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신라로 가는 기이한 바닷길 (긴수염국가, 귀신국, 대사공도) 설화 야담 지괴류

고대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길은 매우 신비롭고 흥미로운 국가와 기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현대한국사회에 좀 더 가시적으로 활용되면 합니다.


다음은 주로 중국의 고대 기담서인 [태평광기]와 [유양잡조]에 실린 네가지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도가적 신비담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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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구 기담

백유구(白幽求)는 신라(新羅)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도교에서 신선인 서악진군을 만났고, 고국에 돌아온 뒤에는 곡식을 끊고 복령을 복용하며, 산수 유람하고, 오악을 유람하며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백유구는 신라왕자(新羅王子)를 따라 바다를 건너 大謝公島(대사공도)에 머물렀다. … 이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서악진군(西岳眞君)을 따라가라 했다. 진군들도 각각 산을 내려 왔으며, 용․호랑이․난새․봉황․붉은갈기말․거북․물고기와 旛旗․정절․羽扇․旄旗 등도 있었다. 진군들을 모시는 천여 명 정도의 시종들도, 해수면을 밟고 걸었다. 백유구 역시 배를 몰아 서악진군의 뒤를 따라갔는데, 저절로 순풍이 불어와 번개처럼 빨리 나아갔다. 새벽이 되어 한 섬에 이르자, 백유구는 진군이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배로 가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배에서 내려 섬에 닿았으며, 눈으로만 진군을 전송했다. … 백유구는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곡식을 끊고 늘 복령을 복용했다. 그는 산수 유람을 즐겼으며, 오래도록 五岳에서 지내면서 영원히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았다.
-태평광기 권46 神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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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백유구는 실존인물입니다. 실제로 신라로 가다가 행방불명된 인물이지요. 그럼 정확히 언제 저 기담이 일어난 것인지 기록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唐眞元十一年 秀才白幽求 頻年下第 其年失志 後乃從新羅王子過海 於大謝公島
당 貞元 11년에 秀才 백유구는 연이어 낙방하다가 그 해 역시 뜻을 잃자, 신라 왕자를 따라 바다를 건너 大謝公島에 머물렀다
-태평광기 권46 神仙46. 

貞元十一年春中 秀才白幽求從新羅王子 過海失風 唐憲宗好神仙不死之術
-全唐詩 第十二函 第七册 春臺仙 ‘遊春臺

태평광기에 따르면 백유구는 정원 11년 신라'왕자'를 따라 바다를 건너 대사공도에 머물게 되었다는 기록이죠. 이 기록은 중국 청(淸) 강희제(康熙帝)의 칙명에 따라 팽정구(彭定求) 등이 당시(唐詩)를 모아 엮은 한시집인 [전당시全唐詩]에도 똑같이 등장합니다. 정원(貞元) 11년에 신라왕자와 떠났다고 되어있으며 따라서 정확한 년도는 753년의 일입니다. 정원이라는 연호는 당 덕종 (唐德宗 742~ 805년)의 세번째 연호니까요.

이 기록이 참 흥미로운 점은 '신라 왕자'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속일본기]에는 752년 윤3월, 일본 후쿠오카의 내륙 대제부(大宰付)에 신라사절단이 도착했으며, 700인에 달하는 대규모였으며 대표는 신라의 왕자 김태렴이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약 3개월 후(752년 6월) 신라사절단은 일본의 수도로 가서 천황을 만났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김태렴은 사실 가짜왕자로 '귀족상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신라왕자는 일본이 아니라 당나라로 갔던 것일까요? (신라왕자가 몇명이었는지가 중요하겠죠). 753년은 경덕왕(景德王) 11년입니다. 

필자가 파악하는 바로는 경덕왕에게는 아들 하나, 딸 둘밖에 없었고, 그 왕자의 이름은 건운(乾運)입니다. 이 왕자는 760년 태자에 책봉, 765년 혜공왕에 즉위하게 됩니다. 저 백유구가 같이 바다를 건넌 인물은 건운왕자일까요?

또한 이런 이야기를 보면 우선 짐작이 가는 것은 불교국가지만 신라에서도 '도교'가 성행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서악진군이라든가 봉황이라든가, 모두 도교에 나오는 인물과 상상수들이죠. 또한 '해수면을 밟고 걸었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도교에서 흔히 나오는 묘사인데, 이는 조선시대의 도교적 요괴그림인 [해상명부도]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을 파견한 추정장소

BC3세기대인 진시황제때에도 벌써 한반도(와 일본등)으로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려 하는등 도교의 성지로 동해를 건너 있는 국가들을 묘사하고 있기도 합니다. "신라로 가다가" 거인국에 불시착한다거나, "신라로 가다가" 이런 도교의 성지에 도착한다거나... 아무튼 매우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마지막 부분의 '복령'을 복용했다는 것은 바로 소나무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苓) 균핵을 뜻합니다. 지금도 땅속의 보물로 불립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하죠:

-신선이 되게하는 복령-

옛날 강원도의 어느 산골에 한 선비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죄인이 되어 숨어살고 있었다. 선비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통나무로 집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서 팔아 목숨을 이어 갔다. 선비한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재주가 뛰어나서 아버지는 이 아들이 언젠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자기의 억울한 누명도 벗겨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열심히 학문과 예절을 가르쳤다.

아들의 나이 열 다섯이 되어 과거를 볼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은 몸이 퉁퉁 붓고 밥맛이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더니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아버지는 좋다는 약은 다 구하여 써 보았으나 별 효험을 보지 못했고, 아들의 병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어느 날, 아들을 간호하느라 지친 아버지가 마당가에 있는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쉬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인지 생신지 수염이 하얀 노인이 뒷산에서 내려오더니“이놈, 자식이 다 죽어 가고 있는데 잠만 자고 있느냐?” 이렇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노인은 짚고 있던 지팡이로 선비의 어깨를 내리치더니 그 지팡이를 발 밑에 꽂아 두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선비가 깜짝 놀라 깨어나 보니 지팡이에 맞은 어깨가 아직도 얼얼하였고 노인이 지팡이를 꽂았던 자리를 보니 조그만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구멍을 막대로 찔러 보니 무언가 덩어리가 들어 있는 듯하였다.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었더니 제법 커다란 공 같은 덩어리가 하나 나왔다. “그래, 이것은 신령님이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기 위해 내려 주신 것이 틀림없어.” 선비는 그 덩어리를 잘게 썰어 정성스럽게 달여 아들에게 먹였다. 과연 아들은 그것을 먹고 부은 것이 내리고 입맛이 좋아지며 기력이 회복되어 오래 지나지 않아 건강을 되찾았다. 그 뒤로 이 덩어리를 산신령이 주신 약재라 하여 복령(伏靈)이라 이름 지었다.
복령(茯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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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8세기 기담입니다.

형숙은 新羅(신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탄산(炭山)에서 정박했다. 상인 100여 명을 만났는데, 몇 척의 배에 실려 있는 화물은 모두 진주와 비취, 沈香木, 상아와 무소 뿔 등으로 수천만금 어치나 되었다. 형숙은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모두 죽이고 바다 속에 던져버린 뒤 그 화물을 차지했다.
-태평광기 권126․12 邢璹.

여기서는 부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탄산(炭山)이란 곳에 정박했다가 거기서 어떤 상인집단을 만나 이들을 모두 죽이고 수천만금어치의 보물을 차지합니다. 형숙이란 작자는 사신이나 되는 주제에 잘도 이런 무뢰배같은 짓을 하는군요. 이 사람의 이름은 한자로 邢璹 인데,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제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邢璹 左賛善大夫 鴻臚少卿 孝成王 2년(738)

738년 이때 신라 성덕왕이 사망하자 사신으로 이 형숙이라는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태평광기에는 이 기록이 126권에 한번 더 자세히 나오는데 이로 보아 이 사신의 약탈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보입니다. 이 화물들을 황제에게 진상하자 다시 하사해서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후담까지 등장하죠.

당나라의 형숙은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炭山에서 정박했다. 상인 100여 명을 만났는데, 몇 척의 배에 실려 있는 화물은 모두 진주와 비취, 沈香木, 상아와 무소 뿔 등으로 수천만금어치나 되었다. 형숙은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모두 죽이고 바다 속에 던져버린 뒤 그 화물을 차지했다. 형숙은 도성에 도착한 뒤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워서 表文을 올려 그 화물을 진상했는데, 형숙에게 다시 하사하라는 칙명이 내려져 형숙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태평광기 권126 報應 형숙

중국측 기록에도 이사람은 저서편찬에 '주석'을 다는 등 활동한 기록이 보입니다. 역시 지식정도와 도덕성은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撰略例 唐 邢璹 注 上海 涵芬楼藏宋刊本

참고로 이 탄산에 대한 정확한 지점은 아직 논란중으로 보입니다 ('탄광'의 일반명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명사明史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宣府左衞 선부좌위
洪武二十四年四月建谷王府,永樂元年遷於湖廣長沙。西有灤河 ,源自炭山,下流入開平界。南有桑乾河,洋河東流入之。又有順聖川,延袤二百餘里,下流亦合於桑乾河。北有東西二城,其東城爲順聖縣,元屬順寧府,西城爲弘州,元屬大同路,洪武中俱廢。天順四年修築二城。又東北有大白陽、小白陽及龍門關等堡。東南有雞鳴驛堡。北有葛峪堡。西北有長峪口、青邊口、羊房等堡。

홍무洪武 24년(1391년) 4월 곡왕부谷王府를 세웠고,영락永樂 원년元年(1403년) 호광湖廣 장사長沙로 곡왕부谷王府를 옮기었다。서쪽에는 난하灤河가 있으며,수원源은 탄산炭山으로부터 나오며,하류下流는 개평계開平界로 들어간다。남쪽에는 상건하桑乾河가 있으며,양하洋河가 동류東流하여 상건하로 들어온다。또 순성천順聖川이 있어,길이(延袤)가 2백여리인데,하류下流에서 역시 상건하桑乾河와 합류한다. 북으로는 동서東西 2개의 성城이 있으며,그 동성東城은 순성현順聖縣이라 하였고,원元나라때에는 순녕부順寧府에 속하였으며,서성西城은 홍주弘州라 하였고,원元나라때에는 대동로大同路에 속하였는데,홍무洪武 연간중에 함께 폐지되었다。명 천순제天順帝 주기진朱祁鎭 천순天順 4년(1460년) 2개의 성城을 수축修築하였으며。또한 동북에 대백양大白陽이 있으며、소백양小白陽및 용문관龍門關등의 보堡가 있다。동남으로는 계명역보雞鳴驛堡가 있다。북으로는 갈욕보葛峪堡가 있다。서북으로는 장욕구長峪口、청변구青邊口、양방羊房등의 보堡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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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는 '장인국(거인국)'을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8세기초 기담, '장수국' 입니다. '새우왕'이 등장하는 기담으로 여기서 장수국長鬚國은 오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수염 긴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새우왕'). 이 장수국에 대한 이야기는 [유양잡조]에 나옵니다.

수염긴 나라, 장수국

大足年間(701~702) 초에 어떤 선비가 新羅國(신라국)의 사신을 따라갔다가 풍랑에 떠밀려 한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모두 수염이 길고 쓰는 말이 당나라 말과 통했으며 ‘장수국’이라고 불렸다. 사람들이 아주 많고 물산이 풍성했으며 집 모양과 衣冠은 중국과 약간 달랐는데, 그 지명은 ‘扶桑洲’라고 했다.

그 나라 관서의 관리 품계에는 正長․戢波․日沒․島邏 등 명칭이 있었다. 1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선비는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다. 하루는 갑자기 대왕과 신하들이 근심에 싸여 있기에, 선비가 이상해하며 물었더니 대왕이 울면서 말했다. "우리나라에 재난이 생겨, 화가 곧 닥칠텐데, 부마가 아니면 구할 수가 없네" 선비가 놀라며 말했다. 진실로 어려움이 그와 같다면, 저에게 명을 내리신다면 감히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대왕은 배를 준비하라 명하고, 두 사신을 선비에게 딸려 보내면서 일러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부마는 용왕님을 한번 알현하고 동해 제삼차 제칠도의 장수국에 재난이 생겼으니, 구원해 주시길 청한다고만 말씀드리게. 우리나라는 작은 소국이니 반드시 두세번 말씀드려야 하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선비와 손을 부여잡고 작별했다. 

선비가 배에 오르자, 순식간에 한 해안에 도착했는데, 그 해안의 모래는 모두 칠보七寶였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긴 옷에 커다란 관을 쓰고 있었다. 마침내 선비가 앞으로 나아가 용왕을 알현하기를 청했다. 용왕의 모습은 불사에 그려진 천궁과 같았으며, 찬란한 빛이 번갈아 반짝여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용왕이 계단을 내려와 영접하자 선비는 계단을 따라 궁전으로 올라갔다.

용왕이 선비에게 찾아온 이유를 묻자, 그가 사정을 말하자 용왕은 즉시 명을 내려 속히 조사해 보라고 했다. 한참후에 한사람이 밖에서 들어와 아뢰었다. "경내에는 그런나라가 아무데도 없습니다". 선비가 다시 애원하면서 기원했다. 장수국은 동해 제삼차 제칠도에 있다고 자세히 말씀드리자, 용왕은 다시 사자에게 상세히 조사보고 하라고 질책했다.

한 식경이 지나서 사자와 돌아와 아뢰었다. "그 섬의 새우는 대왕님의 이달치 음식물로 바치게 되어 있어서, 며칠전에 이미 잡아 왔사옵니다". 용왕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비록 용왕이나 먹는 것은 하늘의 명을 받기에 함부로 먹고 안먹고 할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보아 음식을 줄이겠다".

그리고 선비를 데려가서 둘러보게 했는데, 집채만 한 쇠 가마솥 수십 개 안에 새우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서 붉은 색에 팔뚝만한 크기의 새우 5~6마리가 선비를 보고 팔짝팔짝 뛰었는데, 마치 구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선비를 데려왔던 사람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새우 왕입니다.” 선비는 자기도 모르게 슬피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용왕은 새우 왕이 들어 있는 가마솥 하나를 놓아주라고 명한 뒤, 두 사자에게 선비를 중국으로 돌려 보내주라고 했다. 선비는 하루 저녁 만에 登州에 도착했는데, 두 사자를 돌아보니 다름 아닌 커다란 용이었다.

-유양잡조(태평광기 권469․17 長鬚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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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국의 해변은 七寶 즉 금, 은, 유리(琉璃), 거거, 산호, 마노(瑪瑙), 파리으로 이런 것이 꽉 차있었다는 것이죠. 이 장수국은 부상주扶桑洲라는 곳에 있다고 하는데 부상국(扶桑)에 대해서는 참으로 여러 설화와 기담에 전하고 있어 분명 어떤 실제하던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멀리 알래스카를 이야기하는 설까지 있더군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시 당나라말과 어느정도 통했으며, 건축모양과 의관은 좀 달랐다고 되어 있지요. 이곳은 어디일까요?

마지막 기담은 정말 '기담'입니다. 

귀국鬼國
신라 사람이 바다에 표류하여서 鬼國에 도착하였는데, 귀국(귀신국) 사람들이 그들을 잡고서 말하기를, “너는 우리와 함께 겨[糠]를 3자[尺]  높이로 쌓겠는가, 아니면 너의 코를 1길[丈] 길이로 늘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겨를 쌓겠다고 하였는데, 쌓지 못하였다. 그러자 귀국 사람이 그의 코를 뽑아서 코끼리의 코와 같게 만들었다.
-유양잡조(해동역사 권40 교빙지8 표류)

이 기담은 9세기(최소)의 일로, 이번에는 특이하게 중국사람이 신라로 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라인이 직접 표류하다 겪은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가 귀신국에 표류하자 귀국인들이 겨를 무려 3자, 거의 1미터이상 쌓으라고 한 겁니다. 이를 못해내자 코를 1길(장), 즉 3미터로 뽑아내버립니다. 마치 코끼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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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두 책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평광기]는 한대로부터 북송초에 이르는 소설/필기/야사등의 저서들에 수록되어 있는 고사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한 북송대의 책입니다. 여기 인용된 책은 거의 500여권에 달하며 북송대인 978년 수찬되어 981년에 판각됩니다. 따라서 10세기의 책으로 내용은 전대의 것들이지요. 또한 [유양잡조(酉陽雜俎)]는 당나라 대의 단성식(段成式, ?~ 863년)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지괴류의 문집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도가적색채가 강하다는 점과, 또 한가지 '신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고대, 중국에서 삼국이나 통일신라로 가는 길을 얼마나 험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보입니다. 

얼마나 험했는지 이런 기록이 있지요.9세기 왕인유(王仁裕, 880~ 956년)가 지은 옥당한화의 기록입니다.

六軍使 西門思恭이 한번은 어명을 받들고 신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바람과 물살이 순조롭지 못하여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망망대해에서 몇 달 동안 표류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쪽의 한 해안에 도착했다. … 서문사공은 主軍(六軍使)이 되고 나서부터 차라리 金玉은 남에게 줄지언정 평생 음식은 손님에게 대접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지난날 식량이 떨어져서 당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옥당한화

아무튼, 이런 기담들이 좀 더 활발하게 알려지고 동화집등으로 각색되어 우리 사회에 다양한 색채의 컨텐츠로 기능하면 좋겠습니다.




덧글

  • 베티르 2015/02/25 06:34 # 삭제

    글 잘읽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탄산이 어딘지가 궁금해지네요. 아무리그래도 신라땅에 사신으로와서 신라에서 약탈했을리는 없을것같고.. 제주도나 류큐 쯤일려나요?
  • 역사관심 2015/02/25 23:43 #

    저도 궁금합니다. 다만 '서쪽에 난하'가 있는데 그것의 수원이 탄산이라는 구절이 아마도 베이징과 내몽고사이를 흐르는 난하(롼허)가 서해(중국으로 보면 동해)도시 어디쯤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 Nocchi 2015/02/25 11:51 #

    이야 인용하신 글 들이 전부 다 재미있네요 감사합니다
    형숙 이란 작자는 뭐하는 인간 인 지 도척 같은 인간이었던가 봅니다
    판타지 소설이 따로 필요 없네요
    그리고 당나라와 말이 통했다는 부상국 도 궁금합니다
    각색(소설)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그렇네요
  • 역사관심 2015/02/25 23:49 #

    감사합니다. 이 인간은 실제로 신라에 사신으로 왔던 인간입니다. 첨부해야겠네요.
    삼국사기- 邢璹 左賛善大夫 鴻臚少卿 孝成王 2년(738) 조제
  • 아빠늑대 2015/02/25 15:08 #

    그러고 보면 중국에서 한반도까지의 거리도 그렇게 길지 않은데 별별 판타지 이야기들이 많은거 보면 과거 사람들의 인식 범위라는게 참 동네스럽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산해경에 나온 사람들 이야기만 봐도 거기서 말하는 요상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며 든 거리가 요즘 차타고 하루 정도면 가는 거리인 경우도 있고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그때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은 미디어와 교통의 발달이 세상을 똑같이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 역사관심 2015/02/25 23:53 #

    말씀대로입니다. 이런 글을 읽을때마다, 철학적인 잡상이 자꾸 드는군요. ㅎㅎ
    단견이지만, 중화라는 개념도 말씀하신 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게 듭니다 (특히 지리적인 요소와 중화개념의 성립이라든가..).

    말씀대로 사회의 방향이, 편하고 공평한 (장점) 쪽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동시에 '재미와 다양성을 잃어가는 쪽으로 대체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90년대의 동네분위기와 지금만 비교해도 그렇고...
  • 존다리안 2015/02/25 23:38 #

    사신이라는 사람들이 해적으로 돌변하다니 뭔가 납득이 안가네요.
  • 역사관심 2015/02/26 00:06 #

    삼국사기에서 이 사람의 정확한 정보를 찾았습니다. 진짜 '사신'입니다. 기록을 본문에 실었습니다.
  • Esperos 2015/02/26 11:56 #

    해동역사 이야기에서 3 자는 9 미터가 아니라 0.9 미터 정도지요. 겨를 거의 1미터 가까이 쌓으라고 했다니, 그냥 희망고문이네요
  • 역사관심 2015/02/27 01:01 #

    실수를;; 쓰고 나서 9미터라니 라고 생각했는데 수정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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