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언)조선 전기, 세종대왕이 오른 '루樓'는... 한국의 사라진 건축

흔히 세간에 속칭 전기경복궁, 즉 임진왜란때 불타기 전의 경복궁에 중층건축이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로 쓰이는 사료 하나가 있습니다. 세종 대왕님께서 2층건물에서 낮잠을 주무셨다는 [실록]기록이죠. 인터넷상에 많이 돌아다니는 글이기는 하지만, 원문을 근거로 차근차근 살펴본 글은 거의 없고, 논문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한번 살펴보면 이전에 필자가 쓴 고려대의 '누'건축에 대한 묘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보입니다.

우선 번역문을 보면:

세종 13년(1431년 신해, 명 선덕(宣德) 6년) 8월 18일(경술)
김종서에게 밤낮으로 공소에 머물면서 임금의 말을 밖에 전하게 하다    

좌대언 김종서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병중인데다가 마침 사신의 일로 마음이 번거로운데, 환시(宦寺)들이 말을 복잡한 사연을 다 전하지 못하는가 싶으므로 마음과 기운이 함께 피곤하니, 경은 지금부터 재계하고 밤낮으로 공소(公所)에 있으면서 나의 말하는 바를 듣고 밖에 선전하라.” 하고, 드디어 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기를,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이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宿疾]이 되었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나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 ’고 하였다. 나의 쇠함과 병이 전에 비하여 날마다 더욱 심하니 경은 그런 줄을 알라.” 하였다.

=====
이런 기록입니다. 즉, 세종이 풍질을 얻은 연고가 바로 경복궁의 2층건물에 올라가서 창문앞에서 잠을 자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본인이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럼 원문을 한번 보죠.

○傳旨左代言金宗瑞曰:
予以病, 適値使臣事煩慮, 宦寺不盡傳言, 語之重複, 因而心氣俱困。 卿其自今齋戒, 晝夜在公, 聽予所言, 宣傳于外。
遂引見宗瑞曰: “予得風疾本末, 卿必不知。 曩在景福宮, 方暑亭午, 暫御小樓, 當窓乍睡, 忽覺兩肩間刺痛, 翌日平復, 隔四五日又刺痛, 經宿微腫。 自此以後, 發作無時, 或經二三日, 隔六七日, 至今不絶, 遂成宿疾。 三十年前所御帶皆闊, 是知腰之減圍也。 予行年三十三, 鬢毛兩莖忽白, 侍兒驚怪欲拔之, 予止之曰: ‘多病所致, 勿拔。’ 予之衰病, 比前日益滋, 卿其知之。”

굵은 체에 나오는 부분이 관심부분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부분입니다.
暫御小樓, 잠깐 작은 누(樓)에 거동하여
當窓乍睡  창문 곁(아래)에서 잠시 졸았는데

경복궁의 작은 규모의 '루'에 거동, 창문앞에서 잠을 자다가 풍질을 얻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이 흥미를 끄는 것은 '2층'이라는 번역이 아니라, '루'에 올랐다는 기록과 그 '누'에 '창문'이 있다는 기록때문입니다. 번역과 달리 '올라가서 잤다'라는 것이 아니라 '루'에 거동해서 잤다를 번역자가 당연히 '루'(중층건축)이니 올라가서 잤다라고 번역한 기록이긴 합니다만, 앞서 소개한 '고려대 루(누)'소개글의 맥락, 즉 벽으로 사방이 막히고 창문이 있는 형태의 루(누)의 모습이 이 기록에서도 추정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으로 파악하는 한 이런 형태의 누는 현재 경복궁에는 없습니다. 문루를 제외하고 유일한 올라갈수 있는 구조의 2층건축은 누정인 경회루와 1860년대 (고종대) 만들어진 향원정을 비롯한 근대건축물밖에 없습니다.
이 조선전기 경복궁의 소루는 어떤 형태였을까요? 

조만간 소개하겠지만 조선회화에도 이런 형식의 '누'와 비근한 건축을 (하지만 현전하지 않는 형태의 건축) 그린 그림이 있다는 것을 최근 알게되어 조만간 소개할 예정입니다만, 확실히 '루'라는 건축형식에 대한 정의는 현재 대형정자건축에 가까운 '누정'과는 다른 형태의 건축에 (적어도 조선전기까지는)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수 있는 기록입니다.

임란전의 경복궁을 묘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장수 오오제키가 본 불타기 전 (물론 이 기록이 백성방화론과 맞서 꽤 큰 주제가 되는 기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군의 방화가 거의 틀림없어 보입니다)의 모습이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1660년대]에 등장하는데, 이 '소루'기록과 한번 비교해 볼 필요성도 있어 보입니다.

1592년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 조선정벌기 중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굵은 체만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是れこそ 殿閣 を熟と見るに, 城闕雲に聳え, 樓臺玉を瑩め其綺麗なる有樣, 秦宮の壯麗を摸し

참고로 秦宮(진궁)을 방불케 한다는 말은 그 진시황의 진나라 궁궐인 아방궁을 말하는 것으로 당연히 과장된 비유입니다만, 간접적으로 당대 조선전기 경복궁의 화려한 모습 (경회루의 용조각돌기둥등)을 보여주는 묘사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적을 이긴 자신의 모습을 높이는 용으로 과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수수한 건축에 이런 묘사를 쓸 가능성은 적습니다. 여기서는 옥으로 만든 누대 (樓臺玉)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조선정벌기와 별개의 기록으로, 위의 바로 다음날 즉 , 1592년 5월 4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년)가 이끄는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일본측 승려인 從軍僧 제타쿠(是琢)의 [조선일기(朝鮮日記)]에는 왜군의 한성 입성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섯 발자국마다 樓(루)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4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 그 한 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서 포개어 담을 쌓았는데 높이가 8자이고 4귀퉁이에 방향에 맞추어 4마리씩 16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 紫宸․淸凉 두 전당이 있다. 기둥은 돌기둥인데 아래 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같다. 서까래는 梅檀 나무 (매화 박달나무)인데 서까래마다 한 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五色八彩로 기린・봉황・공작・鸞・학・용・호랑이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丹鶴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
회암사의 정청 부분그래픽 (역시 청기와였습니다)

이 기록은 '유리기와'를 덮었다는 (청기와로 추정) 기록등,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후기 경복궁과 또다른 미학의 당대 경복궁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본 포스팅의 문맥에서 중요해보이는 기록이 가장 처음에 등장합니다.

즉 '다섯발자국마다 樓가 있고' 라는 기록입니다. 필자의 느낌으로 세종대왕이 낮잠을 주무셨다는 '소루'는 이렇게 다섯발자국마다 있다고 묘사할 만큼 많았던 여러 중층 소루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현재 실록에 지금은 없는 이름만 나오는 여러 '루'가 있는 만큼 저 낮잠기록의 전후와 평소 세종의 동선으로 이 '소루'의 정확한 명칭을 유추하는 작업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주목해서 볼 점은 [고려도경]의 저자인 북송인 서긍이 말하던 12세기의 고려대 '루(누)'의 형태가 중국인의 눈에도 '누'로 보였던 것과 같이, 이 기록에서 보이는 일본승려 제타쿠의 눈에 비치던 조선전기의 '루(누)'는 일본인의 건축개념으로 바라본 '루'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590년대 일본에서 '누'라는 개념을 일반적으로 어떤 형태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하는 점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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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방화에 대해
사족:
위의 [조선일기]를 쓴 종군승려 제타쿠의 기록중 아직 국내에서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사료가 있습니다. 당시, 임진왜란과 조선중기의 모습을 상세하게 살필 수 있는 서한들 (총 28통)인데, 국내에서도 알아야 할 것 같아 나눕니다. 이 링크에는 위의 조선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서한들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이며,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에서 나포하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년)가 제타쿠에게 보낸 것들입니다. 특히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간 인물이므로 이 서한들의 내용은 꽤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사족2: 일부넷담론에 제타쿠(是琢)가 5월 4일 경복궁을 봤을리 없다고 설이 있는데, 그 근거로 드는 것이 제타쿠가 종군한 부대인 나베시마군이 5월 7일에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베시마(鍋島直茂)는 4월 18 (혹은 17일)일에 이미 상륙합니다. 따라서 저 기록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즉, 두 눈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은 기록입니다. 일본측 문서인 [구마모토 번 연표] 2권중 해당부분을 첨부합니다. 참고로 5월 4일 경복궁기록도, 4월 17일 부산상륙기록도 모두 음력입니다. 참고로 선조는 나흘전인 음력 4월 30일 새벽에 서울을 떠납니다.
사족 3: 이상하게 이 '경복궁 방화'의 주체에 대한 담론에서 확실한 기록이면서도 빗겨나 있는 한국측 중요사료가 있습니다. 당시 의병장인 조경남(趙慶男, 1570∼1641년)의 [난중잡록]이 그것으로 이 중요사료에도 역시 왜군이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지칭은 하지 않지만) 불태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 初三日賊入長安城中。前一日。賊屯于門外。城中反氓出迎曰。國空無主。城棄不守。賊乃入之。先是慶尙道梁山官奴黃應禎被擄。賊書示曰。爾國何用防禦。不過二十日。當入京城。至是果如其言。所過列邑。皆留酋稱宰。誘聚愚民。散給倉穀。兼造名牌以標其降附。以此民多姑從。又自釜山。達京開三路。上下三十里。每置一陣以備深入路梗之虞。入城之後。先焚宮闕,宗廟。連燒公私家舍。括索帑藏。日輸本土休兵。擬向關西,朔方之路。

入城之後。先焚宮闕,宗廟。連燒公私家舍。

분명히 음력 5월 3일 성에 들어선 이후 궁궐을 먼저 태우고, 종묘를 잇달아 불사르고 연이어 공사와 저택을 불살랐다고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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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평론가 2015/04/07 14:32 # 삭제

    현재 경복궁 발굴 유물들이랑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여러장식구를 생각하면 저사람들의 기록이 후대의 과장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것 같군요. 그리고 경복궁 루도 현존 그림을 보면 많이 남아있는데 일치하는 부분이 많네요.돌다리 묘사부분은 지금하고 완전 똑같네요. 그 누는 어디에 있었을 까요?
  • 역사관심 2015/04/08 03:31 #

    그런 것 같습니다. 파편적이지만 이런저런 사료들과 나온 유구들을 총합해서 전문가들이 가시적으로 미니어처등으로 한번 구현해보면 합니다.
  • 초효 2015/04/07 14:51 #

    경복궁이 만들어 질때 거의 1년 정도 밖에 안 걸렸다는 말이 있더군요.
    당시 자재 가공만 해도 그렇게 단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개성에 있던 구 고려왕궁을 해체해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더군요.
  • 역사관심 2015/04/08 03:32 #

    저 역시 궁금했던 부분인데 말씀과 같은 가능성도 한번 살펴볼만 한것 같습니다. 조선전기 궁궐의 저런 묘사는 확실히 고려대건축의 뒤를 잇는 느낌도 나구요.
  • 천하귀남 2015/04/07 15:41 #

    창덕궁에 남아있는 억석루라는 건물이 중층 누각의 형태입니다. 창덕궁 선원전/궐내 각사 영역을 복원하면서 최근 복원됬더군요.

    이걸 참고하면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제법 되지 않았나 합니다.

    다만... 조선 중기 이후면 온돌이 크게 보급되는데 온돌은 2층에 설치할수 없으니 이런 이유로 누각 형태의 건물은 단층으로 새로 짓거나 철거되면서 줄어든것 아닐까 합니다.
  • 역사관심 2015/04/08 06:03 #

    석어당은 알고 있었지만 억석루라는 건축이 복원된건 전혀 몰랐습니다. 멋진데요. 말씀대로 저 기록은 이런 규모정도로 느낌이 옵니다.

    경희궁 봉상루의 경우도 흥미롭습니다.
  • 無碍子 2015/04/07 18:16 #

    본문의 의도와는 무관하지만 선조가 도성을 떠난 후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측 기록으로는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 궁궐은 말짱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4/08 03:42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로 저 일본승려의 기록들이 무애자님의 말씀을 증명하고 있지요. 사족에 더 달았습니다. =)
  • 이 감 2015/04/07 19:43 # 삭제

    조선 전기 강녕전이 좌우길이는 지금보다 훨씬 작지만 중층이었다고 얼핏 들어서 강녕전이 중층 건물이었다고 확실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이 말이 맞다면 강녕전일 수도 있지 않을런지요.
  • 역사관심 2015/04/08 04:04 #

    말씀을 듣고 사료를 좀 찾아보았지만 강년전 2층기록은 아직 찾기가 힘드네요. 만약 이 기록이 있었다면 말씀대로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
  • 역사관심 2015/04/11 02:50 #

    이 감님> 이런 기록을 찾았습니다.
    선조 129권,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9월 30일(경오)

    해평 부원군 윤근수 등이 이문통과 경복궁 터를 본 결과를 아뢰다

    해평 부원군 윤근수, 도승지 이상의가 아뢰기를,
    “신들이 전교를 받들고 이문통에게 경복궁의 터를 함께 가보자고 청하였더니 문통이 광화문 안의 어로(御路) 위에 나경(羅經)을 놓아보고서는 ‘이 지점이 정전을 세우기에 마땅한 자리이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강녕전(康寧殿)의 옛터는 지세가 자못 높으니 의당 3층 누각(樓閣)을 세워 백호지산(白虎之山)4530) 을 항복하게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따로 쓴 별지를 입계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피아프 2015/04/07 20:01 # 삭제

    잠어소루를 2층에 올라가서라고 번역한 것은 지나친 의역으로 보이고요.. 누라는 것에는 누마루와 같은 것도 포함되고 이 누가 꼭 2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튼 왕이 뜬금없이 융문루같은 곳에서 잠을 잤을리는 없고 갈만한 곳이라면 일단 세종시대에는 지금 크기의 경회루는 없었고 훨씬 작은 누가 흠경각 쪽에 있었는데 혹시 그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 반대편에 지금의 융문루 비슷한 누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 그곳일 수도 있고요.. 혹은 비나 후궁의 처소에도 누가 있으니 그런 곳이 아닐지..
  • 역사관심 2015/04/08 06:56 #

    물론입니다. 그점을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만, 제 느낌으로는 번안자와 비슷하게, 당시 일단 '루'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오른다라는 것을 염두해둔 기록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말씀드렸듯 '창문'의 기록으로 현재 누마루와 같은 트인 공간은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경회루 상부처럼 중간에 어떤 내진(內陣)과 같은 침석을 둘 수는 있겠습니다- 경회루의 현재 내진이 조선전기에도 있었던 구조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세조때 세워진 중층건축인 열고관등이 아닐까 싶기도하고:
    (동국여지승람) 열고관(閱古觀) 주합루 남쪽에 있다. 상하 2층으로 되었으며, 또 북쪽으로 꺾어지면 개유와(皆有窩)가 되고, 또 서북쪽은 서고(西庫)이다.

    역시 세종대에 세운 '보루각'등의 기록을 봐도 중층건축이 있었음은 분명한데, 말씀대로 이런 건물중하나가 아닐까 짐작됩니다.
    경회루 남쪽에 집 세 채를 세우고 거기에 누기(漏器)를 두었는데,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채 안에 2층으로 된 자리를 설치하고 그 위에 세 신이 있는데, 시를 맡은 자는 종을 치며, 경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다만, 위의 일본측기록처럼 청기와, 구슬이나 발로 장식을 한다든가 하는 기록을 보았을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과는 양식자체가 꽤 다른 고려대의 것을 이어받은 과도기적 모습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해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 '루'기록도 고려대 루 기록과 참조할 점이 있어 보입니다.
    =====

    2층 누옥 (거주가능한 누)의 경우 1800년대에도 지어진 기록이 매천집에 있더군요.
    지난 신해년(1851, 철종2)에 이르러 여러 사람의 의견이 제대로 합치되어 남쪽의 병방(丙方)과 정방(丁方)의 사이에다 2층으로 누옥(樓屋)을 최초로 건립했다. 처음으로 도모하여 이루어진 일이라 비록 높고 화려하게 올리지는 못했어도, 붓끝에서 살아나는 생생한 단청으로 비로소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성곽에서 빠뜨려선 안 되는 게 이와 같으니, 이른바 성(城)과 함께 존재해야 할 것이다. 아아,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 모든 게 무너지는 참화를 다시 겪게 됐다.

    또한 구사당 김낙행 (1708~1766) 역시 2층에서 하룻밤을 머문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개인적으로는 누마루 기록은 아닌듯 싶습니다.
    구사당집
    학사당〔學士堂〕절의 윗머리 남쪽 부근에 있으니, 고운 최치원이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저물녘에 상층에 올라 묵으니 / 暮上上層宿
    이곳이 고운의 학사당이라네 / 玆爲學士堂
    당시의 기둥과 대들보 남아 있으니 / 當時楹棟在
    맑은 향기가 온몸에 스미는 듯하네 / 彷彿襲淸香
  • 피아프 2015/04/08 06:08 # 삭제

    누마루에도 창이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는데 어느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보이네요..
    그리고 왕이 피서용으로 낮에 잠시 잠을 자는데 꼭 내진칸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네요. 기록대로 창문앞이라면 분명 그곳이 내진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 말은 해석가능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쪽이지 어떤 다른 견해를 두고 이게 아니네 저게 아니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요즘 글들을 보면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가 나오는 기록으로 보이는데, 답을 정해놓고 글을 쓰신다는 느낌이 좀 듭니다.
  • 역사관심 2015/04/08 06:54 #

    조선전기이전 건축의 경우 사료부족으로 말씀대로 여러 형태가 추정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당장 피아프님의 답글과 또 다른 답글들의 내용의 다양성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견이 강하게 들어간 글들임도 명백합니다. 분명 개인적으로 '보고싶은 건축형태'로 보려는 느낌이 (저러한 기록을 그렇게 보자면 볼 수 있는 기록들이기도 하고) 고려 누 포스팅이후 '누'의 형태에 관해서 있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다만, 여러 형태중 유구가 버젓이 출토되고 기록이 현전하는 부분에서도 현재 현전하는 중기이후의 형태와 규모'로만' 보려는 경향도 일부학계에서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런 관성적인 흐름에는 강하게 반대하는 지라, 그런 의도가 포스팅에서 좀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임란담론의 일부로만 인용될 뿐 저런 종군승려의 건축묘사 기록을 제대로 파고 든 연구는 아직 건축학계쪽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 형태의 건축흐름을 오픈되게 담론으로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인데 (예를 들어 저런 기록에서의 일본인의 당대 '누'개념등도 연구해야 할 듯 한데 전혀 없고, 더 전대인 고려대 건축의 정의는 조선시대의 담론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대 이웃국들의 건축형태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이 참조해야 한다는 등) 그것이 역으로 어떤 고착화된 형태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건축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분명 조선중기이전의 미학이 여러모로 현재 한국학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주된 미학과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인지라. 전자만을 강조하는 흐름이 느껴지는 일부학계에 대한 반발심(?)이 들어가는 듯도 해요.

    그런 맥락에서 말씀하신 점은 충분히 일리있는 것으로 추후 포스팅에서 좀 더 사려깊게 생각하고 적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견 정말로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5/04/08 07:06 #

    같은 맥락에서 우선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기록입니다'라는 표현을 '추정해 볼수 있게 하는 기록'으로 수정했습니다. =)
  • ㅇㅇ 2015/04/08 11:02 # 삭제

    까놓고 말해서

    한양궁궐

    백성방화설은 주관적인 감상론에 근거한거고

    왜군방화설은 객관적인 논리추론에 근거한거죠


    왜군방화설은 철저하게 각종 기록에 시간 논증 그리고 전후상황을 고려한건데

    백성방화설은 조선왕실과 사대부의 무능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강조하기 위한

    감정표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게 문제입니다

    게다가 백성방화설은 사실상 북인의 선조실록에 반대하기위한

    서인의 선조수정실록의 견해에 가깝고

    유성룡이 들리는 소문에 근거하여 전란상황을 징비록에 기록한 거여서

    객관적인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왜군 방화는 포스팅에 나온거 말고도 기록이 많습니다

    조선측 기록보다 일본측 당대 기록이 더 많아요

    특히 궁궐 방화 관련 부분은 조경남 난중잡록 보다

    개인적으론 일본측 기록이 더 구체적이어서 그쪽이 신뢰가 갑니다

    무슨 기록인고 하니

    조명연합군에 의해서 평양성에 탈환될때

    가까스로 도망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한양으로 복귀하면서 당시 병사들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가

    한양점령 직후의 일시적인 유화책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는 거죠

    일반 병사들 태도도 그렇고 고니시 유키나가 자신도

    조명연합군이 한양 공격해올것에 대비해

    한양 도성내 조선인과 내통을 두려워해

    성내 모든 남자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죠

    그리고 관공서를 시작으로 도성 전체를 방화하라는 명령까지 내립니다

    그러구선 스스로 한양에서 철수하죠



    한양 궁궐 방화라는건 단순한 궁궐 방화가 아니라

    한양 도성 전체 방화의 일부분이란 겁니다

    지금도 서울 종로 지표 발굴 조사를 하면

    임진왜란때 한양 종로 시전 전체가 일시에 불탄 흔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죠


    결국 답은 나온거라고 봐야 합니다

    궁궐 방화는

    평양성에서 패퇴한 왜군이 한양도성에서 철수하면서

    조선군 사기를 꺾는등 군 전술적인 측면과

    일종의 분풀이를 위해 도성 전체를 방화하면서

    발생한 사태라는거

    ..






  • 역사관심 2015/04/11 01:15 #

    저도 경복궁을 위시한 한양방화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경복궁은 철수할때가 아니라 5월 4~7일사이에 방화한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백성과 일본의 두가지설을 이야기는 하고 있는데,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백성방화쪽으로 묘사해버리더군요. 설명을 해줘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 ㅇㅇ 2015/04/08 11:13 # 삭제

    그리고 님 포스팅 중 정말 좋은 자료등 글이 많은데

    단지 이 블로그 내에서만 볼수 있다는게 항상 생각했던 건데 너무 아쉽네요

    따로 책을 발매하시거나

    이런 얘기 해서 좀 그렇지만

    널리 알려질수 있도록

    외부 펌 허용 같은거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한국 인터넷 공간만 봐도

    왜곡된 자료가 횡행하는데

    그런 거 시정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4/11 01:17 #

    감사한 말씀이고 과찬이십니다. 다만, 넷상의 정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얼마든 제 해석과 달리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는지라 (그런 경험을 걸어둔 지금도 몇번 했는지라), 그리고 말씀대로 훗날 글들을 모아서 기회가 된다면 정식으로 알리고 싶어 카피는 걸어두려 합니다.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평론가 2015/04/10 09:00 # 삭제

    제타쿠가 묘사한 건물은 돌기둥이라는 대목이 경회루를 의미하는것 같네요 아래위로 용을 조각했다는 묘사도 있고 청기와로 덮었다니 경회루가 청기와 건물이였다니
  • 역사관심 2015/04/11 01:17 #

    말씀을 듣고 보니 일리는 있습니다. 아직 단정지을 일은 아니지만요.
  • 평론가 2015/04/10 11:07 # 삭제

    기록상 유리기와가 아니라 아련와 녹유와 같습니다
    광택기와의 한종류인데 조선실록에서 청기와가 반대로 무산되었고 다른기와로 대체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조선일기 기록에도 유리와가 아닌 기와가 푸른빛이 난다고 적혀있고 대조비교해봐야 할것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4/11 01:18 #

    이 부분은 저도 궁금했는데 일본측 원문을 구할 길이 없어 번역상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번 구하는대로 소개하고 싶네요. 혹 구하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평론가 2015/04/12 01:15 # 삭제

    http://cafe.naver.com/corean2009/10367
    카페에 관련글을 한번 써 보았습니다.


  • 역사관심 2015/04/12 11:37 #

    정보 감사해요. 잘 보겠습니다.
  • 제비실 2020/04/05 21:48 #

    백성들의 경복궁 방화설을 찬성하고 일본군의 방화설을 부정하는 의견에서는 일본군 방화설의 근거 자료인 오오제키의 조선정벌기를 문학 작품이라고 신뢰성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하여 폄하하고
    저자인 오오제키가 왜란 당시에 8세에 불과한 아동이어 왜란에 참전할
    가능성이 없어서 그의 궁궐 목격내용이 사실이지 않다고 주장하여

    백성 방화설을 그런 논리로 띄워주려고 주장하고 있지요
    백성 방화론에서는 조선일기의 저자 제타쿠가 5월 4일 경복궁 목격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타쿠의 5월 7일 상륙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태장원 문서를 인용하였지요

    태장원 주지였던 제타쿠가 5월 7일에 부산에 상륙하였다고
    이런 태장원 문서에 나와있어서 태장원 문서 내용가지고
    제타쿠가 경복궁을 본 적이 없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지요

    백성 방화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말이지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oja&logNo=50143471823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mji98&logNo=220348639958&categoryNo=27&proxyReferer=&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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