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언) 大도끼를 멘 승려, 악마퇴치군 고려 항마군 (후속글) 역사

1104년에 윤관장군이 여진과의 전투를 위해 탄생시킨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 그중에서도 수원승도들로 구성되어 있던 승려전투부대 '항마군(降魔軍)'에 대해서는 얼마전 포스팅 '악마를 물리치는 군대, 항마군'에서 잠깐 다룬 바 있습니다.

그때 이 '항마군'의 위력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료로 [고려도경]의 재가화상 부분을 인용한 바 있는데, 오늘은 또 다른 사료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음 기록은 [성호전집]에 등장합니다.


성호전집 해동악부(海東樂府) 
대부승〔大斧僧〕

서적(西賊) 조광(趙匡)이 묘청(妙淸)과 유참(柳旵)의 머리를 베어 와 항복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金富軾)이, 후군(後軍)이 숫자가 적고 약한 것을 염려하여 밤에 몰래 보병과 기병(騎兵) 1천 명을 보내서 보태 주었다. 새벽에 적들이 마탄(馬灘)과 자포(紫浦)를 건너 곧바로 후군을 치고 들어와 병영을 불태우고 돌진해 왔다.

승려 관선(冠宣)이 모집에 응하여 종군(從軍)하여 큰 도끼〔大斧〕를 메고 먼저 나가 적을 공격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관군(官軍)이 승세를 타고 크게 쳐 부수어, 3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적들이 모두 유린되어 강으로 도망치다가 빠져 죽었다. 노획한 병선(兵船)과 무기가 매우 많았고, 적들의 형세가 꺾였다.

적들이 밤에 군사를 삼등분하여 전군(前軍) 진영을 공격해 왔다. 김부식이 승려 상숭(尙崇)에게 도끼를 메고 적을 맞아 공격하게 하였다. 10여 명을 죽이니, 적병이 달아나 흩어졌다. 장군 우방재(于邦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자, 적들이 무기를 버리고 성으로 들어갔다.

항마 구성의 위세 아직도 남았는데 / 降魔九城餘威在
살기가 서경에 다시 한 번 서리었네 / 殺氣西京又一番
관선은 앞서서 상숭은 뒤이어서 / 冠宣在前尙崇後
맹세코 신룡의 침 흔적을 쓸어내려 하였네 / 誓掃神龍吐涎痕

금강이 눈을 부릅뜨고 육정이 분기하듯 / 金剛努目六丁奮
큰 도끼 번쩍번쩍 삼천문을 움직였네 / 巨斧閃動三千門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대자대비를 말하지 말라 / 莫言竺乾大慈敎
요기가 하늘을 거역했으니 용서하기 어렵다네 / 妖氛逆天理難原

보이는 건 퍼런 서슬이 하늘에 번득이는 것 / 但見白刃磨天揚
호통 소리 쩌렁쩌렁 산악이 들썩였네 / 叱喝聲高山岳掀
삼군이 뛰어나가 성세를 도우니 / 三軍距躍助聲勢
초목이 바람 속에 함께 내달렸네 / 草木風中共追奔

공적을 논하자면 첫머리가 당연하고 / 論功端合在上頭
더하여 백성들에게 부처 은혜 받들게 했네 / 賸使民氓奉佛恩

우리 조정이 임진 병란을 만났을 때에 / 聖朝會値黑龍燹
영규대사의 의로운 명성이 남주에 회자되었고 / 靈圭義聲南州喧
송운대사는 또 모란 대첩을 아뢰어 / 松雲又奏牧丹捷
용만의 상서 기운이 깃발에 휘날렸지 / 龍灣瑞氣旌旗翻

우리나라 고금에 일이 매우 특별하니 / 東邦今古事太奇
불도들도 나랏일에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네 / 緇徒亦能思喪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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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을 하는 전투승려, 고려도경 재가화상의 생생한 기록

우선 글 제목인 大斧僧(대부승)이라는 말은 문자그대로 '큰 도끼를 멘 승려'라는 뜻입니다. 성호 이익(李瀷, 1681~ 1763년)이 쓴 [성호전집]중 해동악부(海東樂府)에 등장하는 글인데, 이 저작은 광해군 9년(1617)에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역사 시집으로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사실(史實)에서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되는 44편을 뽑아 역사적 사실을 가요로 엮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17세기초에 지어진 것인데, 내용의 배경은 묘청의 난의 시대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가 민담이나 설화냐, 그렇지 않습니다. 글 첫 세문단은 모두 정사인 [고려사] 1135년 2월, 11월의 기록입니다. 

1135. 2월 기록 [고려사 김부식열전]
김부식은 후군의 병력이 적고 군세가 약한 것을 염려하여 밤에 몰래 보병과 기병 1천명을 보내어 군세를 보강했다. 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새벽에 마탄(馬灘)54)의 자포(紫浦)를 건너 곧장 후군을 공격해 진영을 불태우고 돌진해 왔다. 관선(冠宣)은 모병에 응하여 종군한 승려로, 갑옷 차림에 큰 도끼로 무장하고 먼저 나가 적도 십수 명을 격살하자 관군이 그 기세를 타고 적을 크게 격파하여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적은 한꺼번에 짓밟히며 강으로 쫓겨 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병선(兵船)과 병장기를 많이 노획하니 적도의 기세는 급격히 꺾여 버렸다.

1135. 11월 기록 [고려사 김부식열전]
김부식이 다시 오군을 모아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녹사(錄事) 박광유(朴光儒)가 전사했다. 적이 밤에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성을 나와 전군의 진영을 공격하자, 김부식은 승려 상숭(尙崇)에게 도끼를 들고 역습하게 하여 십여 명을 죽이니, 적병이 흩어져 패주했다. 장군 우방재(于邦宰)59)·김숙(金叔)·적선(積先)·김선(金先)·권정균(權正均)60)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자 적은 무기와 갑옷을 팽개치고 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일부 원문만 옮겨보자면:
僧冠宣應募從軍, 擐甲荷大斧, 先出擊賊, 殺十數人, 官軍乘勝大破之, 斬首三百餘級. 
富軾令僧尙崇, 荷斧逆擊, 殺十餘人, 賊兵奔潰.

여기보면 '관선冠宣'이라는 고려승려와 선봉으로 나가서 10여명의 머리를 큰도끼로 베어버립니다. 두번째 전투에서도 다시 상숭(尙崇)이라는 승려가 도끼를 들고 나가 10여명을 벱니다. 이런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삼국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불가의 제도에서 분명 어떤 의미로든 육체를 단련하거나, 격투에 대한 시스템이 평소에 갖춰져 있었을 것이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묘사는 후에 더 소개하겠습니다.

또한 관선의 모습묘사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임진왜란 의병상상도에서 보이는 '불가의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싸운 것이 아니라 '갑옷을 입고' 싸웠다는 중요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그가 '선봉장'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이 기록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이것이 '서긍'이 묘사한 재가화상의 기록 (1123년)과 고작 12년 떨어진 기록이란 것입니다 (재가화상 모습은 이전 포스팅글에서 참조). 즉, 이 승려들은 그가 말한 [재가화상]인 것이 거의 맞을 듯 합니다. 즉, 송나라 사신 서긍이 본 강렬한 인상의 '거란을 물리쳤다는' 그 전설의 재가화상들이 10여년 후 직접 나선 전투라 보면 될 듯 합니다. 참고로 재가화상들 역시 서긍의 묘사에 의하면 '통이 좁은 편리한 옷'을 입고 있지 치렁치렁한 가사를 두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꼭 고증하에 묘사하길 기대합니다. 

소헤이(僧兵)- 14세기

이것은 고려대인 10세기 발생해서, 14세기에 막장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본 전국시대의 양아치 승려집단 소헤이(僧兵)입니다. 국가와 사찰을 위해 싸운 고려전투승과 비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모욕). 다만,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승려집단'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국내회화는 한점도 없는 지라 비교적 비근한 시기의 일본측 추정도를 소개해봅니다. 

조선중기인 임진왜란의 기록 (이순신장군의 의병모집등)에서도 같은 맥락이지만, '항마군'처럼 어떤 공적 시스템에서 길러진 승려군이 아닙니다. 관선이나 상숭은 기록 ("승려 관선(冠宣)이 모집에 응하여 종군(從軍)하여")에서도 나타나듯 '국난이 일어나자' 갑자기 모집한 군대에 '자원해서 들어간' 승려들입니다. 즉, 평소에 어떤 식으로든 전투에 대한 기본이해와 무술이 단련되더 있지 않다면 절대로 힘이 좀 세다고 단번에 적병 10명을 벨 실력을 갖추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이런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하나는 지금의 사찰이미지와, 한국의 고대-중세-적어도 조선전기까지의 승려의 이미지는 좀 (아니 많이) 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위치만 해도 도시 한가운데나 평지에 대규모 사찰이 밭을 보유하고 전투가능한 승려들이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을 볼까요.

연려실기술 정교전교(政敎典故)
병제(兵制)
○ 숙종 9년에 비로소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였다. 윤관(尹瓘)의 건의에 좇아 문무 산관(文武散官)ㆍ이서(吏胥)로부터 장사치[商賈]ㆍ노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과 주ㆍ부ㆍ군ㆍ현의 말을 가진 모든 자를 신기(神騎)라 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神步)라 하여, 도탕(跳盪)ㆍ사궁(射弓)ㆍ정노(精弩)ㆍ발화(發火) 등군(等軍)으로 나눴는데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를 보지 않는 자는 모두 신보군에 예속시켰다. 이 두 반은 여러 진부(鎭府)의 군인과 같이 사시(四時)를 통해서 훈련을 받았다.또 승도(僧徒)를 선발하여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였다. 고려 건국 초에 내외 사원(寺院)에는 모두 사원을 지키는 승도가 있어 항상 노역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군ㆍ현의 거주민으로 일정한 생업을 가지고 있는 자도 천 수백 명이나 되었으며, 매양 국가 유사시에 군을 동원하게 될 때에는 또한 내외 여러 사원을 지키는 승도를 징발하여 여러 군대에 분속(分屬)시켰다.

이 기록은 조선후기 이긍익(李肯翊 1736(영조12) ~ 1806년)의 [연려실기술]에 묘사된 고려 병제중 승군과 사찰거주 전투승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기보면 그냥 불도에 매진만 하다가 의병처럼 모집되는 것이 아닌 '평소에는 사찰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승도가 있고, 그 승도들집단이 전시에는 바로 투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검은 옷의 승려

더 오래된 기록 하나만 잠깐 살펴볼까요. 856년 해인사 전투승들의 활약을 기린 진성왕 眞聖王 9년(895년) 즉 9세기말의 금석문입니다. 이 기록은 고려이전, 통일신라(남북국)시대 당시에도 사찰마다 이런 승군이 조직되어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海印寺 妙吉祥塔記 崔致遠 지음

唐나라 19대왕 昭宗이 中興을 이룰 때에 전쟁과 흉년의 두 재앙이 서쪽에서 멈추어 동쪽에 와서, 나쁜 중에 더욱 나쁜 것이 없는 곳이 없었고 굶어 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였다. 海印寺의 別大德인 僧訓이 이를 애통해 하더니 이에 導師의 힘을 베풀어 미혹한 무리들의 마음을 이끌어 각자 벼 한 줌을 내게 하여 함께 옥돌로 삼층을 쌓았다. 그 발원 법륜의 戒道는 크게 보아 호국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중에서 특별히 억울하게 죽어 苦海에 빠진 영혼을 구해 올려 제사를 지내서 복을 받음이 영원히 그치지 않고 이에 있도록 함이다.
乾寧 2년 7월 16일에 적는다.大匠은 승 蘭交이다.

海印寺에서 나라와 三寶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돌아간 승려와 속인의 이름.
乾寧 연간에 해인사에서 난리가 일어나 나라와 삼보를 지키고자 싸우다 돌아간 승려와 속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좌우에 쓴다. 중략.
海印寺 護國三寶 戰亡緇素   玉字   
乾寧  , 濁世於海印寺, 護國三寶, 戰亡緇
素玉字, 列之左右.
判萱 芮嚴 憶惠 僧必 圭吉 鳳鶴 芮弘 
東英 心用 回久 名宗 忍券 永偘 安柔 
平宗 言會 正永 悤達 平達 堅必 開角 
俊乂 帝光 通正 到堅 今善 珍居 希幸 
安相 宗乂 旬宗 悤休 券湛 平吉 才賢 
緊丁 昕海 戈如 今吉 開云 心海 利垢 
安心 布弥達 其名 悤善 悤永 式然 弘吉 
文永 小哀 阿祖 能信 萱吉 允言 其悅 


그런데, 이 기록을 잘 봐주십시오. 戰亡緇素, 緇素중 緇이란 글자는 "검을 치"라는 글자로 이는 당시 승려 '복장의 색감'을 말한 것입니다. 그와 대비되게 "흴 소素"라는 글자로 속인(일반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요. 다만, 이 단어는 불교계에서 한중일 공통으로 내려오는 단어이므로 신라승려군의 복장에 대한 표현으로 직접적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한번 보죠. 우선 이 검은 옷'의 표현은 어디서 전래하는 걸까요?

중국의 고대봉건국가인 '주'나라의 옆에 제후국중 하나인 '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나라는 주나라를 지키는 사도(司徒)의 역할을 담당했었죠, 그 정나라의 민요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緇衣之宜兮 검은 옷이 걸맞으며,
敝予又改爲兮 헤지면 내 또한 고쳐 만들어 주리라.
適子之舘兮 그대가 여관에 가니라.
還予授子之粲兮 돌아가 내 그대에게 밥을 주리라.

그런데 이 '치의(검은 옷)'에 대해 그 주자(朱子)는 이런 말을 합니다. ‘緇 黑色 緇衣 卿大夫居私朝之服也 치는 검은 색이니, 치의는 경대부가 사사로이 조회할 때 입는 옷이다". 즉, 황제를 모시는 관리들이 입던 평상복의 색이 검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당(唐)나라 때 불교가 전해지고 난 뒤로는 승려들이 주로 이 ‘검은 옷’을 입어, 이후로는 ‘치의(緇衣)’라는 단어가 곧 ‘불교’ 내지는 ‘승려’를 뜻하는 단어로 변환됩니다. 따라서, 이 '검은 복장'이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당나라시대)에 전해졌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당과 불교과 매우 활발하게 전래되던 7세기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676년 삼국통일이 된 후 신라의 승려들이 엄청나게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문물을 전해오기 때문입니다.

애시당초 중국의 의복제도를 가져온 정확한 시기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그 주체가 바로 '승려'인 '자장법사'였습니다. 진덕왕 3년인 649년 (즉 삼국통일 27년전)에 '우리나라(신라)의 복장이 중국과 같지 않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 3년 기유년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입게 하고, ..." 란 구절이 나오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장'을 소개한 장 말미에 삼국유사에서 유일하게 '緇素'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1281년 일연스님이 쓴 표현이죠 (이미 일반명사화 된 이후의 표현입니다). 

讃曰曾向清涼夢破迴七篇三聚一時開欲令緇素衣慚愧東國衣冠上國裁
찬하여 말하다
일찍이 청량산으로 향하여 꿈이 깨어 돌아오다.
칠편삼취(七篇三聚  가 일시에 열렸다.
승려와 속인의 옷을 부끄럽게 여겨
동국 의 의관을 중국의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물론 이 '치소'라는 승려와 속인을 구분하는 단어가 시대가 흐르면서 '비유'격인 일반명사화되었겠지만, 애초에 당나라에서 전해지던 원래의 시대에는 아마도 실제로 '검은 옷'까지 전래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검은 옷'을 입은 (삼국)-통일신라시대의 모든 승려가 전투를 담당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전투를 하던 승려'도' 검은옷을 이 당시 입었을 가능성은 꽤 있어보입니다. 필자가 찾아본 가장 오래된 이 '검은 옷'이라는 표현은 이 기록입니다.

886년의 통일신라대 금석문
券之敏 不爲尙也. 年十七 遂剃髮 披緇損俗 
17세에 드디어 머리를 깎았으며, 승복을 입고 세속의 옷을 버렸다. 

여기보면 직접적으로 '검은 옷'을 입고 '흰 옷'을 버렸다라는 식으로 불가에 입문하고 있지요. 이것이 필자가 파악하는 가장 오래된 국내의 표현입니다. 4년후인 890년 금석문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890년 통일신라대 금석문
□, □□□□□□, 是非不異, 遂投簪落髮,解褐 披緇, 以會昌  乙丑年  春, 投大德   聖鱗, 進具戒   僧□, 配居丹嚴寺. □是, 修心 戒律 練志 菩提 忍辱 精進 爲先, 布施 恭敏 爲次   . 時爲獅子喉.
披緇 검은 옷을 걸치다 (즉 승려가 되다)
 (佛敎와 儒敎의 ?)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론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곧 상투를 풀어 머리를 자르고 마옷을 벗고 승복을 걸쳤는데 이때가 會昌 乙丑年 봄이었다(文聖王 7년, 845년)

그럼 '치소緇素'이라는 표현은 언제 한국에서 최초로 나올까요? 필자가 찾아본 가장 고기록은 위와 동일한시기(890년)의 다른 금석문입니다.

890년 통일신라대 금석문
有唐新羅國故兩朝國師敎諡大朗慧和尙白月葆光之塔碑銘 중
발췌: 定康大王莅阼, 兩朝寵遇師而行之, 使緇素重使迎之, 辭以老且病. 

필자가 담대하게 추론했듯, 신라와 당과의 불교교류를 통해 '흑의'가 전해졌으리라 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가장 오래된 기록이 이 '당과 신라'의 교류를 이야기하고 있는 금석문 기록입니다.

여기에 흥미롭게도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금석문에는 아예 '치군緇軍'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직역하면 검은군대, 의역하면 승려군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이때만 (즉 통일신라 금석문에만) 등장하고, 고려-조선으로 가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비석은 앞서 소개한 해인사 전투승들에 대한 추도문입니다. 즉 895년의 표현입니다. 덧붙여 고려시대 '항마군'의 원형으로 보이는 표현인 '免魔 면마 (즉 마귀를 피하다)'란 단어도 등장합니다.

緇軍 
僧訓 
濁數西來及薩羅   , 十年狼豹
困僧伽 . 吾師向覺天耶出, 弟子
脩仙豈免魔 . 昨喜斑螢昭道
好, 今悲乾陣散骸蹉. 欲逢
東庿吉祥處, 爲汝徹霄窣
堵波 .
僧釋喜 書.

승려군을 哭함. 僧訓.

혼탁한 운세가 서쪽에서 신라에 이르러
십년동안 억센 짐승들이 僧伽를 괴롭혔구나.
우리 스승 깨달음 얻고자 하늘에서 나왔으나
제자들은 신선을 닦으니 어찌 魔軍을 면하리오.
어제의 기쁨은 반딧불로 길 밝혀 좋음이더니
오늘의 슬픔은 마른 군진에서 흩어진 뼈들 걸리적거림이라.
동쪽의 좋은 묘터에 내려와서는
그대 위해 하늘에 솟는 탑을 세우네.
          승 釋喜가 씀.

한가지 더, 흥미롭게도 고려도경의 12세기 재가화상 군대도 전투시 '검은 깁'을 허리에 두르고 참전하죠. 삼국이래 고려, 그리고 조선초까지는 승복의 색깔은 이 검은색외에도 금란가사 (금색), 자주색, 토황색, 황색, 누더기를 기워 입은 방식등 다양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합니다. 현재의 삼베옷느낌의 승복은 조선 세종대에, 정확히는 세종 11년 1429년에 흑색 금지령명에 의해 정해집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세종대의 법령이름이 참 흥미롭습니다. 법령이름이 승인의복흑색금지령(僧人衣服黑色禁止令)이죠. 문자그대로 해석하면 "승려들의 흑색승복을 금하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되서 또하나 신기한 사료 한점이 전하죠. 바로 이언적(李彦迪 1491~1553년)이 제자인 조한보 (생몰년미상)와 5차례에 걸쳐 유가토론을 치열하게 논하는 장면중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회재집 잡저(雜著)
망기당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 무인년(1518, 중종13)〔答忘機堂第一書 戊寅〕중:
지금 이교(異敎)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승복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는, 자식이면서 그 아비를 아비로 섬기지 않고, 신하이면서 그 임금을 임금으로 섬기지 않으며, 백성이면서 백성의 직분을 일삼지 않는 것 또한 이와 같으니, 진실로 천지 사이에 우리 도와 함께 설 수 없습니다

즉, 세종이 금한 흑색의 승복을 입은 이단무리가 1429년으로부터 약 90년뒤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러한 '텍스트정보'를 제하고 한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검은색 승복'의 모습은 유명한 고구려 무용총 (5-6세기)과 쌍영총 (5세기말)에 고구려승려복으로 등장합니다. 첫그림은 쌍영총벽화의 고구려 승려입니다. 장삼아래 기본승복 색깔이 '흑색'입니다 (짙은 자색이란 의견도 있지만).
쌍영총 부

문화컨텐츠사이트에서 복원한 그림 (너무 작아서 흐릿합니다)
다음은 무용총중 귀족에게 초대받은 왼쪽의 승려입니다. 역시 검은 색옷이 기본입니다.

복원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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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군(五軍)과 최우의 대격구장

돌고 돌아 다시 김부식의 큰도끼를 든 전투승기록으로 돌아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김부식이 묘청과 붙을 때 '오군(五軍)'을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1135. 3월 기록 [고려사 김부식열전]
3월 오군(五軍)이 일제히 공격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도록 적과 서로 대치하며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10월이 되어 양식이 다 떨어지자 적은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가려 성 밖으로 쫓아내었는데 모두 굶주리고 여위어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없었으며 군졸들도 이따금 나와서 항복했다. 김부식은 이제 공격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서,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흙산을 쌓게 했다. 먼저 양명포(楊命浦)의 산 위에 목책을 세우고 진영을 배치한 다음 전군(前軍)을 이동시켜 거점을 삼고서 서남지역 주·현의 군사 2만 3천 2백 명과 승려 550명을 징발하여 흙과 돌을 운반하고 목재를 모아 놓게 했다. 장군(將軍) 의보(義甫)·방재(方宰)·노충(盧冲)·적선(積先)에게 명을 내려 각각 먼저 정예 군사 4천 2백 명과 북계(北界)에 있는 주·진의 전투병 3천 9백 명을 거느리고 유격전의 병사로 삼아서 약탈을 방비하게 하였다.

오군(五軍)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중간 굵은체를 보시면 역시 승려를 다시 550명 징발, 군사작전을 수행하게 합니다. 오군의 기록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얼마전 살펴본 고려 대격구장에서 전투훈련을 시킨 '최우의 오군(五軍)'의 규모가 어느정도 간접비교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문선 중:
또 군사를 (최우의 격구장에서) 오군(五軍)으로 나누어서 전쟁 연습을 할 때면, 인마가 엎드러지고 쓰러져서 사상자가 많았다. 그것을 마치면 사냥하는 법을 익히는데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서서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었는데, 우는 그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김부식의 오군규모를 엿볼수 있는 구절이 이 고려사 1135년 전투기록에 하나 있습니다. 관선이 등장하기 직전의 문장 2월의 기록입니다: 김부식은 후군(軍)의 병력이 적고 군세가 약한 것을 염려하여 밤에 몰래 보병과 기병 1천명을 보내어 군세를 보강했다.

즉, 中·前·後·左·右軍으로 편성된 5군(五軍)중 한 부대인 '후군'이 약해서 보병과 기병 1천명을 보내서 보충한 것입니다. 적확히 1/5는 아닐지라도 부분편성부대의 보충병으로 1천명을 투입했다는 사실로, 5군의 총규모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정도의 인원을 모아서 (오군으로 전쟁연습을 했다해도 전체는 아닐지라도), 격구장에서 전투연습을 시킨 최우의 기록은 간접적으로 그 격구장의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물론 최우의 저 기록은 1229년의 것으로 김부식의 기록과 정확히는 94년후대의 일이므로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5군제도가 계속 후기(1391년폐지)까지 유지되었음을 고려한다면 그 규모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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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활할뻔 한 항마군

마지막으로 이 '항마군'의 존재가 얼마나 조선시대까지도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고 있었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우선 한번 읽어보시지요.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10)
12월 25일(기미) 맑음
민심을 얻고 천명을 맞이하는 것으로 중흥의 근본을 삼을 것 등 25조목의 의견을 진달하는 장단 생원 최욱의 상소
중략.
열여섯째는 항마군(降魔軍)입니다신이 삼가 보건대 요즘의 승려가 무리는 많은데 일도 않고 놀고먹어 일이 없고 역사가 없으므로 일반 백성이 부역을 않고 달아나 석씨(釋氏)에게 피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절이 없는 산이 없고 성하지 않은 절이 없는데 거의 다 연소하고 사납고 날쌘 부류이고 그 수가 틀림없이 억만을 넘을 것이니 부모나 친척이 있는 자를 쇄출(刷出)하여 그 무리를 소모(召募)해서 수호하고 보좌하는 직임을 책임 지우게 하면 구속하여 역사에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몽고가 온 나라에 가득 찼을 때 고려 문종(文宗)이 모든 산의 상인(上人)을 징발하도록 명하여 용인(龍仁)에서 승리를 얻고서 항마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주: 조선시대를 사는 분으로 약간의 착각. 당시에는 '산'에만 사찰이 있는게 아니라 평지와 도시 한가운데 수두룩했죠). 그때의 관군이 강하고도 성하였습니다만 승려같이 역전하는 일은 없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관군은 그 마음에 ‘이 몸이 죽으면 위로는 부모가 있는데 무엇에 의지할 것이며 아래로는 처자가 있는데 무엇을 바라보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반걸음 나아가서 적을 엿보고 화살에 맞을까 두려워하고 역전하면서도 휘두르는 검에 다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몇 걸음 물러나 돌아보고 피하여 살기를 꾀합니다. 

반면에 승도는 그 의지가 반드시 ‘뜬구름 같은 신세요 흐르는 물 같은 생애이다.’라고 하면서 돌보아 사랑할 아내가 없어 심력(心力)이 전일하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을 이룹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마할 무리를 조유(詔諭)하여 편성해 항오(行伍)를 정하여 일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날에 예비하였다가 뜻밖의 환란을 그치게 한다면 나라는 군사를 기를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군사가 모두 날래고 용감한 무리가 될 것이니 적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하는 데 일당백이 아닌 자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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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1637년 생원 최욱이라는 사람이 당시 조선임금인 '인조'에게 상소하는 항목중 '항마군'의 재탄생을 촉구한 부분입니다. 고려대의 항마군의 활약을 상기시키며 부활을 요청하고 있는데, '가정을 뒤돌아 볼 일'이 없어 '승려군'이 '관군'보다도 용맹한 것이라고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다만, 이것은 약간의 에러가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항마군은 '수원승도'로 자신의 가정을 가진 재가화상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있음에도' 용맹한거죠).

이러한 인식의 반영결과가 이로부터 약 100년뒤인 정규대규모 부대인 '항마군'까지는 아니지만, 산성을 수비하는 특수부대를 조직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1747년(영조 23년), 18세기중반 존재했던 조선후기 승병 군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치영(緇營)이라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소속 군조직이었습니다 (역시 '검을 치'자를 씁니다). 이 조선후기 승군들이 머무는 절이나 암자를 ‘치영’이라 했는데, 11개의 절과 2개의 암자를 만들고 군무기(軍器)를 비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게 합니다. 유사시에는 승군 또한 산성의 방어를 맡아야 하였으므로 치영의 군기고(軍器庫)인 승창(僧倉)에는 조총·대포·화약·활과 화살 등 각종 무기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남.북한산성의 승려들은 처음에는 전국에서 골고루 번갈아 가며 올라와 일정기간 머물면서 산성 수비를 담당하게 하다가가 나중에는 보초 (번(番)) 서는 것을 면제하고 대신 번가(番價)를 받아 특정 승려들에게 번가를 주어 항상 북한산성에 머물며 산성 수비를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즉, 임시직에서 정규군이 된거죠. 남한산성의 경우 372명, 북한산성의 경우 다음과 같은 410명의 배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출처: 문화컨텐츠닷컴). 이들은 1756년 소요경비를 각자가 부담하는 폐단때문에 폐지됩니다. 
또 재가화상과 관련해서 위의 최욱의 상소(주장)와 재밌는 접점이 있습니다. 약간 더 후대인 18세기 성대중(1732~1809년)의 [청성잡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는 것:

맹렬했던 조선 군대의 기질
중략. 청나라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조선 사람에게는 값을 더 올려 주었으니 그 맹렬한 기세를 높이 산 것이었다. 대체로 문을 나서면 집안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유독 조선인이 그러한데 지금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가장 나약하니 이는 기가 변한 것이다.

가정이 있고 없고는 조선전기까지는 별 중요하지 않았나봅니다(농담). 아무튼 고대에서 중세한국의 '승려군'의 전투에서의 위상은 최소 작년 영화 '명량'에서 나오는 그 혜희(惠希)스님의 긴 철퇴를 휘두르는 장면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임란'때에도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참고로 혜희는 향천사 승려 50명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여해서 왜군을 이깁니다. 그 복수로 향천사는 전소되죠. 그 혜희 스님을 기리는 부도가 향천사 석탑에 지금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기셨습니다).
닮았나요?
이런 '강한 승려군'에 대한 인식은 위에서도 짚어보았듯 조선시대 중반이후의 지식인들에게도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승군이라는 제도가 사라지고, 주자학이 교리화된 이후, 현실세계에서 점점 도피하다시피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 구도에 몰입하면서 우리에게 '한국역사속의 승려'는 모두 그렇게 고즈넉하고 긴 장삼을 걸친 모습으로만 고착화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런 모습이 80년대-90년대 온갖 드라마와 영화에서 의병과 뒤섞여 장삼을 끌며 고작 도우미역할을 하는 모습의 유약한 승군으로 묘사된 것이지요.

통일신라-고려시대 승군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결과가 바로 작년 '명량'을 보고난 (역사에 관심없는) 대다수 관객들의 반응이었을 겁니다. "뭔 중이 전투를 해? 저렇게 전투를 잘했다고?", "우리나라에 전투승이 어딨어?". 

갑옷을 입고 대부, 큰도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려전투승 관선이나, 당나라군과 맞붙은 전투승 3만명을 그리는 매체가 앞으로 그러한 인식을 어떻게 점차 바꾸어 갈지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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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하나:
영조대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고려숙종 8년 즉 1102년에 항마군을 폐한다라고, 이종성 (李宗城, 1692 ∼ 1759년)이 [동국통감]을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윤관이 '항마군'을 만든 것은 바로 그 2년뒤인 1104년입니다. 혹시 윤관의 이전에도 항마군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윤관이 '재건'한 것일까요? 그냥 짧은 기록하나입니다만 흥미롭습니다.

영조 5년 12월 3일 (계묘) 1729년 雍正(淸/世宗) 7년  
○ 初三日申時, 上御熙政堂。召對入侍時, 參贊官沈埈, 侍講官李宗城, 侍讀官金尙星, 假注書李顯望, 記事官崔益秀, 編修官申混進伏。李宗城讀東國通鑑, 自肅宗八年春正月, 止降魔軍, 金尙星讀自春二月, 止殿最以聞, 李顯望讀自睿宗, 止是日小雨, 申混讀自都兵馬使, 止豈不謬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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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ㅎㅁㅎㅁ 2015/02/21 05:03 # 삭제

    http://faceless.egloos.com/3867598
    도끼를 든 건 아닙니다만 갑옷 입은 승병 그림입니다.
  • 역사관심 2015/02/23 06:28 #

    직접 그리신 건가요? 멋집니다.
  • ㅇㅇ 2015/02/21 11:37 # 삭제

    조선시대 저런 기록을 보면 아쉬운게 거의 대부분 철저하게

    신라때부터의 기록을 토대로 한게 많더군요

    의도적으로 고구려 백제를 배제하는게 보여서 좀 그렇더군요

    (단순히 당시 기록이 없어서 얘기 안한것 같지는 않네요)

    특히 유학자들이 그런 경향이 많은듯

    문집 서문같은거 봐도

    우리 역사는 신라 최치원과 설총이 유학을 내세우면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등등... 이런류 기술이 많습니다

    이런 역사인식을 토대로 전체역사를 조망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 문집등에 드러난

    한국역사 전체적인 모습 묘사가 거의 대부분 그렇네요

    고구려 백제 누락은 물론이고

    심지어 고려시대 임금의 호칭까지 의도적으로 원나라에 의한 관제격하 이전

    조 종 붙인것 까지 모두 왕으로 대체한 거 문집 원문에서 많이 봤습니다

    예를들어 고려 인종이면 고려 인왕으로

    (문집 작성자들이 요즘처럼 말줄임으로 인종대왕을 인왕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은

    전혀없죠)

    아무튼 삼국시대 고려시대 승군 기록도 특히 재가화상 문제나

    승군 의복 색깔 문제도 그런걸 먼저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2/23 06:29 #

    아무래도 그 시대의 '관'으로 봤을테니까요. 더군다나 유가의 학자들이라면 그 프레임은 매우 보수적이고 한정되어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존다리안 2015/02/21 12:16 #

    김부식은 문신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묘청의 난 때 손수 지휘도 했군요.
  • 역사관심 2015/02/23 06:32 #

    네, 직접 묘청의 난을 총대장이되어 평정했죠.
  • 함월 2015/02/21 17:16 #

    조선이 강력한 억불정책을 들고 나온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개국공신 사병도 없애는 마당에 저런 조직이 전국에 있으면...
  • 역사관심 2015/02/23 06:33 #

    네 고려가 망한 것을 거의 90% 불교로 보고 있었지요. 당연히 재가화상들은 눈엣가시..
  • 남중생 2015/02/21 21:36 #

    "흑의재상"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승려가 정치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인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적극적인 행동"을 상징하는 검은 셔츠를 즐겨입고 일종의 마스코트로 삼으니 당시 조선의 신문에서는 그를 "흑의재상"이라고 부르더군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버렸는데, 아무튼 도끼를 휘두르는 승병이라니 흥미롭습니다.
  • 역사관심 2015/02/23 06:42 #

    말씀듣고 찾아보니 뭇솔리니 검은셔츠단은 기원이 이탈리아 국왕군이던 Arditi이고 Arditi의 셔츠색기원은 19세기의 이탈리아 군대인 Bersaglieri더군요.

    흑의재상이라는 말자체는 송나라 문제 때 혜림(慧琳)이 정치에 참여한 이후 붙은 이름이군요. 우리로 치면 신돈급쯤 되나 봅니다.
  • 이 감 2015/02/22 05:49 # 삭제

    사명당의 첨주투구와 환도가 남아있습니다. 형태는 일반군인들이 사용하던 첨주투구, 환도와 다를 바 없으므로 갑옷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입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승군들도 장삼이나 승복만 입고 싸우지는 않았겠죠.


    덧) 팬저님의 객사관련 포스팅에 역사관련님이 덧글을 남기셔서 여기 써봅니다. (이글루스에 가입하지 않아서요. ㅠ,.ㅠ;;)

    정당이 좌우익랑보다 상당히 높은 객사들은 정당의 앞뒤로 좌우익랑의 전후면 기둥열 보다 한칸씩 툇간을 더 낸 객사들입니다. 앞뒤로 길어지니 건물높이가 더 높아지는 것이죠. 이것이 고을의 급에 따라 그런 것인지, 시대에 따라 양식이 달라진 것인지 혹은 건물 발주자나 설계자의 취향(?)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연구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이에 비해 영성의 객사들 중에는 아예 한 건물로 이루어진 경우가 있죠. 진남관과 세병관 그리고 호서좌영 해미읍성의 객사와 서산객사가 그렇습니다.
  • 역사관심 2015/02/23 06:51 #

    예전에 원효대사 삿갓(추정)은 소개한바 있었는데, 사명대사 투구는 처음 알았습니다. 감격...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고정관념'이란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수 있는것이, 검색해보니 많은 블로거나 기자의 글에 '이 투구를 쓰고 장삼을 휘날리며' 라는 식의 표현이 많더군요 (참 그림 안나오는...). 확실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
    익랑관련 정보 정말 감사드립니다. 논문그림을 올릴수가 없어서 아쉬운데 (넷상에는 그림을 찾기가 힘들고), 안학궁과 상경성의 그 건축들의 경우는 앞뒤도 일정한 듯 해서, 차이가 있는 것이군요.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 이 감 2015/02/23 13:36 # 삭제

    사실 그래서 명량도 좀 아쉽죠. 더 적극적인 무장을 하고 있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네, 말씀처럼 정당이 약간만 높은 일반적인 객사는 안학궁, 상경성 건물처럼 정당과 좌우익랑의 앞뒤 기둥열이 같거나, 정당의 앞뒤 기둥열이 좌우익랑의 기둥열보다 조금 나오게 위치해 있는데요. 객사제도라는 것이 고려대도 있었던 제도라 조선보다 선대의 건물형태가 이어져 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합니다.
  • 낙으네 2015/02/22 20:03 # 삭제

    명량에서 전투승이 나오는걸 보고 저도 항마군 생각이 나긴 했습니다만, 체계적인 전투승의 존재가 시대를 이어져 내려왔을것은 생각하지 못했군요. 정말 흥미롭습니다.
  • 역사관심 2015/02/23 06:52 #

    이런 부분을 재조명해서 가르쳐주면 한국사가 훨씬 다양한 색채와 입체감을 가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 봉래거북 2015/02/26 00:11 # 삭제

    일전에 관선의 기록을 보고 승병 도끼부대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로 있었을 줄이야;;; 이럴 때 참 묘한 기분이 드는 게 역사의 묘미죠.
    예전에 만불향도가 무기를 지니고 다녔다는 기록이 생각나서 찾아보니 고려사 인종 9년(1131) 5월 기록에 '만불향도란 조직이 염불과 독경을 중시하며 술과 파를 팔거나 무기를 지닌 채 흉악한 짓을 벌이거나 놀이판을 벌여 보기 좋지 않다'는 걸 보면(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4087&cid=49630&categoryId=49797) 아무래도 진언종 쪽 사상을 기반으로 불자들이 일종의 준군사조직 성격도 갖춘 단체를 만들어 다닌 것 같습니다. 진언종의 사상이 아무래도 다른 종파보단 일반인 입장에선 좀 널럴하긴 하죠;
  • 봉래거북 2015/02/26 00:17 # 삭제

    더불어 향도라는 게 재가자와 승려를 아우르는 조직이라는 특성상 복잡한 수련이 요구되는 다른 무기보다 상대적으로 다루기 편하면서도 위력적인 게 도끼나 몽둥이류니 항마군이 전문 군사집단이 아니라 평소에 일반적인 생활을 하는 재가화상이나 향도라면 그런 이유로 도끼를 애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딴 얘기지만 제가 링크한 글 정종 11년에 일반 백성들이 비수를 차고 다닌 걸 재차 금지했다는 기록은 몽골풍 이전에도 사람들이 장도를 차고 다녔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봉래거북 2015/02/26 00:19 # 삭제

    위 승병 그림은 뷁하님 그림입니다. 조선 왕들이 독살당했다는 주장을 좋아하는 이모씨가 자기 책에서 저분 그림을 무단도용한 경력이 있죠.
  • 역사관심 2015/02/26 05:54 #

    봉래거북님> 귀한 정보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려사가 검색하기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읽고보니 저 소헤이무리와 다를바가 (저당시에 한정해서보면) 없었군요. 이 부분, 뽑아서 포스팅해보려 합니다.

    맨윗댓글의 링크그림을 말하시는것 같습니다: 뷁하님이란 분이 그리신것이군요. 가보니 좋은 그림이 많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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