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축 (3) 전돌이 깔려있던 부석사 무량수전 일제시대사진, 고대-중세건축의 묘미 한국의 사라진 건축

현재의 무량수전내부

'답사여행의 길잡이' 라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04년 완간)가 지은 책을 보면 국보 18호인 무량수전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바닥에는 본래 녹유를 두껍게 입힌 전돌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고려때의 것으로 수습된 몇점이 유물전시각에 진열되어 있는데 그처럼 두꺼운 유리질막의 전돌이 무량수전 바닥에 가득히 깔려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휘황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녹유전을 걷어내고 마루를 깔게 된 것은 엎드려 절을 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의 예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녹유전이 이것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대 녹유전
그런데 이 이 녹유전은 아닌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무량수전 바닥에 전돌이 깔려있던 사진'이 있습니다. 아래를 보시죠. 첫번째는 요즘의 사진, 두번째는 1930년대(추정) 사진입니다.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跡圖譜 (1933)

아시다시피 부석사 무량수전은 알려진 현전하는 건축중 가장 오래된 한국 목조건축물중 하나입니다 (단정하지 않은 것은 봉정사 극락전때문입니다- 이 극락전에도 사실 '전돌'이 깔려있습니다). 사찰이 세워진 것은 7세기중엽이지만, 무량수전은 고려대의 건물이지요. 보통 1376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많은 중요건축물의 바닥은 나무마루가 아닌, 전돌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1933년 일제가 조사해서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중요한 사진입니다.

이것을 보면, 19세기-20세기초까지도 무량수전의 바닥에는 전돌이 좌악 깔려있었음을 알수 있지요. 전돌이란 존재는 고려대 이전인 삼국시대초기부터 등장하는 오래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 정릉사지에도 전돌이 깔려있고, 백제에서는 한성시대부터 벌써 방형전돌이 제작됩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는 무늬없는 부전돌, 묘전돌이 나오며, 공주시대부터는 본격적인 무늬/문양전돌이 제작됩니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아래는 경주동궁(안압지)의 임해전터에서 나온 전돌입니다.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 써있는 보상화무늬전돌

전돌은 고려대에 들어서는 중요건축에 아주 자주 쓰이는 형식이 됩니다. 예를 들어 고려정궁인 만월대의 경우 뜰안을 전돌로 깔았을 정도였습니다 (아래사진).

고려도경 (12세기초)
양쪽 행랑은 모두 30간이고, 뜰안은 벽돌로 깔았는데 견고하지 못하여 다니면 소리가 난다.
예전에도 제 글에서 몇번 전돌바닥을 부분적으로 소개한 바 있지요. 최근 발굴한 혜음원, 법천사등에서도 많은 전돌바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고려대여관 혜음원 전돌바닥
원주 고려법천사 전돌바닥
당장 오늘자 2015년 2월 10일 발굴소식에서도 고려대건축의 '전돌소식'이 등장합니다. 다음은 순천시 서면 정혜사의 오늘자 발굴소식입니다.

순천시는 서면 정혜사 건물지에 대한 발굴(시굴) 조사가 완료됨에 따라 지난 10일 관계 전문가와 함께 발굴현장에서 자문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사찰과 관련된 건물지 5동과 건물지 사이에는 전돌을 깔아 놓은 유구가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사찰 건물지 중 1동에서는 현재 사찰 내 비석의 비좌가 놓여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확인됐다.

또한 유구와 함께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청자와 기와편을 비롯해 분청사기 및 자기편, 연화문막새 등이 출토 되고 있다. 5동의 건물지에서 보이는 특징중 하나로 잘 다듬어진 주춧돌이 확인되고 있으며,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는 긴 돌을 다듬어서 멋을 낸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주춧돌과 주춧돌의 연결방식은 고려시대에 사용된 건축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사찰 내 가장 빠른 시기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축조된 정혜사 대웅전(보물 제804호)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번 발굴조사로 역사 사료로만 전해지던 정혜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중략.

4-5호건물지 일부사진입니다. 아래쪽에 전돌이 보입니다.
역시 현전하는 오래된 목조건축 중 손꼽히는 조선시대초기건축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13호)도 전돌이 깔려있습니다. 이 건축물은 연기문의 발견으로 최소 1476년이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수 있습니다 (최소이니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정확히 모르지요).
무위사 극락보전 

부석사 무량수전의 미학을 현재의 시점에서 생각할때, 전통목조건축 내부의 '전돌'이라는 개념은 이미 한국인들에게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 사진이 증명하듯 '전돌'이라는 요소 역시 한국전통건축의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였습니다.

사실 창덕궁의 정전이자 국보 13호인 인정전(仁政殿) 역시, 20세기초인 1907년까지 현재의 마루가 아닌 전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왕의 집무공간인 선정전(宣政殿) 역시 내부가 현재 마루지만 1647년(인조25) 수리 당시 전돌이 많이 사용되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원래는 전돌 바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후 별다른 재건기록이 없어 현재의 선정전은 인조대 건물로 여겨집니다.

또한 오늘의 주인공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최고最古를 다투는 고려목조건축 (중기 혹은 후기)인 국보 15호 봉정사 극락전 역시 원래 '전돌바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식 마루를 깔아뒀죠.
하지만, 바로 아래 검은 전돌이 묻혀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흔적이 보입니다. 아마도 승려들이나 행자들의 예불을 위해서 깐 것으로 보입니다만, 사실 이런 고찰의 경우 그 특색에 맞게 신발을 신고 예불을 드리는 독특한 형식도 나올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고려대건축을 보유한 사찰로써의 어떤 역사성과 자긍심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겁니다.
위에 마루를 깔아버린 봉정사 극락전 내부

솔직히 문헌자료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일반인들이 직접 쉽게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중세-고대건축물의 특징이 살아 있는 건축들이 좀 더 재건되면 좋겠습니다. 고궁뿐 아니라 한국전통건축의 거대한 축인 사찰건축에서도 말이지요. 예를 들어, 커다란 치미, 중층양식의 전각, 이중처마, 장륙상, 확실하게 박혀있는 현어, 그리고 이런 전돌양식의 입석식 바닥등, 사료와 부분부분적인 양식을 맛보기로 느끼는 것이 아닌, 비록 복원이 아닌 재건일지라도 여러 사료와 유허등을 통해 최대한 '이게 고대-중세 한국의 건축양식'이구나란 느낌을 확 받을 수 있는 건축물을 보고 싶군요 (현재로썬 백제재현단지가 있긴 합니다만, 고려대 건축물의 전형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
사족: 창덕궁 인정전의 경우, 일제시대 내부사진으로 가장 근접한 사진은 이것밖에 못구했습니다만, 이때는 이미 마루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1907년 전돌을 걷어내고 마루를 설치하면서 '전등'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전등이 여럿 보입니다. 그렇다면 1907년이후의 사진이겠지요).

덧글

  • Nocchi 2015/02/11 10:40 #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벽돌이 깔려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려시대에는 (현대적인) 입식 생활을 했다.. 종교기관 관공서 역참(오늘날로 치면 호텔??) 같은 공공건물은 대부분 입식이었다는 뜻 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 역사관심 2015/02/12 07:22 #

    감사합니다. 삼국-남북국(통일신라)-고려대까지도 공공건축에서는 입식이 있었습니다. 다만, 거주가옥의 경우 고려도경을 보면 서민들은 온돌을 쓰고 귀족은 입석식이었음을 알수 있죠. 이것이 고려시대 귀족가옥의 내부 상상도입니다.
    http://pds26.egloos.com/pds/201404/16/34/a0053134_534d9192e11cb.jpg

    다만 통일신라대에도 일괄적으로만은 볼수 없을 것 같고, 혼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http://luckcrow.egloos.com/2205485
    http://luckcrow.egloos.com/2466815

  • ㅂㅂ 2015/02/12 05:18 # 삭제

    고려시대에는 관공서의 건물이 모두 전돌건물이라거나 귀족은 입식 서민은 좌식이라는 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고려도경이나 송사에 따르면 궁궐 건물이나 귀족의 집에도 마루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편좌(便座)에서 정사(政事)를 보는데, 오직 인욕(茵褥 돗자리)을 탑(榻) 위에 깔았다. 국관(國官)이나 친시(親侍)들이 그 곁에 꿇고 늘어앉아 왕의 분부를 받아 차례로 전달한다.
    대신은 5일에 한 번씩 알현하는데 따로 정사를 의논하는 당(堂)이 있고, 나머지 관원들은 매달 1일과 15일 이외에 네 차례 왕에게 알현하여 분부를 받는다. 분부 받을 일이 있으면 문밖에 서서 받는데 집주관(執奏官)이 문에 서서 준다. 섬돌에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신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가며, 궁정(宮廷)에서 추창(趨? 예도에 맞도록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할 때에는 반드시 왕을 향하여 절을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다.
    <고려도경>

    마루 위에다 자리[席]를 깔고, 올라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는다. <송사>
  • ㅂㅂ 2015/02/12 05:21 # 삭제

    그리고 고려인들은 예를 갖출때 꿇어앉는다거나, 시종들이 곁에 꿇어앉는 다는 등이 나오는걸 봐도 고려시대에는 입식생활을 했다고 섣불리 말 할 수도 없습니다
  • 역사관심 2015/02/12 07:22 #

    ㅂㅂ님> 정확한 사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료로 증명하는 편을 꽤 좋아하는데, 좌식법에 대한 부분을 찾기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고맙습니다. '모두'라는 단어는 역시 함부로 쓰면 안될 듯 하군요 ㅎㅎ. 입식도 있었고 좌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댓글을 수정하죠.
  • ㅇㅇ 2015/02/11 11:47 # 삭제

    바닥 전돌은 수덕사 대웅전, 화엄사 각황전도 그렇죠

    사실상 조선 후기나 말기에 새로 지어진 불교사찰이 아닌다음에야

    중수 복원 보수된 경우 일제강점기까지도 전돌 바닥 그대로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현재 저런 사찰들 바닥에 나무 마루 깔린건

    유감스럽게도 해방후 전통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덕사 대웅전 같은 경우 해방후에 발생한 일은 아니지만

    불상 위치까지 변형됬죠 ( 원래는 불상이 대웅전 중앙에 위치했으나

    나무 마루를 전돌바닥 위에 설치하면서 불상이 뒷쪽 벽체로 이동 )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경우

    녹유전은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만들어진거고 그게

    14세기 초 왜구 침입으로 부석사 불탔을때 새로 지어지면서

    녹유전 대신 일반적인 전돌이 무량수전 중수하면서 일부분 새로 깔린걸로

    압니다 그게 일제강점기 사진에 남아있는 무량수전 내부 전돌이죠

    현재 나무마루는 해방후 전돌바닥위에 깐거구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전돌을 제거하고 나무마루 깔았다는것 같던데

    그건 잘못된 정보 같네요 지금도 저 나무마루 제거하면 밑에

    전돌 그대로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현재 한국의 불교 예배 방식 그닥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원래 임진왜란 이전 까지는

    한국 불교의 일반 신도 참배 방식은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절하는게 아니라

    건물 밖 탑을 돌면서 기도하는 거라죠

    건물 안에는 스님들만 들어가서 기도하거나 강론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2/12 00:33 #

    아 무량수전바닥에 아직도 전돌이 있나요. 유홍준 전청장이 잘못아신거라면 놀랍네요. 추후 기회가 되면 확인후 첨언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일제강점기때처럼 전돌이 있는 사찰은 그대로 두는게 다양성과 역사성면에서 좋은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Nocchi 2015/02/12 09:51 #

    전당 안에는 스님들만 들어갈 수 있고 일반 신도들은 바깥에서 부처님 모습을 얼핏 보일락 말락 하는 구조 라면 장엄함과 권위가 하늘을 찔럿을 것 같네요. 일종의 종교적인 연출로서도 훌륭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일개 서민이 왕을 만나보는 것 같은 느낌.

    버뜨, 천년이 지나자 불교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일반 신도들이 '감히' 부처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 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 Esperos 2015/02/11 21:09 #

    불교문화재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반인치고는 많이 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전돌에 대해서는 궁궐건축에만 있다고 생각했을 뿐, 사찰에서도 사용했을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전돌을 사용한 고려시대풍 사찰건축도 기대해볼 만하겠군요. 물론 불교계에서 이런 데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 역사관심 2015/02/12 00:35 #

    네, 저도 전돌자체에 대한 관심은 항상 있었는데, 마침 무량수전 옛사진을 보고 느끼는 점이 정리가 되어 써보았습니다. 한국문화의 통시성이라는 관점에서 여러 다양한 가시적 접근성이 생겨나면 합니다...
  • Esperos 2015/02/12 01:09 #

    불당 안에 전돌을 깔았다면 고려시대에 예불을 드리는 방식도 현재 한국불교와는 달리 중국불교에서처럼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가서 방석이나 받침대를 깔고 절했겠다 싶습니다. 예불방식도 중국에서 배웠을 테니까요.
  • 역사관심 2015/02/12 01:40 #

    확실한 사료나 연구자료를 본 적은 없는데, 삼국에서 고려대까지는 예불의 방식이 금당자체내에서 예불을 드리는 의식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통일신라대까지는 확실히 일반인은 못들어갔죠). 고려대초기까지도 불대좌가 앞의 공간이 거의 없이 금당 정가운데위치해서, 밖에서 보는 시각적효과를 더 살리기도 합니다. 승려들도 금당안에서 마치 탑돌이를 하듯 불상을 중심으로 돌면서 불공을 드렸다고 하네요 (그래서 광배뒤에 다른 불상을 새긴 경우도 있다고합니다). 어쩌면 고려초기까지는 승려들도 금당문바깥이나, 탑에서 불공을 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찾아봐야 알겠습니다만.

    그리고 고려대중기 이후에도 저렇게 전돌이 깔려있었다면 말씀대로 신발을 신고 들어가서 뭔가를 깔고 절했을 가능성이 많겠지요.
  • ㅇㅇ 2015/02/12 15:40 # 삭제

    한국 불교에서 일반 신자가 법당안에 들어가서 지금처럼 절을 하는 방식으로

    불공을 들이던건 임진왜란 이후로 보는게 한국불교역사 통설입니다

    조선 전기만 해도 법당안에 일반 신도가 거의 못들어가고

    스님들의 전용공간이었다고 보는게 맞죠

    불상이 괜히 법당 내부 중앙에 위치한게 아닙니다

    (실제 현존하는 폐사지들을 봐도 상당수가 법당 중앙에 불상 기단 위치)

    일반 신도들은 불상에 예배하는게 아니라 법당 앞 불탑을 돌면서

    소원을 비는게 일반적인 예배방식이었죠

    그리고 이건 좀 놀라운데

    한국 불교의 특징으로 여겨진 불교 사찰 내부에 칠성각 산신각등

    토속신앙과 불교의 결합 양상

    이것도 조선 전기 까지는 극히 드문 케이스고

    임진왜란이후 조선 중후기에 등장했다고 하네요

    (학계 논문등으로 이미 발표 많이 났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토속신앙이 불교로 흡수된게

    조선사회의 유교고착화와 관련된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즉 도교나 토속신앙이 유교사상의 탄압으로

    불교와 합쳐져서 산중으로 내몰렸다는거죠

  • 역사관심 2015/02/16 07:20 #

    역시 한국역사는 파면 팔수록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으로 너무 고착화되어 있는데, 다양한 양태가 널리 퍼지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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