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통일신라대 해인사 3층집과 4급루 기록. 한국의 사라진 건축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의 현재와 다른 형태로 해석가능한 루기록(여러 가능성이 있다)에 대해 살펴본 바 있는데 다음은 통일신라대의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동문선]에 실려있는 최치원의 문장으로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新羅 伽倻山 海印寺 結界場記)]이 실려 있다. 이 기록은 해인사가 애초에 소규모로 창건된 (추정 애장왕 3년) 802년 이후 100여년 후인 897년 대규모로 중건할때 당시 명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 ?)이 '기' (즉 건축을 세울때 축사격인 기록)를 쓴 것이다. 897년이면 최치원이 41세때의 일이다.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 
최치원

중략. 도가(도가)의 교훈에 이르기를, “편안하여야 유지하기가 쉽다.” 하였고 유가(유가)의 글에 이르기를, “조심하지 않는 것을 사나운 것이라 이른다.” 하였다. 제약(제약)하는 것이 오직 사람이 행할 도리이니, 노력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지역의 4면을 구획하여 모두 책정하기를 다음과 같이한다. 진실로 이른바 3층의 집을 짓고 4층의 누(루)를 올리는 것이다. 좋을시고, 이야말로 산이 높아서 쳐다보기가 쉬운 곳이니, 바라건대 엎어진 물을 거두기 어려운 사정은 없으리로다. 곧 이 지역은 금강석처럼 단단하며 우뚝히 솟은 옥 같은 사찰이로다. 위엄이 세속을 억누르니 유(유)씨의 티끌이 곧 끊어질 것이요, 덕이 요물(요물)을 이겨내니, 장각(장각)의 안개가 침노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마음을 깨끗이 한 것을 재(재)라 하며, 걱정을 방지하는 것을 계(계)라 한다. 유교에서도 이렇게 말하는데, 불교에선들 어찌 쓸데없이 넘기리요. 잡귀가 방해함을 피하려 하면 노력하여 신(신)의 보호를 구하라. 때는 당(당)의 건녕(건녕) 5년 정월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3층의 전각(건물)을 짓고, 4급(단)의 루를 올린다고 (고전번역원의 번역은 4층) 나와 있다. 이 부분의 원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畫界四周。네 경계(모퉁이)의 구획을 그리고
悉數如左。모두 셈(계획)하기를 다음과 같이 한다.
諒所謂起屋三層。진실로 집을 3층으로 세우는 것(바)을 이른다.
昇樓四級。누(樓)를 4급으로 올린다.
好是高山易仰。높은 산을 쉽게 우러러보기 좋구나,

그런데 한국고전번역원측의 주석을 보면 이런 식의 설명이 붙어 있다.
p
대본에는 ‘起屋三層’으로 되어 있는데, 송(宋)나라 희녕(煕寧, 1068~1077) 연간의 소거혈처(巢居穴處) 고사와 관계되어 있는 만큼, 후대에 가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송(宋)나라 왕득신(王得臣)이 지은 《진사(塵史)》 권3 〈해학(諧謔)〉에, 왕공신(王拱辰)은 낙양(洛陽)에 화려하게 3층짜리 집을 짓고〔起屋三層〕 살고, 사마광(司馬光)은 한 길짜리 지하실을 파고 거하였는데, 소옹(邵雍)이 부필(富弼)에게 “요즘 한 사람은 둥지에서 살고 한 사람은 굴을 파고 산다.〔近有一巢居一穴處者〕”라고 하면서 이 사정을 설명하자 부필이 크게 웃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몇가지 이유로 필자는 이같은 견해에 현재 동의하지 않는다. 송대의 문장을 가필했을 수도 있으나, 서지학적인 연구결과가 (즉 가필한 흔적의 확증) 없이 이런 식으로 후대의 중국기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 본다. 起屋三層이라는 흔한 구절하나로 9세기중엽의 기록을 외려 200년 후대인 이웃국(송나라)의 11세기기록으로 같다 붙이는 식의 설명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역사건축학적 (고고학적) 연구와 서지학적 연구결과를 함께 첨부하지 않는 한 이런 추정은 무리라 보인다.

보통 이런 고사를 직간접인용할때는 그 문맥을 살펴야 하는데, 이 起屋三層 라는 구절의 앞뒤 문맥을 보면 분명 해인사의 세세한 건축계획을 설명하는 부분의 바로 뒤에 나오며, 그 뒤의 4급의 루(누) 기록은 송대기록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만약 이 昇樓四級라는 구절까지 송대기록에 나온다면 두 기록의 연관성을 의심해볼만 하지만 그런것도 아니다. 또한 왕득신의 기록은 사찰도 아닌 일반주택의 이야기다.

즉, 이 기록은 통일신라대 사찰 전각과 사찰 층루에 대한 꽤 중요한 사료로 평가해 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해인사사이트를 보면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층)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이 해석이 옳을 가능성이 높으며 역사건축학계등 관련학계에서 살펴볼 기록이라 생각한다.

특히 고려이전, 통일신라대 (9세기중엽)의 '루'중수에 관한 기록으로 4급(단)의 루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연구할 주제라 생각된다. 이 급이 만약 층을 이르는 것이라면 4층의 누가 되고 (현재로선 가능성이 낮아보이지만 당대 신라와 이웃국들의 기록을 교차비교해봐야 할 듯), 만약 '1급, 2급'의 원뜻이라면 9세기에 '누'의 급수를 매겨서 최소 1~4급의 (어떤 것이 더 우위의 급인지는 모르지만) 루에 대한 classification이 있었다는 중요한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역시 다른 '급'의 기록으로 1급과 4급의 차이가 어떤 규모와 모습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연구를 해볼 수도 있겠다. 혹은 가능성은 낮지만 급에 층계의 한단을 의미하는 뜻이 하위의미로 있으니 4계단의 뜻도 제외할 수는 없다 (이경우 아주 낮은 루가 되어버린다).

*대건축카테고리에 들어가기는 힘든 미묘한 건축포스팅을 담은 건축카테고리를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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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4/12 11:35 # 삭제

    그러고보면 해인사도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인게

    전란이 많은 한국역사속에서 몽고침략과 임진왜란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무사히 넘겼는데 나름 평화시대에 어처구니없는 화재가 자주 일어나서

    전성기때 건물이 거의 없다는 거죠. 그나마 조선 전기에 옮겨진

    팔만대장경이 현존한 건 정말 다행이지만요

    그외에 현재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도 존재하고 ㄷㄷ

    (찾아보니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이 좀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풍수적으로 화기가 강한 지세라고 하네요 그래서 항상 화재를 조심해야 한다던데

    해인사에서는 그걸 소홀히 했나봅니다 조선 후기에도 자주 불이 나서

    중층의 대적광전도 단층으로 새로 짖는등.. ㅠㅜ

    그런 와중에 장경판전은 화재로 부터 안전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
  • 역사관심 2015/04/13 22:35 #

    대장경이 살아남은게 기적이죠.말씀대로 해인사는 전화는 잘 피해가면서 왜...T.T 대적광전의 경우 2-3층으로 원래 규모로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 迪倫 2015/04/12 13:15 #

    그동안 올리신 글들을 보니 의외로 조선이전에 복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많네요^^

    잘모르는 분야라 재미있게 읽고 배우고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4/29 00:40 #

    사실 여러 복합적 이유로 임란후 좀 더 단층이 많아진 감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반 주택의 경우 이웃국들처럼 활발하게 복층건물이 많았던 것은 아닌 듯 하구요. 공공건축이나 관망용 건축의 경우는 확실히 중층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들을 살피면서 요즘 느끼는 소주제 한가지는 과연 층수에 선조들이 연연했느냐 하는 점인데, 사실 아주 일부기록을 제외하면 거의 무관심합니다. 달리 말해, 지을 수 있었음에도 철학적인 접근으로 단층을 선호함감이 아주 강합니다. '인식론적 담론'의 레벨인지라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이웃국들의 고층주택등에도 거의 무관심한 듯한 태도거든요 (이사람들은 2층이네, 3층이네 식의 태도입니다). 높이에 대한 열망자체는 많은 경우 자연스러운 것에 속하기때문에 이러한 '건축철학'이라든가 엄격한 규제가 들어가기전인 고려말까지는 (신라대에도 옥사조라든가 고려사에서도 규제가 보이지만 돈이 도는 곳에는 복층이 계속 출현합니다) 그래도 권력가들의 경우 어마어마한 건축을 만드는 경우가 꽤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한정해서 기록을 보면 어떤 느낌마져 드냐하면 국내에 있었던 복층의 경우도 굳이 기록자체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것도 많습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요즘 쏟아지는 귀한 글들을 눈팅만 하고 있습니다. 소이야기. 흥미진진해집니다 ㅎㅎ.
  • ㅇㅇ 2015/04/15 19:52 # 삭제

    옛날 사람이 지금 일부 사람들이 중층 한옥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군요..
  • 역사관심 2015/04/29 00:41 #

    양면성이 모두 있는 것 같습니다. 집착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시각적 충격(보통 이 충격을 다른말로 하면 굉장한 인상)의 가장 큰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규모' (특히 높이)이기 때문에 사실 단층건축이 대부분인 한국 국민들의 많은 사람이 느끼는 솔직한 시선 (이건 해외 관광객도 마찬가지입니다)이기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근 많은 논문에서 지적하듯 현재 한국전통건축이 주변국들에 비해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외국에 안알려진 가장 큰 이유중 하나라고 해도 솔직하다고 봅니다.

    조선중기 이후처럼 (위의 댓글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오히려 어떤 철학적관점에서 저렇게 담담하게 볼 '수'있는 것이 예외적인 상황일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즉, 철학에 근거한 어떤 건축관이 없다면, Raw eye로 보는 시각적 인상(혹은 미학)에서 높이와 규모는 당연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중층건축, 특히 생활건축이나 고층루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현재의 한국전통건축 양태에 대한 일부의 불만이나 컴플렉스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요. 어찌보면 제 블로그의 주요관심사가 고대대규모 건축에 있는 것도 그러한 쓸데없는 컴플렉스와 밸런스있는 한국전통건축사의 재정립을 위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없던 것이면 모르지만, 있던 것은 차근차근 복원해내는 것이 중요하지요. 외려 '있던 건축'도 애써 후기의 시각의 관성으로 외면하는 감도 (거꾸로) 없지 않다고 봅니다. 이러한 양쪽의 극단 (집착이나 무시) 모두 도움이 안되는 시각들이겠지요.

    하지만, 말씀대로 조선후기 선비들이 현재의 중층에 목말라하는 일반인을 보면 뭘 그리...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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