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축 (7)- 구체적인 고려시대 '누樓'의 모습 (중층과 벽) 한국의 사라진 건축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전통건축의 모습은 얼마나 될까요? 과연 한국의 시대별 건축의 다양한 모습을 얼마나 현대한국사회는 가시화해서 보여주고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누각'이라든가 '**루'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면 어떤 건축이 머리에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겁니다.
이것은 필자가 구글에 '한국의 누각'이라는 검색어를 통해 본 구글이미지검색의 일부입니다. '경회루', '영남루'등 한국의 현재 대표누각이라는 건축은 보통 이렇듯 조선시대의 '정자'의 개념을 확장한 형식의 마루를 높은 기둥으로 지탱하고 사방이 트인 건축입니다.

하지만, '누'라는 개념은 (다른 고건축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시대별로 그리고 장소별로 그 개념이 조금씩 다릅니다. 예컨대 중국의 누각이란 한국어 검색을 해볼까요?
전혀 다른 형태의 건축물이 사진을 채웁니다. 일본의 누각은 어떨까요. 역시 다른 결과가 나오죠.
이렇듯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인식적으로 박혀있는 '樓'라는 개념은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최근 필자가 알아 본 고려시대 '누' (누각, 누관등)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요. 즉, 고려시대 중기 기록인 '고려도경'의 발이 쳐진 2층이상의 가누 (저택의 누각)에서 여인네가 아래를 내려보는 장면이 쉬이 어떤 그림인지가 인식적으로 구현되질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하나 그 다양한 모습을 탐구해서 실체화시킬 필요가 있는데, 몇년전 좋은 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시대 누와 정에 대한 연구(2008, 이정미 & 한지만)이란 논문으로 이전 포스팅글들에 더해, 오늘은 이 내용에 필자가 개인적으로 찾아낸 사료를 더해서 좀 더 가시적인 기록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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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누樓

우선 예전에 소개한 바와 같이 이규보 (李奎報, 1168년∼1241년)의 사륜정기 기록에 다음과 같이 현재 조선시대 양식의 '누'와 '정'이 규모로만 구분되고 비슷한 확장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확연히 다른 정의가 나옵니다.

構屋於屋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謂之樓 누(樓)라 하고 

作豁然虛敞者 툭 트여서 텅 비고 허창(虛敞)한 것을 
謂之亭 정(亭)이라 하였으니 

이는 단순히 이 기록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정미와 한지만의 연구결과를 보면 '루'와 '정'의 고려시대 기록은 건축자체가 확연히 그 목적과 규모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루가 훨씬 크고, 그 구조도 틔여있는 (현재의 영남루같은) 정과 다르며, 1층도 기둥만 존재하는 정과 다른 경향을 보입니다.

사료를 하나씩 살펴보죠.

동국이상국전집 
몽설(夢說)

내가 3품~4품의 벼슬에 있을 때부터 늘 꿈을 꾸면 큰 누각(樓)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는 큰 바다였으며 물이 누각 위까지 올라와서 잠자리를 적시는데, 나는 그 속에 누워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6~7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깰 적마다 이상스럽게 여겼으며, 혹은 《주공몽서(周公夢書)》로써 징험해 보고서 마음속으로 서몽(瑞夢)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경인년(1230, 고종 17)에 와서 내가 아무 죄도 없이 위도(猬島)로 귀양 가서 나이 많은 어떤 사호(司戶)의 집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높은 누각(高樓)이 큰 바다를 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어 마치 훨훨 날아갈 듯한 기상이었고, 물이 헌창(軒窓)에까지 치밀어 올랐으니, 꼭 꿈에 보던 그 누각과 같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전일의 꿈을 징험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의 출세와 은퇴, 잘되고 못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모두가 모르는 가운데 미리 정해지는 일일 것이다.

당시에는 꼭 그 땅에서 죽으려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안 가서 서울에 돌아와 지위가 정승에까지 올랐으니, 이도 역시 하늘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갑오년(1234, 고종 21) 월 일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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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역시 이규보(1168년∼1241년)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아주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이규보가 꿈을 꾸는데 바다위의 누각(樓)위에서 잠을 자는데, 물이 올라차와 자신의 잠자리를 잠기게 한다는 것이죠. 이 기록이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고려중기 '누와 정'의 구분정의를 내린 이규보자신의 기록이기 때문인데, '누'라는 건물을 '집위에 집'이 있는 형태로 정의내린 본인의 기록이기에 현재 우리가 보는 위의 사진같은 건축을 이 기록에서 '樓'라고 이야기할 리가 없습니다.

원문을 보지요.

常夢坐一大樓上。其下皆大海也。水到樓上。霑濕寢席。予臥其中
請寄一老司戶之家。則有高樓正臨大海。翼翼翬飛。水亦將拍于軒窓。眞若夢所見者。

여기서 또 한가지 알수 있는 것은 '귀양을 간 섬'에 있는 지방공무원의 집에 조차 '대루'(큰 누각)이 있었을 정도로 고려대에는 '루'라는 형식이 흔히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위도(猬島)라는 곳은 전북 부안군 부안면에 있는 변산반도 옆의 작은 섬입니다. 이곳에 살던 바닷가 저택에 '대루'가 있었던 거죠. 
전북 부안군 위도(猬島)

이 누에 대한 묘사로, 翼翼翬飛, 즉 처마처마가 날아갈듯 하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가장 상층의 처마를 강조하는 것일수도, 혹은 중층에 모두 처마가 있었음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霑濕寢席, 침석을 적신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것은 寢席 침석, 즉 잠자리가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죠. 현재의 경회루같은 구조에 그냥 낮잠을 자는 용도라기보다는 어떤 구체적인 침실형태가 마련되어 있음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단어가 바로 軒窓 (헌창)입니다. '집의 창문'으로 해석할 수 있는 데, '창문에 까지 물이 차올라'라는 구절에서 적어도 1층이나 2층에 창문이 있는 사방이 막힌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추가 아닌데, 왜냐하면 다음의 기록에는 '벽'이란 단어가 분명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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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신청 [申靑] 
자신의 집에 거대한 누각을 지은 후 벽에다 금을 입히고 기둥에 붉은 옻칠을 하는 등 사치와 참월한 짓을 했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 죄입니다.

원문입니다.
家起大樓, 金畫其壁, 朱髹其楹, 奢僭類此, 罪七也
집에 대루를 짓고, 그 벽에 금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기둥에 붉은 옻칠을 하다.

旣而籍沒靑家, 撤其樓, 輸材瓦於崇敎池. 恭愍時, 授平壤道巡問使, 官累工部尙書樞密院副使.
신청을 순군으로 이감시키고 송명리(宋明理)·송팔랑(宋八郞)을 보내어 신청의 입에 분뇨를 발랐다. 뒤에 신청의 가산을 몰수하고 누각을 철거해 목재와 기와를 숭교사(崇敎寺)의 연못으로 옮겼다.

[고려사]의 이 기록은 1343년의 것으로 이규보보다 수십년 후의 기록입니다만, 굉장히 의미있는 기록입니다. 여기 보면 '신청'이라는 신하가 사택에 거대한 누각을 지었는데, 朱髹其楹, 즉 그 기둥에는 붉은 옻칠을 하고, 金畫其壁, 즉 그 벽은 금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붉은 색 기둥과 '벽'이 있었음이 명확합니다. 즉, 적어도 1층이나 2층, 혹은 양층 모두 사방이 벽으로 막힌 형태의 건축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대누각을 철거해서, 숭교사라는 절로 (개성에 있었습니다) 그 목재와 기와부재를 보냈다고 되어있죠. 개인적으로 찾아낸 흥미로운 사실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이 부재를 이용 또다시 숭교사에 '누'를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같은 해 1343년의 기록입니다.

고려사절요/권이십오/충숙왕/계미 4년(1343)

癸未四年(계미사년) 
계미 4년(1343)

대호군(大護軍) 박양연(朴良衍)에게 명하여/ 命大護軍朴良衍
숭교원(崇敎園)에 꽃나무를 심었다./ 種花木於崇敎園
이에 앞서 숭교사(崇敎寺)의 연못가에/ 先是就崇敎寺蓮池旁
누(樓)를 지어 잔치하는 장소로 만들었으니/ 起樓以爲遊宴之所
이는 폐신(嬖臣) 송명리(宋明理)가/ 嬖臣宋明理
권유한 것이었다. /勸之也(권지야)  

모듈식도 아니었을텐데 꽤 흥미로운 사실이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벽'에 대한 기록이 이색(李穡, 1328~1396년)의 [동문선]에도 전합니다.

동문선 
이색(李穡)
서경 풍월루 기(西京風月樓記)

금상 19년 가을 7월에, 개성 윤(開城尹) 임공(林公)을 안주(安州)의 장관으로 삼으니, 얼마 안 가서 군사와 정사가 다 잘 이루어졌으며, 그 해 겨울 11월에 서경 윤(西京尹 평양 부윤)으로 옮겨 중략.

이에 5월 첫 길일에, 영선점(迎仙店) 옛터에 자리를 잡아서, 기둥 다섯 개의 누(樓)를 짓고 도벽과 단청을 하였는데 다섯 달을 지나서 이룩되었다. 누를 바라보니 나는 듯하고 동남쪽 여러 산이 자리 아래에 있는 것 같으며, 강물이 그 앞을 지나간다. 좌우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니, 올라서 바라보는 좋은 경치는 부벽루와 서로 백중(伯仲)이 되겠고 화려함은 그보다 더 낫다. 이미 상당(上堂) 사람 승지(承旨) 한맹운(韓孟雲)이 크게 쓴 ‘풍월루(風月樓)’석 자를 얻어서 걸고, 또 한산 이색에게 기(記)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기하기를 아끼는 것은 내가 능히 내 누의 이름을 짓지 못함으로써 그런 것이다.

迺以五月初吉。卜地于迎仙店之舊基。作樓五楹。塗墍丹雘。五閱月而告成。望之翼如也。東南衆山。如在席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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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볼까요. 作樓五楹。塗墍丹雘. 즉, 다섯개의 기둥으로 된 누를 지었고, 단청과 벽에 색칠(塗墍, 도벽)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보는 '정자'의 확장형 건축이 아닌 벽으로 막힌 '누각'인 겁니다. 또한 부벽루와 비교하고 있지만, 현재의 부벽루 역시 393년 지어진 이후 (고구려대로 이때는 '영명루'였습니다. 12세기가 되서야 부벽루라고 바뀌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건되어 현재것은 18세기인 1714년 중건된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종대와 일제시대, 그리고 한국전쟁때 마다 새로 건축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14세기의 부벽루는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원래 고구려 영명사의 부속건축이었던, 즉 원래의 고대-중세건축의 '樓' 개념에 가까웠을 영명루시절의 부벽루가 12세기이후 18세기 재건될 당시의 흐름이 현재 **루라고 불리우는 한국의 건축모습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살필 수 있는 하나의 연구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1층은 온돌방

고려말 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년)의 [양촌집]에는 더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다음입니다.

양촌선생문집
금교역루기(金郊驛樓記)

전부터 객관(客館)이 있었으나 좁고 누추하며 낮고 습하여, 찌는 듯한 더위와 장맛비에는 답답증이 더욱 심하여 바람을 쏘일 곳이 없으므로 오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여겼다. 영락(永樂) 2년 가을 8월에, 나의 벗 대령(大寧) 최군 자고(崔君子固)가 문학(文學)과 재간이 있어 풍해도찰방 겸팔참정역사(豐海道察訪兼八站程驛使)로 뽑혀 팔참을 순시(巡視)하게 되었는데, 일에 임한 지 한 달 만에 섶[薪]과 꼴[蒭] 따위가 모여 쌓이고, 무릇 공비(供費)에 수응(酬應)할 것이 갖춰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말하기를,

“이 역참은 왕경(王京)과 가장 가깝고 사신 행차가 오갈 때 반드시 쉬는 곳인데, 마루와 지붕이 낮고 누추하여, 국가에서 중국 사신을 높이는 뜻에 맞지 않으니, 어찌 옛것을 헐고 새로 세우지 않겠는가.” 하고, 곧 나라에 계문(啓聞)하여 결정을 얻었었다. 이리하여 9월에 일을 시작하여 재목을 구해 들이고 기와를 굽되, 백성의 힘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농사철이 되기 전에 공사를 이루게 되었다. 

중앙에 당(堂)을 높이 세우고 좌우에 방[室]을 붙였으며, 바로 왼편 방 앞에 누각(樓閣) 세 칸을 세웠는데, 크고 높게 트였으나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으며, 그 밑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한서(寒署)에 쓰기 편리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2월 초에 끝났는데, 그해 여름에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이 누각이 비록 강이나 바다를 조망(眺望)할 구경거리는 없지만, 산과 구릉이 고리처럼 둘렀고 들과 언덕이 이리저리 잇달아, 갤 때면 좋고 비 올 적엔 기이한데, 아침 놀과 저녁 연기가 한없이 변하는 모양은 소인(騷人 문인)들에게 읊조리는 흥취를 제공할 만하고, 난간에 가득한 맑은 바람은 말발굽에서 일던 더러운 먼지를 씻을 만하고, 발[簾] 사이로 비치는 밝은 달은 손님 대접하는 자리의 아취(雅趣)를 돋울 만하니, 이는 기(記)가 없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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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고려말 金郊驛이라는 역참(객사)에 누각을 세운 기록인데, 객사 중심건물로 일단 중간에 堂 (집)을 높이 세우고, 그 집의 좌우에 室 즉 거실 혹은 방을 붙였는데, 그 왼쪽 방앞에 세칸짜리 누각을 세웁니다. 여기서도 고려대까지는 '누'라는 개념이 중국처럼 일단 '높이'가 있는 건축에 쓰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치스럽지는 않아도 '크고 높이' 지었다는 구절이 나오죠. 宏敞軒豁, 즉 크고 시원하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롭게도, 누의 1층에 '온돌방'을 만들어서 추울때 쓰도록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좀 보죠.
中高其堂。翼以左右之室。直左室之前。起樓三楹。宏敞軒豁。不侈不陋。下爲燠室。以便寒暑

起樓三楹 이란 건 말 그대로 하면 번역문처럼 누각 세칸 (혹은 세칸짜리 누각)이라기보다는 누각 세개를 세웠다는 뜻같은데 확실치 않군요. 楹 이란 글자는 기둥으로도 번역하지만 이런 경우 집을 세는 단위인 '채'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아무튼 더 중요한 건 이 구절 "下爲燠室". 즉, 아래(층)은 따듯한 방(혹은 집)으로 만들었다 라는 부분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유추하면 고려시대 '누' (객사건 저택이건)의 개념은 사방이 막힌 '건축'의 형태가 적어도 1, 2층중 한곳(혹은 양층 모두)에 구현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또한 '난간'과 '치는 발'도 있었음이 나옵니다 ('발'의 기록은 고려도경에도 나오죠).

1층이 온돌방인 기록외에도, 현재의 경회루같은 그냥 기둥아래 1층은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 치자면 '대형 주차장'으로 쓰인 기록도 있죠. 그 유명한 최우의 고려최대 누각 '우대루'이야기입니다.

동국이상국집
이것이 이제 승제(承制) 최공이 거대한 누각을 거실의 남쪽에 짓게 된 까닭이다.
누각 위는 손님 1천 명을 앉힐 수 있고 누각 아래는 수레 1백 대를 나란히 놓을 만하다. 
그것은 새가 날아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릴 만큼 크다. 
是今承制崔公之所以作大樓於居室之南偏者也。可以坐客千人。可以方車百乘。

이 기록은 앞선 글들에서 자세히 봤으니 각설하고, 다만 '상층에는 천명이 들어가고' '하층에는 수레 백대' (아마도 손님들이 타고 온)가 놓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과장이 섞인 표현일지언정, 현재의 경회루같은 형태의 건축을 천명이 들어가게 아무리 넓게 짓는다 할지라도 '새가 날아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라는 표현을 쓸리는 없다고 봅니다. 단순히 넓은 것이 아니라, 높이가 상당한 건축임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다음 기록은 더 흥미롭고 결정적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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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것으로, 고려시대 '누'는 단지 연회로 쓰일 뿐 아니라, '기거'가 가능한 건물이라는 기록입니다. 

동국이상국전집 
고율시(古律詩)

乾聖寺帝釋 殿主謙師所居樓。架蒲桃遮陽。賦者多矣。師請予次韻。 

건성사(乾聖寺) 제석전(帝釋殿)의 전주(殿主) 겸사(謙師)가 기거하는 누관(樓觀) 시렁[架子]을 만들고 포도(蒲萄) 넌출을 틀어올려 차양(遮陽)을 삼았는데 이를 두고 시를 읊은 이가 많았으므로 겸사가 나에게 차운을 청하다

시렁의 포도 넌출 이리저리 뻗었는데 / 架引蒲挑繞屋傍
처마에 눌린 낮은 난간 녹음이 시원해 / 壓簷低檻翠陰涼
가을 이전에도 구슬 같은 이슬 볼 수 있고 / 未秋先見團珠露
대낮에도 반 점의 햇빛 보이지 않으며 / 當晝猶無半縷陽
뒤쪽 넌출이 앞쪽 넌출을 부축하고 / 後蔓來扶前蔓倒
새 줄기가 묵은 줄기를 따라 자라네 / 新莖走趁舊莖長
잇닿은 옥 같은 열매 함부로 따지 마소 / 纍纍玉實休輕摘
달콤한 맛은 서리 흠뻑 맞아야 되네 / 甘脆偏須得飽霜

殿主謙師所居樓。전각의 주인인 겸사가 살고 있는 누에 
架蒲桃遮陽。시렁(긴 막대선반)위에 포도넝쿨을 올려 차양으로 삼다.

즉, 이 기록은 '벽'이 있는 모습에서 한차원 더 나아가, 정(정자)과 달리 그곳에서 숙박을 했다는 것으로, 중층의 제대로 된 (즉 사방이 트이지 않는) 주거형태의 건축일 가능성을 크게 높여줍니다. 물론 '경치'를 봐야하니 난간이 많이 돌출된 구조였겠지요. 그러한 난간에 햇볕을 막기 위해 포도넝쿨을 올려 차양을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2층에 사람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벽을 갖춘 건축임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누각'에 사람이 '투숙하며 머문다'는 기록입니다.


고려시대 누각의 높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가누' (저택의 누)라든가 바닷가 별장의 누각이라든가, 호텔(객사)의 누각이라든가, 왕의 누각이라든가 여러 형태의 고려누각이 있어 그 규모와 높이도 제각각입니다. 다만, 다음의 기록은 그 소규모 누지만 높이가 묘사되어 있어 재미있습니다.

익재난고
운금루기(雲錦樓記)
京城之南有池。可方百畝。環而居者。閭閻煙火之舍。鱗錯而櫛比。負戴騎步。道其傍而往來者。絡繹而後先。豈知有幽奇閑廣之境。迺在其間耶。後至元丁丑夏。荷花盛開。玄福君權侯見而愛之。直池之東。購地起樓。倍尋以爲崇。參丈以爲袤。不礎而楹。取不朽。不瓦而茨。取不漏。桷不斲不豐而不撓。堊不雘不華而不陋。大約如是。而一池之荷。盡包而有之。於是請其大人吉昌公與兄弟姻婭。觴于其上。怡怡愉愉。竟日忘歸。子有能大書者。使之書雲錦二字。揭爲樓名。余試往觀之。紅香綠影。浩無畔岸。狼藉風露。搖曳煙波。可謂名不虛得者矣。不寧惟是。龍山諸峯。攢靑抹綠。輻輳簷下。晦明朝夕。每各異狀。而嚮之閭閻煙火之舍。其面勢曲折。可坐而數。負戴騎步之往來者。馳者休者顧者招者。遇朋儔而立語者。値尊長而趨拜者。亦皆002_555c莫能遁形而望之可樂也。在彼則徒見有池。不知有樓。又安知樓之有人。信乎登臨之勝。不必在僻遠。而朝市之心目

서울 남쪽에 너비가 1백 묘(畝)쯤 되는 못이 있는데, 살림하는 여염집들이 빙 둘러 있어 즐비하고, 이거나 지고 타거나 걸어 그 옆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앞뒤에 연락부절한다. 어찌 뛰어나게 그윽하고 훤칠하게 넓은 지역이 이 안에 있을 줄 알랴? 

후(後)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정축년(충숙왕 6, 1337) 여름 연꽃이 만발했을 때에 현복군(玄福君) 권겸(權廉)이 보고는 사랑하여 바로 못 동쪽에 땅을 사서 누을 세웠다. 높이는 두 길이 되고, 연장(延長)은 세 발[丈]이 되는데, 주추가 없이 기둥을 마련하였음은 썩지 않도록 한 것이요, 기와를 덮지 않고 띠로 이었음은 새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서까래는 다듬지 않았지만 굵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며, 벽토는 단청(丹靑)하지 않았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대략 이러한데, 온 못의 연꽃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이에 그의 아버지 길창공(吉昌公)과 형제ㆍ인아(姻婭)들을 초청하여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화평하고 유쾌하게 놀아 하루 해가 지는데도 돌아갈 줄 몰랐는데, 대자(大字)를 잘 쓰는 아들이 있으므로 ‘운금(雲錦)’ 두 자를 쓰도록 하여 누각 이름으로 걸었었다.

나는 한 번 가보니 향기로운 붉은 꽃과 푸른 잎의 그림자가 가없이 펼쳐져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며, 연기 낀 파도에 일렁이어 소문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했다. 어찌 그것뿐이랴? 푸르른 용산(龍山)의 여러 봉우리가 처마 앞에 몰렸는데 밝은 아침 어두운 저녁이면 매양 형상이 달라지며, 건너편 여염집들의 집자리 모양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으며, 지거나 이고 타거나 걸어 왕래하는 사람들 중의 달려가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다보는 사람, 손짓해 부르는 사람과 친구를 만나자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 존장을 만나자 달려가 절하는 사람들이 또한 모두 모습을 감출 수 없어 바라보노라면 즐겁기 그지없다. 저쪽에서는 한갓 못이 있는 것만 보이고 누각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 또한 어찌 누각에 있는 사람을 알겠는가? 진실로 올라가 구경할 만한 경치가 반드시 궁벽하고 거리가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조정이나 시장에만 마음이 쏠리고 눈이 팔려 우연히 만나면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며, 또한 하늘이 만들고 땅이 숨겨 경솔히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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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익재난고]에 나오는 재밌는 기록으로, 100묘(畝) 즉 일만(10,000)평이 되는 못이 개성남쪽에 있는데, 이 호수(연못이 아니라 호수죠 이정도면) 동쪽에 권겸이라는 자가 '누'를 세우고 운금루(雲錦樓)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이 누각의 높이는 두 길, 즉 약 6미터이고 연장을 늘인 것이 9미터라는 해석이 나오는데, (수정) 확실치는 않지만 높이는 전장, 즉 지붕까지가 아니라, 지면에서 상층의 마루부분까지의 높이, 즉 누주(누각의 기둥)의 높이를 말하는 듯 합니다. 이 부분은 더 연구해야겠지만, 만약 누주가 6미터면 아주 높은 편입니다.
購地起樓。倍尋以爲崇。 

이 높은 누(루)에서 바라보는 호숫가 마을의 자세한 전경이 상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저쪽에서는 한갓 못이 있는 것만 보이고 누각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 또한 어찌 누각에 있는 사람을 알겠는가?"라는 구절은 이 누각이 꽤 먼거리 (즉 호수를 가로질러)에서 마을을 보고 있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또한 여기서도 또다시 '벽토는 단청(丹靑)하지 않았지만'이라는 '벽'의 구조가 나옵니다.

적어도 고려대에는 객사건 관아건 이러한 '높은 누(루)'를 중요시 여기는 장면은 자주 등장합니다. 여기 하나만 소개해 보지요.

동문선
영광 신루 기(靈光新樓記)
신전자 군(申展子君)이 영광(靈光) 군수가 되어 민폐를 없애고 인화(人和)로 인도하니 정무(政務)가 한가하였다. 공관(公館)을 둘러보니 누거(樓居)가 아직 없었다. 신군이 말하기를, “누거란 막히고 답답한 마음을 화락하게 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지, 미관(美觀)을 위하는 것이 아닌만큼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다. 중략.

나는 오직 왕인을 섬기는 예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너희 부로(父老)들은 누거 세우기를 도모하라.” 하였는데, 이에 여럿이 달려와 다투어 힘써서 재목을 모으고 공역을 다스려서 열 달 사이에 아름답게 한 고을의 훌륭한 집이 되었으니, 신군은 유능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영광이 신군을 얻음과 신군이 신루(新樓)를 지음이 옛날이 아니고 지금에 와서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대나무는 푸르고 연꽃은 향기로우며 산빛과 바다 기운은 멀고 가까운 데서 서로 비추는데, 물소리가 또 그 사이에서 들려온다. 무릇 이 누에 오르는 이는 그 일에 분망함을 잊을 뿐 아니나, 물 흐르는 소리가 없었다면 또 어찌 여기에 이르는 다행함을 얻었으리요. 진실로 그 경지가 기이하다. 

顧瞻館宇。樓居尙缺。
申君之作新樓。

'막히고 답답한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높은) 건축이 '누(루)'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관상' 만드는 것이 아닌, 이렇게 높은 곳에서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기능성 건축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사실 이 기록이 중요한 또 한가지 이유는 누거(樓居)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인데, 누거라는 말은 '높은 집'이라는 일반적인 뜻이 있습니다. 고려대의 누거가 어떤 뜻인지는 또다른 연구대상이겠지요. 사실 이런 '높이'를 강조하는 풍조는 고려말뿐 아니라 '조선전기'까지도 이어집니다. 다음은 15세기 서거정 (徐居正,1420~1488년) 의 [동경잡기東京雜記] 로 보는 당대 '누'에 대한 시각입니다.

동경잡기
거정(居正)이 젊은 시절 영남(嶺南)을 유람할 적에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성하고 화려함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가만히 생각건대, ‘경주가 주(州)가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00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 중에 어진 이가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가 몇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던 말인가.’ 하였다.

동도의 풍물이 아직도 번화하건만 東都文物尙繁華
다시 고루 일으켜 자하를 떨쳤네 更起高樓拂紫霞
성곽은 천년을 이은 신라 때 세웠고 城郭千年羅代樹
여염은 태반이나 부처 모신 집들일세 閭閻一半梵王家
구슬 발 다 걷으니 마치 그림 같은 산 珠簾捲盡山如畵
옥피리 불어도 아직 기울지 않은 해 玉笛吹殘日未斜
기둥에 기대 시 읊노라니 도로 우습나니 倚柱吟詩還自笑

중략. 경주는 곧 옛적의 계림(雞林)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산수는 빼어나고 풍경은 기절(奇絶)하며 옛 어진 이들의 유적이 많아서 멀리 유람하는 사람의 질탕(跌宕)한 기운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객관이 누추하고 좁은 것이다. 비록 의풍루가 있으나 사면의 처마가 낮게 처져 시루[甑] 속에 앉은 것 같아서 사람을 갑갑하게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 8) 겨울에 봉명사신이 되어 다시 이르니 부윤 김담(金淡) 공이 나를 맞아 누에 올라 조용히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내가 말하기를, ‘등왕각(滕王閣)은 천하에 이름난 명승으로 이 누각에 올라 조망하는 사해(四海)의 호걸(豪傑), 문인(聞人), 재사(才士)들이 매우 많았지만, 왕중승(王中丞)을 만나 비로소 중수되고 한퇴지(韓退之)를 만나 기문이 지어졌다. 이 누를 중수하고 기를 쓰는 일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하니, 김 부윤이 빙그레 웃었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객관이 중수되고 통판(通判) 신중린(辛仲磷)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으므로 대략 전말을 써서 돌려보냈다. 조금 있다가 들으니 의풍루가 또 불에 탔다고 하였다. 불에 탄 뒤에 새로 짓지 못한 지가 2년이 되었다. 정해년(1467, 세조 13)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부윤으로 와서 정사는 잘 닦아지고 폐해는 제거되었다. 이에 누를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고 곧 누의 옛터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경영하여 세우니, 우뚝 솟아 한 도(道)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의풍루'라는 경주의 누각이 객관에 있는데 작고 처마가 낮아 마치 시루속에 앉은 것 같아 답답하다는 구절이 나오고, 마침 불에 탄 이 누각을 새로 확대해서 우뚝하게 높이 올려 '한 도의 장관'이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 의풍루는 지금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워진 작은 어디서나 볼수 있는 형태의 누각이 되어있습니다. 전기의 의풍루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서거정이 비유에 들고 있는 중국의 '등왕각'은 이런 건축입니다 (아래 사진. 물론 등왕각 역시 이 모습이 아닌 여러 재건을 거칩니다만 기본적인 누의 형태는 고수해 왔습니다). 물론 이런 건축을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비유가 중요한 것은 등왕각을 '조망하는 좋은 누각의 예'로 들고 있을 만큼 조선전기까지도 그 '전망'을 즐길 수 있는 형태의 높은 누각, 그리고 (아마도) 등왕각처럼 사벽이 쳐져 안에 들고 날수 있는 형태의 건축이 있었음을 추정하게 해주는 구절이란 것이지요.
중국 강서성 등왕각

고려대의 누(루)의 규모는 여러 가지였지만 (최우처럼 극대형도 있고), 다음의 [고려사]기록은 만월대의 중광전 (1138년전에 강안전으로 개칭합니다)의 옆에 있던 '남루'라는 곳에서 여진의 추장등 손님 40명을 접대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종 5년(1110) 경인년
경자일. 왕이 중광전(重光殿) 남루(南樓)에서 서여진의 추장(酋長) 등 40여 명을 접견한 후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또한 같은 시기 길거리에 '임시 누(루)'를 만드는데, 임시로 만들어도 채색 비단을 장식하는 등 화려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종 11년(1116) 병신년
계묘일.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가서 낙성을 기념하는 재(齋)를 지냈다. 당시 사흘간이나 길거리에 채색 비단으로 장식한 임시 누(루)를 설치해 놓고 풍악을 잡히게 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마무리를 하기 전에, 이런 고려시대 '樓'에 대한 정의를 읽고 같은 시대의 다른 기록을 보면 어떤 맥락의 연관성이 느껴지는데, '누선'이 그것입니다. 다음은 바로 위의 임시 누각의 기록과 정확히 같은 1116년의 기록입니다.

고려사
예종 11년(1116) 병신년
경오일. 금강사(金剛寺)와 흥복사(興福寺)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영명사(永明寺)에 들러 누선(樓船)을 타고 종친·재추·시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또한 왕 자신이 지은 선려조(仙呂調)의 「임강선(臨江仙)」세 곡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즉, 고려시대에 등장하는 '누선'의 경우 물론 송나라처럼 거대한 누각을 배에 싣고 다니지는 않았겠지만, 어느정도 규모있는 높은 형태의 구조물을 선박가운데에 지닌 형태가 아니었을까요? 누(루)라는 개념이 '일정 높이'의 집형태라는 것으로 쓰였다면 한번 연구해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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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이상으로 우리의 인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한국의 건축형태인 '고려대의 누(루)'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이상에서 보이듯, 다양한 높이와 규모, 그리고 모습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의 '누'개념은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정자의 개념과 합해진 느낌의 '사방이 트인 기둥으로 받친 공중마루'의 형태가 아닌 채색기둥을 가진 '벽이 있고 잠자리가 있어 기거가 가능하기도 했던' 중층건축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층에 온돌방을 놓기도 하고, 객사나 지방유지의 별장이라도 '루'가 없다면 이것을 아쉬워 할만큼 인기가 많은 형태의 가옥구조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살펴본 것은 대부분 13세기정도의 사료들이지만, 이런 모습은 12세기초반 서긍이 묘사한 '수십채마다 루'라는 기록이 타당함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왠만한 부호나 유지의 저택은 모두 이런 중층누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필자가 예전 글에서 추정했듯 이렇게 '사방이 벽으로 막힌 형태'의 중국'누'와 비슷한 (즉 아래 사진의 송나라 당대의 누각과 비슷한 형식의) 건축을 개경의 대로에서 보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이것을 '누'(누관)이라고 표현한 것일 것입니다.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시의 송대양식 전통루 거리

혹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리입니다. 수십채가택마다 루가 서있죠. (시대는 파악하는데로 업데이트할 것입니다)

앞으로 전문가들의 연구가 더 치열해져서, 우선은 곧 회화나 3D형태로라도 고려대의 '누(루)'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 대중들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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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및 흥미포인트 (누관樓觀):

비교맥락에서 고대 일본에서는 '누관樓觀'이란 것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음은 일본사기의 기록을 학술네트워크인 '동북아역사넷'에서 설명해 둔 부분입니다.

桓·靈間,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侍婢千人, 少有見者,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語. 居處宮室樓觀城柵, 皆持兵守衛. 法俗嚴峻.
왜(倭)에 군주가 없는 틈을 타 비미호(卑彌呼)가 왕위에 오름
[그녀의] 거처(居處)인 궁실(宮室), 누관(樓觀)[註1], 그리고 성책(城柵)을 [병사들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수위(守衛)하였다.  법속(法俗)이 엄준(嚴峻)하였다.

누관 註 1주: 누각 형태의 건축물을 뜻한다. 彌生時代의 요시노가리(吉野ヵ里) 유적에서는 높은 망루가 확인되고 있다. 祭殿으로 생각되는 건축물도 누관이라고 할 수 있다. 『三國志』에는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飲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라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고대-중세 일본의 누관(樓觀)에 대해 이런 추정도를 내놓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동북아역사넷

그런데 이 누관(樓觀)이라는 단어, 어디서 본 기억이 나시죠. 위의 본문 중 '동국이상국집'에 '기거하는 누(루)'기록이 나옵니다. 바로 이 일본사료처럼 말이죠. 더 중요한 것은 '누에 기거'한다는 이 기록과 (殿主謙師所居樓) 매우 흡사하게 위의 중국 '삼국지'기록에 '居處宮室樓觀' 즉 궁실누관에 기거한다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죠. 즉, 누에 '거주'한다는 기록이 연달아 나오고 있는 겁니다. 다만, 동국이상국지의 기록원문은 '누관'이 아닌 '누'입니다. 아래것은 번역본이죠.

건성사(乾聖寺) 제석전(帝釋殿)의 전주(殿主) 겸사(謙師)가 기거하는 누관(樓觀)에 시렁[架子]을 만들고 포도(蒲萄) 넌출을 틀어올려 차양(遮陽)을 삼았는데 이를 두고 시를 읊은 이가 많았으므로 겸사가 나에게 차운을 청하다

또한 1123년 서긍의 '고려도경'의 '누'기록이 정확히 말하면 '누관'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관(樓觀)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사찰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 양쪽과 국상(國相 일국의 재상),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樓)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樓가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 것은 ‘박제(博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樓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놀러 올 때면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어쩌면 세부사항은 많이 달라도, 이러한 비슷한 기본 형태의 구조물을 고려대에도 '누(루)'라고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형태라야 '아녀자들이 발을 치고, 상층에서 아래로 '굽어보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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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후 '주루' (즉 주점의 누각)에 대해서도 기회가 되면 알아 보겠습니다.
* 대건축 카테고리에 넣기는 애매하지만, '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하나의 사라진 형태의 한국 대건축구조로 일단 분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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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응가 2015/03/27 18:48 # 삭제

    조선후기에도 이런식의 건물이 있지않나요???
    창덕궁 징광루(경훈각)가 3층이었는데 창덕궁 대화재때 모두 불타버리고 경복궁 만경전 건물을 옮겨서 짓게 되어서 현재는 일층짜리 건물로 남아있습니다.
    http://cfs10.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EgwMDNAZnMxMC5ibG9nLmRhdW0ubmV0Oi9JTUFHRS8wLzkxLmpwZy50aHVtYg==&filename=91.jpg
  • 역사관심 2015/03/29 02:27 #

    응가님> 네, 저도 징광루 역시 예전의 형식을 어느정도 담고 있는 건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선후기 것이지만 방초정역시 같은 맥락에서 참조건물이 아닐까 합니다.
  • 응가 2015/03/29 19:26 # 삭제

    경훈각 징광루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만경전을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서 복원하고 동궐도에 나와있는데로 경훈각 징광루를 청기와를 올려 다시 복원했으면 좋겠네요.
  • 역사관심 2015/04/04 07:22 #

    저도 청기와로 된 징광루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 ㅇㅇ 2015/03/28 11:48 # 삭제

    이런거 보면 고려 후기 불화에 나오는 장대하고 화려한 각종 목조 건축물들이

    절대로 과장된게 아님을 쉽게 알수 있네요

    그리고 그런게 몽골침략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져오고 조선시대 15세기까지는

    존속했다는게.. 아무튼 더많은 유적지 발굴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고고학 발굴할 사람들이 너무 적어요

    하다못해 서해 남해 해저유물도 발굴할거 산더미 같은데

    전문가 부족이 너무 심함 대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과도 비교되네요

    나랏돈 빼돌려 지 뱃속 채우는 수꼴 정치인들만 드글드글하지

    국가정체성 확립을 위한 예산 편성을 아직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



  • 역사관심 2015/03/29 02:29 #

    고려불화는 제대로 연구자들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위의 기록에서도 신청의 고루의 경우 '붉은 옻칠'을 기둥에 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변상도등의 중층누각에 흔히 보이는 모습이라 꽤 흥미롭습니다.
  • 응가 2015/03/29 19:24 # 삭제

    불화안의 건축물과 실제건축물을 비교하는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불화안에 그려진 건축물로 따지자면 조선시대의 불화에도 그러한 건축물은 수없이 등장하거든요.
    게다가 조선시대건축도 무시못할수준은 아닙니다. 경복궁 근정전, 종묘정전, 경회루는 지금 규모도 적은편은 절대아니죠. 게다가 여말선초의 건축물인 맹씨행단과 조선중기의 양진당이나 후기의 연경당과 비교하면 일번적인 한옥의 형태는 조선중기에 정형화되어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 역사관심 2015/03/30 04:38 #

    응가님 말씀도 맞습니다. 결코 불화같은 종교화와 실경을 그대로 적용해선 안됩니다. 다만, 당대의 시선(국지적)이 엄연히 담길 수 밖에 없는 회화의 특성상 (예를 들어 복식등도 인도-중국형식이 아닌 일본이나 고려의 것이 많이 담기듯), 건축물 역시 세부영역에서 자국문화의 반영을 하는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고려대 명예교수이신 주남철 교수님을 필두로, 한동수, 이상해 교수님같은 분들이 일부에서 꽤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그 숫자가 아직 미비하며, 해외의 자료를 제대로 파악하는 흐름은 최근들어서야 일어나고 있어, 90년대까지의 연구성과가 그다지 많이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조선건축처럼 꾸준한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개인별로 조금 파편적인 연구에 그치고 있어 아쉽습니다. 실물을 볼 수 있는 조선건축과 달리 유구들 역시 북한에 집중되어 있는 고려대 주요건축의 경우, 연구자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흐름도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쪽에서 할 수 있는 이러한 불화연구등에 좀 더 연구가 나와주면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말씀대로 시대별로 또한 건축별로 어떤 건축은 규모가 화려하고 큰 것에서 소박하고 작은 경향으로, 어떤 건축은 더 커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저런 흐름을 통시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역사건축학계에서 표등으로 정리해주는 것도 좋은 연구라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이 최종적으로는 항상 제 의견처럼 적어도 미이어쳐라든가 회화의 형태로라도 구현되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 좋겠구요.
  • ㅇㅇ 2015/03/28 14:53 # 삭제

  • 역사관심 2015/03/31 01:00 #

    답글 고맙습니다. 올려주신 사진의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형태를 가리켜 이규보가 누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사진은 제외- 하지만 이건 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네요).물론 사견입니다만, 서긍 역시 송대의 누를 보다가 와서 이런 형태의 건축을 누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봅니다. 본문의 근간이 된 이정미-한지만 교수님들 역시 이런 건축형태들을 몰라서 논문에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분들의 기본시각은 저와 비근한데, 고려대의 '누'형식은 현재 한국에 현전하는 조선후기형식의 루와 기본적으로 달랐다고 보는 시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중후반의 경우 송대건축의 영향, 특히 복강성지역등,의 누각형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양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더 알게 되는대로 나누겠습니다만).

    그리고 말씀대로 침상은 어디나 둘수 있죠- 팔각정안에도 둘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정미교수의 경우 고려대에서 '침석'이라는 글자를 쓰려면 내부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으며,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1층에 온돌방기록까지 있지요. 또한, 올려주신 많은 건축의 경우 전각이나 정에 속하는 (적어도 고려후기)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더군다나 고려도경등에 보이는 현재는 거의 사라진 가누(주택에 붙어있는)라든가 대로변의 높은 공공루, 그리고 객사의 전망용 고루등과 달리 이런 건축들은 대부분 사찰소속이 많고, 간혹 조선중기이후 궁궐에 세워진 루입니다.조선중기 이후 '루'라고 현재 이름이 붙었으나 이것이 고려대의 '루'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본문의 시발점입니다.

    사실 이런 건축들보다 소규모지만 더 비슷한 형태가 하나 남아있는 건축이 '방초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포스팅으로 생각중인데) '정'이고, 또한 지금의 형태는 1788년 것이고, 이런 형식이 고려대의 '누'의 일괄적/일반적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형태가 참조할 점이 꽤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평론가 2015/03/28 16:12 # 삭제

    누 높이가 6-9미터면 굉장히 낮은거 아닌가요? 단층짜리 한옥보다 낮은거 같은데..
  • 역사관심 2015/03/29 02:17 #

    우선 저 기록이 고려대 누각의 일반적인 높이는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예지요. 또한 그다지 낮은 높이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10미터-20미터 이상의 고루라든가 3층 이상이 아닌 이상 말이지요. 고려사기록에 '상국(송나라)'와 같이 높은 전각을 참람하게 세우는 움직임들이 많아 제한해야 한다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높은 건축을 제안하려는 기록이라 봅니다). 이 운금루의 경우, 또한 벽토를 단청하지 않고 수수하게 라는 구절등에서 볼 수 있듯 신청의 루나, 일명 '고루'라고 이름붙은 누각과 비교하면 작은 것에 속하는듯 합니다. 또한 6미터라는 높이가 지붕까지 포함되지 않고, 처마정도로 볼수도 있는등 단문이라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사견으로는 이 누각의 경우, 원래 2층누각이었던 제천의 응천각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나 합니다.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where/where_main_search.jsp?cid=1685168&out_service=Y (물론 19세기 개축되어 현재는 중층형태는 아닙니다. 형태가 아니라 규모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례로 근대 2층한옥상가들의 높이가 대강 이정도에서 형성됩니다. 다음은 건축학교수 송인호선생의 논문중 일부입니다:

    이층한옥상가는 남대문로나 종로, 돈화문로와 같이 시전행랑이 있던 필지에 지어지기도하고, 보문동과 같이 새로 조성된 도시주거지의 가로변에 지어지기도 한다. 현재 사진과 실물로 확인할 있는 이층한옥 상가의 분포는 대체로 경성부의 전차노선과 일치한다. 전차노선은 도성내의 기존상업지역을 관통하여,도성 밖 새로 확장된 신주거지로 확장되는데, 이 전차노선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5) 즉
    이는 조선일보 1934년 11월2일자에 “18척 높이 이하의 건물불허구역을 확대(更增)”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에 ‘대정11년(1922년) 5월에 경기도 내훈 제1호로써 「시가지건축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경성시가지 중의 중요한 지구에는 처마높이18척이하의 건축물을 불허하는 규정을 정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문정기, 「이층 한옥상가의 유형 연구」(서울시립대학교 석사논문, 2003), 30쪽)

    즉, 1922년, 전차를 위해 길 주변에 이층이상의 한옥(종로특성상 대부분 상가)만을 허가하게 되는데 그 최소처마높이가 18척, 즉 5.4미터정도 됩니다.즉, 2층 한옥상가가 6미터정도에서 형성되는 것이지요. 참고로 이정도가 6미터입니다.
    http://encrypted-tbn3.gstatic.com/images?q=tbn:ANd9GcRlLHtzApNhgfOzvEq45uu_YM19FNVx5dovP-mhYdqpBMPjBpYr
    이러한 경우, 아래의 가운데 보이는 중층건축정도의 건물이 가능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http://img.sdchina.com/news/20140903/c01_4ecc7fef-9ac6-4be5-80de-2e652d0cd5f4_1.jpg

    마지막으로 9미터정도가 되면 한경헌에 비근하리라 봅니다.
    http://www.conslove.co.kr/news/photo/201410/35804_175695_215.jpg
  • ㅇㅇ 2015/03/29 14:47 # 삭제

    http://cfile204.uf.daum.net/image/15084F184CCC403D05212A
    위의 평론가님의 말이 나올만도 한게 링크 속의 한옥은 단층의 5량가 건물로 높이 7m정도 입니다. 그런데 누각의 높이가 6m라면 (연장 9m는 건물의 길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게 알맞을것 같구요. 건물의 크기를 말할때 높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길이가 사용되니까요.) 이상할 정도로 납작한 모습이 나오겠죠. 이 글의 논지대로라면요.
    그리고 누각 위에는 사람이 몇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수레를 몇대를 놓을 수 있다 라는 표현을 볼 때도 이 글에서 얘기하는 그런 구조와는 좀 다른 것 같구요.
    개인적으로는 이규보가 말한게 어떤 고려시대 누의 단정적인 정의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고려시대의 기록속에서도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데다가 지금의 누 형태는 뜬금없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리고 지금의 누라고 부르는 건물도 벽이나 문으로 주변을 막는다면 집위에 집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런 모습의 건물들도 많이 존재하고요.
  • 역사관심 2015/03/31 00:58 #

    물론입니다. 댓글에서 밝혔듯 다만 이 누각의 경우 그리 큰 규모가 아닌 예에 속한다고 봅니다. 또한 수레를 놓을 수 있다는 최우의 누각과, 집위의 집이라는 누각역시 다른 형태겠죠 (하층에 온돌이라는 것과도 다를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그런 다양성의 맥락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런 저런 고려대의 기록들을 집산해서 분석, 어떠한 형태가 가능한지 하나하나 시각적인 구현을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봅니다. 조선시대나 중국의 누각형태가 하나가 아니듯, 고려대에도 여러 형태의 가루, 객사루, 궁루등이 있었을 수 있겠지요. 한 두가지의 사료로 전체를 판단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따라서 모든 기록을 주욱 늘어서 본것인데, 다만 확실한 것은 '벽'을 가진 형태, 즉 사방이 뚤린 정자형태보다는 적어도 건물에 까까운 형태가 많았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말씀대로 어떤 건축은 그 명맥을 이어서 소규모로 변형되며 이어질 것이지만, 또한 어떤 건축은 완전히 그 시대상만을 반영하다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흔합니다. 현재는 부족한 사료로 고려의 '누'에 대해서 이규보의 정의대로 볼것인지, 지금 현전하는 경회루같은 형태의 전형태로 볼것인지는 각자의 마음이라 생각해요. 저는 이규보의 시대에는 조금더 송대의 누각과 같은 형태의 건축이 있었으리라 보고, 근거없이 집위의 집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과 고려의 건축은 조선중기보다 훨씬 중국과 일본건축의 형태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으리라 봅니다 (서긍 역시 그렇지 않았다면 이색적이라든가 이상하다는 표현이 어디서든 좀 나와줘야 했다고 보구요).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예전에 살펴본 고려대추정 선암사 미륵전 - http://pds25.egloos.com/pds/201502/28/34/a0053134_54f0f364554ae.jpg

    물론 좀 더 많은 유구를 통한 실증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니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지만 oo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이러한 시대의 건축에 대해서는 각자가 사료나 유구를 통해 어떤 공론화가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포스팅과 댓글은 저의 사견일 뿐이라는 점을 명시합니다. =)
  • 역사관심 2015/03/30 04:55 #

    이 분야를 살피다가 굉장히 궁금해진 것 한가지는 사실, 역사건축학계에서 연구가 한국의 루(누)건물의 통시적인 변화상을 분석한 연구가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고려대 누의 연구가 2008년 이정미 한지만 것이 거의 유일하니 이제 시작이라 봅니다만). 현재의 경회루, 촉석루 같은 사방이 트인 형태의 건축형태가 전형적인 '루'가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한번 살펴보는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분명 같은 아시아건축에서 '누'라고 하면 중층의 건물형태를 (동북아뿐아니라 동남아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현실에서 이러한 조선특유의 **루라는 형태가 언제부터 발달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6/06/11 02:23 #

    누주가 6미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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