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家樓기록 발견 & 13세기 고려청자로 보는 추정 복층가옥구조. 한국의 사라진 건축

고려도경의 누묘사에서 이어지는 글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작년 여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산수인물무늬 편호 13세기

이 글은 해외 어떤 사이트에서 고려청자의 사진(위)을 올려 놓은 것을 보고 필자가 분석을 해 졸필을 올린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김도경님과 평론가님께서 이 도자기가 중앙박물관에 산수인물무늬 편호 (13세기추정)라는 이름으로 1919년에 구입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당시 여러 이웃들께서 '누교'라든가 '사량이냐 오량이냐'등 고견을 주셨는데 본 그림만으로는 확인할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평론가님께서 이 청자의 다른 면에 묘사된 건축 그림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발견됩니다.
이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앞그림의 정면을 묘사한 것으로 (앞그림이 측면이 됩니다) 보이는데, 다른 건축을 묘사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는 '풍탑'이 윗층과 아랫층으로 보이는 처마끝에 모두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복층구조의 건축을 묘사한 것일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런 식의 중첩되는 처마형식의 건축이 분명 있었을 거란 것입니다. 이 건축은 이전 고려시대 누관(樓觀)의 모습 (고려도경 그리고 청명상하도)글에서 소개한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의 송도기행첩 (1757년)의 개경 남대문 거리 확대부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저 청자가 13세기것이라면 고려도경의 묘사와는 100년정도 차이가 납니다. 강세황의 그림은 1757년, 거의 500년후의 회화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연결점이 보인다면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路傍家樓

13세기 청자라면 당대의 기록을 한번 볼까요. [고려사] 충렬왕 3년, 즉 1277년 (13세기중후반)의 기록에 다음의 중요한 기록이 전합니다.

고려사 
충렬왕 정축 3년, 1277년
가을 7월.
갑오일. 공주가 행차할 때 사람들이 위에서 내려다볼까 우려해 길가 집들의 누각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원문을 보면, 아주 중요한 용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家樓" 라는 단어입니다.
甲午 以公主之行, 恐人壓見, 命撤路傍家樓.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명확히 길가의 '일반저택'의 높은 복층구조의 '누'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건축을 포함할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흔히 보는 조선시대의 낮은 정자형누각이나 사찰의 누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저택의 누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고려거리 상상도와 어느정도 비슷할수도 있겠지만, 오늘 청자와 송도기행첩의 가옥구조를 반영한다면, 오히려 아래의 명대객잔의 모습같은 건축도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엽壓라는 글자는 '숙이다'라는 의미로 壓見이라는 말은 몸을 숙여서 내려다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림 왼쪽의 남자처럼 말이지요.
명대-청대 객잔누각 (재현)
그 다음에 고려시대에 천문과 지리등을 관할하던 관후서란 곳에서 건축에 대한 제한을 건의합니다.

1277년
○ 관후서(觀候署)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삼가 『도선밀기(道詵密記)』12)를 살펴보면 ‘산이 드물면 높은 누각을 짓고 산이 많으면 낮은 집을 지으라.’고 했는데 산이 많으면 양기가 성하고 산이 적으면 음기가 성하며, 높은 누각은 양기를 이루며 낮은 집은 음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기 때문에 높은 집을 지으면 반드시 지기를 훼손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그 때문에 태조 이래로 대궐 안은 물론 민가에까지 모두 집을 높이 짓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조성도감(造成都監)에서 상국의 건축제도를 본 따서 몇 층이나 되는 누각과 높은 집을 지으려 한다 하니 이것은 도선의 말을 좇지 않을뿐더러 태조께서 정하신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행위입니다. 하늘의 강건함과 땅의 부드러운 덕성이 서로 갖추어지지 아니함으로써,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도리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 발생할 것이니 어찌 삼가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기록으로 고려시대의 건축이 500년간 어떤 제한을 엄격히 따랐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무신정권기에는 이런 규제는 가볍게 무시하는 대건축들이 들어섰었고, 공민왕대에도 3층누각을 짓는등 시대별로 여러 모습이 존재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 이전에도 통일신라시대 (834년)의 옥사조등 제한법이 있었지만, 9세기말-11세기에는 이런 법을 무시하는 규모의 저택들이 들어선바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옥사조의 등장은 역으로 그 전대의 금입택등의 호화주택의 규제를 위함이라 보고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 1157년 정함이란 귀족의 집은 200칸으로 궁전과 견줄 급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당장 위의 13세기 기록으로 보아도 최소 2층의 복층 樓형 생활건축들이 고려시대의 관도(공공거리)에 배치되어 있었음이 명확히 보입니다. 오히려 필자의 생각으로는 태조대의 일정기간과, 이 관후서의 제안을 따른 충렬왕대의 일부시기가 건축물의 높이를 엄격하게 규제한 예외적인 시기가 될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건축사에서 항상 '양'을 지양하고, '음'을 지향한 것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집니다. 이는 조선중기 문신인 민주면(閔周冕, 1629년∼1670년)의 동경잡기 기록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경주 안강현의 양좌동(良佐洞)은 바로 선생이 거쳐하셨던 곳이다. 그 동네 서쪽15리에 자옥산이 있으니, 선생이 별장을 짓고 유식(遊息)과 장수(藏修)의 처소로 삼은 곳이다. 거기에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관어대(觀魚臺), 세심대(洗心臺)등이 있는데 모두 선생이 이름을 붙이고 항상 소요하며 스스로 즐기시던 곳이다. 누를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니 청(淸)이라는 것은 기(氣)이고 기는 양(陽)이다. 이 누각에 오르는 자는 청을 받아들여 양을 보양하고 양을 보양하여 도(道)를 응결되게 함이 여기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즉, 관후서가 이야기하는 태조이래 높은 집을 짓게 하지 못했다는 말은 자신의 주장을 펴기위해 한 말로 보입니다. 당장 이보다 150여년전인 1123년의 고려도경에서도 거리의 누건축 모습이 이미 살펴보았듯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層樓高屋 (층루고옥)이란 말에서 내포하듯 2층보다도 (즉 기존에 존재하는 길가의 2층건축들보다 높은) 3층이상의 고옥들을 도성도감에서 마치 상국 (이때는 이미 북송은 예전에 멸망한 후로, 아마도 원을 뜻하는 듯)의 건축처럼 지으려 한다는 말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즉, '높은 건축'이라는 의미자체가 어느 정도의 고옥을 의미하느냐는 모르는 것입니다. 다음의 건축들이 원대의 '樓'들입니다.
아래는 강남 4대루에 들어가는 남송-원대건축인 7층누각 성황각
따라서 저 건의는 이런 정도의 '고옥'들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 일반건축의 '루'의 기록을 간략하게 쪼개서 소개해보면 어떤 느낌인지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12-13세기 
이규보 (李奎報, 1168년∼1241년)의 사륜정기 :
構屋於屋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謂之누(樓)라 하고 

12세기, 1123년 서긍의 고려도경 :
入宣義門。每數十家則建一樓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樓)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13세기, 1277년 고려사 :
命撤路傍家樓.
길가 집들의 누를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즉, 최소 11세기에서 13세기의 고려 개경에는 최소 2층의 복층 가옥누각들이 몇백미터에 하나씩은 지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또한, 오늘 소개해드린 13세기 고려청자 '산수인물무늬 편호'의 가옥과 후대인 17세기 강세황의 회화에 나오는 객잔형식으로 보이는 건축은 그 구체적인 형태들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족:
이 거리는 북경시에 원대의 건축을 명대-청대에 이어 건립한 전문대가(前门大街)라는 대규모 거리입니다. 3층이 대부분입니다. 
관심있는 분을 위해 다음글도 링크합니다.


* 거대건축카테고리로 묶기 애매한 건축들의 경우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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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5/03/03 08:04 #

    사학계적으로 건축은 아직도 밝혀질게 워낙 많아서 심심할... 일은 없어 보이네요 건축은 언제나 재밌어 보여요
  • 역사관심 2015/03/04 02:38 #

    결코 심심할 일이 없지요. 발굴하나가 어떨때는 건축사를 새로 쓰게 합니다 ^^ (거꾸로 보면 그만큼 모른다는 뜻...)
  • ㅇㅇ 2015/03/03 10:55 # 삭제

    고려 충렬왕 때면 몽고 침략이 수십년간 지속되었다가

    겨우 전쟁이 종결된 직후나 마찬가지인데

    당시 수도 개경 시가지에 누각들을 철거하란 얘기가 나올정도면

    고려의 전쟁 회복 속도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비교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네요

  • 역사관심 2015/03/04 02:39 #

    몽골침입시기의 건축소실과, 임란, 병란후의 건축소실을 비교파악하는 연구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이정도는 역사건축학계쪽에서 해야할 일 같은데 말입니다 (사료도 충실한 편이고).
  • 이 감 2015/03/03 20:07 # 삭제

    누와 정의 차이에 1층을 살림집으로 쓰거나 문으로 쓰거나 혹은 보일러실로 쓰던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도 들어있던 것으로 들었던 듯 합니다. (기억이 확실치 않네요.) 현대의 높은 건물을 마천루라고 하기도 하고...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층이나 삼층으로 지은 한옥이라고도 되어 있네요. ^^;;
  • 역사관심 2015/03/04 02:41 #

    확실히 살림집이 붙어있는 쪽이 (일반가옥의 경우) 고려대까지는 대체로 '누'로 불린 것 같아요. 네 말씀대로 표준국어에도 루가 정자형이 아니라 2층이상 집으로 되어 있어 놀랐습니다 (북한쪽에서는 아예 2층집을 루집이라고 하더군요).
  • Cheese_fry 2015/03/04 06:29 #

    굉장히 특이한 청자네요. 윗부분도 금속?재질의 흙인 것 같고 그림도 독특해서 연구 가치가 커 보여요. 전반적으로 고려시대 문화가 더 풍성하고 너그러웠던 것 같아요. 조선시대도 제가 보기에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검박함을 강조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 역사관심 2015/03/05 14:09 #

    동감합니다. 일반적인 청자와도 좀 달라보여요 (저는 도자기쪽은 문외한에 가깝습니다만;;). 삼국-남북국(통일신라)-고려대의 문화는 확실히 조선시대 후기보다는 자유스럽고 화려합니다. 이건 부정할수 없는 팩트죠. 임란이후에도 물론 화려함이 돋보이는 탱화도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들이고,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소박미'와 '담백미'라는 것을 중립적으로 한번쯤 되돌아 볼 시점도 되었다고 판단해요. 어떤 시대가 낫다는 것이 아니라, 즉, 중립적으로 '한국적인 미'라는 것이 선각자인신 최순우선생이나, 일제시대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야기하는 조선후기의 담백미로 대변될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저는 반대하는 쪽입니다 (감히).

    즉, 절대적인 유산의 숫자와 20세기의 접근성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점이지요. 최근들어 해외에 산재해있는 고려대의 유산들이 조명되면서 사실 화려함과 담백미 양쪽을 모두 한국의 '미'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보입니다. 조선의 미는 조선의 미로 (전기 후기를 나눠야 한다면 나누고), 고려의 미는 고려의 미로, 삼국의 미는 삼국의 미로 정당하게 발란스를 맞춰 그것들을 통합하는 새로운 한국의 미학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시가 한 예입니다: '소박미' 편견깨는 화려한 공예전 (2013)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118217&cloc=olink|article|default

    이게 뭐가 중요한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흐름'이 실질적인 '힘'과 영향력을 어마하게 가지고 있으니까요. 국내의 기존시각이 바로 해외에 그대로 반영 (당연히), 조선후기의 미학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한국의 미는 중국-일본의 '가운데 끼어있는' 어정쩡한 다리역할로 본다거나, 단지 이미지가 아니라, 국내에서 어떤 유적이 발견되었을때 우리측 기존학자들의 선입견으로 많은 것을 놓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예를 들어 대전의 고려의 추정 대저택이 2-3년전 발굴되었을때, 처음에는 형태로 보아 고려대저택같은데 이런 규모의 저택은 있을리가 없으니 이건 관아나 사찰일 것이다 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관아-사찰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요, 지금 관아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양산, 재건이나 재현시 전문가집단마져도 건강하고 통시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우를 낳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이어령선생의 '축소성의 지향성'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학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 정도입니다. 고건축학계만 보면 일본은 결코 축소지향의 나라인 적도, 진행형도 아닙니다).

    당장 월정교 복원만 해도 일부언론에서는 너무 화려한거 아니냐, 너무 크다 식의 웃기는 이야기를 기사화하고 있더군요. 조선시대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이웃국들의 양태를 비교해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발굴기록으로도 월정교 크기는 저 크기입니다- 현재의 '광진교'와 같은 규모입니다). 통일신라당대의 당,송, 그리고 일본의 건축양식을 보면 현재의 월정교는 오히려 얌전한 편인데도 말이지요, 오히려 단청등 세부적으로 뜯어봐서 삼국의 양식미를 얼마나 구현하고 있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기자중 김태식기자외에 이런 걸 제대로 볼 수 있는 문화부 기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이러한 '고고한 조선선비의 질박함 소박함'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인해 문화컨텐츠의 이용에도 어떤류의 '엄숙함'이 사회분위기를 지배하는 것도 무시할수 없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망가, 뮤비, 가벼운 축제에 입는 현대식 전통의상, 그리고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지만 겉은 전통식인 재현되는 건축들같은 것들이 쉽사리 시도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쓰다보니 또 이런;;)
    예전에 제가 쓴 관련글 두어 편만 링크해드리고 물러갑니다~.
    http://luckcrow.egloos.com/2231616
    http://luckcrow.egloos.com/2443707

  • 이 감 2015/03/05 01:13 # 삭제

    주둥이의 황색부분은 결손된 부분을 보수한 것입니다.
  • 역사관심 2015/03/05 02:09 #

    이 감님> 그렇군요. 역시 -_-b 감사합니다.

    Cheese_fry님> 참고로 고유섭, 조지훈선생 역시 이런 식의 담백미, 자연미, 소박미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조지훈선생의 경우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6세기의 신라불상에서 '소박'웅건 (이게 무슨말인지)한 기상이 보이며, 고려청자는 '중국의 장대한 패기와 일본의 가벼우면서 영리한 미학의 '중간'에서 소박하고 꾸밈없는 특점과 매혹이 있다. 고려의 사상적 특징은 허무와 낭만이며, 거기에서 '자연한' 인공의 극치인 공예미술이 나왔다.

    정말로 어떠한 '관'이 무엇을 볼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소박 웅건' '자연한 인공'같은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상충적인 단어를 볼때면 제가 현상학을 좋아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하며 선각들의 한국미에 대한 고찰과 그 업적은 당연히 인정하고 존경하지만, 이런 '통시적 고찰'만큼은 개인적으론 절대 동의할수 없는 의견들입니다. 애시당초 어떤 문화권의 통시적 문화를 몇몇 형이상학적 단어와 담론으로 규정지으려는 시도자체를 무리수이자 현실적이지 않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끄적인 단상 한가지를 덧붙입니다: http://luckcrow.egloos.com/2482221
  • Cheese_fry 2015/03/05 04:01 #

    링크해 주신 글들하고 기사 잘 봤어요. 금은보화(!) 전시라니... 놓쳐서 아깝...ㅜㅠ 전 도자기, 공예품, 그림 류를 특히 좋아하거든요. 얼마전에 샌프란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서 청대 자개장하고 탁자를 감상했는데 참 즐거웠어요. 고려시대는 북송하고도 겹치니 당대에 아쉽지 않게 문화가 발전했을거라 생각은 합니다. 하긴 유럽으로 치자면 중세이니까, 고려시대의 문화가 많이 안 알려진 점이 납득 안 가는 건 아니지만요...

    그런데 '소박웅건'. '자연한 인공'이라니... 알쏭달쏭한 말씀이네요. ㅎㅎ 제 생각에 신라 불상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맛이 있지요. 특히 동시대 일본 불상들과 비교해 보면요. 고려시대로 가면 점차 넉넉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한 듯 하고요. 한 시대를 꿰뚫는 시각이 매력적이긴 하지만,역시 무리수겠죠.

    이 감님/ 윗부분은 보수한 부분이군요. 예전에 금속 성분이 들어 있는 흙을 섞어 구운 자기를 본 적이 있어 엇비슷하다 느꼈는데... 그래도 자연스레 잘 보수한 걸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대영박물관에 있는 고대 그리스 토기는 정신이상자가 와장창 깨먹은 걸 하나하나 장인의 정신으로 붙여 놓았던데... ㅎㅎㅎ
  • 역사관심 2015/03/05 04:32 #

    그렇지 않아도 올려주신 포스팅 (박물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말씀처럼 저 공예전도 '리움박물관'주최였습니다. 멋진 곳이에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평론가 2015/03/04 11:21 # 삭제

    공민왕때에도 3층집을 지은적이 있었나요?
  • 역사관심 2015/03/04 23:57 #

    관음전을 말한 것인데, 음 사실 관음전은 '누'라기 보다는 사찰 전각이므로 엄밀히 말해 문맥상 어울리지 않기는 합니다. 생각해봐야겠네요.
  • 응가 2015/03/08 14:58 # 삭제

    구한말 사진중에 한양과 개성, 평양같은 큰도시를 찍은 사진중 몇몇사진에서는 대로변의 적산가옥이아닌 2층건물들이 심심지않게 보입니다. 한번 잘 찾아보십시오.
    평양의 2층한옥: 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7gu8&imgurl=http://cfile232.uf.daum.net/original/17508F3950136C0629FBE0
    > 대동문과 연광정말고 작지않은규모의 2층건물이 보입니다.
    한양의 2층건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04522&cid=51267&categoryId=51267
    > 고종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청나라양식 건물옆에 2층건물이 하나 있는데 용마루를 보면 한옥이 분명합니다.
    http://blog.naver.com/lnn0909/80202096229 >13번째 사진에 2층 상가건물이 하나 나옵니다.
    그리고 3층짜리 건물은 흔치않지만, 함경북도 온성의 수항루라고 3층짜리 누각이 하나 있습니다만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 응가 2015/03/08 15:09 # 삭제

    조선시대에 들어서 (정확히는 조선말) 다층건물들이 사라지게된 이유는 온돌때문입니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는 방한켠에 쪽구들을 두었는데 조선중기에 이르게 되면서 방전체에 구들을 놓게 되면서 지금처럼 낮아진것입니다. 온구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나무침상에서 잠을 잤고 겨울철에는 침상밑에 불을담은 그릇을 두고 잤는데 이렇게 지내면 건물이 아무리 높아도 무리가 없죠. 하지만 화재의 위험이 있다하여 바닥에 그냥 자게 됩니다.
  • 역사관심 2015/03/11 05:43 #

    아, 이런 사진들 그렇게 찾았는데 있었군요, 평양의 사진의경우 제가 찾은 녀석은 워낙 저퀄이라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혹시? 저거..란 생각이었는데 이 사진은 명확하네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제 소개해봐야겠습니다.
  • 응가 2015/03/17 17:38 # 삭제

    평양의 2층한옥으로는 이런것도 있습니다.
    http://cfile232.uf.daum.net/image/13612F104C2834366ABB9D
    1층에서는 장사를 하는것이 보편적인가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3/17 22:40 #

    아 귀한 사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혹 사진의 대강의 연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얼핏 보기에는 상점같기도 한데, 연대에 따라 혹 일본의 영향을 받은 2층 한옥상가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조선건축인지 중요한 정보인지라... 염치없이 여쭤봅니다.^^;
  • 응가 2015/05/20 20:09 # 삭제

    연대를 자세히는 알수없는데 일단 광무년즈음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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