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소재 임진왜란前 전기 경복궁 회화 공개 (추정, 연대미상)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경복궁이라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은 가장 많이 알려진 것 같으면서도, 사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는 베일에 쌓인 건축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모두 아시다시피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명확히 '조선전기' 궁궐건축을 대표하는 모든 건축물들이 전소되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후 조금씩 다른 궁들을 중심으로 재건되던 한양의 궁궐건축중 정점인 경복궁은 무려 2세기반인 235년을 폐허로 지내다가, 고종대에 들어와서야 (1868년) 대규모로 재건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경복궁의 전소는 타 문화분야, 철학분야와 더불어 조선의 '건축'을 전기와 후기로 가르게 되는 하나의 아이콘같은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은 무려 왕조가 하나 바뀔 정도의 시기의 공백기 (235년)를 생각하면, 전기의 것과는 부분적인 (삼조삼문등의 구조나 비교상의 규모등) 연관성을 제외하고, 개개의 건물의 경우 많이 다른 것이었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많은 전통건축에 관심있는 이들의 탐구대상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 갈증을 조금 풀어주는 그림이 얼마전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언론에서는 거의 다룬 바가 없고, 논문의 일부로만 잠깐 흑백사진으로 등장했을 뿐입니다. 논문의 저자인 홍선표 (2013)에 의하면 이 작품은 에도시대 다니 분초 일문(谷文晁 一門, 1763-1849년)이라는 유명화가에 의해 모사된 [관아후원계회도官衙後園契會圖] 라는 그림입니다.

아쉽게도 이 그림 표제와 좌목은 없고 그림만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원본이 아닌 '모사본'입니다. 그림구도는 1557년의 <동궁책봉도감계회도>와 유사하게 백악산을 조산으로 하는 명당도의 구성원리로 이루어졌는데, 한양의 도읍 전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 차이를 보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홍선표 교수에 따르면 "경복궁이 건재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임란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지만 연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계회는 태평성세의 서운이 깃든 한양의 진산과 법궁을 화면 상부 중앙에 배치하고 그 서편의 관아 후원에서 열리고 있다. 동관계회의 경우, 15세기 후반부터 관청의 정원이나 후원에서도 자주 열렸지만, 이러한 관아 후원계회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라고 되어 있어 분명히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추가로 필요해 보입니다. 만약 원본이 존재한다면 그림구도으로 보아 아마도 임란직전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官衙後園契會圖 (일본개인소장)

그럼 조선전기의 경복궁에 대한 구조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태조 4년 실록기록에 처음으로 건설된 초기 경복궁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관심이 있는 '루'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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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8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9월 29일(경신)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다. 그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     
是月 大廟及新宮告成
이달에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대묘(大廟)의 대실(大室)은 7간(間)이며 당(堂)은 같게 하고 실(室)은 따로 하였다. 안에 석실(石室) 5간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간씩이며, 공신당(功臣堂)이 5간, 신문(神門)이 3간, 동문이 3간, 서문이 1간이었다. 빙둘러 담장을 쌓고 신주(神廚)가 7간, 향관청(享官廳)이 5간이고, 좌우 행랑이 각각 5간, 남쪽 행랑이 9간, 재궁(齋宮)이 5간이었다. 새 궁궐은 연침(燕寢)이 7간이다. 

동·서 이방(東西耳房)이 각각 2간씩이며, 북쪽으로 뚫린 행랑이 7간, 북쪽 행랑이 25간이다.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남쪽으로 뚫린 행랑이 5간, 동쪽의 소침(小寢)이 3간이다.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小寢) 3간과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다.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이 5간, 정사를 보는 곳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간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간,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간이다. 처음 남쪽에서 통행하는 행랑 5간이 동쪽 행랑에 닿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간도 역시 남쪽 행랑 5간에서 서쪽 행랑에 닿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간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正殿)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간이 서쪽 행랑이 되어, 이상이 내전(內殿)이다.

정전(正殿)은 5간으로 조회를 받는 곳으로 보평청의 남쪽에 있다. 상하층의 월대(越臺)가 있는데,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넓이가 1백 12척 5촌(寸), 동계(東階)·서계(西階)·북계(北階)의 넓이가 각각 15척이다. 윗층계[上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石橋)가 5층[五級]인데 중계(中階)의 사면 넓이가 각각 15척, 아랫층계[下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가 5층이다.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 궁전뜰)에 닿았다. 넓이는 동서(東西)가 각각 80척, 남쪽이 1백 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간은 전(殿)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행랑은 각각 17간씩이며, 수각(水閣)이 3간, 뜰 가운데에 석교(石橋)가 있으니 도랑물 흐르는 곳이다. 문(門)의 좌우의 행랑이 각각 17간씩이며, 동·서각루가 각각 2간씩이다. 동문을 일화문(日華門)이라 하고, 서문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者房)·상의 원(尙衣院)이며,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지 방(承旨房)·내시 다방(內侍茶房)·경흥부(敬興府)·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와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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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초창기 즉 1395년 지어진 경복궁의 기록을 보면서, 이 확대한 부분을 비교해 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분명 지금 볼 수 없는 루나 건축물들이 많이 보입니다 (저 '각루'라는 것은 십자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광화문 아래쪽에서도 보입니다.

경복궁 동루/서루, 동각루/서각루, 동루고/서루고

요즘 천착중인 '루'의 기록이 역시 흥미로운데, 이 기록에는 확실히 당시 경복궁에는 동루와 서루라는 건축물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상하층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나옵니다.

東隅有連排三間 西隅有連排樓五間 (중략) 東樓三間 有上下層 (중략)西樓三間 有上下層 (중략) 東西角樓各二間 중략) 東西樓庫之類總三百九十餘間也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중략)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중략) 서루(西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중략) 동·서각루(角樓) 각각 2간 (중략)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태조실록을 보면 이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합니다. 또한 이 누각들은 정자형 누정이 아닌 사방이 막힌 '누각'들로 추정됩니다. 아래 기록을 보면 '이 동서루 (용문루, 융문루)'안에 궁궐의 중요서책들을 보관하고 있지요.

燕山 49卷, 9年(1503 癸亥 / 명 홍치(弘治) 16年) 3月 28日(乙未) 
경복궁 용문루의 책을 융무루로 옮기게 하다    

傳曰: “景福宮隆文樓所藏書冊, 竝移隆武樓。 且東武樓開鑰, 同守宮內官開閉。”
전교하기를, “경복궁 융문루(隆文樓)에 간직한 서책을 모두 융무루(隆武樓)로 옮기고, 또 동무루(東武樓)의 자물쇠를 수궁 내관(水宮內官)으로 열고 닫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루고樓庫' (누고)라는 것은 직역하면 2층창고(다락창고)라는 뜻이 됩니다. 역시 조선전기대 기록에만 나오는 (광해군대가 마지막) 건축으로 루고 역시 2층이었음은 1425년 세종대 기록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세종 28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6월 23일(신유) 
前朝司宰魚物庫在松都, 纔單三間而已, 五百年間經國之費, 未嘗闕乏也。 今司宰監則樓庫三四, 巍嶪宏壯, 猶未能盡容, 多作假庫。
전조(前朝) 사재(司宰)의 어물고(魚物庫)가 송도에 있었사온대, 겨우 단층 세간뿐이었사오나, 그래도 5백 년 동안 국가에서 소용되는 데 모자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재감에는 이층 창고가 서너 채가 있어 높디 높고 크기가 굉장하오나, 그래도 다 들여넣을 수 없어서 가창고(假倉庫)를 많이 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누고(樓庫)가 巍 (높고 클 외) 嶪 (높고 험할 업) 宏 (클 굉) 壯 (장대할 장) 즉 높고 높고 굉장히 크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그 규모를 엿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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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房 (누방, 다락방)

다음으로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중략)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이라는 기록에 나오는 '누방(樓房)"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다락방, 즉 2층 (누)에 있는 방이 됩니다. 이 '누방'이라는 단어는 실록에서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직전인 명종대 기록을 마지막으로 조선궁궐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즉 후대의 경복궁에서는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 다락방의 기록은 역시 조선전기인 연산군대에 등장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연산 61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1월 26일(병오) 1번째기사
경복궁의 가면극 하는 곳의 가가를 온돌로 급히 짓게 하다     
丙(辰)〔午〕/傳曰: “景福宮山臺處假家, 令該掌司急造, 幷設樓房及溫堗。”
전교하기를,
“경복궁의 산디놀음하는 곳의 가가(假家, 임시거처방)를, 해사(該司)에 명하여 급히 짓게 하고, 아울러 누방(樓房)과 온돌을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현재 번역본에는 '누와 방과 온돌로 만들라'라고 이상하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樓房及溫堗" 이라는 말은 문맥상 '누방과 온돌로 만들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가가(假家 임시방)를 누방과 더불어 온돌로 만들게 하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조선전기인 명종대에도 누방이 나옵니다.여기서 '초책'이라는 것은 초벌로 거칠게 기록한 문서를 말합니다, 즉 초본원고정도 되지요. 

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7일(정묘)
臣初入經筵而退, 與王希傑。在政院樓房, 憑修草冊, 相與言曰
신이 처음으로 경연에 들어갔다가 물러나와 왕희걸(王希傑)과 더불어 궁궐정원의 다락방에 앉아 초책(草冊) 을 증빙 정리할 때 서로 말하기를...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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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누방'이라는 곳은 확실히 상층에 존재하던 방임을 보여주는 역시 임란전인 1525년 중종대 기록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탕빙이라는 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당시 한량이던 윤탕빙(尹湯聘)을 말합니다.

중종 53권, 20년(1525 을유 / 명 가정(嘉靖) 4년) 3월 14일(계유) 5번째기사
유세창의 공술    
유세창을 국문(鞫問)하니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나이는 32세입니다. 신은 서소문 밖에서 살고 한량 윤탕빙은 아이고개(阿伊古介)에서 사는데 갑신년 12월부터 반송정(盤松亭)에서 서로 만나 그대로 함께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탕빙이 매양 신의 집에 왔고 더러는 반송정에서 함께 활쏘기를 하였습니다. 이달 초승 무렵에 폐문(閉門)할 때쯤 탕빙이 충찬위(忠贊衛) 김말진(金末珍)과 신의 집에 왔다가 신이 말진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평소 침실로 쓰는 행랑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도록 했습니다. 중략.

아우 세영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4경 무렵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도 각각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탕빙이 신에게 ‘함께 다락방으로 올라가 이야기하자.’고 하며 탕빙이 신에게 ‘전시(殿試) 보이는 날 함께 놀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신이 ‘어떤 놀이를 하며 노느냐?’고 묻자, 탕빙이 ‘반송관(盤松館) 뒷동리에 각기 술과 과일·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소혁(小革)12865) 을 쏘며 놀이한다.’고 하기에, 신이 ‘좋다.’고 했었습니다. 중략.

원문을 보면 이렇습니다.
‘共上樓房, 作話。같이 다락방 (누방)으로 올라가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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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寢室 (루의 침실)
또한 좀 더 전대인 세종대에는 (후일 더 알아볼 주제지만) '침루'라는 기록까지 등장합니다. 즉 '침실이 있는 루'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종 107권, 27년(1445 을축 / 명 정통(正統) 10년) 1월 28일(임인)
거처를 연희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승정원에 전지하다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어제 좌의정 등이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이 있다고 하여 초수리(椒水里)로 가기를 청한 것을 듣지 않았고, 또 개성으로 가기를 청한 것도 또 듣지 않았으나, 문득 생각하니 만일에 벌레와 뱀이 과연 많다면 안심하고 여름을 지내지 못할까 싶다. 

또 소나무가 울밀하고 북쪽 담이 낮고 미약하며, 다락(루)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환자(宦者) 전길홍(田吉弘)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을 가 보고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昨日左議政等以衍禧宮多蟲蛇(중략)若蟲蛇果多 恐未安心過夏 且松木鬱密 而北垣低微 樓寢室遮陽朽破 將伐松築垣 修葺遮陽 予欲移御他處 畢修而還

樓寢室 (루침실), 즉 '누의 침실'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침루에 '차양'이 있었음도 나옵니다. 여기서는 '누침실'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역시 조선전기인 성종대에는 '寢樓' (침루)라는 단어도 등장합니다. 이 침루에 대해서는 후일 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짚어볼 점으로 많은 조선전기의 저택들이 그러하듯, 이당시 경복궁도 왠만한 건물들은 '행랑'으로 연결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회도에 나오는 경복궁과 현재의 경복궁을 나란히 사진으로 비교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대한 지도는 몇 종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1767년 영조이후로 제작년대를 추정하고 있고 따라서 그러한 그림들에 그려진 건축들은 대부분 조선후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확실한 연대추정단서가 없어서) 그림이 이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현재는 없는 '수각(水閣)'이 두 채 나오는 등, [관아후원계회도]와 비교해 볼만한 부분이 꽤 있어 보입니다. 또한, 아주 예전에 다룬 바 있는 경복궁 전기 대형건물지 발견 뉴스에 이런 부분이 있었지요.

"경복궁 복원공사가 한창인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구간. 좌우 양측 용성문과 협생문 자리에서 초석과 기단 등 건물의 기초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건물터가 나왔습니다.가로 11.2m, 세로 50m 정면 12칸, 측면 3칸의 동서 대칭구조입니다 (뉴스중)" 2008년 뉴스.
이 건물지는 그림에서 어디일까요? 광화문과 흥례문이 계회도 속에서 확인되면 자연스레 그 가운데 위치한 건물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 그림이 더 확실한 화질로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학술적 접근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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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정작 계회도의 주인공에게는 관심이 없었군요. 사실 이 부분도 많은 관심을 기울일 부분으로, 경복궁 서남쪽에 위치했던 관아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관아'의 '후원' (즉 뒷 정원)에서 선비들의 '계회' (뒤에 보이죠)가 있었던 것을 기념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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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iekie 2015/04/30 10:50 #

    흥미롭네요. 조선 전기 경복궁에 대한 더 많은 자료를 보고 싶어요.
  • 역사관심 2015/04/30 11:16 #

    저 역시 그렇습니다. 좀 더 명확한 그림은 없는지... 운무는 왜들 좋아해서 ㅠㅜ
  • ㅇㅇ 2015/04/30 11:57 # 삭제

    ㅎㅎ 저 운무는 중국화풍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나라때 자금성 그림들 보면 저런류의 운무가 많이 보이죠

    보통 성종때 왕세자 탄생도를 불화로 그린 조선전기 석가탄생도 그림에 나오는

    조선전기 궁궐 그림이 중국풍이라는 지적을 하는데

    솔직히 현존하는 조선전기 궁궐 그림보면 화풍 자체가

    중국스타일이라서 건물 그림들이 그쪽과 유사한게 많이 보입니다

    명종때 궁중숭불도도 그렇고 창덕궁 인정전 그림있는 은대계회도도

    그리고 이 포스팅의 관아후원계회도도 마찬가지

    결국 무조건 중국풍이니 저걸 토대로 궁궐 고증하는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기보다는

    고증에 있어서 참고할 건 참고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솔직히 고증을 문제삼을려면

    19세기 초반 창덕궁 창경궁 그림인 동궐도도

    실제 현존하는 창덕궁 건축양식과는 좀 차이가 있는게 사실이죠

    현재 남아있는 창덕궁 건축양식은 1800년대 초 동궐 화재 이후

    재건된 궁궐양식이 그대로 남아있거나 현대에 복원된 거거든요

    근데 그것이 동시대 동궐도와 모습이 다르다?

    결국 그런걸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까놓고 정석적으로 고증을 하려면

    저런 류 궁궐그림보다는 차라리 궁중의궤를 추적하는게

    더 정확하겠죠 (사실상 이게 설계도나 마찬가지이니)

    현존하는 궁중의궤가 조선 중기 선조때 것부터 있으니

    실제로 조선중기부터 조선말기 궁중의궤에 나오는 궁궐 개별 건물들을

    좀 살펴봤거든요

    단순히 창덕궁 인정전만 봐도

    선조-광해군 당시 건물과 19세기 순조이후 건물의 외관이 좀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것이 조선 중기보다 차분한 편이죠

    기와 치미도 중기 것은 마치 중국 건물처럼 위쪽으로 솟은 느낌이구요

    아무튼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했으면 하네요

    이 포스팅 건물 그림도 그렇고 조선 전기 궁궐이나 일반 양반집 건축 기와 지붕보면

    조선 후기 처럼 지붕 가운데가 곡선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처럼 일자인 경우가 많은데

    그게 실제 모습도 그랬는지는 조금 의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시각적으로 조선 전기 궁궐 관아 건축 양식을 살펴볼수 있는게

    이번에 재건되긴 했지만 서울 숭례문 문루가 있고

    임진왜란 끝나자마자 조선 전기 성종때 의궤를 토대로 재건된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이나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이 있는데

    분명 조선 후기 건물양식인 흥인지문이나 경복궁 근정전과는

    건물 외양이 많이 바르지만 지붕 가운데 곡선은 조선 후기와 거의 유사하더군요

    오히려 곡선이 후기보다 약간 더한것 같은 느낌

    (물론 후기에 보수하면서 이게 달라졌다고 볼수도 있지만

    양식이 달라지는게 모두 달라질수도 있고 하나도 안달라지는 경우도

    현존하는 건물이거나 20세기초 사진보면 확실히 알수 있더군요

    일단 장수향교 대성전, 부석사 무량수전, 무위사 극락전 같은 경우는

    조선 중후기에 보수가 있었음에도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것 같구요

    금강산 장안사 대웅보전 같은 경우는 조선 후기 보수되면서 원래 양식을

    많이 잃은 것 같더군요 내부는 모르겠고 외부만 보기엔 사진상으로 그렇습니다 )


    정리하자면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지

    무조건 아니다 맞다 주장할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이 포스팅에 인용하신 조선 초기 경복궁 기록은

    기본적으로 건물 칸수가 정면 칸수만 표시했다는 걸

    염두하고 판단해야 할듯 싶습니다

    상식적으로 궁궐 정전이 5칸이고 전체 칸수가 390칸이라는게

    말이 안되죠

    결국 실제론 조선 초기

    정전은 전체 칸수가 25칸이고 궁궐 전체로 따지면 약 2000칸 정도라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5/01 03:06 #

    꽤 생각해볼 문제라 생각이 드는군요. 음, 논문주제로 선정해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계속 글쓰며 뇌리에 남을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칸수에 대한 생각 역시 맞는 듯 합니다. 예전에 논고에서 비슷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99칸이 넘는 저택이 굉장히 많았으며, 그 근거로 든 예가 많았습니다. 이때 칸수계산을 비슷하게 하더군요).
  • ㅇㅇ 2015/04/30 12:08 # 삭제

    그리고 궁중의궤에 대한 걸 몇개 찾아보다보니

    조선전기 한양 궁궐 모습을 아주 자세하게 살펴볼수 있는 의궤가

    임진왜란 직후 조선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즉 선조 말기 한양도성 재건시 궁궐 재건하면서

    당시 조정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선 전기 성종때 한양 궁궐 의궤와 명종때 재건된 한양 궁궐 의궤를

    묶어서 그걸 토대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했다고 하는데

    그 의궤 묶음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이건 임진왜란때 약탈된 것도 아닌데...


    혹시 이괄의 난, 병자호란, 19세기초 동궐 화재때 불에 탄건지

    그것도 아니면 일제강점기 불법 반출된 건지

    ... 도무지 행방을 알수가 없네요

    아무튼

    조선 전기 모습이 반영된

    왜란 이후 재건된 창덕궁 창경궁 건축물은

    일단 19세기초 화재로 상당부분 사라졌다고 하네요

    지금 보이는 대다수 건물은 그 이후 건축양식을 반영



  • 역사관심 2015/04/30 23:46 #

    아 정말인가요. 그렇다면 창건당시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물들은 어느정도 경복궁(전기)의 영향을 받았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19세기초이전의 그림은 있을 듯 한데).
  • 이 감 2015/04/30 20:16 # 삭제

    각루는 성곽건축에서 꺽이는 곳에 짓는 초소 누각이니 궐대겠죠. 동서십자각 외에 조선전기에는 인용하신 실록에 보이듯이 근정문 혹은 흥례문 양 옆 모서리에도 궐대가 있었을 것으로 보더군요.
  • 역사관심 2015/05/01 00:15 #

    그렇네요. 그런데 저 맨 앞쪽에 4개정도 보이는 저 작은 건축들은 뭘까요? 혹 저게 궐대는 아닐테고... 여튼 궁금한 그림입니다.
  • 이 감 2015/05/01 00:30 # 삭제

    그림 자료의 해상도가 낮은게 아쉽습니다. 고해상도 자료가 풀려야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 역사관심 2015/05/01 00:42 #

    동감입니다. 왜 항상 궁금한 그림은 UFO화질인건지;;
  • ㅁㅁ 2015/05/01 17:08 # 삭제

    당시 경복궁에 대한 연구에 따른 평면도입니다.
    http://m.blog.naver.com/lnn0909/220116648412
  • 이 감 2015/05/01 21:48 # 삭제

    이 평면도에는 전문과 오문 즉 지금의 근정문과 흥례문 자리 양 옆으로 모두 각루가 있군요. 오문 지나 일화문과 월화문도 2층 문이라하니 좀 더 변화감있는 느낌도 있네요.
  • 역사관심 2015/05/01 22:52 #

    고맙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도면이네요. 출처를 혹 알수 있을까요? 누가 연구를 제대로 하신듯 한데...
  • 응가 2015/05/03 22:43 # 삭제

    생각보다 전기보다는 고종때 중건되었을때가 구조가 복잡하고 건물들수가 많네요. 침전도 건물이 더 많은걸 보니 조선중기 이후 정형화되고 복잡해지기 시작한 민가의 한옥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 같습니다.
  • 평론가 2015/05/03 03:09 # 삭제

    헐 설마 자료가 더 있을 줄이야 님덕에 좋은자료 잘보고 갑니다...눈물이..이제 더이상 신비의 세계가 아니네요..
  • 역사관심 2015/05/04 06:08 #

    화질이 아쉽긴 합니다. 일본소재 계회도들이 파악은 좀 되고 있는듯 한데, 아직 많이 알려지지는 않아서 아쉬워요.
  • 응가 2015/05/03 22:35 # 삭제

    경회루가 원래 3층에다 1층의 돌기둥에는 용과 꽃을새겨 아름답기 그지없었다하나 지금의 경회루도 아름답지 않다고는 할수없겠죠. 지금의 경회루도 중국과 일본에서 무시할수없는 규모에다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것은 경회루앞에 원래의 형태를 잘 알려주는 조그만 모형이나 사진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게 바람입니다.
    누각으로는 가장 안타까운게 창덕궁 징광루라 생각하는데 경훈각을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 만경전을 복원하고 청기와를 올린 건물로 다시 복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역사관심 2015/05/04 06:10 #

    그렇습니다. 두 건축 모두 나름의 미학이 있지요. 말씀대로 아쉬운 점은 이웃국들에 비해, 다양한 전대의 건축들에 대한 가시적인 정보의 제공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점.넷상으로도 모형사진조차 (삼국~고려의 1000년간) 당시 건축을 보기 힘든 실정은 분명 문제가 있지요.

    말씀하신 건축들의 경우, 유구나 사료가 확실해서 말씀대로 다양한 모습으로 재건되면 좋겠어요. 동감입니다.
  • 케이 2015/06/28 13:03 # 삭제

    저 그림이 실린 논문의 제목이 뭔가요?
  • 깨알같은 얼음집 2017/06/13 16:26 #

    안녕하세요^^ 항상 까마구둥지님의 블로그에 오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실례지만 하나 부탁 좀 해드려도 될까요? 현재 웹상에서 조선 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경복궁 회화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는데 이 회화의 이름은 "대출행"이며 현재 해외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공개된지 오래됬는데도 아직 관련 논문 하나 나오지도 않았네요

    이게 왜 논란이냐면 숭유억불을 행하던 조선이 버젓이 궁궐에서 부처를 맞이하는 등의 모습이 묘사되고 궁궐지붕도 금빛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화 속에 나오는 복장을 보면 또 헷갈리네요. 혹시 이 그림에 대해 조사해 볼 생각 없으신가요?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7/06/15 12:14 #

    대출행은 저도 관심이 있어 기회가 될때마다 뜯어보는 그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전기 것이 맞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논란이 있었는줄 몰랐네요.

    혹 논쟁이 있는 곳의 링크를 주시면 내용을 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 한라온 2020/06/09 20:21 #

    궁궐에 누각이 있었으면 훨씬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을 것 같네요. 그래픽이나 미니어처로라도 복원한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은...
  • 역사관심 2020/06/14 02:45 #

    동감입니다. 이제는 조선중기이전 건축에 대한 뭔가 좀 가시적인 정보를 제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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