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지금, 여기, 나'를 향해 있지 않다 (푸코...읽기, 우치다 타츠루 중) 독서

좋은 책은 어떤 페이지를 다시금 오랜만에 펼쳐도 많은 생각할 점을 던져주고 새로운 깨달음을 (현재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한)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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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금, 여기, 나'를 향해 있지 않다.

나는 크리스마스 때 학생들이 집에 모였을 때 직접 편집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었습니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야마시타 타츠로 (주: 80년대초 유명한 일본의 싱어송라이터)의 [크리스마스 이브], 존 레논의 [해피 크리스마스], 왬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등입니다. 이들 노래는 스무 살 정도의 학생들이라면 어릴 적부터 자주 들었던 친숙한 음악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학생들이 이 노래들을 전부 흘러간 노래 한묶음 정도로 생각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빙 크로스비 (1903~1977년)와 야마시타 타츠로 (1953년~) 중 누가 연상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아무튼 흘러간 노래잖아요?"

그렇지 않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옛날 노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주: 1983년)는 최근 노래야,라고 말하면서 내가 그들과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나 역시, 실시간으로 '그것'이 생성되지 않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이는 모두 '과거의 것', '과거부터 계속 있어왔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빙 크로스비와 야마시타 타츠로 가운데 누가 더 빨리 데뷔했는지를 모르는 학생들을 보며 웃었던 나도 한 세대위의 사람들로부터 "이미지와 김추자 가운데 누가 더 데뷔가 빠른가?" 라는 말을 들으면 (이해의 편의를 위해 우리 식의 예를 들었음- 옮긴이) "뭐, 그런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둘다 오래된 사람이잖아?"라고 별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문물에는 각각 고유의 탄생일이 있고 탄생에 이르는 고유한 '전사前史'의 맥락을 (주:그리고 그것이 생겨난 동시대의 맥락을) 파악하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잊습니다. 그리고 자기고 보고 있는 것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며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거부터 계속해서 지금처럼 있어왔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믿습니다.

푸코 (1926~1984년)은 이런 믿음을 분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그의 대표작인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광기의 역사], [지식의 고고학]등의 제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옥'이 되었건 '광기'가 되었건 또한 '학술'이 되었건, 우리는 그것이 시대나 지역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탄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그러나 망각하기 쉬운) 사실을 지적하고 그 제도나 (문물이나) 의미가 생성된 현장으로 거슬로 올라가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의 '사회사'입니다.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훗날 롤랑 바르트는 '영도 (zero degree)'라는 학술용어로 부르게 됩니다. 구조주의란 한마디로 다양한 인간적 여러제도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주: 건축, 역사, 철학자체도 다 포함됨)등)에서의 '영도의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지금, 여기,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진화해온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향해 곧바로 흘러왔고, 세계의 중심은 '여기'이며, 세계를 살고 경험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재판부는 다름아닌 '나'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여기, 나'를 역사의 진화에서 최고 도달점,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푸코는 '인간주의 Humanism'라고 부릅니다 (자아중심주의의 일종입니다). 인간주의란 다른 말로 바꾸면 '지금/여기/나' 주의가 됩니다. 푸코는 '지금, 여기, 나'를 근원적인 사고의 원점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시각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지의 자세를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주: 이는 인지학-뇌과학적으로도 말이 된다- 범주화의 한 현상일지도). 

인간주의적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차례로 '보다 좋은 것', '보다 진실한 것'이 연속적으로 현현하는(나타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지금여기내]가 모든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이 최고도달점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전제입니다). 푸코는 이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지금, 여기, 나'를 도달점으로 생각하면 모든 사건은 '진화'라는 '이야기'속에 잘 정돈이 되겠지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금, 여기, 나'를 향해 진화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직선적 추이'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현실의 일부만을 떼어내고 그 이외의 가능성에서는 조직적으로 눈을 돌려야 이른바 역사를 꿰뚫는 '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입니다. 즉 '역사를 꿰뚫는 한가닥 선'을 보기 위해서는 선택된 단 하나의 '선'만을 남기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건(또는 문물)이나 그와 관계가 없는 역사적 사실은 배제하고 버려야 합니다.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부계전승의 모계배제에 의한 2의 n 제곱 마이너스 1외에 대한 배제의 혈연관계로 인한 단일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예등을 설명한 후). 우리는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숙명적 각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조직적인 배제)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어떤 조상하나 (부계)만을 선택하고 그 이외의 조상은 망각하고 소멸시켜야 조상으로부터 나에게 '일직선'으로 계승된 민족적 정체성의 환상이 성립합니다 (나는 증조부의 이름은 알지만, 증조모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무수한 조상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배우자를 다른 사람으로 선택했거나 아이를 만들기 전에 죽었다면 '지금, 여기,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 나'라는 것은 역사에 무수히 존재하는 분기점이나 어느 방향이 '어쩌다가' 선택되어 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중략.

예를 들면 증기기관차가 지금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와트의 증기기관을 운전 수단으로 만들 때 많은 기술자들이 당시에 먼저 생각한 것은 '말처럼 지면을 차고 전진하는 기계'였습니다. 그때까지의 운송수단은 모두 '무엇인가가 차를 끄는' 구조였기 때문에 인습적 상상력이 '쇠로 만든 말'의 설계로 향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티븐슨이 '무엇인가가 차를 끄는' 것이 아닌 '차바퀴가 스스로 회전하는' 기관차를 구상했는데 이것은 콜럼버스의 계란이나 다름없는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쇠로 만든 말이 실용화되었다면 그 모습을 한 증기기관차 (나 탈것)에 익숙해졌을 것이고 그 외의 다른 형태를 가진 운송수단을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이 '지금, 여기, 나'에 이른 것은 다양한 역사적 조건이 예정 조화적으로 종합된 결과라기보다 (쇠로 만든 말로 대표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배제되어 오히려 점점 홀쪽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 푸코의 근원적인 물음이었습니다.

푸코는 그때까지의 역사가가 결코 제시하지 않았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져왔는가?'가 아니라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사라졌)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을 알기 위해서는 사건이 생성된 역사상의 그 시점- 사건의 영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해보아야 합니다. 고찰하고 있는 주체인 푸코(나) 스스로 '지금, 여기, 나'를 '괄호에 넣고' 역사적 사상 그자체와 정면에서 마주한다는 지적 금욕을 스스로 부과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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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를 쉽게 설명하는 저서인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의 푸코부분은 예전에는 읽고 지나쳤던 부분인데, 요즘 내가 사료를 뒤지면서 느끼는 점과 확실히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어서 적어둔다.

'사상과 사건'만이 아니라 '건축과 의복'을 포함하는 문물 역시 사람들은 '지금 여기 나' ('지금'은 인식적으로 알기 쉬운 바로 가까운 과거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는 현재 살고 있는 영토국가정도의 의미까지 확장될 것이다)를 중심으로 쉽게 생각해버리곤 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뇌의 작용 (범주화로 대표되는 뇌용량의 Efficiency 작용)이며 망각은 그 작용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나 문화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그런거야라고 치부해선 곤란한 작용이다 (물론 카가 이야기했듯,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해석하는 것이 역사가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 해석이란 것은 최대한 그 모습 그대로 다가서려는 것의 '한계점'에 도달했을때만이 주어지는 면죄부이다).

'그 당대', 그리고 '그 당대에 직접 영향을 주는 바로 전대', 그리고 '그 당대에 스티븐슨의 기관차'같은 패러다임의 등장이 있는지를 세밀하게 고찰하는 것인 역사가나 문화재전문가들의 할 일 이다. 그리고 그것을 푸코는 '지적 금욕' (쉽게 '지금/여기/나'위주로 생각하려는 뇌의 작용을 금하는)이라 부른 것이다.

항상 염두해 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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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바퀴로 이미 체제가 바뀐 후에도 '말' 모습에 천착하는 현상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덧글

  • 평론가 2015/05/04 23:40 # 삭제

    오호 퍼가고 싶은 글이네요.ㅋㅋ
  • 역사관심 2015/06/27 03:29 #

    이제 봤습니다 .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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