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허리에 찬 선비들 (여말선초-조선후기) 역사

한번 고착된 '이미지'라는 놈은 그것이 하나의 인물이건 객체건 사회이건 참으로 바꾸기 어려운 놈입니다. 하지만, 또 어떤 계기로 인해 천천히 혹은 급작스럽게 바뀔 수도 있는 동물이지요. 
우리에게 조선시대의 선비라는 존재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많은 선입견이 있는데, 선비는 고려귀족처럼 대대로 이어지는 어떤 '계급'이다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선비는 칼과는 평생 인연이 없는 존재다, 특히 문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등등 여러 이미지가 있을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그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중)이 낯설게 느껴지고 속칭 '뻥'처럼 느껴지죠.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필자 역시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명한 남명 조식선생처럼 문인이 칼을 소지한 경우가 있다면 사료에 그런 묘사가 또 있지 않을까? 과연 '검'이란 건 국가에서 개인소지를 금했을까? 그렇다면 김홍도의 그림에 나오는 검을 방에 둔 묘사가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이 이 포스팅의 결과물입니다. 그럼 찬찬히 읽어주세요.

얼마전 (2014년)에 사실은 최초도 아닌데 언론에서 '최초의 조선선비의 검'이라고 소개한 검이 있었죠.
칼을 든 선비- 발견된 조선시대 양반검은 어느시대 것? (아래 검- 김천 성산 이씨 가문 전래)
통일신라~여말선초

우선 본포스팅은 '검을 소지한 문신'들의 모습에 집중, 사례의 역사적맥락이라든가 의의등은 생략합니다. 윗 링크 포스팅글에서 신라와 고려시대의 관료들의 칼을 찬 모습을 소개한 바 있는데, 다음의 부분입니다. 이 내용이 흥미로운 것은 문반 무반을 따지지 않고 검을 소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려도경
도필(刀筆)
칼과 붓의 집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그 만듦새는 세 칸인데, 그 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ㆍ방자(房子)ㆍ친시(親侍)가 그것을 찬다.

12세기초, 하위관리가 도필이라는 일종의 나무용기같은 걸 차고 다니는데, 아예 붓 한자루와 서로 길이가 다른 검 두자루를 꽂고 다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지응(祗應)이란 관리는 심부름을 다니는 하급관리입니다. 방자(房子)는 고려대에 중국의 사신일행이 머무는 사관(使館)에 속하여 허드렛일을 맡아보던 잡직이며 조선시대에도 관청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에 속합니다. 친시(親侍)는 궁중에서 사환 노릇을 하는 청년 혹은 남자아이를 말합니다. 이런 하위관직이나 하인들까지 칼을 차고 다닌 것입니다. 

그 바로 전대인 9세기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고운 최치원의 [양위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양위표 讓位表 (부분발췌)
말할 때에는 반드시 하늘을 두려워하고, 걸어갈 때에는 모두 길을 양보하였으니, 이는 대개 인현(仁賢)의 교화를 받아서 군자의 나라라는 이름에 실제로 부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에 새참을 내갈 때에도 변두(籩豆)를 갖추었으며, 장팔사모(丈八鍦矛)를 지게문에 기대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신라의) 풍속이 비록 허리에 칼을 차는 것을 숭상하긴 하면서도 지과(止戈)의 뜻이 담긴 무(武)의 정신을 참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897년 통일신라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최치원이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를 찬술한 것으로, 당나라에 바치는 글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당대에 얼마나 흔하게 지도층이 검을 소지하고 다녔는지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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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시대인 삼국~고려대의 경우, 얼마전 살폈듯 (앞으로 소개할 내용이 더 있습니다만) 승려들도 대단한 무술능력들을 갖춘 시대였습니다. 유교가 고려후기에 들어오긴 했지만, 역시 오늘의 '선비'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의 이미지죠. 그럼 여말선초부터 시작해서 연대별로 무인을 제외한 '문인'이 검을 소지한 모습들을 소개해 봅니다 (단, 첫번째 사료의 김인문은 무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은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김준 金俊 열전중
유종식은 별장 김인문(金仁問)의 집을 찾아가 벽에 걸린 활과 칼을 보고는 가져다가 어루만지면서, “그대는 대장부다. 지금 이 시절에는 이 물건으로 재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찌 아녀자들처럼 하잖게 살아가는가?” 하고 속을 떠보았다. 그러나 김인문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나오는 유종식(柳宗植)은 고려말기, 즉 14세기 중반의 인물입니다. 김인문 역시 그 신라의 유명한 무신이 아닌 고려대의 인물입니다. 제목인 '김준 열전'에서 볼수 있듯 이시대는 무인정권이 막장으로 치달을때인 무의 공포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유종식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죠. 

같은 고려말의 또다른 경우는 [동사강목]에 전합니다.

동사강목 
무진년 전폐왕 우 14년(명 태조 홍무 21, 1388)

염흥방이 승복을 받으려고 국문을 참혹하게 하였으나, 조반이 굽히지 않고 욕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국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와 나는 서로 송사(訟事)하는 자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염흥방이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 입을 마구 치게 하였다 (주: oh my...).

수일 후에 우(우왕)가 최영의 집에 가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하였는데, 이날 조반을 풀어 주도록 명하고 의약(醫藥)을 내리고, 마침내 염흥방을 순군(巡軍)에 내리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명철하시다.” 하였다. 우가 조반의 일곱 살 먹은 아이를 불러 그 아버지의 한 바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다만 칼을 빼어 시험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탐욕스러운 7~8인의 재상을 목 베어 나의 뜻을 시원하게 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기한(飢寒)에 이르리라.’ 하더이다.” 하였다.

조반(趙胖, 1341년~1401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입니다. 조선개국에도 일등공신인 이 사람은 문신이지만 원간섭기의 군기의 정사를 담당하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맡는 등, '무'에 관심이 많던 인물로 파악됩니다.


조선전기

이제 조선시대로 넘어가 봅니다. 첫 기록은 그 유명한 한명회로 [사가집]에 전합니다.

사가문집
비지류(碑誌類)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계유년(1453, 단종1) 10월에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하는데, 한두 명이 의구심을 품고 군중을 저지하는 자가 있자 공이 칼을 뽑아 들고 크게 외치기를“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은 사람이라면 면하기 어려운데,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그래도 헛되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감히 다른 마음을 갖는 자는 벨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드디어 원흉을 제거하였는데, 머리를 빗고 벼 사이의 잡초를 제거하듯이 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다.

한명회(韓明澮, 1415~ 1487년)는 소개할 필요없이 대부분 다 아시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죠. 이 양반이 칼을 뽑아들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기껏해야 '모사꾼'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런 기록을 보면 무도 갖춘 인물임이 드러납니다. [사가집]자체가 조선초기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글로, 완전히 동시대의 묘사이므로 믿을 만하다 생각합니다.

그럼 역시 같은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 자신은 어땠을까요?

사가집(四佳集)

말 타고 나가자니 진흙탕 길이 두려워 / 出門騎馬怕泥深
권문세가를 날로 심방하지 못하노니 / 不向權門日訪尋
칼 보며 술 마시면 한적하기 그지없고 / 看劍引杯閑寂寂
책 베고 환약 지어라 늙음만 엄습해 오네 / 枕書丸藥老侵侵
고독한 신세는 형체가 그림자 의지하고 / 伶仃身世形依影
전원에 돌아갈 일은 마음에게 말하면서 / 歸去田園口語心
요순 같은 임금 만들 꾀 없음이 부끄러워 / 堯舜慙無致君術
백발의 사업을 조용히 읊조림에 부쳤다오 / 白頭事業付沈吟

아예 집에서 칼을 음미하며 술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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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후대로 내려가 봅니다. 15세기후반부의 글입니다.

속동문선 서(序)
감구 유부 후서(感舊遊賦後序)
김일손(金馹孫)

또 순천부(順天府)의 학사(學士)인 주전(周銓)을 만났는데, 상냥하고 사람이 좋으며 학문이 넓고 시를 잘 지었다. 나는 차고 있던 칼을 주어 선물로 하였고, 주(周)는 책을 두어 가지 주어 나에게 보답했다. 주는 말하기를, “한림(翰林) 이동양(李東陽)이 문학과 명망이 높다 하므로 나는 주를 통하여 한번 방문하려 했으나 돌아올 시기가 촉박하여 되지 않았다. 그대는 마땅히 나를 위하여 주를 찾아 보고 그 말을 전해달라.” 하였다.

김일손 (金馹孫, 1464~1498).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입니다. 같은 학자인 '주전'을 만나서 마음에 들자 그에게 '차고 있던 패도'를 선물하고 교환물로 책을 받는 모습이죠. 이런 모습을 보면 조선전기까지 이런 선비의 '패도'가 문인들끼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추론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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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6세기초로 갑니다.

기묘록보유중
사화가 일어나던 날 숙직하였는데, 밤 이경에 정원 서리(書吏)가 말하기를, “재상 두어 사람이 가만히 영추문(迎秋門)으로 숨어 들어왔고, 근정전(勤政殿)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에워싸고 서 있습니다.” 하였다. 숙직하던 승지 공서린(孔瑞麟)ㆍ윤자임(尹自任)ㆍ한림 이구(李構)와 함께 합문(閤門) 밖에 나아갔다. 

잠깐 뒤에 내수(內豎)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成雲)을 부르니, 성운이 칼을 차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공이 붓을 쥐고 쫓아가니 신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잡인(雜人)을 금단하라고 하였다. 공이 성운의 띠를 거머쥐고 들어가려고 하니, 문지기가 공의 손을 쳐서 떼어 놓고 함께 붙들고 나왔다. 

이것은 그 유명한 1519년의 기묘사화를 기록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칼을 차고 빨리 움직이는 인물은 무인이 아니라 조선중기의 문신인 성운(成雲, ? ∼ 1528년)입니다. 

임진왜란의 시대인 16세기말은 어떨까요. 계곡 장유(張維, 1587년∼1638년)는 조선중기의 문신입니다.

계곡집(谿谷集)
내가 우연히 삼인(三寅)의 단검을 얻었는데, 삼인이라 함은 대체로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그 검이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는 삼인검은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물리쳐 준다고 하기에 내가 그 검을 사랑하여 허리에 차고는 부를 지어 기리는 바이다.

장유선생은 삼인검을 자랑스럽게 허리에 차고 다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또다른 문신은 역시 자신의 칼로 자결을 시도합니다.

기언(記言) 
동계(桐溪 정온(鄭蘊))를 곡하며

세 차례나 간언을 올렸지만 공의 말씀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황 또한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공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였으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은둔하여 일생을 마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 그 의리가 밝고 그 뜻이 순결하며 그 행위가 청렴하여 성인의 깨끗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니 공이 수립한 것은 거의 일월과 그 광채를 다툰다 할 것이다.

정온(鄭蘊, 1569-1641년)은 계곡 장유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입니다. [기언]은 본인의 문집으로 조선 시대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 1595~1682년)이 편찬한 책입니다. 정온은 선조에게 간언이 먹히지 않자 자산의 검으로 자결을 시도합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같이 '허리에 차고'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집안에 보관하던 검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소지하고 다녔음이 드러납니다.

동계집(桐溪集)
윤승해(尹承解) 묘지명
충의위(忠義衛) 윤공(尹公) 묘지명 병서(幷序)

공의 휘는 할(劼)이고, 자는 자고(子固)이고, 성은 윤씨(尹氏)인데, 고려 개국 공신 신달(莘達)의 후손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倭賊)이 재차 쳐들어올 때를 당하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 상국(李相國)이 왕명을 받고 남쪽 지방을 체찰(體察)할 때에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세 고을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로 삼았다. 

성을 넘을 당시에 어떤 사람이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서 다리에 중상을 입자, 공이 그에게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다친 부위를 찌르라고 신속하게 명하였다. 이에 피가 흐르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었다.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추격하는 적들이 지척에 있어서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려 있는데도 소리만 들리고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태연히 그 목숨을 살리고자 하였으니, 대개 공이 평소에 마음 씀씀이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같은 정온(鄭蘊, 1569-1641년)의 문집인 [동계집]에 실려 있는 윤승해 (1534~1607년)라는 인물의 비석명으로 1597년 정유재란대의 기록묘사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나오는 윤승해라는 사람은 과거를 통해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방유지'입니다. 황석산성전투의 묘사인데, 다른 고을의병이 쓰러지자 허리의 칼을 뽑아 응급조치를 하는 장면이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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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대이나 조금 더 후대인 병자호란대의 기록입니다.

동춘당집 
행장(行狀)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奉常寺正) 죽창(竹窓) 이공(李公) 행장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군께서는 필선 윤전(尹烇), 주부 송시영(宋時榮) 등 두 공과 더불어 스스로 처신할 방법을 상의하셨는데, 송 주부가 “우리가 이런 꼴을 보리라고 어찌 짐작이나 했던가. 어제 죽지 않았다가 오늘 적의 핍박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윤 필선이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가리키며 “이것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라고 하니, 부군께서 “우리는 평소 고인(古人)의 글을 읽은 사람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를 당하였으니, 신하로서 살기를 바라겠는가. 어젯밤에 소나무 사이에서 자결하려 하다가 하리(下吏)에게 들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라고 하셨다. 

역시 허리에 칼을 차고 있던 이 윤전(尹烇 1575∼163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적병과 교전하다 살해당합니다.


조선후기

이제 조선후기인 18세기로 가 봅시다.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이때 사천(四川)의 거인(擧人) 한 사람이 있다 말하기를, “우리 고향은 아직 태평하지 못한걸요.” 하자, 좌중 사람이 눈을 흘기며 말을 막는 자가 있으므로, 그 사람은 뒷짐을 지고 가 버렸다. 최생의 나에 대한 대접이 심히 후하므로, 우리나라 필묵(筆墨) 및 남포연(藍浦硯) 1개를 선물로 주고, 또 찬 칼을 끌러서 주었더니, 최는 항주에서 나는 비단부채 한 자루로써 답례하였는데, 초화(草花)와 협접(蛺蝶)을 그리고, 화리(花利)로 자루를 만들고 만(卍) 자의 문금(文錦)으로 변(邊)을 꾸몄다.

유득공(柳得恭, 1748~ 1807년)은 유명한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신입니다. 1801년 사은사일행으로 중국에 다녀온 그가 사천지방에서 답례를 하는 모습인데, 중국의 '최생'이라는 자의 호의에 본인 허리에 찬 칼을 선물하는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선비들이 칼을 차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산시문집 유사(遺事)
방친(旁親)의 유사

또 그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을 때 장복상(張福尙)이란 자가 있었는데. 공은(公銀) 1만 냥을 축내었다. 마땅히 사형감이었으나 그는 성격이 호협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서도(西道) 백성들이 다투어 저마다 그의 죄를 대신 받으려고 하였다. 공이 그를 위해 주장에게 고하여 자기의 봉급을 모두 털어 그것을 보상케 했으나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자 서인(西人)들이 다투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칼자루를 장식한 테두리를 떼어 내놓았고, 아녀자들도 가락지를 벗어서 던져 주었다. 잠깐 사이에 은(銀)이 모자라는 양만큼 채워져서 장복상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성명(姓名)이 진신(縉紳) 사이에 알려져서 무릇 안절사(按節使)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다투어 공을 보조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다산시문집]의 기록으로 여기 보면 아주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장복상이라는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평소 베풀기를 잘한 덕으로 평양의 백성들이 그를 구제하려 하는데, 서인(西人)들이 다투어 각자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그 칼자루를 장식한 테두리를 떼어 기부했다는 장면이 나오죠. 흥미롭게도 동인보다 온건파인 서인들조차 칼들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이 칼들이 고가의 장식을 한 작품들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의 시대면 이미 서인들은 송시열이후 힘을 잃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장복선'이란 사람 역시 조선의 협객입니다. 이수광이 지은 잡인열전을 보면 평양기생들조차 노래를 지어 이 사람을 풀어달라고 하죠. 무려 백여명이 몰려와서 이런 노래를 합니다.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장복선을 용서해 주시기를 만 번 이라도 비나이다(萬 乞饒 張福先)
미동 어르신, 채 판서님(美洞爺爺蔡尙書)
저 장복선을 용서해 주사이다(彼張福先乞饒全)
장복선을 용서해 주시면(張福先如得饒)
한양에 올라가셔서 정승이 되오리다(此回知登上台筵)
만약에 그리 되지 못한다 하여도(上台筵雖未筵)
고운비단 댕기를 맨(剪板樣子錦唐)
젊은 첩을 무릎 앞에 앉히리다(得小郞君在膝前)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장목선을 용서하여 명대로 살다 죽게 용서해 주사이다(乞饒張福先 終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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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로는 가장 후대이나 글의 흐름상 우선 19세기로 갑니다. 이번에는 정약용의 제자입니다.

심전고(心田稿) 
응구만록(應求漫錄)

이중봉(李中峯)의 이름은 진예(辰豫),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사람으로 기묘년에 과거에 올랐으며, 30세의 젊은 나이에 영명을 날리고 있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며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쓰는데, 이월정(李月汀)과 일가 형제이다. 그때, 운루(雲) 박재굉(朴載宏)이 나와 같이 갔었는데, 마음이 서로 가장 잘 맞아서 이중봉이 운루에게 작별시를 주었다. 술을 마시며 매우 즐거워하면서 운루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선사하니 이중봉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서로 사귀는 데 있어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겼고 물건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운루가 말하기를,“한 사람의 좋은 벗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인데, 어찌 주고 안 주는 것을 말하겠소.”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 '박재굉(朴載宏)'이 이중봉이라는 선비에게 허리에 찬 검을 선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조선초기에도 나왔던 장면이죠? 선비들끼리 이런 검의 교환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에서도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18세기의 '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소개합니다. 

無名子 무명자집 
칼〔買刀說〕

작은 칼 한 자루를 행상한테 샀는데, 모양이 매우 질박하고 날이 지극히 무디었으며 물건을 베어 보면 이가 빠지거나 날이 휘어 버리니, 천하의 조악한 물건이다. 소꼬리로 칼집을 만들어 띠에 차고 다녔는데, 길손이 하찮게 깔보며 말하였다

“어디에 쓰려고 이런 걸 사셨소? 심하구려, 칼 보는 눈이 이렇게도 없다니. 물건 입장에서는 다행 반, 불행 반이구려.
만약 이 칼이 안목 있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가차 없이 버려졌을 것이니 어떻게 사람한테 쓰일 수 있었겠소? 안목 없는 사람을 만난 덕에 사람한테 쓰이고 게다가 귀중히 다뤄지기까지 하니, 칼이 운이 좋아서 그대를 만난 것이외다. 반대로 이 칼이 그대를 만나지 않고 농부나 장사치 손에 들어갔더라면 그들한테 잘 어울렸을 것이니, 칼의 입장에서야 어찌 그 편이 더 큰 행운이 아니었겠소?

지금 그대가 이 칼을 집 안에서 차고 있으면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불편해하고, 밖에서 차고 돌아다니면 보는 이들이 다 비웃으면서 한편으로는 대장장이의 형편없는 솜씨를 탓하고 한편으로는 그대의 무지를 비웃을 것이오. 이렇게 보면 칼이 그대를 만난 것은 불행이라 할 것이오.” (주: 이 장면을 보면 선비가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칼'을 소꼬리칼집따위에 넣고 다니는 것을 비웃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자랑하는데, 칼자루를 무소 뿔로 만들고 칼집을 은으로 장식하여 겉모습이 사람의 눈을 놀래기에 충분하였다. 칼을 한번 뽑아 닦아 보니 서리 같은 광채를 뿜어 달빛 같은 빛을 내었고, 치켜들어 겨누어 보니 서슬 퍼런 기운이 교룡을 베고 옥을 자를 듯하였다. 참으로 내 칼과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주: '길손'이라는 사람이 선비인지 중인인지 천민인지 알 길은 없으나 주인공(선비)과 나란히 동등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 (그리고 특히 칼을 빼들기까지) 같은 신분인 양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말하였다. “그대의 칼은 참으로 보검(寶劍)이오. 그러나 쓸모가 없으니 쓸모 있는 내 칼만 못하오. 그대는 훌륭한 칼을 좋아할 줄만 알고 사람마다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이 따로 있음은 모르는구려. 또 그대는 칼을 볼 줄 모르는 내가 안목이 없다는 사실만 알고 칼을 잘 보는 그대가 안목이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소. 그대의 칼이 보검이긴 하나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외다.” 

길손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칼의 쓰임새는 사람에게 달렸지 칼한테 달려 있지 않소. 그래서 옛사람은 칼을 논할 적에 천자의 칼, 제후의 칼, 서인(庶人)의 칼을 구별하였소. 지금 그대가 그 칼을 쓰려 한다면 장차 어디에다 쓸 수 있겠소? 내 칼의 쓰임 정도에 불과할 것이오. 내 칼이 조악하기는 하나 내 한 몸이 쓰기에는 충분하오. 글을 쓸 적에는 종이를 자르기에 좋고, 텃밭을 가꿀 적에는 각종 열매를 따기에 좋소. 또 손톱을 깎거나 뒷간용 나무쪽을 다듬기에도 좋소. 이처럼 일상생활의 긴요한 용도에 족히 쓸 수 있으니 쓸모 있다고 하지 않겠소?

나는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어 성현의 도(道)에 뜻을 두고 문장을 배워 온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한 가지도 성취한 일이 없으니, 재주가 노둔하다 할 것이오. 그리고 활시위 하나도 잡아당기지 못할 만큼 힘이 약하고 큰 검에는 마음을 둔 적이 없으니, 천품이 졸렬하다 할 것이오. 그렇다면 큰 고래를 벨 수 있는 의천검(依天劍), 검광(劍光)이 두수(斗宿)와 우수(牛宿)의 자리를 쏘는 용천검(龍泉劍)이 있다 한들 나에게는 마치 궁녀가 창을 지니고 맹인이 거울을 지닌 것 못지않게 무용지물일 것이오. (주: 이 부분은 참 흥미로운데 문인임에도 활시위를 당기지 못하고 큰 검에 마음을 둔 적이 없음을 마치 "창피해 할것"이 아니라고 반론하고 있어, 많은 선비들이 역설적으로 장검등에 마음을 두고 있었음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의천검이나 용천검이니 하는 설명까지 문인이 하고 있죠).

더구나 지금은 명철하신 성상(聖上)께서 위에 계시어 팔도(八道)가 교화의 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소. 무력을 잠재우고 문치를 펴시어 무기를 녹여 버리고 갑옷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으니, 활과 검이 무기고(武器庫) 안에서 먼지만 수북이 쌓여 가고 늙은이와 젊은이 모두 뽕나무 아래서 김을 매고 있소. (주: 이 부분은 한국의 무기사에서 한번 살펴볼 장면같습니다. 저자의 생몰년도로 보아 아마도 정조대가 아닌가 싶은데, 거꾸로 말하면 그 전대까지는 활과 검이 무기고안에서만 잠자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 같은 태평성세에 사람들은 수고로움을 잊고서 즐겁고 평화롭게 지내며 도검(刀劍)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모르오. 오랑캐를 정벌하는 칼 울음소리와 초(楚)나라 성 위에서 태아검(太阿劍)을 휘두른 일 등은 문인의 한가로운 담소에나 끼어들 뿐이오. 지금 세상에 그대의 칼은 쓸모가 없으니, 일상적인 쓰임에 요긴한 내 칼보다 못하다 할 것이오. 그대가 만약 그런 줄을 알고도 그 칼을 차고 다닌다면 사람들에게 과시하여 남보다 좋은 패물(佩物)이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에 불과한데, 이 역시 옳지 않소. 만물은 실상이 있어야만 적합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쓰임새가 있어야만 아름다운 외관을 칭찬할 수 있소. 만약 실상과 쓰임새가 없는데 한낱 이름과 아름다움만을 취한다면 식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길손이 물었다.
“그대의 칼을 내 칼과 바꾼다면 어떻겠소?”

내가 대답하였다.
“원치 않소. 물건을 서로 바꾸는 것은 피차의 가치가 대등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농부가 곡식을 질그릇으로 바꾸어도 옹기장이에게 손해가 되지 않고, 옹기장이가 질그릇을 곡식으로 바꾸어도 농부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이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몸에 차고 다니는 물건을 서로 바꾸는 것을 보면, 남에게 좋은 물건이 있는 걸 보면 자기 물건의 좋고 나쁨을 헤아리지 않고 무턱대고 바꾸자고 하여 베를 비단으로 바꾸고 돌을 옥으로 바꾸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상대방도 담담히 받아들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더이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솔직히 말하지 않고 한사코 둘러댄다.’라는 경우요. 

나는 내심 이런 습속을 해괴하게 여겨 왔으니, 평소 다른 사람과 패물을 바꾸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소이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그대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물건을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물건으로 바꾸려 하겠소? 내 칼은 조악하기 때문에 다행히 나에게 쓰이고 있고, 그대의 칼은 훌륭하기 때문에 다행히 그대에게 쓰이고 있으니, 각기 제자리를 얻었다 할 것이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바꾸겠소?

값을 논한다면 내 칼은 그대의 칼을 쳐다볼 수도 없으니, 나는 그런 염치없는 짓을 할 수 없소. 쓰임새로 말하면 그대의 칼이 내 칼만 못하니, 바꾸기를 원치도 않소. 그대는 나를 위하여 사람들에게 그대의 칼 쓰는 법을 배우지 말고 나의 칼 쓰는 법을 배우라고 말해 주기 바라오.

길손은 묵묵히 부끄러운 기색을 띠더니 자기 칼을 들고 물러갔다. 이에 문을 닫고, 길손과 주고받은 말을 기록한다.
=====

이 '검'에 대한 이야기는 [무명자집]에 실려 있는데 무명자라고 하니까 필자미상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 '무명자'를 겸손하게 호로 삼은 18세기의 문인 윤기(尹愭1741~ 1826년)의 저작입니다. 글 내용이 말해주듯 '실학자' 성호 이익선생의 제자로 최근에야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긴 수필형태의 칼에 대한 글인지라 중간 중간에 의미있는 부분은 주석을 달아 보았습니다.

마무리

조선시대 선비하면 꼬장꼬장한 Nerd에 가까운 이미지가 대부분이고 대중적으로 그나마 알려진 문무를 겸비한 이미지는 검을 차는 것을 즐겨한 남명 조식(曺植,1501~1571년)정도인데, 이렇게 많은 기록에 무인도 아닌 문인들이 칼을 차고 있는 묘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참고로 남명선생은 경상감사 이양원이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남명선생의 검에는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으니 다음의 검명이 나오는 칼은 남명의 검입니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義內明者敬),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外斷者義)’.

작년에 발견되었다는 조선선비의 검 뉴스를 시작으로 학구적인 조선선비의 모습외에도 검을 즐기는 또다른 모습의 선비들의 모습이 활발하게 재조명되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한국언론에서 다루는 이런 그림 정말 싫군요.
===
사족:
예전에 조선자객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있는데, 그 글과 약간은 일맥상통하는 포스팅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전에 사진에 나오는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맹인검객이 휘두르는 '창포검'에 대해 살수집단인 '검계'와 연계해서 알아본 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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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5/03/14 08:55 #

    조선 선비들이 칼을 차고 다녔단 사실 자체는 알았는데 아거보니 무도 충분히 단련하였군요 거기다가 수필의 내용도 상당히 재밌고요 잘봤습니다
  • 역사관심 2015/03/16 07:59 #

    무를 단련한 경우도 있을것이고, 그냥 장식용으로 차고 다닌 분도 있을 것 같아요.
  • 이선생 2015/03/14 09:26 #

    과거에도 문무겸비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덕목이었나 보네요...
  • 역사관심 2015/03/16 07:59 #

    진짜 양반!
  • 아빠늑대 2015/03/14 10:10 #

    볼때마다 생각하는거지만 저 가문의 보도(?)는 정말... 후손들이 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보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꽁꽁 싸메다가 다 망가뜨려 놓은 것 같아서 가슴이 쓰립니다. 허긴... 주변에 그런식의 문화유산이 어디 한둘이라야...
  • 역사관심 2015/03/16 08:03 #

    그렇군요. 도검보존하는 법에 대해선 문외한인지라 잘 한건줄로만;
  • 존다리안 2015/03/14 10:27 #

    하긴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을 일컫는 거니까요. 무용을 갖출 필요도 있었겠죠.
  • 역사관심 2015/03/16 08:03 #

    그러게요. 실록등을 관찰해보면 적어도 세종대까지는 확실히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 뚱띠이 2015/03/14 10:51 # 삭제

    그러고 보니 옛날 전통때 동아일보 사설에 우리나라의 유수한 양반가에는 괜찮은 칼들이 많았는데 일제시대 일본애들이 싹쓸이를 해가 안타깝다는 사설이 있었지요....
  • 역사관심 2015/03/16 08:03 #

    또 그런 일이; 하여간...
  • 레이오트 2015/03/14 11:07 #

    활쏘기는 선비의 6가지 교양 중 하나라며 적극 권장했으며 심지어 왕도 엄청난 수준의 활솜씨를 보여주는 나라가 조선이라 활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별 큰 제재가 없지만 도검류의 경우에는 무과 시험 준비자가 아니면 잠재적인 반란집단으로 의심하다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네요.
  • 역사관심 2015/03/16 08:04 #

    활은 워낙에 다들 놀이로도 즐겼으니 왠만한 명사수들이었죠. 도검류는 규제한줄로만 알았는데 조사하면서 좀 놀랐습니다.
  • Scarlett 2015/03/14 11:50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필은 굉장히 흥미롭네요.
  • 역사관심 2015/03/16 08:04 #

    현대적인 느낌마져나죠 ^^
  • santalinus 2015/03/14 13:30 #

    원래 士는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거였으니깐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르네상스맨이죠. 무시무시한 넘사벽들...
  • 역사관심 2015/03/16 08:05 #

    전기까지는 확실히 그런 존재의 느낌이 많이 나는것 같아요.
  • 셰이크 2015/03/14 13:58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장복상의 이야기에서 서인은 당색을 말하는게 아니라 서도사람들이라고 보는게 자연스러울것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3/16 08:05 #

    아, 그런 측면이 있을수 도 있군요. 한번 생각해보고 첨언해봐야겠습니다 감사해요.
  • BaronSamdi 2015/03/14 14:37 #

    정말 통념을 깨는 이야기네요. 참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3/16 22:30 #

    사회적인 통념이란게 참 무섭죠. 그 통념을 만드는 많은 매체들이 뭔가를 만들때 먼저 최소한 공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구요.
  • 남중생 2015/03/14 18:15 #

    길이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차고 다녔다는 고려도경의 묘사는 굉장히 흥미롭군요. 일본 사무라이의 전통으로만 알고있었는데...
    그리고 삼인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연월일은 물론이고 "인시"에 만들기 까지도 했다는데, 이 "인검"은 광해군 때에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글을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위의 기록도 일치하네요! 아마 흰 수탉의 피를 담금질할 때? 쓴다던가 하는 꽤나 까다로운 제작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역사관심 2015/03/16 08:06 #

    삼인검이 광해군때 많았군요. 혹 그 글의 출처를 알려주시면 (언제라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남중생 2015/03/16 23:54 #

    제가 본 글의 출처는 아니지만, 이 논문집 pdf 파일의 67페이지(인쇄된 페이지 번호는 133)에 조선시대 인검에 대한 논문이 있습니다. 인시까지 맞추면 "사인검"이라고 했다는군요. 부록에 상당한 분량의 사료도 실려있으니 참조할만 하네요.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gunsa/EEB03062N.pdf
  • 역사관심 2015/03/17 01:28 #

    읽어보니 삼인검, 사인검 이 놈들은 많이 쓰일만한 물건들이군요. 다운받았는데 찬찬히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 남중생 2018/01/11 02:03 #

    이번에 글 쓰면서 삼인검 때문에 다시 한 번 찾았습니다~!
    "길이가 다른 두 자루 칼" 이야기가 오니처럼 뿔 달린 "고려 도깨비"와 겹쳐서 어른거리네요. 어쩌면 고려시대는 사극에서 흔히 그리는 "좀더 화려하고 불교적인 조선"이 아니라 일본에 가까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迪倫 2015/03/15 11:28 #

    역사관심님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고려시대에 좀 등한시하느라 고려도경을 제대로 안읽고 훑어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찬찬히 다시 읽어야겠다 싶습니다.

    칼을 차는 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도검착용을 금지시킨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사무라이 계급 이외는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금지 회수령을 내리고 했었지만 말입니다. 검은 원래 선비의 중요한 예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흥미있는 이야기들 찾아 소개해주신 것 잘 읽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3/16 08:07 #

    고려도경은 제게는 실록보다도 더 흥미로운 사료인데, 사실 좀 더 자세히 묘사되었으면 할때가 많습니다. 그림이 없는게 정말 한일뿐...
  • 이 감 2015/03/15 13:09 # 삭제

    고려시대의 도필의 칼이 검이라기 보다는 짧은 칼, 즉 패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붓과 함께 세트로 되어 있어서 칼도 붓 정도의 길이로 보이고 남자들이 차는 그 정도 길이의 칼은 패도죠. 유물로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패도는 조선시대의 패도와 달리 굉장히 화려한데요. 금은동 등의 귀금속을 타출기법으로 온갖 문양을 새겨 놓았죠. 물론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런 금속칼집의 화려한 고려 패도들은 귀족이나 고위 관리의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 역사관심 2015/03/16 08:08 #

    그럴수도 있겠네요. 바로 위에 달았듯 조금만 더 자세한 묘사 (길이라든가)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추후 교차비교가 가능한 사료가 나오면 한번 조사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 프랑켄 2015/03/15 23:20 #

    제 생각엔 검을 패용했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길다란 검이 아니라 현대의 나이프처럼 짧막한 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선비들이 무사도 아닌데 무게 나가고 휴대하기 힘든 검을 상시로 패용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품위유지라면 그 정도도 충분하니깐요
  • 역사관심 2015/03/16 08:31 #

    네 그런 경우도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선비는 단검이고 어떤 경우는 장검을 차고 다녔다고 보고 있습니다. 획일적인 길이와 형태라기보다는. 예를 들어 이런 경우를 보면 상놈이 장검을 들 정도니, 양반이라고 못찼을 것 같지는 않아요 (생각해보니 이 기록은 첨가해도 좋을듯 하네요).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3)
    6월 29일(정축)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비 옴
    흥화문으로 뛰어든 현수남을 법대로 찰추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병조가 아뢰기를,
    “방금 현수남(玄守男)이라는 한 상놈이 술김에 발광하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장검을 들고서 흥화문(興化門)으로 뛰어들 때 수문장(守門將) 신위망(申魏望)이 문밖에 나가 금지하자, 칼로 쳐서 그 손가락을 상하게 하였는데 금천교(禁川橋) 가에서 간신히 포박하였습니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법대로 찰추(察推)하게 하시고, 군사들이 저지하지 않고 지레 먼저 달아나 흩어졌으니, 모두 찰추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금부로 하여금 찰추하도록 하라.”
    하였다.

    학자인 김창협과 문인 권필의 시에도 장검이 나옵니다. 역시 첨언해봐야겠습니다.

    농암집-
    천운이 어이 그리 쉽게 트일까 / 天運詎能泰
    인사가 나날이 잘못되는 걸 / 人事日崩分
    탄식하며 외진 골짝 누워 있는 몸 / 太息臥窮谷
    백발만 하릴없이 어지럽구나 / 素髮空紛紛
    책상 앞에 장검을 어루만지며 / 摩挲倚牀刀
    남모르는 원한이 창공에 닿아 / 幽憤干靑雲
    독록이라 난세를 읊은 옛 노래 / 獨漉有遺亂
    그대 향해 구슬피 불러본다오 / 悲歌以向君

    석주집-
    술 취하여 이자선(李子善)에게 주다

    장검도 벗어 선뜻 주었나니 / 長釰脫相贈
    술잔 따위를 어찌 사양하랴 / 酒巵安足辭
    남아가 남에게 허락한 것은 / 男兒然諾地
    백발이 되도록 지켜야 하느니 / 頭白以爲期
  • ㅇㅇ 2015/04/23 08:15 # 삭제

    세 구멍에 칼과 붓이 들어가는 그런 것은 사무라이의 칼과 같은 것이 아니고 지금의 맥가이버 칼같은 다용도 패물이라고 보는 것이 알맞다고 보여지는군요.
    명칭이 기억이 안나나 휴대용 붓, 귀이개, 작은 칼 등이 묶음으로 되어 차고다니는 것이 있었다고 알고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4/23 08:18 #

    저도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검이 아니라 단검종류라고 생각되는데 다만 두 자루가 길이가 달라 하나는 좀 길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 ㅇㅇ 2015/04/23 08:21 # 삭제

    그리고 이 칼이라는 것은 동서 막론하고 그 자체로 상징적인 물건이었죠.. 메이스, 도끼, 칼, 창 등도 마찬가지였고..
    대표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에도 칼이 같이 그려져있고요..
  • 역사관심 2015/04/23 08:22 #

    그렇습니다. 문무를 고루갖춘다는 상징성으로도 쓰이겠지만, 그 자체가 권위의 상징이죠.
  • 덜 아름다운사람 2015/07/07 11:50 #

    혹시 별장은 무인 아닌지요?
  • 역사관심 2015/07/08 02:03 #

    네, 아마도 고려중기 김인문과 당시 중부녹사였던 (군자감소속) 유종식은 무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래서 김인문의 경우 무인이 아닐까 추정을 이미 적어두었지요. 물론 녹사라 해서 무조건 무과출신은 아닙니다만... 유종식의 경우 따라서 문무를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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