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물리치는 降魔軍, 고려 승려군의 힘- 단상 역사

작년 조선군대의 기질에 대한 포스팅중 영화 명량의 승려군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조선중기의 승군은 그냥 민간의병정도가 아니라 강군이었음을 설명한 바 있지요. 조금만 발췌하자면:

임란당시 이순신 휘하의 승려에 대한 연구논문 (양은용, 전라좌수영의 의승수군에 관한 연구 , 『임진왜란과 불교의승군』, 경서원, 1992, 304쪽)을 보면, 이들은 흥국사에 주진하여 이순신의 지휘를 받으면서 수륙양전을 도모하였는데, 승장들의 칭호는 한결같이 유격대나 돌격대의 대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승장들이 거느린 승군들이 전투부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하멜' 역시 1688년의 조선 승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유사시에 이 중들은 승병으로 활약하기 때문에 칼과 활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승병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병사로 간주되며, 승려들 사이에서 선출한 승병장의 진두지휘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전투부대 승려군의 전통은 사실 기원이 훨씬 올라갑니다. 삼국시대에 전투승려가 있었음은 알려진 사실(예를 들어 고려사에서 최영이 "당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라고 말한 것등)이나, 구체적인 '제도'가 나오는 시대는 고려대입니다. 1105년 윤관이 조직한 별무반의 특수 작전 부대중 가정을 가진 '수원승도'를 대상으로 하는 항마군(降魔軍, 말 그대로 악마퇴치군)이 있었습니다.

그럼 고려 승려군의 강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요? 이와 관련되어 흥미로운 사료 한 점이 전합니다. 바로 서긍의 1123년 [고려도경]의 기록입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석씨(釋氏) 재가화상(在家和尙)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치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 

변경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으나 자못 강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거란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동이(東夷)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렸기 때문에 화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기록은 매우 흥미로운데, 우선 재가화상이라는 집단의 의복형태 (검은 깁의 허리와 좁은 흰 모시옷)와 그들의 용맹한 성정, 그리고 군대에 가더라도 알아서 군량까지 가져가는 단독적인 집단이란 점. 그리고, '거란이 고려에게 패한' 것 (즉, 저 993년, 1010년, 1019년의 3차 고려-거란전쟁)이 바로 이 재가화상부대때문이었다고 1123년 당시 들은 것을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적어도 이 재가화상의 무리의 전투능력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사실은 죄수들인데 머리와 수염을 밀어버려서 '화상'(승려)라고 하는 것이라고 마무리짓는 부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리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오히려 1104년의 윤관의 별무반 특수작전부대인 항마군(降魔軍)의 구성원이 '수원승도隨院僧徒' 즉, 사원에 딸려 노역에 종사하던 승도를 '재가화상'이라는 존재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있습니다. 수원승도의 특징이 바로 가정을 이루고, 토지인 항산(恒産)을 소유했던 승려들이었던 점이 일치하고 있지요.

이 '수원승도'는 그냥 사찰을 지키는 몇몇 현재로 치면 경비원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초기부터 대사찰의 경우 많게는 1000명가량의 수원승도가 머물고 있었던 것이 고려시대의 모습입니다 (현대한국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조선시대 사찰양식에 묻혀 거의 사라지고 없지요). 다음은 [고려사]의 병제부분중 수원승도 부분입니다.

숙종대 병제 중:
개국 초기에 전국 사원(寺院)에는 모두 수원승도(隨院僧徒)가 있었으며 이들은 군현의 거주민과 같이 상시 노역을 담당했는데,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자가 많게는 천백(千百)에 이르렀다. 매번 국가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마다 역시 전국 여러 사원(寺院)의 수원승도(隨院僧徒)를 징발하여 여러 부대에 나누어 소속시켰던 것이다. 보승군(保勝軍)을 집결시켜 군진(軍陣)을 사열하였다.

아무튼 기록이 좀 더 자세한 것이 없어서 아쉽지만, 승려군이라는 존재의 역사적 영향력에 비해 그동안 등한시되어 온 감이 있었는데, 작년에 영화 명량에서 제대로 한번 시동을 걸어준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예를 들어 '승려군, 승려부대'라고 구글링을 해도 삽화, 사진 한장 없습니다. 온통 일본, 중국의 전투승 사진뿐. 그나마 명량사진이 작년부터 최초로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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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존다리안 2015/02/16 16:29 #

    그러고 보면 서구에서도 좀 다르지만 성당기사단 같은 게 있었지요.
  • 역사관심 2015/02/17 09:05 #

    생각해보니 비슷한 느낌도 드네요. 장원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사조직인가 아닌가에서는 차이가 납니다만.
  • BaronSamdi 2015/02/16 18:33 #

    군대갔을 때 마치 스님이 된 기분이었는데 그래서인가 싶네요 ㅎㅎ
  • 역사관심 2015/02/17 09:06 #

    ㅎㅎㅎ 고려승군의 혼이...
  • 迪倫 2015/02/17 04:30 #

    불교계 전통무술들 중에 승군 전통을 내세우는게 혹시 없던가요? 상당수 최근 창작된 게 많다해도 실마리같은게 있지는 않을까요!
  • 역사관심 2015/02/17 09:07 #

    일본측에서 내려오는 신라무승 강포의 이야기는 짧게 소개한바 있는데, 말씀듣고 흥미가 동해 한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 ^^
  • ㅇㅇ 2015/02/17 11:23 # 삭제

    포스팅과 관련된 인터넷 뉴스가 있어서 퍼와 봅니다

    **

    검은옷 입은 승려를 조심하라 "사람이 아니다"

    칭기즈칸의 나라인 몽골제국은 전 세계를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짓밟힌 지역은 중국부터 시작해 동유럽까지. 유라시아 대부분이 몽골의 말발굽에 밟힌 것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을 짓밟고 동유럽까지 휩쓴 몽골 기병대에도 콤플렉스는 있었다. 당시 몽골 수도인 대도(현재 북경과 북경 약간 위쪽 지역)의 코앞에 있는 고려에 대해서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고려를 부마국(사위 국가)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화조약의 결과였다. 군사적으로는 승부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가 세계 최강 몽골을 방어한 것은 특유의 민족주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고 산악 위주의 지형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일까.

    몽골이 고려 침공을 개시한 1231년. 몽골군은 초반부터 희한한 경험을 했다. 소수의 고려 특공대가 몽골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데도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묘사돼 있다. 고려 장교 김경손이 이끄는 12인의 특공대가 몽골 대군을 두 차례나 퇴각시킨 것이다.

    김경손 특공대는 국경 지대인 정주성과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성곽을 포위한 몽골군 진영을 헤집고 다니며 적군을 교란했다. 몽골 대군은 이들 12인에 밀려 두 차례나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기적에 힘입어 김경손은 귀주성 수비를 책임지게 됐다.

    퇴각했던 몽골군이 되돌아와 귀주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지만, 김경손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20일 이상 대항한 끝에 결국 몽골군을 막아냈다. 몽골군은 귀주성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 김경손은 포탄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고를 당했다. 측근들이 "자리를 피하시라"고 권유했지만, 김경손은 "내가 움직이면 병사들의 마음도 움직인다"며 사양했다. 김경손은 부상에도 신출귀몰한 전법을 구사했다. 몽골군도 "사람이 아니다"라며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경손과 그의 특공대는 이처럼 고려군 전체에 초인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난 28, 29일에 방영된 MBC 드라마 <무신>에서도 김경손 특공대의 활약상이 묘사됐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수긍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속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농민군이었다.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출동하는 군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 병사들의 전투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장교가 여러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게 가능했던 것은, 장교는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데 비해 일반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경손 특공대는 일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군대 조직이 아닌 다른 곳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일반 특공대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이 이들을 보고 당황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특공대는 고려 정규군에 편제된 부대가 아니었다. 김경손을 포함한 대원들이 정규군 내에서 직책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런 특공대가 정규군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규군이 몽골군을 방어하지 못하자, 이들이 특공대를 구성해서 전투에 나섰을 뿐이다.

    이 특공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김경손이 항상 검정 옷을 입었다는 '김경손 열전'의 기록이다. 검정 옷, 즉 조의(?衣)를 입거나 검정 허리띠를 착용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고구려 수행자 군단인 조의선인(?衣仙人)이나 신라 수행자 군단인 화랑의 후계자들이었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절단이 작성한 현지 조사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이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평상시에는 일반인들처럼 생활하다가 비상시에는 나라를 위해 전투에 자원했다.

    <고려도경>에서는 이들을 '재가화상'이라 불렀다. 일반 민가에 사는 승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 표현을 보고 이들을 불교 스님들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수도사가 기독교 승려라고도 불리듯이, 승려란 표현은 불교 스님 이외의 성직자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이들이 불가의 스님이 아니라는 점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 가정을 꾸려 여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한다"(<고려도경>)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 복장도 입지 않고 불교 계율도 지키지 않고 가정까지 꾸렸다면, 이들을 불가의 스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경손 특공대는 조의선인과 화랑의 맥을 잇는 신선교 수행자 집단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선교 수행자 출신으로서 고려 정부군 내에서 활동하는 군인들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군대 안의 종교인들이 모여 별도의 조직을 꾸린 것과 같다.

    이들은 일반 농민군과 달리 평상시에도 군사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사명감으로 무장한 조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출현 앞에 몽골군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어린 화랑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백제 정예군을 격파한 사실에서 나타나듯 이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보다도 무서운 것은 신앙심이 강한 군대다. 두 손에 칼을 쥔 군대보다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경전'을 쥔 군대가 더 무서운 법이다. 신선교 수행자 군단은 둘 다 갖춘 부대였다. 몽골군이 "사람이 아니다"라며 감탄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웬만한 나라의 정부군은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인이 나서 국난을 극복한 전통은 계속된다

    신선교 수행자들은 몽골족뿐만 아니라 거란족과의 전쟁에도 크게 기여했다. <고려도경>에서는 거란족 요나라가 고려 침공에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수행자 군단의 활약 때문에 거란족 군대가 무너진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고려 말의 최영 장군도 동일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그는 "당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 승군은 조의선인 군단을 지칭한다. 당태종의 30만 군대를 격파한 주역이 고구려 정부군이 아니라 3만의 조의선인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만 명의 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했으니, 당나라 군대가 움찔하는 것도 당연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정치인의 말은 잘 안 들어도 종교인의 말은 잘 듣는 듯하다. 과거 한국의 종교인들이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으니,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반 서민들도 자연스레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민족이 숱한 외침을 극복한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민족 특유의 민족주의나 한민족 거주지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탁월한 전투력과 종교적 사명감으로 무장한 수행자 군단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수행자 군단이 나라를 지켰기에, 전 세계가 몽골 기병대 앞에 무릎을 꿇는 상황에서도 고려만큼은 끝끝내 국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원나라) 역사서인 <원사>의 '왕약열전'에는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제시돼 있다. 그중 하나는 '고려 백성들이 사납게 돌변하면 우리가 힘만 소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종교인들과 백성들까지 목숨을 걸고 덤비니, 몽골 정부에서도 '고려는 정복할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민족을 지켜온 신선교 수행자 군단의 전통은 조선시대 전기에 크게 약화됐다. <세조실록>이나 <예종실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는 유학자 관료들에 의해 신선교 서적들이 대대적으로 압수되고 불태워졌다. 또 일종의 유교 원리주의자인 조광조의 집권을 계기로 신선교의 전통이 크게 훼손됐다.

    하지만, 종교인들이 나서서 국난 극복을 주도하는 전통은 신선교가 힘을 잃은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불가의 스님들이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한 것이나, 유교 선비들이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의병을 조직한 것이나, 기독교인들이 일제 때 독립운동에 공헌한 것이나 천주교 사제들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사례들이 이를 증명한다.

    한민족이 오늘날까지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전투력뿐만 아니라 신앙심까지 동원해서 나라를 지켜온 뿌리 깊은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모시는 심정으로 나라를 지키는 민족이니, 몽골 기마병들도 이런 민족만큼은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역사관심 2015/02/18 00:01 #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기사를 예전에 본 일이 있는데, 김경손장군의 12인과 재가화상을 직결시키는 것은 기사내용만 가지고 보아서는 무리가 있어보였습니다. 일단 사료를 찾아봐도 김경진 장군이 흑의를 입었다는 기록은 찾기가 힘들더군요- 다만 '흑기를 가진 적군'을 잡았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리고 조의선인 부분은 아직 사료로써의 가치가 정해지지 않는 [해상잡록]의 기록이므로 포스팅내용에서는 제했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고대-중세 승군관련 사료가 적어서..T.T
  • ㅇㅇ 2015/02/17 18:44 # 삭제

    근데 고려도경의 재가화상이나 최영의 승군 언급은

    조의선인의 용모착의때문에

    중국인들이 불교승려로 착각한 것에서 기인한다는 얘기도 있으니..

    그리고 저 재가화상이라는거

    일제강점기때까지 함경도 북부 일부지역에 존재했다는 어떤 사람들하고

    좀 연관이 있는것 같기도 하더군요

  • 역사관심 2015/02/18 00:01 #

    오오, 그런 기록이 있나요? 혹시 정보를 좀 주시면 안될까요. 추가할 수 있으면 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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