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축 (5) 고려시대 누관(樓觀)의 모습 (고려도경 그리고 청명상하도) 한국의 사라진 건축

흔히 중국 회화역사의 극세사화의 최고봉이자 블랙홀로 불리우는 '청명상하도'를 보면서 우리는 대단하다라는 감상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청명상하도는 의외로 우리에게 꽤 고찰할만한 가시적인 정보를 시사해 주는 그림이기도 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우선 오늘의 주제인 고려시대의 누관건축에 대한 사료를 들여다 보지요. 다음은 [고려도경]에 나오는 누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누관(樓觀)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사찰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 양쪽과 국상(國相 일국의 재상),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樓)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樓가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 것은 ‘박제(博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놀러 올 때면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樓觀

王城。昔無樓觀。自通使以來。觀光上國。得其規模。稍能 太上御名 治。初惟王城宮寺有之。今官道兩旁與國相富人。稍稍僭侈入宣義門。每數十家則建一樓。俯近興國寺。二樓相望。左曰博濟。右曰益平。王府之東。二樓臨衢。不見摽牓。簾幙華煥。聞皆王族游觀之所。人使經由。則有婦女。窺覘於其間。衣服之飾。不異民庶。或云王每出游。則其族始易錦繡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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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에서 서긍은 누관이 원래는 왕궁과 사찰들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개성의 중심도로 (관도)의 양쪽길가에 세워지고, 또한 귀족(부자)들의 저택에도 많이 두어 사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선의문 안쪽에만 들어서면 드러나는데, 수십가호마다 누각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 지도는 고려대 개성의 문들을 표기한 지도입니다. 주황색입니다. 그러니까 저 선의문 안쪽은 누관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선으로 표기한 것이 선의문 안쪽의 궁으로 통하는 거리입니다). 선의문은 당시 두개가 있었는데, 아마도 지도에서 윗쪽 선의문 안쪽을 말하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윗쪽 선의문 안쪽이 바로 관청들이 즐비한 관도였기 때문이며, 또한 한자도 고려도경의 '宣義門'입니다. 참고로 아래쪽 오정문도 선의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禪義門'입니다.

그리고 왕부동쪽의 누각 둘은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되어 있으며,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본다고 말하고 있지요.

고려도경과 청명상하도

아시다시피 서긍은 12세기초 고려 개경의 모습을 본 '북송'의 사신입니다. 따라서 그가 묘사하는 모든 개경의 모습은 (그리고 건축용어를 포함한 단어들은) '북송대의 북송인'의 인식으로 보고 사용한 단어가 됩니다.

그럼 이 '누관'이란 건축의 북송대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음은 언급한 유명한 [청명상하도]중 객사와 주점부분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酒樓" (주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술을 마시는 '누'관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주루는 2층입니다. 
북송대 회화인 청명상하도중 누관형식의 여관들 酒樓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럼 이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연대는 언제일까요? 이 그림은 정확히 1120년의 북송의 수도인 개봉(카이펑, 開封)의 중심가를 사진찍듯 그린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북송의 수도 개봉에서 출발해서 온 사신 '서긍'은 언제 개경의 거리를 기록한 것일까요? 1123년입니다. 정확히 저 그림의 3년뒤로 즉, 서긍이 생활속에서 활보하며 다닌 곳이 바로 저 그림속이란 뜻입니다. 즉, 그가 일상적으로 보고 다닌 '누관'들은 바로 청명상하도에 나오는 누관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죠. 서긍은 원래 화주출신으로 18세에 수도 카이펑에 있는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5년간 학교를 다니고, 이후 강소성, 정강, 장주등에서 임기를 수행합니다.

참고로 청명상하도를 그린 장택단(張擇端)의 생몰년도는 1085년 ~ 1145년, 고려도경을 그리고 쓴 서긍(徐兢)의 그것은 1091년 ~ 1153년입니다. 즉, 두 사람은 고작 6살터울로 완전히 동시대와 같은 장소를 살아간 인물들입니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묘사한 개경을 방문한 1123년은 그가 한창때인 만 32세의 일입니다. 이 나이의 인물이 아주 상이한 구조의 건축을 보면서 자국의 건축용어를 사용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개봉와 개경 (12세기초 동시대에 서긍과 장택단은 이 두 도시를 묘사했습니다).

다음은 호남 악양에 있는 중국의 '누관'만을 집중적으로 통시적으로 볼수 있게 거대한 청동 건축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공원중 중국 강남 3대루로 꼽히는 악양루의 시대별 모습을 구현해 놓은 것입니다. 현대중국에서 '누관'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하면 이런 건축들이 나옵니다. 물론 이러한 건축들이 개경에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더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우리가 흔히 강변등의 정자형 단층건축에도 붙이는 '누'라는 개념이 시대별로 어떤 차이가 국내에서 있어왔는지, 그리고 중국과의 차이는 (시대별) 어떠한지 역시 추후 연구할 과제같습니다. 우선 아래 사진들은 중국인들이 '누관'이라는 개념을 대체적으로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하나의 케이스로 훑어보시길 바랍니다. 원래 사진을 올린 중국인이 쓴 단어그대로를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송대누관樓觀 (악양루)
서긍과 장택단의 시대의 악양루는 위의 모습, 그전대인 당나라대에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누관樓觀
송대 다음인 원대에는 더 고층이 됩니다. 글 주제를 벗어나 이 모형들은 훌륭한 것이 건축물 아래의 돌로 쌓은 모습을 보시면 시대별 특성이 고스란히 잘 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대의 돌쌓기 방식은 마치 동시대 우리나라 삼국의 산성들같지요.

원대 누관樓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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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청대에도 酒樓客棧 (주루객잔)이란 말은 이런 건물을 뜻했습니다. 이 사진은 복건성 회주시에 있는 청대 전통가옥 형식의 건물로 酒樓客棧이라는 설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역시 명청시대의 주루객잔을 복원한 음식점. 보시다시피 '루'라는 명칭이 들어간 거리의 건물은 대부분이 복층임을 알 수 있지요.

흔히(라고할까 어쩔수 없이라고 할까) 고려시대의 거리그림을 구글링하면 유일하게 뜨는 삽화가 이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조선시대를 그린 회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두가지, 도시안에 불탑이 보인다는 것과, 2층누각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2층묘사를 보면서 정말 이랬을까라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본 그림은 고려도경에 나오는, 每數十家則建一樓, 이 묘사의 거리의 누관모습을 나름대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훨씬 후대인 조선후기 18세기중반 그림이 한점 남아있습니다. 바로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의 송도전경이라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서긍이 묘사한 왕궁관도로 통하는 선의문쪽, 즉 고려당대 중심가가 아닌, 훨씬 아랫쪽의 '개성 남대문'안쪽의 그림입니다. 즉 빨간색 구역을 그린것이지요.
이것이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이 정확히 1757년 송도(개경)을 기행하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고려시대의 전성기를 거의 잃어버린 개성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대문안쪽에 기와집이 즐비하고 반듯한 대로가 정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확대해볼까요? 여기에도 2층집으로 보이는 가옥이 길가에 보입니다. 주관적인 느낌에 의지한 것이지만, 필자의 눈에는 상하층에 비슷한 길이의 짧은 처마를 뺀 양식이 위의 두번째 명청대 주루객잔형식의 건축과 비슷해 보입니다. 혹 18세기중반까지도 개경의 일부지역에는 이런 고려양식의 생활건축들이 남아있던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구한말까지도 어쩌면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유일한 사진이 한장 (필자가 파악하는 한) 있습니다. 1911년의 개성시가지를 찍은 일제시대 사진인데, 이당시는 아직 일본건축 양식이 개성시에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던 시절이라, 이 양식이 조선말기의 모습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여기보면 마치 위의 건축같은 객잔형식의 2층건물이 보이지요. 오른쪽 윗쪽의 2층 건물입니다 (파란색 동그라미 바로 아래). 그리고 왼쪽의 큰 기왓집도 2층으로 보입니다.

같은 시기의 한양에서는 이런 모습의 복층형식 건축을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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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진의 확실한 도록출처와 거리위치를 파악하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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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 대한 기록외에, 고려시대 저택에 있는 누각이나 2층에 대한 묘사를 찾아본 것중 두어개 소개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전에 신돈이 '윗층을 헐어 아랫층과 합쳤다'는 고려말 기록을 소개했는데, 오늘은 다른 두가지.

우선 삼국사기 [궁예]편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弓裔
왕이 궁중의 사자(使者)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 아래로 던졌는데, 젖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길로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眇其一目 抱而逃竄 劬勞養育

이 부분은 젖먹이 시절 궁예를 왕의 킬러를 피해 도망시키는 급박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아기 궁예를 '누'아래로 킬러가 던져버린 것을 젖먹이가 급히 (몰래) 받아서 피신시키는 장면이 나오죠. 궁예를 죽이러 온 전문살수가 아래 사진과 같은 우리가 아는 이런 누각높이에서 던졌을까요? (현재 국내에는 이런 양식의 '누'밖에 없으니 이런 그림만 머리에 떠오르는 게 당연합니다).

아랫쪽이 강이라든가 절벽이 아닌 이상, 그렇지는 않을 듯 합니다. 아마도 후삼국시대의 누건물개념 (아마도) 2층건축에서 아래로 던졌다는 것이 더 와닿는 설명입니다.
다음은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崔忠獻) 부 최의(崔竩) 
元拔自度不勝, 欲擔竩走避, 以竩肥重未能. 乃扶上屋冓, 又自當戶, 壽山突入, 擊元拔中額, 踰垣走. 別抄追, 斬于江岸, 又索竩及能, 皆殺之.

동이 틀 무렵 야별초(夜別抄) 등이 최의의 집 벽을 무너뜨리고 난입했는데, 원발(元拔)은 장사라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일어나 칼을 빼들고 문을 막아서니 군사들이 나아가지 못하였다. 원발이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해 최의를 업고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가 너무 살지고 무거웠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이에 최의를 부축하여 옥상방으로 올려놓고 단신으로 문을 막아섰는데 오수산이 갑자기 뛰어들면서 원발의 이마를 치니, 원발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별초(別抄) 군사들이 그를 추격해 강기슭에서 죽였으며 최의와 유능도 찾아내어 모조리 죽였다.

최충헌의 아버지인 최의의 저택에 야별초가 난입, 그를 죽이는 부분입니다. 여기보면 최의가 너무 살찌고 무거워서 그를 피신시키던 장사인 '원발'이 최의를 屋冓에 올려두고 달아나는 장면이 등장하죠.

屋冓란 한자는 직역하면 지붕(옥)밑의 방(구)이란 뜻입니다. 네이버등에서 다락방으로 해석해 놓은 버젼도 있습니다만, 애시당초 다락방이라는 말자체가 현대의 한국에서 쓰는 부엌옆의 다락방의 의미와 달리 벽없이 2층 마루로 지은 집을 말합니다. 즉, 乃扶上屋冓이란 것은 최의를 지붕밑의 2층방위에 부축해서 밀어올려두었다 뜻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지금도 "마룻바닥이 지면보다 높거나, 이층으로 지은 집"을 다락집이라 부르고 다른 말로는 루집이라고 부릅니다.

고려도경과 청명상하도의 관련성에 대한 논문이나 연구는 전혀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예전에 이 그림에 나오는 고려인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필자가 고려도경에 나오는 말잡이의 모습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관련글
... 재상에게는 배속되는 정리가 4인, 구사는 30인이다. 영관이 수행한다. 앞에는 청개가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수십 보 밖에 급사가 서 있다. 말을 탈 때는 두사람에게 고삐를 잡게 한다. 재상 이하는 앞에 청개를 사용하지 않고, 말을 타되 두 사람이 고삐를 잡지는 못하게 한다. 일반 백성이 말을 탈 때는 스스로 채찍을 들고 고삐를 잡아야 한다. 정리의 대부분은 앞에서 몰고 급사는 수건巾이나 병甁, 그리고 물건을 들고 뒤에서 따라간다. 중략.

앞으로 두 사료의 시대별 관련성을 고찰, 비교연구가 더 활발해지면 좋겠습니다.
(저 고려인의 복장부터 서긍의 묘사와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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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2/26 12:15 # 삭제

    확실히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남북국시대 신라 수도 서라벌 인구 100만 고려시대 수도 개경 인구 50만 그리고 조선시대 수도 한양 인구 최대 20만... 인걸 비교해보면 어떻게된게 뒤로 갈수록 수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같아 이상한 부분도 있네요 수도 넓이도 한양이 개경보다 작은 편이고 ( 일단 외성 둘레부터 차이가 ) 근데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수도 장안 인구도 100만이 넘고 송나라 수도 개봉 인구도 150만 이었다던데
    그보다 후대인 청나라 수도 북경 인구가 60만인걸 보면
    한국과 중국 역대 왕조국가는 뭔가 뒤로 갈수록 이상한 것 같긴 하네요
  • ㅇㅇ 2015/02/26 12:20 # 삭제

    참고로 북송 수도 개봉의 황궁은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다네요
    금나라 원나라가 파괴한게 아니고
    원나라때 대홍수 때문에 개봉의 상당부분이 물에 잠겼는데
    불행하게도 북송 황궁 지역이 거의 대부분 홍수 피해를 봤다고 하네요
    엄청난 대홍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궐터가 지금은 모두 거대한 호수가 됬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나라때 황제가 궁궐터에 누각을 짓고 이곳이 북송때 황궁터라는거 기념했다네요
    그게 현재 개봉에 남아있는 용대라고 합니다
    중국 정부에서 개봉 호수 수중탐사를 한적이 있었는데
    물속에 지금도 송나라 황궁 건물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ㄷㄷ
  • 역사관심 2015/02/27 06:25 #

    개인적으로 인구의 추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신빙성을 가진 자료를 아직 찾아보지 않은지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수도를 중심으로 한 인구변화는 아직 어떤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고대경주가 비정상적인 규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은 가끔 합니다만. 개경의 경우 10만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더군요- 그럼 대충 4-50만이 되겠네요). 다만 한국과 일본의 인구추이에 대해 엔하위키에서는 이런 정보가 있더군요:

    한국의 인구자료는 두산백과를 참고하였다. 여기서는 서력기원 즈음의 한국 인구를 300만이라 추정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와 현재의 중국 동북부 지방을 합쳐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인구는 위키백과를 참고하였다. 일본의 인구는 기원전 3000년 경에 약 10만이었고, 기원후 1년 즈음엔 30만 정도로 추정한다. 이 때만 해도, 중국 본토를 제외한 다른 지방에선 제대로 된 고대국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반도나 일본 열도나 인구이동이 꽤 빈번하게 나타나던 시대였다. 일본에는 동남아와 대만, 류큐 등을 경유하는 인구들이 꾸준히 들어왔고, 한반도나 중국을 경유해서 들어오기도 했다. 한반도에도 중국이나 북방의 인구가 유입됐고, 애초에 한민족 자체가 시베리아 동남부에서 발원한 것으로 본다.

    인구이동에 대한 연구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매우 부실하였다. 대략, 고려말 시기엔 400만 정도로 보고 조선 전기를 550만, 조선 중기를 700만 수준으로 본다. 일본은 200년에는 50만, 400년에는 150만에 이른 것으로 보며 715년에는 451만에 이르렀다고 본다. 인구에서는 아마 이 시점에서 일본 열도가 한반도를 이미 능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혼란기를 겪어 줄었다가 1150년 즈음에는 대략 600만을 넘기고 15세기를 지나 1천만을 넘긴 것으로 본다. 임란직전 조선의 인구는 1000만에서 12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이 시기의 일본은 1200만으로 추정한다. 1700년경에 일본은 3000만에 이르렀다고 보며 동시기 조선의 인구는 1700만, 이 수치는 조선이나 일본이나 100년 가까이 큰 변화가 없다가, 메이지 유신 직후에는 약 3,700만에 이른다. 같은 시기 조선의 인구는 약 1700만 정도로 추정한다.[20] 그 후, 일본은 1915년에 5천만을 넘겼고 조선은 1925년에 약 2,000만에 이른다. 일본은 1940년대에는 7,000만, 조선은 2,500만에 이른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 한국과 북한이 분단되면서 한국의 인구는 약 2,000만[21], 북한은 900만 수준이다. 일본은 1965년에는 1억을 넘긴다. 한국은 1960년에 2,500만으로 1940년대 한반도의 인구 수를 회복했고 1970년에는 3,150만에 이르렀고 현재는 5,000만까지 이른다. 북한은 2,400만 정도로 추정한다. 일본은 현재는 1억 2,800만 정도로 본다. 한반도는 현재 남북을 합쳐서 약 7,400만 정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일본과 한반도의 인구 격차가 한동안 3배 가까이 벌어졌던 것을 보면 한국과 북한이 많이 따라잡은 셈이다. 다만, 일본은 초고령사회이고 한국은 고령화사회로 초고령사회 진입이 2014년 기준으로 고작 12년밖에 남지 않은지라 더 이상 인구가 늘어날 가능성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북한이 변수가 될 수 있기는 하다.
  • 역사관심 2015/02/27 06:34 #

    말씀하신 개봉시의 황궁의 경우 용정지역이라고 하는군요. 다시 재현한 곳이 있긴 합니다만, 수중사진을 볼수 있으면 좋을텐데:
    http://www.ezday.co.kr/bbs/view_board.html?q_sq_board=6070642

    여기는 더 아스트랄합니다. 1300년전의 고성이 두개나 수몰된 곳인데 사진이 정말이지;
    http://laketown.tistory.com/69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561147/Chinas-Atlantis-How-Lion-City-purposely-flooded-make-way-power-station-remains-completely-intact-130ft-underwater-50-years.html

  • 첫걸음 2015/02/26 20:43 #

    누관 건물이 참 화려하네요. 고려시대 건물 중 저런 건물이 남아 있었으면 참 훌륭한 문화재가 되었을 것 같은데... 가끔씩은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중국의 누관들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교토 금각사(긴가쿠지)의 건물도 저런 형태랑 비슷한 것 같군요.
    제가 알기로는 무로마치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기상 원 후반기, 고려 말이라 긴카쿠지도 원과 고려 시대 누관의 양식 영향을 받은 것도 같습니다.

    http://terms.naver.com/imageDetail.nhn?docId=1200645&imageUrl=http%3A%2F%2Fdbscthumb.phinf.naver.net%2F2765_000_1%2F20131014002927877_OV4A4LW64.jpg%2F187892.jpg%3Ftype%3Dm4500_4500_fst%26wm%3DN&cid=40942&categoryId=39950
  • 역사관심 2015/02/27 06:48 #

    개성쪽에서 고려무신들이나 귀족들의 저택지와 여러 기와양식, 장식들이 발굴된다면 언젠가 재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각사의 경우 요시미쓰가 별장으로 만들었으니 무로마치전기의 '기타야마문화'가 반영된 건축인데, 이 양반이 거의 '명빠'수준의 인물인지라, 아마도 중국건축의 양식을 참조하긴 했을 것 같습니다. 흔히 1층은 후지와라기, 2층은 가마쿠라기, 3층은 중국 당나라 양식으로 각 시대의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한 독특한 건축으로 보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3층은 정말 당나라 양식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http://static.panoramio.com/photos/medium/16933270.jpg
  • ㅇㅇ 2015/02/27 14:25 # 삭제

    (일단 저는 개인적으로 엔하위키 자체를 그닥 신뢰하지 않습니다
    일베충식 객관 중립 팩트가 너무 많아서요.. 역사 부분도 마찬가지죠
    아이돌 빠순이스러운 사고방식도 넘쳐나고..)

    근데 솔직히 고려말 인구를 400만 정도로 보는건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개중에는 고려 전성기 전체 인구가 200만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고려도경을 잘못 해석해서 생긴 착오라고 보는게 맞는것 같네요
    실제로는 거의 1000만에 육박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라나 고려가 비정상이라거나 조선보다 중앙집권적이어서
    수도 인구가 더 많은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럽이나 일본 같은 경우 소위 서양의 발전사관에 맞춰서
    역사발전에 따른 도시인구유입을 설명할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이나 중국같은 경우 그런 논리를 1:!로 대입하는게
    그닥 적절해 보이지는 않네요

    참고로 조선 후기 강세황 그림에 나오는 개성 남대문 (현재도 남아있죠)
    그 남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개성 성곽은 사실
    고려 전성기 외성과는 관계가 없죠
    고려 공양왕때 이전시대 외성이 너무 넓어서 이성계가
    수도 방어를 위해 몽골 침략으로 황폐해진
    외성 대신 뒷쪽에 새로 세운 석성이니..
    규모도 이전보다 작구요

    그러고보면 고려 전성기 궁성 내성 외성의 실제 모습에 대한
    연구가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알기론 고려시대 수도 성곽은
    조선시대와 달리 판축형 토성이었다던데
    참고로 그 당시 원나라 수도 대도의 성곽도 토성이었죠
    당나라때 장안성도 사실 토성..

    그리고 중국 같은 경우 목조건축에 벽돌을 많이 사용한 경우가 많은데
    이게 사실 명나라 청나라 시대 대중적인 건축양식이라네요
    원나라 이후 중국 중부 북부 지역 산림 훼손이나 지형 변화등으로
    목재가 많이 부족해진 탓이 중요 원인이라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5/02/27 16:00 #

    네 저도 엔하위키를 다 신뢰하진 않습니다. 강세황그림의 설명부분은 본문에 조선후기의 모습으로 설명을 해두었습니다. 외성보다 조선후기에도 저런 이층건물이 아마도 있었다는게 포인트입니다. 흥미로운 정보 항상 고맙습니다.
  • 뽀도르 2015/07/13 09:53 #

    조선 시대의 인구 급증은 신대륙으로부터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 같은 구황 작물의 도입과도 관련이 클 겁니다 일단 조선이 영토도 고려보다 크고 거기에 새로운 작물의 도입으로 경작 가능한 지대도 늘어난 점이 인구 증가에 크게 기여했지 싶습니다 중국도 명청 교체기 무렵에 이들 작물의 도입으로 그전에는 경작 불가능했던 지역에서도 식량을 생산해 인구가 급증했다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5/07/13 10:41 #

    뽀도르님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 평론가 2015/02/27 22:57 # 삭제

    저기 누대 몇개는 미니어쳐 느낌이 나네요? 실존 건물인가요? 기둥색이 초록색인 원대 누각?
  • 역사관심 2015/02/27 23:58 #

    아닙니다. 몇미터짜리 축소 청동모형들을 공원에 죽 배치해 둔겁니다.
  • 평론가 2015/07/10 21:08 # 삭제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677899
    평양에도 비슷한 건축이 존재했군요.
  • 역사관심 2015/07/13 04:02 #

    네 이 평양쪽 사진은 그동안 화질이 너무 흐려서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얼마전 중화질을 구해서 언젠가 소개할 생각이었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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