향을 두고 베르그손은 사물의 진행 앞에서 그들은 사유와 언어가 취하는 태도를 잘못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사물의 진행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편을 택했다.”고 말한다 (창조적진화, 463). 중략.

 

그러다면 안정성은 어떻게 파악되는 것일까? 베르그손은 그것을 환경에 대한 생명의 적응과정의 결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생명체는 안정된 지반위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 만약 매순간 변화하는세계속에서 아무것도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 생명종은 나름의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를 고정시켜 파악하는 독특한 종적특성을 가진다. 예를 들면 박쥐는 자외선과 적외선을 지각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어떤 동물들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시각체계로 살아간다. 결국 고정성이란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성립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상 물체는 매순간 형태 변화를 하고 있다. 아니면 차라리 형태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태는 부동적인 것에 속하면 실재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실재적인 것은 연속적인 형태 변화이다. 즉 형태는 변화위에서 취해진 순간성일 뿐이다. (창조적진화, 447~448)”

 

이처럼 베르그손의 지속의 철학은 그리스철학의 관점과는 반대편에 서 있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운동과 변화이며 오히려 고정된 형태야말로 변화의 순간적 외양일 뿐이다. 바로 이 순간성이 이미지로 나타난다. 순간성은 무수히 많은 관점에서 연속적으로 포찰될 수 있고 이에 따라 이미지도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많은 비슷한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나타날때 우리는 그 모든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지각하지 못한다. 대신 중간정도에 해당하는 이미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이미지를 대표로 파악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의 증가나 감소, 또는 변형으로 파악하는 습성이 있다 (: 이것이 바로 범주화하는 뇌의 기능이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바로 이 중간적 이미지를 우리가 사물의 본질이나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이렇게 볼 때 이미지들은 운동하는 실재이자 한 단면이지 허상은 아니다. , 이미지는 실체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지만, 실재의 일부인 것이다.

 

고정적 관점에서는 운동 역시 이미지들의 연쇄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착시효과로부터 만들어진다. 이미지들중에서 생명체가 고정된 것으로 지각한 중심적 형태는 지성에 의해 철학적 개념으로 승격된다. 형상이든 실체든, 일단 만들어지면 거기서부터 운동이 재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흐르는 실재 속에서 순간적 이미지를 절단하여 실체화한 다음, 그것들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여 움직임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 제논의 역설은 바로 이런 바탕위에서 성립한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착시효과를 영화적환상이라고 부른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진기의 필름이 풀리면서 장면의 다양한 사진들이 차례로 연속될 때 나타나는 시각적 착각을 이용하여 만들어진다.  중략.

 

그러나 이미지들 배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 실체나 형상은 인간지성의 작품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고 지속이라는 더 커다란 우주적 과정의 일부로서 나타난 단면들이다. 그렇다면 운동은 그것이 질적 변화이든 위치이동이든지속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단 형상이나 실체를 제거하고 이미지들만 남겨놓는다는 조건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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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생각과 거의 모두 일치하는 구절들. 특히 화살의 운동에 불가분적 행태를 비롯한 베르그손 저작직접인용부분은 그대로 노자의 '유무상생' 근본설과 합치한다. 이는 사상계를 기초로 여러 문화계 역시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했던 여러 양태가 깨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니, 원래 그런 세상을 (적어도 필자의 시각으로는) 억지로 고정된 언어와 개념이라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사진으로 붙들어 매고 있어온 프레임이 드디어, 현대에 이르러 돌고 돌아 그렇게 보아야 할 관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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