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정亭과 누樓의 구분 기록 (고려후기-조선초기 누각, 풍영루기록) 한국의 사라진 건축

조선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김종직(金宗直, 1431~ 1492년)의 [점필재집]에는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누각이 하나 등장합니다. 경북 상주에 있던 풍영루(風詠樓)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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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김종직(金宗直)

상주(尙州)는 낙수(洛水)의 상류에 위치하여 尙處洛水之上游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而爲監司之本營
실로 동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實東南一大都會也

그래서 사명을 받들고 정사를 반포하는 빈객과 皇華賦政之賓
일본(日本)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고 가는 사신이 日域獻琛之使
계속 줄을 잇되, 往來繈屬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경우는 由竹嶺者
3분의 1도 못 되고 不能三之一
대부분이 관현(冠縣; 聞慶의 고호임)을 경유하는데, 而率由冠縣
상주가 그 사방에서 폭주(輻湊)하는 중심지가 되어 있다.州當輻湊之交焉

그러니 의당 높고 웅장한 누각(樓閣)을 두어서 宜其有崇樓傑閣

의형(儀刑)을 맞추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고, 稱儀刑而壯觀瞻
높고 탁 트이게 하여 무더위를 제거해야 할 것이니, 抗高明而祛炎溽也
이것이 바로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此風詠樓不可以不重修也

우리 전하18년 (성종, 1487년) 정미(丁未) 봄에 我殿下十有八年丁未春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 공이 淳昌薛公順祖
부절(符節)을 갖고 이 고을에 와서 握左符于是州(

이 누각의 용마루와 서까래가 휘어져 기울고, 覩斯樓之甍桷撓傾
난간은 깨어졌으며, 欄楯撦閈
기왓장은 처마에 뒹굴고, 瓦飄于簷
비가 벽에 들이쳐 새서, 雨淋于壁
붉고 흰 빛깔의 장식은 赤白之飾
모두 흐려지고 벗겨져서, 漫漶剝落

누각에 오른 사람이 관현악(管絃樂)을 베풀기도 전에 주춤하며 登之者絃管未陳
꺼리는 빛이 완연함을 보고는 而恇懼之色可掬
개연히 누각을 중수하고자 하였다. 慨欲新之

그런데 그 해 가을에 其秋
통판(通判) 신후 현(申侯礥)이 뒤따라 이르렀다. 通判高陽申侯礥續至
마침내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합하여 議以克合
다음해 봄에 越明年春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農務未興
재목 수집을 명하여 命鳩材
성중(城中)으로 실어 들이고, 而輸之城中

가을 8월에 이르러 及秋八月
비로소 옛집을 헐고 始撤舊宇
그 제도를 훨씬 넓혀서 짓되 恢拓其制
일을 시작한 지 겨우 30여 일 만에 纔三十餘日
자귀와 흙손의 사용을 而斤斧圬鏝
모두 끝마쳤다. 已息其用矣

그래 놓고 보니, 누각의 넓고 시원하고 화려함이 樓之宏敞華麗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無與爲敵
성지(城池)와 여항(閭巷)도 城池閭巷
모두 자랑스러운 빛이 있고, 皆有德色
경내(境內)의 진산(鎭山)과 소택(沼澤)이 된 모든 산천(山川)들도 而凡境內之山川爲鎭爲浸者
갑자기 훨씬 더 높고 깊어진 것 같았다. 倏若增其高深焉

그러자 공(公)이 이에 公於是
이 고을의 교수인 나의 친구 주윤창(周允昌) 군을 중개인으로 삼아 介吾友州之敎授周君允昌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走書徵記於僕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僕披州之故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元之泰定丁卯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重繕館宇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位置得宜者
목사(牧使) 김영후(金永煦)이고, 牧使金永煦也
기(記)를 쓴 사람은 而記之者
근재(謹齋)였다. 謹齋也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逮皇明洪武庚戌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闢館之東偏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作新亭其地者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牧使金南得也
풍영이라 이름하고 而名以風詠
또 기를 지은 이는 且記之者
목은(牧隱)이며,牧隱也
시(詩)를 지은 이는 詩之者
도은(陶隱)이었다. 陶隱也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 1380년 고려우왕)에 庚申兵燹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亭亦煨燼
얼마 안 되어 未幾
그 옛터에다가 就其舊址
를 바꾸어 누으로 지은 사람은 易亭爲樓者
목사 송인(宋因)이고, 牧使宋因也
기를 지은 사람은 而記之者
양촌(陽村)이었다.陽村也

그런데 지금 이 누각을 중수함에 있어서 今公之重新斯樓也
그 제모(制謀)와 정공(程功)은 其制謀程
충분히 두 김 목사와 한 송 목사에 필적할 만한데, 足以追配乎二金一宋
그 기문 짓는 일을 촉탁받은 자는 而所以囑其爲記者
네 선생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顧不得班於四先生之徒弟也
어찌하겠는가. 如之何

옛날에 한퇴지는 등왕각의 기를 지으면서 昔韓退之記滕王閣
자기의 글이 세 왕씨의 다음에 나열되는 것을 以詞列三王之次
영광으로 삼았으나, 爲有榮耀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구미속초를 해 놓으면 僕強顏續貂於四先生之後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안고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必賭世人之捧腹
장차 부끄러워 움츠리기에도 겨를이 없을 판인데, 將縮恧之不暇
또 영광이라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又焉有所謂榮耀哉
중략 & 시중 발췌:

그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誰能執熱兮 
시원한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 逝不以濯 
이전의 것을 계승한 이 있으니 前者有繼兮 
층층의 누각이 구름에 닿았네 層構軼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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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1327년 고려 충숙왕후기에 처음으로 이곳에 객관이 들어서고 1370년 작은 '정'(정자)형태의 건축이 이 객관에 들어섭니다. 그후 고려우왕대인 1380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이 건물이 불타버리는데, 이곳에 다시 '누'(누각)을 세운 겁니다. 그후 조선초기인 1487년, 다시 중수할 때 지은 기문이 이 김종직의 기록인 것이지요. 그런데 1380년 불타버린 '정'을 고치는 시기를 묘사하는 부분에 한국건축사에서 중요한 기록이 나옵니다. 

亭亦煨燼 정(亭)이 불타버렸는데, 
未幾 얼마 안되서
就其舊址 바로 그 옛터에
易亭爲樓者 정(
)을 바꿔서(개조해서) 루()로 바꾼 자가

현재 많은 번역문에는 이 풍영루가 '정'(정자)이던 1370~ 80년사이에 목은 이색이 이름을 붙인 구절 즉, "풍영이라 이름하고 而名以風詠" 이라고 되어 있는 구절을 '풍영루라 이름하고'라고 되는대로 번역해 놓았는데, 원문에는 엄연히 '루'라는 글자가 빠져있고 그냥 '풍영'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370년 지어진 최초의 건물은 '루'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문 서두에는 엄연히 이것이 바로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此風詠不可以不重修也라고 되어 있어, '루'가 된 1380년 이후의 건물을 1487년 다시 중수할때는 엄연히 '풍영루'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조선전기까지도 '루'와 '정'이라는 건축에 대한 구분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역시 조선전기의 저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에 '청풍루'에 대한 짧은 기록이 전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청풍루 역시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청풍루(淸風樓) 
객관 동북쪽에 있는데 옛 청풍정이다. 목사 홍석(洪錫)이 다시 지어 누로 만들었다.

여기서 다시 예전에 소개한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 (李奎報, 1168년∼1241년)의 현재 조선시대 후기양식의 '누'와 '정'이 규모로만 구분되고 비슷한 확장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확연히 다른 정의를 살펴 보지요.

構屋於屋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謂之樓 누(樓)라 하고 
作豁然虛敞者 툭 트여서 텅 비고 허창(虛敞)한 것을 
謂之亭 정(亭)이라 하였으니 
물론, 이 풍영루기록으로 '집위의 집'이라는 확증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리고 정과 루가 높이만이 아닌 규모의 차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누(루)라는 건물에는 당시까지도 '벽체'가 존재하던 양식이 빈번했음은 확실합니다 (이 기록에외도 앞으로 소개할 건물이 많습니다). 이 1380년에 지어져서 107년이 지난 (1487년) 풍영'루'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이렇습니다.

이 누각의 용마루와 서까래가 휘어져 기울고, 覩斯樓之甍桷撓傾
난간은 깨어졌으며, 欄楯撦閈 
기왓장은 처마에 떨어져 있고, 瓦飄于簷
비가 벽에 들이쳐 새서, 雨淋于壁 
붉고 흰 빛깔의 장식은 赤白之飾
모두 흐려지고 벗겨져서, 漫漶剝落

굵은 부분을 봐주십시오. 이 부분은 설순조(薛順祖)라는 조선전기 문신이 고려시대에 세워진 구 풍영루에 올라 그 퇴락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瓦飄于簷라는 말은 '기왓장이 처마에 뒹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밖에서 보면서 지붕의 처마기와가 뒹굴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에 올라 난간아래 보이는 아랫층의 처마에 (즉 상하층에 각각 처마) 기와가 뒹구는 것을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부분은 연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벽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雨淋于壁 벽에 비가 새서 (들이쳐서) 벽체에 있는 단청이 벗겨지고 있다라는 구절로, 이는 이미 구체적인 고려시대 '누樓'의 모습 (중층과 벽)에서 고려시대 루기록에 많이 등장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層構軼雲'라는 표현은 '층이 얽혀  혹은 층층이 얽혀 구름에 닿는다'라는 묘사입니다. 문인 특유의 과장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높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설명드렸듯 이 풍영루는 상주객사에 있던 고려후기-조선전기 누각으로 현전하지 않습니다. 혼동할 수있는 동명의 경남 남계서원정문의 풍영루는 1841년 (헌종 7년)에나 지어진 훨씬 후대의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 아직 제대로 된 연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삼국-고려-조선전기의 '루'에 대한 구체적 형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 합니다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어떤 모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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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려-조선전기의 '루'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이전 몇 관련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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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4/26 16:37 # 삭제

    하여간에 우리 전통 건축에 대한 그동안의 신화, 선입견은
    이제는 좀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표적으로
    기와집 99칸 신화 라던가
    도선국사가 우리땅은 풍수적으로 높은 집을 지으면 지력이 쇠퇴하므로
    건물을 낮게 지어라 신화 등등
    실제로 이런건 후대에 과대해석된 것일뿐
    과거 현실에서는 사실상 잘 지켜지지 않았다가 정답일듯 싶네요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한국 전통 건축 상황을 보면
    확실히 문제있는게
    기본적으로 소빙기 때문에
    기존의 삼나무,느티나무가 줄어들고 소나무 전나무가 증가해서
    높고 큰 목조건축물을 짓기 어려워졌을뿐만 아니라
    대규모 전쟁후 목재 수요 폭증 그리고 전체온돌 때문에
    건물들을 원래규모대로 짓기 어려워진 점도 고려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주사나 금산사의 경우에서 보듯이
    17세기 지방 양반 지주들 중심으로 재건 불사를 할때
    전쟁때 기술자들이 대거 납치되거나 죽어서
    조선땅에 크고 규모있는 건축을 정교하게 만들수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하네요
    기술 전수도 명맥이 끊기구요
    그래서 재건할때 좀 잡탕식으로 어정쩡하게 건설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법주사 팔상전도 그렇고 금산사 미륵전도 마찬가지 ㅠㅜ

    마지막으로 전쟁도 전쟁이지만
    조선 말기 19세기 정도되면 17세기 재건 당시의 건물 규모도
    유지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네요
    그 덕분(?)인지 건물 보수할때 아예
    중층 건물을 해체하고 단층으로 고쳐짓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방 사찰의 경우 이러하고
    서울 궁궐 건축 같은 경우도 좀 안습인게
    창덕궁 창경궁을 왜란 끝나자마자 바로 재건했지만
    인조때 이괄의 난 그리고 병자호란때
    상당부분 다시 불탔거든요
    근데 그 건물들을 신축하지는 못하고
    광해군때 짓다가 만
    사직단 근처 인경궁 건물 거의 대부분 헐어다가
    창덕궁 창경궁 재건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원군때 경복궁 재건할때도
    마치 전부다 신축이라도 해서 국가재정이 파탄날뻔했다고 하지만
    실제론 이것 역시 상당수 건물을
    당시 사용하지 않던 경희궁 건물을 헐어서 이건했다네요
    결국 지방 사찰이나 서울 궁궐이나
    조선 후기 재정 파탄에 직격탄을 얻어맞은 거죠 ㄷㄷ

    이런거 보면 고려시대나 조선전기보다
    조선후기가 경제발전 상업발전 운운하는 기존 역사해석이
    과연 옳은 건지 의문이 들수밖에 없더라구요


  • 역사관심 2015/04/27 09:22 #

    하나하나 선입견없이 발굴해내려 노력중인데, 글에 적어주신 많은 부분은 매우 이론적으로도 흥미로운 부분같습니다. 특히, 수종과 건축의 크기에 대한 이런 속칭 '설'은 넷상에서는 자주 나오는 주제인데, 학계에서 제대로 접근한 논문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파악하는 바로는 없었습니다만).

    1) 17세기 건축시 임란때 (마치 도공처럼) 건축가들도 죽거나 납치되어서 건축이 축소되고, 2) 19세기말 17세기 재건당시 건축규모도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부분도 아주 흥미로운데 혹시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있으시면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술적으로 정말 중요하고 흥미로운데 꼭 좀 알려주시면 합니다.

    항상 좋은 정보와 글 감사드립니다.
  • ㅇㅇ 2015/04/27 12:00 # 삭제

    사실 자세한 출처라고 할것도 없죠 뭐

    위에 저 글은 이미 신문기사나

    현재 한국내 개별 사찰들 홈페이지 사찰 연혁에 다나오는 내용입니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조선 후기 중수 문제도 마찬가지구요

    어떤 일관된 건축술로 만들어진게 아니라

    짜집기 식으로 여러가지 양식이 뒤섞여 있다는거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더군요

    19세기 대웅전 중수할때 중층이 단층으로 바뀐건

    완주 송광사가 그러하구요 (이런 케이스가 은근히 많더군요)

    불교사찰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 평양 성곽의 문루 (대동문인지 보통문인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목조 건축이 이전보다 축소되었다고 하네요 ( 북한 역사학자 증언, 이건 방송에 나온듯 )

    그리고

    좀 다른 얘기지만 나무 수종과 건물 규모와 관련해서

    한국만 직격탄을 얻어맞은게 아니라

    중국도 그와 비슷한 곤란을 겪었더군요

    명나라 청나라때 자금성 같은 경우도

    현존하는 대다수 건물은 1700년대 중수된 거더라구요

    중국같은 경우 기후변화와 산림남벌등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 시절 중국 북부 중부 지역은 쓸만한 나무가 상당부분 사라졌다고 합니다

    중국 전통 건축에서 벽돌이 전국적으로 널리쓰인게 이런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하네요 이런 연유로 자금성 중수할때 멀리 운남성의 나무를 사용..

    암튼 소빙기와 맞물린 소나무 전나무 수종이 건출 규모에 영향주는건

    단순한 인터넷 설이 아닌것 같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이나 건물터에서 체취한 나무 수종 보면

    거의 압도적으로 참나무 삼나무 느티나무가 많긴 하죠

    당시 만주와 한반도 기후 자체가 조선시대보다 높았다는 연구 기록도 본 것 같네요

  • 역사관심 2015/04/28 03:08 #

    몇 정보는 제 블로그에서도 다룬 바 있는 것이군요. 자금성의 경우도 흥미롭군요. 요즘들어 다시 활엽수가 한국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니만큼 이왕이면 이런 수종들로 요즘 활발해지는 삼국-고려시대 건축의 재건을 하면 합니다. 역사성에도 더 맞고 말이지요.
  • 응가 2015/05/03 23:06 # 삭제

    우리전하18년 이라한게 꽤나 흥미롭네요... 찾아보니 금상재위 몇년이라는 말도 명,청의 연호와 같이 사용한것을 보니 실록에 기록된 태조몇년 처럼 고려 광종때처럼 연호를 직접만들지는 않았지만 광무년, 융희년 전에도 그러한 여지를 충분히 남긴것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5/04 06:14 #

    이 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정말 그렇네요. 성종대에 저런 주체적인 칭호가 있었다는 좋은 예가 될수도 있겠습니다.
  • 응가 2015/05/20 18:42 # 삭제

    기둥을 높게 올려 층을 만든 건축물도 누 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여말선초의 누각에 관련된 다양한 기록은 여말선초의 한옥의 특징때문에 그 기록이 많은것 같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여말선초 한옥(남흥재사, 달전재사 향단 설선당 등등)대부분이 ㅁ자나 ㄹ자 형태를 띄고있고 기둥을 높게 올린다음 누의 형태를 만든 경우가 많아서 조선중후기의 넓게 펼쳐지는 형태가 되는 한옥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집안에 누각을 두었다는 기록이 많은것 같습니다.
    1층과 2층 모두 지붕을 만드는 형태는 상대적으로는 적기는 하지만 꽤나 규모가 있는 궁궐이나 시전에는 다들 한동정도는 있었던것 같습니다. 덕수궁의 석어당, 창덕궁의 징광루, 수원행궁에도 한동이 있었고 남대문의 시전에도 중국식이아닌 누가 찍힌 사진이 있습니다.
    http://terms.naver.com/imageDetail.nhn?docId=1796473&imageUrl=http%3A%2F%2Fdbscthumb.phinf.naver.net%2F1694_000_25%2F20130627052506772_0PK3ECU15.jpg%2Fz2_cp08010010000.jpg%3Ftype%3Dm4500_4500_fst_n%26wm%3DY&cid=49267&categoryId=49267
    >월산대군방이라고 적혀있는데 월산대군저가 나중 덕수궁으로 변하니 덕수궁의 석어당 같습니다. 덕수궁 대화재전 사진같은데 원래는 ㄱ자 형태였던것 같습니다. (관련없는 말이지만 석어당을 복원할때 중층으로 복원했던것은 정말 잘한것 같습니다)
    http://data.adic.co.kr/lit/publication/tmp/S0010398/00301.gif
    http://cfs10.blog.daum.net/image/8/blog/2007/12/18/11/26/47672fc3b3258&filename=south3.jpg
    >우연히 찾은 남대문 안의 중층건물 사진입니다.
    평양이나 개성 시장의 중층건물사진은 상대적으로 많은데 서울은 꽤나 찾아보기 힘들더라구요.
  • 응가 2015/05/21 18:10 # 삭제

    구한말은 아니지만 1945년 에 찍힌 누각도 존재합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3/US_Army_in_Korea_under_Japanese_Rule.JPG
    한눈에봐도 일본풍이나 중국풍은 아니고 또한 작은규모는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지역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이남이 확실합니다
  • 역사관심 2015/05/22 12:59 #

    좋은 말씀과 링크글 감사드립니다. 추후 살펴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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