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황사가 우리가 지금 보는 정도의 사찰이 아니었다는 것은 2000년대 들어 발굴소식이 알려지면서 이젠 꽤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2008년, 분황사의 사역이 바로 이웃한 황룡사와 거의 비근하다는 소식까지 알려지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신라시대 고대가람으로 알려진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대한 발굴조사 내용과 성과를 2008년 12월 12일(금) 14:00 현장에서 관계학자와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1990년부터 신라시대 사찰의 가람배치와 그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경주시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에서는 석탑 북쪽에 삼금당(三金堂)이 ‘품(品)’ 자형으로 배치된 소위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창건 가람을 확인하였다. 이후 일금당(一金堂)으로 변모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배치를 이룬 중건 가람 등 3차례에 걸쳐 진행된 금당의 변천과정과 강당지(講堂址)를 비롯한 크고 작은 여러 건물지를 확인한 바 있다.
이번 발굴조사 지역은, 최근까지 분황사로 진입하는 도로와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신라시대 분황사의 중문지(中門址)와 남회랑지(南廻廊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 그 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1차 중건시기의 중문지를 비롯하여 남회랑지 등 대형 건물지 4동과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석축 배수로(排水路) 1기가 확인되었다.

아래가 발굴된 중문과 회랑지, 윗쪽이 현재까지 알려져 온 분황사 사역
중문지는 분황사 석탑에서 남쪽으로 30.65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문지는 전체길이 12.63m에 도리칸 3칸, 보칸 2칸 규모이다. 이는 가람의 핵심인 석탑 및 금당과 중문이 모두 남북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분황사는 전형적인 평지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문지의 양쪽에는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남회랑지가 확인되었는데, 보칸 2칸 규모의 복랑(複廊)구조이다. 서남회랑지는 동서 길이 62.89m의 범위에 19칸의 도리칸이 배치되어 있으며, 동남회랑지는 지금까지 5칸의 도리칸이 확인된 상태이다. 분황사의 가람배치가 남북중심선을 기준으로 좌우대칭형이라고 한다면, 회랑으로 둘러싸인 동서 너비는 138.4m로 황룡사의 176m에 버금가는 대규모 가람이다. 또한, 신라지역에서 밝혀진 고대가람 가운데 복랑의 구조를 갖춘 회랑은 지금까지 황룡사가 유일한 예였으나, 분황사에서도 복랑구조의 회랑이 확인되었다는 점은 품자형 삼금당식을 배치한 창건가람과 함께 한국 고대건축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실로 평가된다.
분황사는 언제 대사찰 시리즈로 다루고 싶지만, 현재 이러한 발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기다려 봐야 할 듯 합니다. 필자가 찾은 분황사의 전각에 대한 간접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분황사(芬皇寺)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선덕왕 3년에 세웠다.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있는데, 오금석(烏金石)이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끼는 빈 섬돌에 둘렀고 대[竹]는 처마에 스치우니, 경내(境內)가 청량(淸涼)하며 여름 더위 받지 않네. 중은 한가롭게 고아(高雅)한 웃음지며 누른 눈[黃眼] 돌리고, 손은 취하여 고담(高談)하며 붉은 수염 떨치네, 연꽃 핀 못에선 난 항상 혜원(慧遠)을 생각하고, 버드나무 선 문(門)에선 공(公) 역시 도잠(陶潛)을 잡아끄네. 술잔을 머금고 취하여 돌아갈 길 잊었는데, 쓸쓸한 저녁 볕이 발[簾]의 반쪽을 비추네.” 하였다.
고려중기 (12세기)의 문신 김극기(金克己)의 이 시로 분황사의 전각높이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대나무가 '처마'에 스친다는 문구입니다. 또한 아직 발굴된 바 없는 연지가 최소 하나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분황사의 상징인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탑의 원형에 대한 확실한 가설은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경주시청에서 소개하고 있는 문구를 들어보죠:
통일신라 이전에 세운 모전탑으로 원형은 5층인지 7층인지 9층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중에서 지금은 3층(국보30호)만 남아있다. 신라탑은 전탑양식이 유행하여 백제의 미륵사지 목탑구조 모방 전탑과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루었다. (출처- 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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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9층 석탑에 대한 사료 두점
동경잡기
<화주(火珠)> 분황사(芬皇寺) 구층탑(九層塔)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 반을 훼손하였다. 뒤에 어리석은 중이 개축(改築)하려고 하다가또 그 반을 훼손하고서 구슬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바둑돌 같고 빛은 수정(水精) 같았으며, 들어서 비추면 그 바깥까지 꿰뚫어 볼 수가 있다.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 는 솜을 가까이 대면 불이 일어나 그 솜을 태운다. 지금은 백률사(栢栗寺)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중기인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이 탑이 9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이 탑이 원래 9층이었음은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분황사라는 문구는 없지만, 아마도 이 9층전탑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료 한점을 찾았습니다. 바로 다음의 것입니다.
동사강목
무술년 경덕왕 17년(당 숙종 건원(建元) 원년, 758)
영묘(靈廟)에는 재앙이 네 번 있었고, 황룡사(黃龍寺)에는 큰바람이 불어 불전(佛殿) 하나가 무너졌고, 9층의 탑 둘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그 외에도 불사에 떨어진 벼락은 사적(史籍)에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이때에 이르러 또 벼락이 열 여섯 곳에 떨어졌으니, 이러한 것으로 본다면 엄한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도 이처럼 간절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동사강목]에 나오는 부분으로 8세기중반인 758년, 황룡사에 폭풍우가 와서 강풍에 금당 하나가 무너지고 (훗날 짚어보겠지만, 높이를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9층목탑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직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띕니다.
"9층의 탑 둘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둘이라뇨.혹시 번역자의 오류가 아닐까요? 사료를 직접 인용합니다.

분명하게 벼락이 구층탑 '둘'에 떨어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다음은 황룡사와 분황사의 지리적 위치입니다. 아시다시피 두 대찰 (분황사는 앞으로 저 규모보다 넓게 그려야 하지만)은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절들입니다. 참고로 2008년의 앞서 말씀드린 발굴중 두 사찰의 배수로가 서로 이어지고 있다는 새로운 내용까지 알게 되었지요.
이번 발굴조사 결과, 그 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1차 중건시기의 중문지를 비롯하여 남회랑지 등 대형 건물지 4동과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석축 배수로(排水路) 1기가 확인되었다.

배수로가 이어질만큼 붙어있는 두 대찰입니다.
필자 생각에 따라서, 황룡사 주변에서 어떤 또다른 9층급 목탑지가 미탄사등에서 발굴되지 않는 이상, 저 구절의 가장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은 황룡사 9층목탑과 바로 옆의 분황사 9층모전탑에 벼락이 동시에 떨어졌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정 아래 최근 문화재청에서 복원한 3D 분황사 경내의 모습입니다 (맨 앞사진 포함). 황룡사 전각보다야 작겠지만, 전각 역시 '처마에 대나무가 닿을 정도'는 되어 보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으로 9층의 모전탑이 서 있습니다.

복원된 분황사 중심사역 모습
그럼 9층짜리 분황사전탑은 몇 미터였을까요? 현재 3층짜리를 기준으로 탑신비례를 따져본 다음의 복원안을 보면 약 15.6미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분황사 3층모전탑과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소개한 필자의 동경잡기 기록이 분황사의 원래모습을 찾는 사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덧글
특히 동경잡기의 기록은 신라삼보라는 구절때문에 '황룡사 목탑'으로 보기에는 그 뒷문장, 즉 임진왜란때 반이 무너지고 (약 4.5층), 어떤 승려가 다시 반을 무너뜨렸다는 (2.7층) 구절이 더 결정적으로 분황사 모전탑의 형태와 맞아떨어진다고 (그리고 몽골침입때 전소된 황룡사 목탑으로 착각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경잡기대는 물론 임란때도 이미 목탑은 터만 남은 상태이니까요. 외려 삼보는 그냥 분황사 탑의 귀함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로 보입니다. 다만, 이 경우 분황사 탑의 왜란때 훼손기록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의 사료라고 하기엔 너무 최근 (구한말)의 자료긴 하지만 한가지를 더 첨부합니다. 장지연의 기록에 다음의 것이 있습니다.
韋庵文稿
芬皇寺九層塔
慶州 芬皇寺九層塔, 以小磚石築之, 恰如支那 西安府城外慈恩寺大鴈塔及薦福寺小鴈塔, 而善德王三年 (六三四) 建, 卽唐貞觀八年也, 我國最古建物, 其初層入口兩側, 刻仁王像, 又塔四隅, 配以石獅子, 皆唐式也。
高麗書畵
하지만, 말씀대로 아직 확정할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포스팅의 내용에 조언을 첨부해서 톤을 조절할 생각입니다. 감사드려요.
일본의 나가오카궁 http://kodai.exblog.jp/13848325/
http://pds.exblog.jp/pds/1/201012/20/10/e0080110_18502832.jpg
다시 검색해보니 칸이 두칸이면 그 사이 벽이 있든 없든 복랑이라 하나봅니다.
경복궁 근정전앞 회랑도 복랑.
http://blog.daum.net/bgony/15749926
그런데 위의 기록은 758년의 기록으로 718년의 기록은 포함되겠지만 868년의 것은 넣지 못하게 됩니다. 혹시 758년 이전에 황룡사 목탑에 한차례 더 벼락이 친 기록이 있을까요? 이 사실여부에 따라 글의 수정여부가 좀 달라지는 지라 혹 아시는 경우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임란 당시 유정 이라는 분의 '遊芬皇寺' 시에
"항사탑을 두고 사람들은 늘 구슬 빛을 이야기한다[珠光人說恒沙塔]"란 구절이 있는데, 임란 당시에도 전탑과 관련된 구슬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 시구는 동경잡기의 구슬 이야기를 뒷받침한다고 판단됩니다.
현재 이 자료를 번역 중이라 앞뒤 구절과 관련하여 좀더 살펴 해보겠습니다.
안정010-5588-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