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樓누의 정의- 중요사료 (12세기 기록) 한국의 사라진 건축

어제 글에서 '고려대'의 '누'개념을 북송사신인 서긍의 인식으로 바라본 (즉 북송에서의 '누' 개념을 고찰) 바 있습니다. 그런데, 비근한 시대인 12세기말 고려말기 기록에 고려인의 인식에 '누'라는 것이 어떤 건축인지를 보여주는 명징한 정의를 찾았습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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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륜정기四輪亭記 중.
이규보

古者巢居 옛날에 나무에 깃들어 
不可以處 거처할 수가 없으므로 

故始立棟宇 비로소 기둥과 집을 세워 
以庇風雨 풍우를 막았는데 

至於後世 후세에 이르러 
轉相增制 점점 만드는 법이 증가하여 

柴板築謂之臺 나무판자로 쌓은 것을 대(臺)라 하고 
複欄檻謂之榭 난간을 겹으로 한 것을 사(榭)라고 하였으며 

構屋於屋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謂之樓 누(樓)라 하고 

作豁然虛敞者 툭 트여서 텅 비고 허창(虛敞)한 것을 
謂之亭 정(亭)이라 하였으니 

皆臨機商酌 모두 그때그때 헤아리고 참작하여
取適而已 맞는 것을 취한 것일 뿐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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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의 문신인 12-3세기 인물인 이규보 (李奎報, 1168년∼1241년)의 동국이상국집의 사륜정기부분입니다 (사륜정에 대해선 추후 따로 포스팅예정). 여기 보면 당시까지의 건축 개념을 짧지만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어 한국건축사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궁궐건축, 사찰건축, 일반주거건축에서 같은 단어의 정의가 미묘하게 다를 수 있음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은 '일상건축'의 정의로 보시면 됩니다.

굵은 체를 보시면 構屋於屋 (구억어옥) 즉, '집의 위에 다시 집을 지은 것'을 즉 '누'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글자그대로 현재 우리가 흔히 보는 '경회루'의 그 정자형 누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죠. 복층구조의 가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構 구라는 글자는 얽다, 집을 올리다라는 뜻입니다. 

12세기 당시 다른 건축형태도 잠시 살펴보면, 우선 나무판자로 쌓아올린 형태를 '대', 난간을 겹으로 친 건축을 '사榭' (이 글자도 사전에는 정자 사라고만 되어 있는데 고려대에는 이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의 '누'를 설명한 직후 '툭 트이고 허한 공간이 있는 건축을' 정'이라고 다시 분류하고 있어 현재의 정자형 누각을 '누'라는 독립단어로 칭할리는 없습니다.

즉, 적어도 12세기의 고려에서 '누'개념은 복층건축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 기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규보의 시대가 정확히 대규모 건축이 성행하던 (정확히 최씨가문의 시기) 무신집권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시점으로 이 기록을 교차비교해 보지요. 

고려도경
누관(樓觀)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사찰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 양쪽과 국상(國相 일국의 재상),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樓)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樓)가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 것은 ‘박제(博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樓)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놀러 올 때면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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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宣義門。每數十家則建一樓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樓)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북송대의 '樓'누 개념을 연구한 자료는 찾아보지 못했지만, 이전 글에서 정확히 동시대인 [청명상하도]에 나오는 '樓'들이 하나같이 복층구조임을, 그리고 동시대의 여러 누관구조 건측들이 2층이상의 건축들임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또한 서긍이 고려에 와서 '중국의 양식을 차차 따르고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樓'를 고려도 많이 짓기 시작했다는 설명을 하는 것으로 두 나라의 樓 개념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긍의 나라, 북송의 수도 카이펑 (개봉시)에 남아있는 송대의 전통거리입니다. 사찰등이 아닌 일반 거리에서는 이런 걸 '누'라고 한 것입니다 (사진출처). 즉, 정확히 이런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느낌의 건물을 보고 그가 '누'가 거리에 세워져 있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입니다.
이것이 청명상하도에서 '주루酒樓'라고 표현된 부분입니다. 
그럼 고려후기 즉, 정확히 이 [고려도경]과 [청명상하도]의 시기에 송나라와 고려의 건축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회화가 있을까요? 다음의 그림은 고려의 승려인 대각국사(1055-1101년)가 전남 순천의 선암사를 중창할 때 그린 중창건도기입니다. 정확한 년대는 1092년으로 1123년의 고려도경보다 겨우 31년 전의 선암사입니다 (청명상하도와는 28년전)입니다. 원안의 건축이 고려중기 중창된 선암사의 중금당입니다 (그림자체는 18세기경에 다시 11세기의 원본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중금당을 현재의 대웅전이 아닌 '미륵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1092년 선암사 모습

참고로 이것이 이전 글에서 소개한 송대의 악양루 양식입니다.
현재의 선암사 대웅전 (미륵전이 아닌)은 우리가 흔히 보는 조선시대 팔작지붕입니다. 보물 13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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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기록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앞의 것이 일반건축 (주택, 주점등)에 대한 설명이라면, 다음의 기록은 사찰의 누에 대한 묘사입니다. 다만, 이 기록은 1100년대의 것이 아닌 훨씬 후대 1326년의 기록입니다.

동문선 기(記)
중수 개국률사 기(重修開國律寺記)

후당(後唐) 청태(淸泰) 18년에 태조께서 술수가(術數家)의 말을 듣고서, 그 사이에 절을 지어서 가사 입고 불교 계율 배우는 이들을 거처하게 하며 이름을 개국사(開國寺)라 하였다. 중략. 그런데 임진년에 불탄 다음 새로 중수하지 못하니, 승방과 불전이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여 계단(戒壇)은 빈 터가 되고, 강사(講肆)에는 풀이 무성하여 날마다 달마다 퇴락하니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물건은 언제나 시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때를 만나면 번영하게 되며, 도는 끝내 막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을 기다려서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남산종사 목헌구공(南山宗師木軒丘公)은 뛰어난 재주로 의리에 통하여 정혜묘원 자행대사(定彗妙圓玆行大師)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무너진 기강(紀綱)을 진흥하는 것만을 소임으로 삼았다. 중략.

여러 사람들이 듣고서 그 뜻을 깨달아 팔을 걷고 따라 나서서 종파 문중의 여러 절에 통첩을 보내어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 들여서 땅의 높고 낮은 것을 평평히 하고, 풀뿌리와 나뭇가지를 잘라 내어 재목을 만들고, 칸 수를 정하여 기둥을 세워 둘러 짓고 흙을 바르고 단청하였다. 높고 가파른 전각을 언덕쪽에 짓고 긴 행랑을 양 옆으로 지었으며, 두 행랑 끝에 누(樓)을 짓고 마루를 놓으며 두 누(樓) 사이에 행랑을 짓고 문을 내었다. 그 서쪽에는 학도들의 집과 스승의 방이다. 부엌과 곳간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데, 간략하고도 주밀하며 검소하고도 견고하니, 기왕의 일을 참작하여 오래 가게 하려고 규모와 제도를 증감하여 알맞게 한 것이었다. 지리(至理) 계해년(충숙왕 10년)에 시작하여 태정(泰定) 을축년까지 3년간에 완성하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어 낙성하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峻殿于上方。引脩廡于兩傍 兩廡之端而軒焉。廊兩之間而門焉

고려문신 이제현(李齊賢, 1287~ 1367년)의 [동문선]에 등장하는 고려 개경의 개국사의 중수기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기 보면 화재를 입어 전소된 개국사를 1326년 재건하는데, 峻殿  준전, 즉 가파른 높이의 전각을 짓고 그옆에 행랑을 만들고, 면의 좌우에 복층의 누(樓)를 세우고 중층의 마루를 그 사이에 깔고, 마루위에는 지붕을 덮어 행랑양식으로 만들고 끝에 다시 누문(樓門)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즉, 복층구조의 누각이 양쪽에 서있고, 그 사이를 행랑이 이어주는 구조입니다. 전각의 행랑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쪽의 두개의 누사이의 행랑은 공중에 떠있는 구조일 것입니다. 이런 구조의 건축이 현재 국내사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문화컨텐츠닷컴측에서 고려저택의 구조를 설명하는 일부 그림에 이런 공중에 떠있는 행랑이 있습니다.
이 모습을 역시 이제현의 익재난고에서는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익재난고(益齋亂藁)
중략.  무리들은 이 말을 듣고는 뜻을 알아차려 팔을 걷어붙이며 종문(宗門)의 여러 사찰에게 권유하여 역부(役夫)를 배정 동원하여 땅의 높고 낮은 것을 고르고 우거진 숲들을 베어낸 다음 먹줄로 재고, 연궤(筵几)를 알맞게 만들며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걸었으며, 백토(白土)를 칠하고 단청(丹靑)을 하였는데, 위쪽에는 높다란 전(殿)이 세워지고, 그 양편에는 긴 무(廡)가 연결되었으며, 양쪽 무 끝에는 누(樓)가 세워지고 두 누각 사이에는 행랑이 세워졌으며, 대문이 달렸다. 그 서쪽에는 학도(學徒)들의 학사(學舍)와 감사(監師)의 당(堂)이 있고, 주방과 창고도 각각 제자리에 있어 간략하면서도 주밀하고 검박하면서도 견고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을 참작하고 장구할 것을 헤아려 적당하게 증감한 것이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계해년(1323, 충숙왕 10)부터 시작해서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을축년에 이르러 3년 만에 공사가 끝났는데, 연회를 열어 낙성을 축하하니, 듣고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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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언: 

고려대의 건축에 대한 정보는 파편적으로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 일본과 달리 그림도 현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실물은 물론 없는 (일반건축과 궁궐은 전무, 사찰건축으로 두세건물 뿐) 상황에서, 텍스트정보에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경우, 텍스트에 나오는 각종 건축용어에 대한 시대별 정리는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텍스트의 해석은 당연히 당대 건축의 스탠다드였던 중국쪽의 왕조별 정의를 크게 참조해야 합니다. 북송대의 건축을 묘사한 청명상하도와 그 동시대의 인물인 사신 서긍이 묘사한 고려도경은 그런 면에서 좋은 상호참고자료가 됩니다.

거기에 더해, '당대 고려인'인 이규보가 남긴 '누樓'에 대한 정의 (즉 집위의 집)는 북송대의 樓 개념과 겹쳐짐이 명확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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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구글에 樓라고 친 검색결과입니다. 樓라는 개념 (우리 정의로는 '다락' 이라고 하는)은 중국에서는 적어도 '높이 솟은 건물'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 하군요. 우리는 樓가 조용한 연못가에 있는 정자형 건축 (**루)으로 현재는 인식되고 있다고 보는데, 시대별 용어정리가 중요한 이유로 보입니다. 일단, 고려시대 이규보는 그런 건축을 '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作豁然虛敞者 툭 트여서 텅 비고 허창(虛敞)한 것을 
謂之亭 정(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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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2/28 09:45 # 삭제

    확실히 이런거보면 고려중기 몽골침략을 거치고 고려후기 다시 국가재건 시점과 조선중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고 조선후기 국가재건 시점의 차이가 많은것 같습니다 고려후기엔 그래도 이전시대의 풍광을 많이 회복한것 같은데 조선후기는 임진왜란 이전 수준 회복에 거의 실패한 셈이니..(뭐 전쟁의 피해 정도 차이가 크고 외부의 경제적 지원이라던지 국가 경제 상황 그리고 국가 이념을 고려하면 이해 못할건 아니지만 그래도 차이가 크네요,, 참고로 원나라에서 고려로 교초등 중국돈이 전쟁 이후 대량 유입되었다고 하죠 그 돈이 고려 민생을 위해 많이 쓰인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려 외적 모습 복구에는 많이 쓰인듯 합니다)
    근데 송나라 청명상하도 고려인...그거 그냥 한국 인터넷 추측으로 보는게 맞죠?
    그런 복식과 특히 갓 쓴거 한국에만 존재했던 전통복식도 아니고
    한국 인터넷의 소위 엄격하고 냉정한 역사인식과 달리 너무 섣부른 추측이 아닌가 싶네요
  • 역사관심 2015/02/28 13:40 #

    모두 샅샅이 조사한 것이 아닌지라 이제까지 공부해온 감으로만 본다면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임란전까지는 고려시대의 풍광이 이곳저곳에 남아있거나 재건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건축뿐 아니라 의복, 연회의 모습등에서도 마찬가지...

    사실 공론화되기전 이 고려인은 한국측에서는 어떤 블로거가 개인적으로찾은 적이 있습니다만, 공식적으로는 중국 자단 박물관측에서 찾아내 연락해온 것입니다.
    http://china.joins.com/portal/article.do?method=detail&total_id=7989495

    그리고 느낌으로는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http://depts.washington.edu/chinaciv/painting/4urbtrn8.jpg


  • ㅇㅇ 2015/03/01 09:50 # 삭제

    중국 박물관측에서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어서 당시 고려인이라고 추측한것 같은데 현대 중국인들이나 역사관련종사자들 한국 조선시대 이전 사람들의 복식에 대해 솔직히 잘 모르지 않나요?

    한국에서도 몇몇 기록에 대한 고증노력이나 사극? 등으로 어렴풋이 아는 정도인데..
    중국사람들이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어서 고려인으로 추측한다는 말 자체가
    그쪽 사람들 한국 전통복식에 대한 지식수준이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사람 복식이라는건데
    그사람들이 저 얘기 했다고 저걸 어떤 지적 권위로 보는건 좀 문제가 있어보이네요

    개중에는 저런 것때문에 갓과 두루마기는 조선시대 이전에도 한국 전통 복식으로 봐야하고
    사극이나 국내 남아있는 기록등으로 고증한 복식은 과장되었다.. 이런 의견도 나오던데
    좀 비약이 아닐런지요..

    갓과 비슷한 건 이미 조선시대 이전 중국에도 있었고 저 그림속
    모자를 갓이라고 확정하기도 좀 모호한데 말이죠
    단순히 보면 저그림속 인물은
    800년전 중국 송나라에 400년전 조선 중기 사람이 등장한 것 같은 느낌도 드는게
    사실입니다

    (조선후기 중국에 사신으로 간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기록도 그와 비슷한게 있더군요
    조선인들이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거.. 중국에서는 예전에 입던 옷인데 조선에서는 지금
    입고 있다..뭐 이런식으로요)
  • 역사관심 2015/03/01 10:30 #

    지적권위야 한국언론은 박물관쪽에서 이야기하면 일단 실는 정도죠 ㅎㅎ. 요는 한국학계에서 어느정도 연구를 하고 있느냐인데...결과물을 곧 보면 합니다. 의복은 제 주분야가 아니라 저도 찾아봐야 하겠네요.
  • 2015/02/28 21: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3/01 02: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Cheese_fry 2015/03/03 02:06 #

    그러면 고려때 2층 건물이 있었다는 거네요. 와... 아주 흔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요. 그런데 조선기에는 왜 다... 1층으로...;
  • 역사관심 2015/03/03 04:24 #

    감사합니다. 사실 한국건축역사의 흐름은 대체로 단위별 건축에서 볼때, 대에서 소로, 화려함에서 소박함으로 나아갔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할수는 없지만, 현재의 한국사회는 삼국-고려시대의 '모습'의 재현에는 확실히 실패해왔고, 그것이 현재 조선후기로 집중편향되어 있는 한국미학담론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한국의 정체성, 이미지로 굳어져 왔지요.

    좀더 다채로운 '한국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잇다면 좋겠습니다. 그때 오히려 역으로 조선후기의 담백미가 더 빛날수 있을 겁니다 (현재의 모습보다도).
  • 평론가 2015/07/10 20:53 # 삭제

    저런 건축이 고궁에도 있긴 한데 두 누사이에 행랑을 지었다는 구절만은로 복층행랑으로 볼수 있을까요?
  • 역사관심 2015/07/13 04:05 #

    사실 저 부분은 제 생각이라기보다는 (전문분야가 아닌지라) 문화컨텐츠사이트 (혹은 어떤 논문에서)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저도 구조를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두가지 모두 해석이 가능할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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