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조선전기 목욕문화 & 해주 객관 목욕실 (2탄) 한국의 사라진 건축

공교롭게도 이 글의 전편을 쓰기 일주일 전, 4월 24일 이런 기사가 떴더군요.

.....그러나 성리학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는 옷을 함부로 벗어던질 수 없었기에 선비들은 한 여름에도 냇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였던 신유한(申維翰)은 그의 일본 기행문 《해유록(海遊錄)》에서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풍속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이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전해지고 불교의 나라가 되면서 목욕이 습관화되기도 했었지요. 중략.
   
그러나 성리학  시대의 조선시대로 오면서 고려시대에 했던 남녀의 혼욕과 알몸을 드러내는 목욕을 더러운 일로 생각하여 황실이나 양반들은 목욕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하였지요. 더구나 집에 목욕시설이 없었기에 옷을 입은 채, 겨우 함지박을 이용한 수준의 부분 목욕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전신목욕 대신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 이닦기, 머리감기를 하는 정도였고, 전신욕은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에서처럼 개울에 몸을 담그는 정도로 했는데, 다만 그 시기는 명절인 음력 3월 3일(삼짇날), 5월 5일(단오), 6월 15일(유두), 7월 7일(칠월칠석) ,7월 15일(중원절)이었습니다. -한국문화신문, 김영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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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속은 과연 조선왕조 500년 내내였던 걸까요? 사료를 들여다본 지금 글쎄요입니다. 물론 많이 나오는 목욕기록은 온천과 휴양을 해서 몸을 보신하는 의료목적의 기록이 많기도 하지만, '목욕재계' 즉, 몸을 깨끗히 하는 의미의 목욕도 꽤 많이 등장합니다. 과연 조선전기~중기의 기록을 제대로 살피고 이런 글을 썼는지 의문입니다.


조선전기 욕실에 대해 쓴 김에 한편 더 이어서 갑니다.

오늘은 전편에서 못다루었던 기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대부터 시작해보죠. 우선 많이들 알고 있는 1123년 [고려도경]에 나오는 고려의 보통 대중들의 목욕습관입니다. 이것 역시 절대적인 기록이 아닌 것이 송나라 사신 '서긍'의 한달간의 '경험', 즉 그의 시각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시 고려대중이 모두 이러한 습속만을 따른 것이라고 단정지어선 안될 것입니다. 즉, 그가 '눈으로 본' 일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선화봉사고려도경 잡속(雜俗)
한탁(澣濯)

舊史。載高麗。其俗皆潔淨。至今猶然。每笑中國人多垢膩。故晨起。必先沐浴而後出戶。夏月日再浴。多在溪流中。男女無別。悉委衣冠於岸。而沿流褻露。不以爲怪。浣濯衣服。湅涗絲麻。皆婦女從事。雖晝夜服勤。不敢告勞。鑿井汲水。多近川爲之。上作鹿盧。輸水於槽。槽形。頗如舟云。

옛 사서에 고려 (고구려)를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일해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도 대개 내에 가까운 데서 하니, 위에 두레박[鹿盧]을 걸어 함지박으로 물을 긷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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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옛 고려도 깨끗하다라는 말. 즉 '고구려'인들도 목욕을 즐겨했다는 기록입니다. 또한 고려인들은 아침에 목욕을 하고, 여름에는 두번씩 목욕을 했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요즘같죠, 현대싱글남들보다 낫다는). 또한 많이 인용되는 구절로 당시 중국인들보고 때가 많다고 비웃으며, 남녀가 분간없이 함께 혼욕을 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당시에도 빨래는 아녀자의 몫이며, 배의 모양의 함지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구절외에도 고려도경에는 당시 고려인들이 상용하던 목욕가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건 많이들 모르시죠.

선화봉사고려도경 공장(供張) 
저상(紵裳)
紵裳之制。表裏六幅。要不用橫帛。而繫二帶。三節每位。各與紵衣同設。以待沐浴之用。
저상의 제도는, 겉감과 안이 6폭인데, 허리에는 가로 두른 깁을 쓰지 않고 두 개의 띠가 매어져 있다. 삼절의 자리마다 각각 저의(紵衣)와 함께 마련하여 놓게 해서 목욕할 때 쓰도록 한다.

제목인 '紵裳'은 모시로 만든 치마라는 뜻으로, 저의 즉 모시로 만든 윗옷과 함께 목욕시 입도록 하고 있다고 되어 있어, 위의 냇가목욕문화와 비교, 대중들이 아닌 고려귀족들의 목욕문화라는 생각이라 생각도 들지만, 사실 '저의'라는 이 모시옷은 서민들까지 모두 입는 것으로 되어 있어, 대중들의 목욕문화를 포함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공장(供張) 
저의(紵衣)
紵衣卽中單也夷俗不用純領自王至于民庶無男女悉服之
저의(紵衣)는 곧 속에 입는 홑옷이다. 고려의 풍속[夷俗]은 가장자리에 두른 선[純]과 옷깃[領]을 쓰지 않고,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없이 다 모시 웃옷[紵衣]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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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으로부터 200년뒤, 고려말 충숙왕때의 왕실목욕문화를 살펴보면 '향료'를 들이붓는등 마치 로마의 목욕문화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1328년 12월 미상(충숙왕)

○왕이 장차 입조하고자 반전도감(盤纏都監)을 설치하고 백관 및 5부의 방리(坊里)로 하여금 저포를 내게 하였으며 나아가 경기 8현의 민호(民戶)로부터 포를 차등있게 거두었다. 이에 간악한 아전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횡렴하니 안팎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또한 내탕고[內帑]의 은병을 내어 쌀을 사들이자 내신(內臣)들이 이것을 기회로 수탈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양부(兩府)에서 근심하여 5도에 찰방(察訪)을 파견해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하였으나 내신[內人]들이 중간에서 저지하였다. 

왕의 천성이 청결한 것을 좋아하여 한 달에 목욕하는 비용으로는 여러 향이 10여 항아리에 달하였고 저포는 60여 필에 이르러 이른바 수건(手巾)이라고 하였는데, 내시[內豎]들에게 많이 도난당하였으나 왕은 알지 못하였다.

충숙왕 (忠肅王,1294~1339년)대의 기록으로 왕 혼자쓰는 여러종류의 '향료'가 든 항아리가 한달에 10개이상 사용되었으며, '수건'이 60개이상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고급수건들을 내시들이 가져가버려도 모른다는 거죠. 흥미로운 기록으로 아마도 한국최초의 '수건'기록이 아닌가 하실수 있지만, 사실 '수건'이라는 기록은 더 이전인 저 [고려도경]에도 등장합니다. 이 기록이죠.

선화봉사고려도경 부인(婦人)
귀부(貴婦)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중략. 감람(橄欖)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鐸]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侍婢)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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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과 목욕실

'수건'에 대한 기록은 목욕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데, 일본승려 엔닌의 9세기 당나라 기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오는 860년의 기록을 한번 보시지요. 즉 남북국/통일신라시대입니다.

개성오년(開成五年)  
칙사가 오대산에 도착하다 (840년 6월 6일(음))
六月六日勑使來寺中衆僧盡出迎候常例每年勑送衣鉢香花㝳使送到山表施十二大事 校勘 065  細帔五百領綿五百屯袈裟布一千端青色染之香一千兩茶一千斤手巾一千條兼勑供巡十二大寺設斉

칙사가 왔으므로 절 안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나가 맞이하였다. 상례(常例)로 해마다 조칙으로 의복, 바리, 향화등을 보내는데, 칙사가 산에 도착해 12개의 큰 절에 보시했다. 세피(細帔) 註 159  500벌, 면 500둔, 푸른색으로 염색한 가사포 1천 단, 향 1천 냥, 차 1천 근, 수건 1천 장 등이다. 아울러 조칙으로 12개의 큰 절을 돌며 재를 베풀어 공양하였다.

이 기록이 흥미로운 것은 조선중기때까지 기록에도 보면 보통 온천을 제외하면 '사찰과 목욕'문화가 매우 밀접함이 나오곤 하는데 (즉, 수양이나 요양목적의 목욕시설), 그도 그럴것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가에서 목욕재계를 율법으로 정하면서 주술적 수단이었던 목욕이 진일보, 이 시기 목욕문화가 대중화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입니다.

이 9세기의 수건기록 역시 중국의 오대산에 있던 12개의 대찰에 수건을 1,000장이나 보시하고 있습니다. 한 사찰당 평균 90여장이 되겠지요. 다음 기록 역시 고려후기의 사찰과 목욕문화를 보여줍니다.

동국이상국전집 
방문(牓文)
서보통사(西普通寺)에서 행하는 담선방 중
무릇 소집한 중은 각각 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고, 암혈(巖穴)에 숨어 있는 고인(高人)ㆍ숙망(宿望) 같은 자들도 모두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으며, 거처하고 휴식하는 장소나 세수하고 목욕하는 기구까지도 특별히 깨끗하게 마련하였으니, 대개 마음으로 공경함을 보인 것이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至於居止燕息之所 (즐겁게 쉴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다)。灌嗽熏浴之具。
灌 (씻고) 嗽 (양치하고) 熏 (말리고/태우고/데우고) 浴 (목욕하는) 之具 (기구나 설비)

이것은 충숙왕이 태어나기 53년전의 인물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여기 나오는 '서보통사'는 개성시에 있던 고려의 대사찰로 예전에 소개한 바 있는 그 어마한 규모의 '보제사'에서 열리던 담선법회 (談禪法會)가 열리기도 한 가람입니다. 이 사찰에 천명의 승려를 모으는데 역시 세면장소과 목욕하는 곳을 제대로 마련합니다. 

고려대뿐 아니라 조선전기까지도 회암사와 진관사등 대사찰에는 '욕실'을 짓고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다음의 기록은 조선 태조 1397년의 기록입니다. 진관사는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고찰입니다.

양촌선생문집 제12권
기류(記類)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
홍무 정축년(1397, 태조6)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궐내에서 친근히 모시는 신하) 이득분(李得芬)과 사문신(沙門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기를, 중략.

사흘 지난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 양건(陽建) 및 사문(沙門)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 도봉산까지 둘러보고 복명하기를 ‘모든 절들이 진관사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상(上)이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와 지상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불러 모아 일을 시작하도록 하였는데, 내신(內臣)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써 그달 경진일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2월 신묘일에 상께서 친히 임하여 보시고 3단(壇)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둥하여 보셨는데,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3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ㆍ하 두 단은 좌우에 또한 욕실(浴室)이 각각 3칸씩 있고 하단(下壇)은 좌우에 따로 조종(祖宗)들의 영실(靈室)을 각각 여덟 칸씩 설치했으며,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 등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

이곳에 조선초기에는 6칸짜리 대형 욕실이 있었던 것이죠.
역시 조선전기 태종 역시 사냥을 가는 길에 나암사라는 절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태종 11년 신묘(1411,영락 9)
2월12일 (계묘)
상왕이 행주의 나암사에 가서 7일간 매사냥을 하고 돌아오다
상왕(上王)이 행주(幸州)의 나암사(羅庵寺)에 이르러 목욕(沐浴)하고, 인하여 7일 동안 매사냥을 하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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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온천목욕시설과 목욕조

그럼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던 내용에 추가하는 형태로 조선전기 세종대왕시절로 넘어가 봅니다. 우선, 충청도의 온천에 침실과 욕실을 만드는 장면입니다.
세종 60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4월 16일(기해)
충청 감사에게 온정의 정청과 침실 및 상탕을 제외하고 목욕할 수 있게 하라 전지하다  

○己亥/傳旨忠淸道監司曰: “還宮後, 溫井正廳與東西寢室南北上湯子, 竝皆封鎖, 其餘間閣, 許人入浴, 南北次湯子, 使士族男婦沐浴。 南北虛地湯子造家, 又月臺下溫水湧出處, 掘井造家, 令大小男婦皆得沐浴。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환궁한 뒤에 온정의 정청(正廳)과 동서 침실(東西寢室) 및 남북의 상탕(上湯)은 모두 다 봉하여 잠그고, 그 나머지 집에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목욕하게 하되, 남북의 다음 탕은 사족(士族) 남녀들에게 목욕하도록 하고, 남북 빈 땅에 있는 탕에도 집을 짓고, 또 월대 밑에 더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도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모든 남녀들에게 다 목욕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즉, 온천을 위한 건물을 짓는데 동서에 각각 침실이 있고, 남과 북에는上湯, 즉 온도가 높은 탕이 있습니다. 이 곳은 왕실을 위한 장소로 문을 잠그고, '나머지 집'은 일반인들이 들어가서 목욕할 수 있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次湯子 즉 다음(2등급?) 탕들은 사족士族, 즉 문벌이 좋은 좋은 집안사람들을 들여보내게 하죠. 그런데 '남녀'모두에게 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천이 그냥 야외에만 있는 것이 아닌, 건축시설을 짓고 '욕실'을 만들었음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南北虛地湯子造
남북의 빈땅에 또 집을 짓고
라고 되어 있죠.

물론 온정의 '정천, 침실, 그리고 상탕'을 '잠근다'는 표현에서도 건축물들이 나오고 있으면, 其餘間閣 이란 표현에서도 그 나머지 '각' (집)들이라는 묘사를 볼때 이 충청도의 온정(온천)에 많은 시설물들이 자리잡고 있음이 나옵니다. 그냥 개천이나 아무것도 없는 휑한 온천에 몸을 담근게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월대밑이란 곳에도 또다시 온천 욕실을 짓고, '모든 남녀들이 모두 목욕'할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掘井造家, 令大小男婦皆得沐浴

과연 이 시대 (조선전기) 온천목욕을 할때 이렇게 했을까요?
"따라서 조선시대는 전신목욕 대신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 이닦기, 머리감기를 하는 정도였고, 전신욕은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에서처럼 개울에 몸을 담그는 정도로 했는데,... "

사실 이런 온천의 건물은 조선전기 이전인 고려대기록에도 등장하는데 다음은 고려후기 문신인 정포(鄭誧,1309∼1345년)의 [설곡집 (雪谷集)]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즉, 현재의 동래온천에 있던 고려대시설입니다.

[설곡집 동래잡시]중: 溫泉傳自昔 浴室至今存
온천이 옛날부터 전해 오니,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 있네.

이때가 14세기인데, 100년뒤인 조선초기 세종대까지 이 욕실시설은 건재합니다. 다음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주부 동래 기록.

溫泉,【在縣北二里, 有浴室廳房廚廐。
온천(溫泉)- 현 북쪽 2리에 있는데, 욕실(浴室)·청(廳)·방(房)·부엌·마구(馬廐) 등이 있다.

세종대에는 욕법도 꽤 발전해서, 전염병을 치료할때는 이렇게 복숭아가지와 여러 한약제로 만든 온천탕을 만들기도 합니다. 

세종 16년 갑인 (1434,선덕 9)
6월5일 (경술)
외방의 유행·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다
또 시기장역 욕탕방(時氣瘴疫浴湯方)은, 복숭아나무 지엽[桃枝葉] 10냥, 백지(白芷) 3냥, 백엽(柏葉) 5냥을 골고루 찧고 체[篩]로 쳐 내어 산(散)을 만들고는, 매양 3냥을 가져다가 탕(湯)을 끓여 목욕을 하면 극히 좋다.

이전 포스팅에서 '석탕자', '목탕자'라는 돌과 나무로 된 욕조를 살핀 바 있는데, 16세기초인 연산군대에는 여러가지 다른 형태의 욕조가 등장합니다. 우선 '놋으로 만든 욕탕'과 '옻으로 칠을 한 화려한 욕탕'이 있습니다.

연산 53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5월 26일(을묘) 
놋 목욕통을 들이게 하다 
전교하기를, 큰 놋 목욕통 4개를 튼튼하고 두껍게 주조하여 탄일(誕日) 잔치까지 대궐로 들이라.” 하였다.

연산 59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8월 21일(계유) 
경상도 관찰사 임유겸 등에게 목욕통에 드는 옻진을 바삐 올려 보내게 하다 
下書于慶尙道觀察使任由謙、忠公道觀察使許輯、全羅道觀察使成世純曰: “內用沐浴桶所入漆汁, 其急上送。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임유겸(任由謙), 충공도 관찰사(忠公道觀察使) 허집(許輯),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성세순(成世純)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대내(大內)에서 쓰는 목욕통에 드는 옻진[漆汁]을 바삐 올려보내라.”
하였다.

옻칠을 하면 이렇게 고급스럽게 방수가 됩니다.
이 욕조의 크기나 목욕의 빈도수를 짐작할 만한 기록이 있는데, 아래의 것입니다. 목욕 물을 길을 사람으로만 100명이 소요됩니다.

연산 54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6월 20일(기묘) 
목욕할 물을 길을 종을 뽑게 하다  
전교하기를, “풍정(豊呈)을 올릴 때에 내시객(內侍客)이 목욕할 물을 길을 종[婢] 백 명을 깨끗한 사람으로 뽑아서 들이라.” 하였다.

재밌는 것은 이 연산군대의 욕조들이 연산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內侍客 (내시객) 즉, 궁궐방문객용으로도 쓰이고 있다는 점이지요. 참고로 목욕탕(沐浴)이라는 기록은 조선 중기 성종대 인물인 범허정(泛虛亭, 1493~1564년)의 [범허정집]에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원문만을 싣습니다.

泛虛亭集卷之二 (범허정집)
過素沙有感 
曾在戊申秋。陪從溫泉行幸。回鑾到此。尤春二丈告落後。上諭旨敦勉。與之偕行矣。龍髯莫攀。世變無窮。重過趨走之地。愴然有感。沐浴湯盤德日新。後車仍載二儒臣。高臨帳殿風雲會。特賜宮壺雨露均。百姓欣欣爭見羽。三軍肅肅廊淸塵。傷心趨走當年地。白首今爲旅泊人。

이외에도 임란직후인 1602년 선조대 기록에 '목욕수건' (목욕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정무록 
무신년(1608, 선조 41)
사간원이 아뢰기를, “엊저녁 상식에 해조에서 곧 그릇을 마련해 올리지 아니하여 전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하옵건대, 당해 관원을 잡아다 추문하고 빈전도감도 또한 단속하지 못하였으니, 당상을 파직하고, 담당 낭청도 또한 잡아다 추문하시고, 어제 염습(斂襲)할 때의 향탕수(香湯水)를 내의원(內醫院)의 담당 관원이 몸소 마련해 올리지 않고, 목욕건(沐浴巾)을 상의원(尙衣院)의 당해 관원이 전연 마련해 올리지 아니하였으니, 청하옵건대, 모두 잡아다 추문케 하소서. 습전(襲奠) 때의 향탕 그릇 또한 깨끗하지 못한 낡은 물건으로 마련해 올려서 더럽기 짝이 없었으매, 불경한 죄가 크니, 당해 관원 또한 잡아다 추문하고 단곡하지 못한 도감의 담당 낭청은 파직하소서. "하였다.

沐浴巾尙衣院當該官。全然不進排。請並命拿推。襲奠時香湯器皿。亦以不潔舊件進排。麤穢莫甚。不敬之罪大矣。當該官亦拿推。不檢擧都監色郞廳。罷職。

이것은 조선중기의 황유첨(黃有詹)(1578-?)의 [정무록(丁戊錄)]에 나오는 기록으로, 왕실목욕에 필요한 향이 나는 물과, 목욕수건을 구비하지 못한 죄를 상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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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의 목욕시설 기록

다음은 1476년의 흥미로운 기록으로 앞으로 전통여관이라든가 전통온천을 만들 때 한번 참고할만한 운치있는 시설입니다.

사가문집
기(記) 해주(海州)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을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

객관에 동헌이 있었는데 홍무 무인년(1398, 태조7)에 목사 김공 회련(金公懷鍊)이 지은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집이 부서지고 무너졌다. 공이 통판(通判) 우공 찬(禹公贊)과 의논하여, 중건할 것을 조정에 보고하여 윤허를 받아 옛터에다 그 규모를 더 키워 지으니, 집이 우뚝하고 단청이 훤하였다. 8월 초순에 공사를 시작하여 10월에 완공해 놓으니, 보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병신년(1476) 봄에 거정이 압록강 가에 사신으로 나갈 때에 봉산군(鳳山郡)에서 이후를 다시 만나니,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면서 말하였다. “해주의 진산(鎭山)은 용수산(龍首山)인데 험준하게 우뚝 솟아 북쪽으로 우이산(牛耳山)과 불족산(佛足山)에 연결되어 웅장한 기세가 수십 리에 서려 있습니다. 동헌의 동쪽 3리쯤에 수양산(首陽山)이 있는데 그 위에 이제대(夷齊臺)가 있고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을 찌르며 빽빽한 산림이 옥으로 만든 창을 세워 놓은 것과 같습니다. 또 고사리가 있는데 살지고 부드러워 보통 것과 다릅니다.

2리쯤에 광천(廣川)이 있는데 너비가 100보쯤 됩니다. 강바닥에는 흰 돌이 대자리를 깔아 놓은 듯이 깔려 있습니다. 물이 푸르고 깨끗하여 손으로 움켜 마실 만합니다. 물고기 중에서 좋은 것이 농어와 붕어인데, 이것들이 천 마리 백 마리씩 떼 지어서 자유롭게 헤엄쳐 다닙니다. 강가에서 내려다보면 손가락을 꼽으며 셀 수 있으며, 낚시도 할 수 있고 작살질도 할 수 있고 투망으로 잡을 수도 있고 그물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중략. 또 약간 서북쪽으로 가면 삼괴정(三槐亭)이 있습니다. 그 좋은 경치가 남정(楠亭)과 우열을 다툽니다. 그 남쪽에 못이 있습니다. 연꽃을 심어, 꽃향기와 잎 그림자가 주변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 헌(軒) 앞에 몇 칸 욕실(浴室)이 있는데 욕실의 상하에는 모두 새로 판 못이 있어 너비와 길이가 각각 10여 장(丈)이고 그곳에 연꽃을 심고 고기를 기릅니다. 윗쪽 연못의 물이 콸콸 흘러 층계진 곳을 따라 아래 연못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목욕을 마치고 난간에 기대 있으면 개운하고 후련하여 마음속의 번잡함을 씻어 내고 무더위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헌의 옆에 또 누대가 하나 있습니다. 높고 시원하여 사신이나 빈객이 오면 반드시 여기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습니다.

이런 것들이 해주 명승의 대략인데, 이 모든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동헌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글로 잘 꾸며 주십시오.”
=====

이 [사가집]의 기록은 조선초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이 지은 것으로, 황해도 해주의 객관 (즉 여관시설)에 있던 동쪽 건물을 중건하면서 기문을 적은 것입니다. 

浴室楹。浴室上下。皆鑿新池。廣袤各十餘丈。植蓮種魚。上池之水㶁㶁。循階除入于下池。浴罷憑闌。夷然豁然。可以滌煩襟而消酷暑矣。軒之傍。又有一樓。高明爽塏。使華賓客之來止。必觴詠於斯。

여기 보면 객관의 새로운 건물앞에 몇칸이 되는 욕실이 있는데, 그 욕실의 위 아래에는 새로 인공적으로 판 연못(皆鑿新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번역원의 해석 오류가 있어 보입니다. 浴室數이건 '몇 칸 짜리 욕실'이라기 보다는 '몇 채의 욕실'이라고 봐야 합니다. "楹" 이라는 글자는 보통 가옥을 세는 단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규모가 무려 각각 10여장, 약 30미터씩됩니다. 廣袤各十餘丈 1장을 보통 3.03미터로 치니 그 남북과 동서의 너비가 30여미터씩 됩니다. 이러한 인공못을 욕실 상하에 만든 것입니다.그럼 위의 인공못에서 아래쪽 못으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그 가운데 위치한 '욕실'에서 직접 보게 되는 겁니다 (㶁㶁 (물소리 괵)이란 말은 말 그대로 콸콸입니다). 즉 정리하자면 위아래 30미터짜리 인공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욕실을 지어두고, 상하 연못사이에는 '층계'로 연결, 물이 쏟아지게 만든 구조입니다.
이런 비슷한 느낌이겠죠 (연못은 더 컸을테고)- 큐슈의 온천장 연못

이 욕실이 제대로 된 건물이란 건 이 부분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浴罷憑闌" 목욕을 파하고 난간에 기대어, 즉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이 장관을 '난간'에 기대서 바라보는 겁니다. 왜 이런 시설을 다시 전통온천이나 여관에 구현해 볼만한지 감이 오시리라 믿습니다. 왠만한 요즘 온천시설보다 운치있습니다.

해주는 개성 왼쪽에 있습니다 (1편에서 다룬 배천온정과 매우 가깝죠)

그럼 이 객관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역시 조선중기의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위치를 비정할만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온천(溫泉) 부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돌난간의 욕실(浴室)이 있다.

'有石欄浴室 돌난간의 욕실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어 위의 객사 욕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지라 다른 황해도의 욕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여말선초의 훈구파 관료이자 문인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년)의 문집에 등장하는 두 개의 욕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용헌집
안동 욕실에 짓다 題安東浴室

뜰 앞의 아전들 가고 달빛이 밝은데 / 庭前吏散月華晶
누각 아래 냇물 흘러 밤기운이 시원하네 / 樓下溪通夜氣淸
길손은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 / 客子思歸懷抱惡
무단히 추성부(秋聲賦)를 읊어 보네 / 無端舒嘯賦秋聲

추성부는 송나라의 문집입니다. 여기 나오는 안동이 경북 안동인지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곳의 욕실에서 지은 시입니다. 같은 [용헌집]에 다른 조선초기 욕실에 관한 조금 더 자세한 시가 나옵니다.

용헌집
진관사의 욕실에 짓다 題眞觀社浴室

산사가 최고로 빼어나니 / 梵宮最奇絶
주위에 봉우리가 우뚝하네 / 旁圍山硉屼
주지인 조계 장로께선 / 主人曹溪老
드넓은 서강 물을 다 마셨네 / 吸盡西江闊

여기(餘技)인 그림은 입신의 경지이고 / 餘事畫入神
손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진실 되네 / 好客意眞實
머물면서 목욕을 함께 하고 / 留連共休沐
조용한 말 하루 종일 들었네 / 軟語聽終日

밥과 찬은 산해의 맛 겸하였고 / 飯飡兼海山
다과에는 감과 밤도 섞였네 / 茶果雜柹栗
원하는 것 밖에서 안 구하니 / 所願不外求
서로 함께 즐길 만하구나 / 足以相怡悅

이 몸은 속세에 있지만 / 此身雖塵寰
본래 맘은 암혈에 있었네 / 素心在巖穴
어찌하면 접견을 받아서 / 安得被接引
승경에서 세월을 보낼까 / 霞上度歲月

밤중까지 긴 생각을 읊다 보니 / 半夜吟思長
눈바람에 솔숲에서 소리 나네 / 松聲響風雪

여기 나오는 진관사, 어디서 들어보셨죠? 바로 글 중간에 1397년 태조가 진관사를 개축, 3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ㆍ하 두 단은 좌우에 또한 욕실(浴室)이 각각 3칸씩 배정할 만큼 대형 욕실을 갖춘 기록말입니다. 아마도 이원은 이 태조가 개축한 최신식 욕실을 경험한 듯 합니다. 그의 생몰년대를 비교하면, 1368년생이니 진관사 욕실이 개축되던 것이 정확히 29세때의 일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마치 요즘 일본 료칸의 느낌마져 드는 것이, 산사의 고요한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한식으로 여러 맛을 즐기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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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기록중 해주 객사의 온천 욕실 형태는 현대에 짓는 전통온천의 시설물등에서 한번 고려해 볼만 한것 같습니다. 전통식으로 멋지게 지은 다음, 이런 기록을 가져다 첨부해서 보여준다면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겠죠. 

마지막으로, 서두의 기사에 나오는 "고려시대에 했던 남녀의 혼욕과 알몸을 드러내는 목욕을 더러운 일로 생각하여 황실이나 양반들은 목욕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하였지요" 라는 구절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구절 두 가지를, 그것도 18세기 , 조선후기기록으로 보여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기사에서 중간에 일본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신유한(申維翰, 1681~1752년)의 [해유록]기록을 들면서 그가 남녀가 함께 탕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다고 마치 인간으로써 못볼 것을 본 것인양 설명하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그 선비 신유한은 오사카 출신 기녀를 데리고 목욕탕에 같이 들어갑니다. 아래가 원문에 나오는 '남녀가 함께 풍속한다'는 구절의 앞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제목은 낭화여아곡(浪華女兒曲, 낭화는 오사카라는 뜻이고 여아는 여자아이). 

낭군은 누에 올라 자자 하는데 / 歡欲上樓眠
나는 욕실이 좋다고 말하네 / 儂言浴室好
향탕에서 깨끗이 씻고난 뒤에 / 蘭湯澡儂膚
웃음을 머금고 낭군과 포옹하네 / 含笑交郞抱
주: 이 나라 풍속은 반드시 목욕탕을 만들고 남녀가 함께 목욕한다.

마지막으로 이현일(李玄逸, 1627~1704년)의 [갈암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갈암집
서(書)
이국재에게 답함 임오년(1702, 숙종28)

이율곡에 대해서는 조금 비평을 하여, “사단을 칠정 중의 선한 쪽이라고 한 것은 분배하고 억지로 끌어다 합친 잘못이 있는 듯하다.”라고 하고, 자신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칠정이 사단 속에 포괄되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것을 옮겨서 저것과 바꾸는 것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이른바 함께 목욕하면서 상대에게 벌거벗었다고 놀리는 격이니 매우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이(理)에서 발현하기 때문에 온 천하에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자신에게서 발현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바를 남이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과 칠정의 구분입니다. 어찌 칠정의 애(愛)와 오(惡)를 사단 안에 끌어들여 억지로 합쳐서 나란히 둘 수 있겠습니까.

1702년의 기록으로 목욕하면서 벌거벗었다고 놀리는 격이니 말이 안된다. 라는 뜻은, 목욕할때는 벌거벗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물론 비유이며, 같은 일본의 풍속을 두고 다른 저자의 기록에서는 구역질이 난다고 표현하는등 다양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18세기초 선비의 이 구절은 '단편적이고 일방적이고 한가지'로 문화사를 규정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생각합니다.


=====
해주객관의 욕실 부분으로 '사라진 건축'분야에 포함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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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antalinus 2015/05/05 10:15 #

    언제부턴가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일단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역사랑 관련된 부분들은 제대로 조사를 하거나 전문가한테 자문을 구하지 않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깜냥에 짐작한 대로 써갈기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인 모양입니다....
  • 역사관심 2015/05/06 01:24 #

    언론사 기자들이 이런 분야 자료를 찾아보는 건 무리라고 해도, 문화재청등의 공식홈피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면 합니다. 찾아보니 이 기사도 그런 관련기관의 페이지에서 짜집기 한 것이더군요.
  • 라무 2015/05/05 10:55 #

    옻칠 되게 고급스러워보이네요 김제에서 관련 도자기 파는거 봤을땐 이런느낌 없었는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15/05/06 01:24 #

    누가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나 봅니다. ^^
  • 레이오트 2015/05/05 16:03 #

    그러고보니 비누라는 말은 순우리말로 옛날에는 비노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중국 기록인가 거길 보면 고려인은 하루 세 번 목욕한다고 하며 고려인은 목욕성애자라고 묘사하지요. 조선시대에는 목욕 좋아하는 민족성 어디 안가서 아예 단오에는 목욕을 단오 주요 이벤트로 지정하고 시행할 정도였지요.
  • 역사관심 2015/05/06 01:26 #

    아 그런가요. 찾아보니 [박통사언해]에 나오는 비노가 최초인가보네요. 모르던 사실 배웠습니다. 중국사료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ㅎㅎ
  • 역성혁명 2015/05/05 11:32 #

    오호호호 고구려, 고려 사람들은 지금의 도시사람들만큼이나 목욕을 즐겨했다는 것이 매우흥미롭습니다.
  • 역사관심 2015/05/06 01:26 #

    신기하죠, ㅎㅎ 의외로들 깨끗하셨다는...
  • ㅇㅇ 2015/05/05 11:38 # 삭제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발전된 시대다. ~

    조선전기보다 조선후기가 발전된 시대다~ 류의

    무조건적인 발전사관을 맹신하면 이런 결과가 발생하죠

    역시 한국사는 통시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판단해야 된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역사비하에 대한 반동으로

    무분별하게 조선시대를 미화하고 역사전개과정을 절대적인 발전사관으로

    판단하는거 이거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현재 조선후기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고

    그 조선후기마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잘못되게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진짜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의 악영향은 너무 큰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5/06 01:26 #

    마지막 문장 절대공감입니다.
  • Scarlett 2015/05/05 11:40 #

    늘 잘 보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5/05/06 01:27 #

    항상 감사합니다~.
  • ㅇㅇ 2015/05/05 12:13 # 삭제

    그리고 예전에도 느낀거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근대 시절 종교가 가지는 문화발전 상업발전 예술발전의 측면을 절대

    무시할수가 없네요 사실상 종교가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할듯 싶습니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조선전기까지는 그러했으며

    서양도 그러했던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불교가 그 역할을 했고 서양에서는 천주교와 기독교가 그 역할을 했죠

    마치 한국에서 해방후 ( 물론 부작용이 분명 있었지만 ) 한국전쟁 이후 상황만 봐도

    정치 경제 사회의 서구적 발전에 군대 군조직의 역할이 컸던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유럽같은 경우 중세시대를 끝내고 르네상스를 통해 근대로 가는 길목이 된건

    아이러니 하게도 천주교 기독교 사원을 중심으로 모여든 마을과 주변 상업 자본이

    아니겠습니다 그런 상업 자본이 중세 종교 사회를 무너뜨리는 기반이 된거죠

    일본이나 한국 같은 경우도 불교의 조형예술을 통해 문화가 정교해지고

    건축술이 발달하고 불교 사원 중심으로 마을과 상업 발전이 많이 이루어진 경우가

    지방의 경우 많았죠. 아쉬운건 한국은 조선전기 이후 불교 쇠퇴로

    조형예술 하락과 사원중심 마을과 상업의 결탁이란 측면이 약해졌지만

    일본은 그게 계속 이어져 근대로 가는 일종의 지름길이 된 것 같은 느낌 (마치 유럽처럼)

  • 역사관심 2015/05/06 01:30 #

    제가 생각하던 맥락과 일맥상통하는 정리된 글 감사합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해오고 있는데, 글로 정리한 바는 없었네요. 문화사적으로 물론 전란도 있었지만, 이런 종교의 Consistency가 없었던 것도 왕조교체와 함께 전대 문화를 차곡차곡 끌어앉고 보존하지 못한 면에 큰 책임이 있는 듯 합니다. 언젠가 소개하겠지만 삼국에서 통일신라- 고려대까지는 아주 잘 보존되 오던 여러분야의 문화사가 조선중기이후 완전히 끊기고, 더군다나 근대화가 되면서는 뒤틀린 '전통자체에 대한 전반적 혐오'감마져 들어가면서 현재의 무색무취의 국가 이미지가 되버리는거라 생각합니다.
  • ㅁㄴㅇㄹ 2015/05/06 03:54 # 삭제

    지나가던 유동이지만 공감합니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건 종교는 그 문화의 꽃이자 발전의 원동력이었죠. 이런 종교의 힘을 무시하고 종교가 인류 역사에 공헌한 점이 없다고 당당하게 발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 역사관심 2015/05/07 23:59 #

    ㅁ ㄴ ㅇㄹ 님 감사합니다.
  • ㅇㅇ 2015/05/05 20:06 # 삭제

    이래서 선입견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죠.
    조선후기의 그림을 봐도 여자들이 냇가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고 또 구한말 사진에는 고기잡는 남자들이 그냥 벌거벗고 뱃일을 하기도 하는.. 물론 높은 귀족계층이야 빨개벗은 모습은 커녕 얼굴도 보기 힘들정도였지만요.
  • 역사관심 2015/05/06 01:30 #

    그러게 말입니다. 저 역시 찾아보면서 느끼는 점도 많았습니다.
  • 바람불어 2015/05/06 01:15 #

    정확히 하면 본문중에 수건 언급된 <구법입당순례행기>는 중국 당나라죠. 시기적으로야 남북국/통일신라시대지만 장소로서는 당나라. 저기 오대산도 중국의 오대산이고. 물론 수건이란 게 어느 문화권에서 자연스럽게 쓰였던거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인 것처럼 표현되어서 지적해봅니다.
  • 역사관심 2015/05/06 01:30 #

    이것참, 당연한 사실을 완전히 오해했군요. 바람불어님 덕분에 큰 실수를 수정합니다. 감사드려요!
  • ㅁㄴㅇㄹ 2015/05/06 04:06 # 삭제

    서양쪽에도 비슷한 편견이 있죠. 고대 로마인들은 목욕을 즐기고 항상 깨끗하게 생활했는데, 중세 시대부터는 기독교 때문에 알몸을 보이는 것을 삼가면서 목욕문화가 사라지고 더러웠다는 삭으로요. 현실은 중세시대에도 로마의 목욕문화는 명맥이 계속 이어졌지요. 물론 흑사병의 영향으로 목욕이 전염병을 퍼트린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목욕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퍼지기도 했지만, 그런 단편적인 이야기만 가지고 중세 1000년을 뭉뚱그리는 건 참 잘못된 역사인식이라 생각합니다.
  • ㅇㅇ 2015/05/06 10:25 # 삭제

    중세 프랑스에서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사냥후에 욕조에 들어가 와인을 마시는 것이다" 이런 말도 있었다고 하니 한 시대를 뭉뜨그려 선입견으르갖는 것은 참 바보같은 일입니다.
  • 역사관심 2015/05/07 01:09 #

    두분 말씀에 공감합니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도 푸코는 비판한 마당에, 그런 맥락보다 훨씬 광범위한 '문화사'를 저런 식으로 툭툭 범주화에 집어넣어버리는 건 무지에서 비롯된 대담한 오만함외에 아무것도 아니겠죠.
  • 迪倫 2015/05/06 11:25 #

    왠지 머리 속으로 "Thermae Romae"같은 이야기들이 뭉게 뭉게 피어나는데... 재미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대해 언제 좀더 공부해보고 싶은데... 역량이 부족해서. 조선전기까지는 확실히 임란 후의 사회랑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5/07 12:33 #

    말씀대로 테르마이 로마가 떠오릅니다. 특히 '향료탕'부분에서 ㅎㅎ.
    그리고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확실히 조선전기는 고려만큼은 아니더라도 문화사부분에서는 전공자들이 다시 세세히 연구할 시대같아요.
  • 평론가 2015/05/06 19:00 # 삭제

    이제 실내목욕탕은 일본에만 있었다라는 말도안되는 이야기는 버로우네요.
  • 역사관심 2015/05/07 01:12 #

    그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욕실이라는 게 어찌 그쪽만 있었다고 생각하는건지 놀랍네요. 무슨 삼국-고려-조선이 신석기시대도 아니고. 이게 다 신윤복때문에 (농담;)
  • Nocchi 2015/05/07 10:33 #

    <<테르마이 로마이>> 를 전 권 소장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더욱 재미 있는 포스팅 인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5/05/07 12:34 #

    저는 영화로밖에 보지 못했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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