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축 (9)-고려.조선전기 이층침실, 침루(寢樓) 한국의 사라진 건축

그냥 경치를 즐기는 용이 아닌 '잠을 자고 투숙도 하는 2층의 루'. 현재의 한옥개념에서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형태의 건축물입니다. 얼마전 쓴 고려시대 루의 형태부분에서 연장된 글이라 보셔도 좋겠습니다.

일본 은각사銀閣寺 2층루 (1481년 최초건설, 에도초기에 재건)

침루(寢樓)

이런 건축물을 말 그대로 寢樓 즉, '잠을 자는 루', 침루라고 합니다. 현재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런 형태의 건축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우선 오래된 기록으로 목은 이색(李穡 1328~ 1396년)의 기록이 있습니다. 즉, 고려말기입니다.

목은문고 전(傳)
송씨전(宋氏傳)

宋氏出家名性聰。然不居僧房。居旻天東傘橋南。近水樓二間貯書邀客。日嘯詠其中。得錢卽沽酒市殽膳不少吝。

송씨의 출가(出家)한 이름은 성총(性聰)이다. 하지만 승방(僧房)에는 머물지 않고, 민천사(旻天寺) 동쪽 산교(傘橋) 남쪽에 있는 냇물 근처의 두 칸짜리 다락(루)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그러고는 책을 쌓아 두고 손님을 맞이하며 날마다 그 속에 들어앉아 노래하고 시나 읊조리면서 지냈는데, 어쩌다가 돈이 생기기라도 하면 곧장 술과 안주를 사서 먹고 마시는 데에 써 버릴 뿐 조금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여기 보면 성총이라는 승려가 민천사의 남쪽의 냇물 옆에 있는 두칸짜리 작은 루를 거처로 삼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민천사에는 13세기에 건축된 3층짜리 사리각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추후 소개하죠). 즉, 고려후기 당시 이런 형태의 '루'에서는 침식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우 앞서 고려시대 루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듯 당연히 벽체와 문이 달리게 되겠지요.

近水樓二間。貯書邀客。물가에 두간짜리 누(루)가 있어, 거처로 삼았다.

두칸짜리 소규모 루이니 아마도 17세기초에 지어진 방초정과 비슷한 형태일도 모르겠습니다. 방초정은 경북 김천출신인 이정복(李廷福, 1575~1637년)이 1625년에 처음 지었습니다. 김천시 구성면 원초마을의 감호(鑑浩, 방초정 앞의 연못) 곁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방초정 이름짓고 후학을 양성했죠. 다만 방초정은 '루'가 아닌 '정'이므로 엄밀히 말해 루가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조선전기 문신인 노수신(盧守愼, 1515∼1590년)의 시문집에 등장하는 16세기의 침루기록입니다.
穌齋先生文集卷之四
夢覺泣書十一月 

雙親分席寢樓中。一稚隨身臥檻東。辛酉中冬廿夜夢。記來非吉亦非凶。

아직 국역본이 없는 문장입니다. 부분만 발췌하자면 둘이 친하여 침루 가운데 자리를 나누었다 라는 뜻이 됩니다. 난간 동쪽으로 몸을 누인다는 문장이 뒤따르지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겨울 스무밤을 지샌다는 것으로 보이는 세번째 문장도 있습니다. 이것이 맞을 경우 겨울에도 지낼 수 있는 침루가 됩니다. 문맥의 글간을 살필때 이 글은 아마도 노수신이 '을사사화' 당시 파직해서 유배를 간 '순천', '진도', '괴산'중 한 곳에 있던 침루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볼까요?

제 여흥루(題驪興樓)
정몽주(鄭夢周)

말타고 동서로가 무슨일 이룰건가 /鞍馬東西底事成 
가을 바람에 서둘러서 남으로 가네/ 秋風汲汲又南行
여강에서 하루밤 다락(루)안에서 자는데/ 驪江一夜樓中宿 
누워듣는 어부노래 길고 짧은 가락일레/ 臥聽漁歌長短聲

연기와 비가 아득히 온 강에 가득한데 / 煙雨空濛滿一江
다락(루) 안에 자는 손이 밤에 창을 열었다 / 樓中宿客夜開窓
이튿날 아침에 말에 올라 진흙을 뚫고 가면서 / 明朝上馬衝泥去
머리를 돌리니 푸른 물결엔 흰 새 한 쌍 / 回首滄波白鳥雙

[동문선]에 나오는 그 정몽주(鄭夢周, 1338~1392년)의 시입니다. 이 시를 보면 누집(다락집)에 자는 손님이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다는 구절이 나오고 있어 그 형태를 짐작케 해줍니다. 여강(驪江)은 현재의 여주입니다.

조선전기 저택의 묘사

그럼 왜 이런 형태의 '루'가 조선전기까지는 더 많았을까요? 필자의 생각 (뿐 아니라 여러 논문들을 살핀 결과)에 이는 한옥구조에서 온돌방이라는 구조가 고려-조선전기까지 건축구조의 전반을 차지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온돌과 마루의 결합, 즉 우리가 현재 보는 정형한옥의 탄생은 여러 변수가 있지만 일반화가 된것은 조선시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시기조차도 현재 남아있는 양반가들처럼 일반적으로 온돌이 모든 침실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에서 온돌과 마루의 결합과정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며, 결합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마루와 온돌의 결합은 언제 우리나라에 완전한 전통주택의 정형(定型)이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온돌과 마루가 연접(連接)해서 한 건물을 이루는 방식은 적어도 고려시대 후기 이전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온돌과 마루가 연접하는 방식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전면온돌의 출현이다. 전면온돌이 널리 확산되는 것이 13세기경이라고 가정한다면 그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온돌 옆에 마루나 부엌과 같은 다른 실이 달라붙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짐작된다. 또한, 상류계층까지 온돌구조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東文選의 公州東亭記의 기록만으로는 온돌과 마루가 고려시대에 결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주택 안에서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문화의 지역적 이동과 전파에 따라 온돌과 마루가 다른 지역에 소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두개의 구조가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전면온돌 형식은 13세기 (고려후기-조선전기까지도), 그리고 정형한옥 (단층온돌위주)은 조선중기까지도 일반화 (특히 상류층 저택에서)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줄 침루를 좀 더 상세히 묘사한 글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침루'는 아니지만, 조선전기의 성종대 19년, 즉 1488년의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부(朝鮮賦)]라는 저서에 나오는 글인데, 이것은 명나라의 동월(董越)이란 자가 조선의 풍토를 부(賦)로 읊은 것으로 사신으로 왔다가 명으로 돌아가 지은 책입니다. 여기에 조선전기 양반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하는데 매우 희귀하면서도 그 형태가 현재의 한옥과는 달라 한국건축사에서 결코 소홀히 다뤄선 안되는 구절입니다. 한번 보시지요.

조선부(朝鮮賦)

富則陶瓦皆동(同+瓦) 而?序之翼東西者 棟反聳出於南北 塗?皆土而堂寢之位前後者 脊反低下於中間[堂寢皆一間?序乃反三間] 門則皆循東序之東設梯以升 必矩步乃可達於堂寢[其門雖皆南向 然不自中開 皆就東?之棟 南向以開 以基多高故須梯升 其面東西者亦然] 地則皆畏下濕之沾 鋪板以隔

곁채[무서(?序)]의 동서로 달린 것은 마룻대[동(棟)]가 도리어 남북으로 우뚝 솟아나왔고 모두 진흙을 발랐다. 마루[당(堂)]와 침실[침(寢)]의 앞뒤로 놓인 것은 용마루[척(脊)]가 오히려 중간에서 낮다[당과 침은 모두 1간이고 무서(?序)가 도리어 3칸이다]. 문은 모두 동쪽 곁채[동서(東序)]의 마룻대를 따라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데 반드시 직각으로 꺾어서 걸어야[구보(矩步)] 당과 침에 닿을 수 있다. [그 문은 비록 모두 남쪽을 향했지만 가운데부터 열지 않는다. 모두 동쪽 곁채[동무(東?)]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쪽으로 연다. 터가 많이 높은 까닭에 반드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동쪽과 서쪽으로 면한 것도 역시 그렇다]. 땅은 모두 하습(下濕)함이 스미는 것을 싫어하여 판자를 깔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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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보면 온돌이 전면적으로 쓰이기 이전의 한옥으로 습한 것이 싫어 마루와 침실의 경우 중층에서 지낸다는 맥락이 강하게 등장합니다. 梯, 즉 사다리 (제)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습이 사신의 눈에 인상적이었던 것입니다. (ㅇㅇ님의 제보에 따르자면, 이 기록은 현재 학계일부에서 가설로 이야기하는 조선중기이후의 소빙기 이전의 한반도 기후를 보여주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중반까지만해도 건축자재가 소나무가 아닌 느티나무등의 활엽수라는 예전의 글과도 일맥상통하는 기록일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재(2013)는 다음과 같이 한반도의 기후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략 AD 1400년에서 AD1900년 사이에 상대적인 저온 상태가 지속되면서 전세계 여러지역에서 빙하가 확장되었던 시기를 소빙기라 부르는데(Grove, 2004), 나이테 등의 고환경 자료뿐 아니라 다양한 역사문헌에서도 이 시기의 존재가 뚜렷하게 확인된다. 특히 소빙기의 저온 현상은 이 시기 인간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문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중략.

이 화분 비율의 증감을 기준으로 일본 중부 지역의 기후 변화를 추정하면, 대략 BC 1000-BC 580년, BC 250-AD 700년, 1300-1800년이 추웠고 BC 580-BC 250년과 AD 700-AD 1300년이 따뜻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Park et al.(2013)과 Park(2011)에서 제시된 한반도의 기후변화와 매우 유사하다. 또한 한반도에 인접한 중국 지린성 후이난현의 습지퇴적물 분석 결과(Hong et al.,2000)도 소빙기, 중세온난기, 중세암흑 저온기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Park(2011)의 분석결과와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홀로세 후기 극동아시아의 인접한 남한지역, 일본 중부, 중국 북동부의 기후 변화는 서로 엇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말선초에 해당하는 1300년대말부터 즉 조선으로 접어들면서 한반도는 고온다습했던 약 600년의 시기를 끝내고 한랭한 기후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수종 역시 급격히 소나무등의 수종으로 바뀌지요). 물론 이 글은 1488년에 사신이 조선전기의 저택을 보고 쓴 기록이지만, 이 저택이 최소 고려시대후기부터 전해온 건축일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임란 전까지는 고려시대 건축과 통일신라대 건축이 혼재하는 상황이었지요.  기록을 다시 뒷받침 해주는 비교맥락의 훌륭한 조선후기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한양에 조선전기와 후기의 저택의 변화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부(附) 동명(洞名)
車洞 有洪慕堂履祥世居之宅 奉祀孫入居 凡爲十三世 而內屋四十間 甚宏傑 古之屋製 皆房少而廳多 蓋古之老人 始居溫? 少年輩?宿處于廳事 故如此耳

차동(車洞)에는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1549~1615)이 여러 대 거주한 집이 있는데 봉사손(奉祀孫)이 들어가 사는 지 무릇 13세(世)이다. 내옥(內屋)이 40칸인데 매우 굉걸하다. 옛날의 가옥 제도는 모두 방이 적고 마루[청(廳)]가 많다. 대개 옛날에는 노인이 되어야 비로소 온돌에 거처했다. 젊은이는 마루방에서 많이 잤다. 그러므로 이같이 생겼다.

이 [한경지략]이란 저서는 정조 (1752~1800년)때 한양의 모습을 적어둔 것으로 정확한 연대는 미상입니다. 저자는 유득공 (발해고의 저자)의 아들로 추정되는 수헌거사(樹軒居士)라는 자입니다. 내용의 주인공인 홍이상은 1549~1615년의 인물인데, 이 양반의 저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홍이상이 살던 당대에 이미 그의 13대선조부터 내려오는 집이라고 하니, 기록대로라면 무릇 줄잡아 30년씩만 잡아도 당대에 이미 거의 400년정도가 된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전기에는 방보다 '마루'가 많았다고 나오고 있지요.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추후 다른 포스팅에서 소개하겠지만, 조선전기까지도 방과 방들이 마루와 행랑으로 연결 (현재보는 한옥처럼 뚝뚝 떨어진 '채'들이 아닌)된 구조가 많았다는 또다른 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인이나 온돌방에서 침숙하고 다른 사람들은 마루방에서 주로 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침루'를 포함하는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온돌방 (1층에 반드시 있어야하는)이 전기까지만해도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조선전기의 상류층 저택의 구조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또 있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을 그린 [쇄미록(鎖尾錄)]입니다.

鎖尾錄
계사(癸巳)(1593) 5월 8일 

竹前洞親家 則當初賊雖入陣 而賊出後 市人在近者 先入偸去 至於北東西樓間身梗付斜廊 板子及窓戶門扉 盡撤而偸去 其餘東樓兩間板猶在

죽전동(竹前洞)의 친가(親家)는 당초에 적이 비록 들어와 진을 쳤지만 적이 나간 후에 가까이 있는 시인(市人)들이 먼저 들어가 도둑질해 가서 심지어 북,동,서루(西樓) 사이에 있는 사랑의 판자 및 창호와 문짝을 모두 뜯어 도둑질해 갔고, 그 나머지 동루(東樓) 양쪽칸 사이의 판자만 아직 남아 있고...

[쇄미록]은 조선중기의 학자인 오희문(吳希文 1539~1613년)의 일기로 임진왜란당시 남아있던 (즉 조선전기의) 저택을 난리통에 시민들이 부숴서 뜯어가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보면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북루', '동루', '서루'니 하는 '가루' (집안내의 누각들)의 기록들입니다. 특히 동루 양쪽칸의 판자 (東樓兩間板猶)라는 기록을 보면 루집의 상층칸이 두 칸이상의 규모였음이 드러납니다. 모두 현재 양반한옥에서 쉬이 볼 수 없는 구조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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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자던 높은 방, 그리고 객사 침루들

약간은 야한 이야기지만, 빼놓을 수 없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년)가 쓴 [오산설림초고]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오산설림초고
成廟朝。朝士有後娶者。心疑處女有若經人者。疏請去之。上命宦侍。圖其家室形勢而來。見寢室傍有高樓。上賜其人書曰。譬如秋栗。時至自坼。率與之終身可也。時識者以爲。高樓連寢室自少下上。相激使然。當以意思之。聖慮非衆人所及也。

성묘조 때 조정 관리 가운데 후취(後娶)한 자가 있었는데, 마음에 처녀로 다른 남자를 경험해 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어 소(疏)를 올려 그 처를 버리기를 청했다. 임금이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그 집 방의 형세를 그려 오게 한 다음 보니, 침실방이 높은 누(樓)에 있었다. 임금이 그 사람에게 글을 내리기를, “비유하여 말하자면, 가을 밤(栗)과 같아 때가 되면 스스로 벌어지는 법이니, 거느리고 더불어 종신(終身)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당시에 식자들이 말하기를, 높은 누(樓)가 침실에 이어 있어, 어렸을 때 오르내리며 서로 부딪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뜻으로서 이것을 생각해 보면, 임금의 생각은 뭇 사람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즉, 조선전기 성종(成宗, 1457~1495년)대의 일로 후처로 들인 여자가 처녀인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은 의심이 들어, 그 여자를 버리려 했는데, 성종이 명을 내려 그 처녀가 살던 처갓집의 모습을 그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처녀때 살던 침실의 구조가 '높은 누각과 침실이 잇닿아 있어' 이 높은 침실을 누를 타고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여기서 이유는 생략한다...) 처녀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는 혜안을 내놓으신 겁니다. 이러니 더불어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야기도 재밌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부분.
見寢室傍有高樓。살펴보니 침실방이 높은 누(루)에 있었다.
高樓連寢室。고루(높은 루)에 침실이 맞닿아 있다.

즉, 이 조선전기 양반규수가 자던 침실은 루건물에 위치한 '침루'가 되는 겁니다 (온돌방이 아닌, 이 부분은 추후 추가포스팅에서 다시 인용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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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루'에 대해 쓴 글이니 한 가지 기록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아래 글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인 하륜(하윤, 河崙, 1348~ 1416년)의 '봉명루 기'라는 기문입니다.

봉명루 기

진주(진주)는 내 고향이라서 내가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안다. 비봉산(비봉산)이 날개를 벌리고 북쪽에 그쳤으며, 망진산(망진산)은 용이 꿈틀거리는 듯 남쪽을 옹위하고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고, 동서의 모든 산이 보기좋게 둘러 있으며, 촉석봉(촉석봉)이 강의 북쪽 개울에 비끼었는데, 그 봉의 형세를 따라 성을 만들어 튼튼하고도 높다. 옛날에 누(루)가 봉우리의 꼭대기에 있어 조망의 아름다움이 한 지방에 으뜸이었다. 중략. 

객사(객사) 남쪽으로 백여 보를 나가면, 3칸의 오래된 누(루)가 있어 그 누의 아랫칸을 비워서 왕래를 통하게 하였는데 누문이라 이르고, 다른 이름은 없었다. 곁에는 고목 10여 그루가 열지어 바람을 부르고 햇볕을 가리어 상쾌한 기운이 저절로 일고 공관과 민가의 죽림(죽림)과 화목(화목)들이 은은히 서로 마주치고 산광(산광)ㆍ수색(수색)ㆍ연하(연하)ㆍ성월(성월)이 그밖에 비치니, 유람할 만한 곳이 실로 지척의 사이에 있다. 중략.

이 기록은 무엇보다 14-15세기초의 여말선초의 '루'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해 보입니다. 즉, 고려시대 (이 당시에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니 고려시대겠죠)의 오래된 루가 하나 있는데 3칸짜리입니다. 그런데, '루의 아랫칸'을 비워서 '누문'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말일까요? 이건 보통의 '루'는 아랫층과 윗층이 구분되어 있고 사방이 막혀있는 형태라는 반증이 됩니다. 즉, '루'가 아닌 '누문'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아랫층을 비워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 기록은 현재의 많은 '루'라고 이름붙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형태의 건축물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동국이상국집]과 [속 동문선]에 나오는 고려중기의 귀한 두가지 루 기록을 소개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동국이상국집
현종원 중창기(懸鐘院重創記)중 발췌:

賓客。不宜使夷而錮遠目。故以崇其居。飛枅走栱。上出鳥道

빈객(賓客)을 묵게 하는 집은 낮게 지어서 빈객들의 전망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락(루)을 올려서 그 거처를 높이되, 동자기둥을 나는 듯 세우고 두주를 달아나는 듯 꾸며서 공중에 우뚝 솟아나게 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남쪽을 바라보면 창해의 돛단배들이 즐비하고, 서쪽을 바라보면 촌락이 펼쳐 있다. 아래에는 연당(蓮塘)과 유저(柳渚)가 있어 백로(白鷺)와 취금(翠禽)이 날아 서로 왕래하면서 부침 유희하니, 그것은 마치 때를 타서 득의한 자의 즐거움과 같다. 앞에서 말한 왕인ㆍ대빈으로서 왕래하는 자가 절(節)을 멈추고 이 다락(루)에 오르면 표표히 일어나는 놀과 같이 소요(逍遙)하고 언앙(偃仰)하지 않음이 없으리니, 다만 눈비를 피하여 행차를 멈출 뿐 아니라, 해가 넘어가도 떠나는 일을 잊을 것이며, 떠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주 뒤돌아보며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나 친한 벗을 만나 차마 이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할 것이다.

승안(承安) 3년(1198, 신종 1) 모월 모일에 적는다.

현종원 중창기는 정확한 년도가 보여주듯 1198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현종원이라는 객사(원)을 짓고 쓴 '기문'입니다. 여기 보면 빈객(손님)들이 자는 곳은 '낮아선 안된다'라고 되어 있어 '침루'형식의 건축이 있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정자'라든가 하는 표현이 아니라 '舍 (집 사), '庳 (집낮은 비)' 라는 글자가 나온 다음,
以崇其居. 따라서, '루'를 지어서 그곳을 거처로 한다. 

라는 기록이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즉, '전망'만을 위해 지어진 조선후기의 '루'와 달리, 고려대-조선전기의 많은 루중 어떤 형태의 건축물들은 분명히 '조망'과 '거처 (침실)'을 겸비한 형태의 건축물들 (벽이 있는)이었음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과장이 섞였을 지언정 上出鳥道 (새가 다니는 길에 솟아나다)라는 구절은 높이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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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으로 [속 동문선]에 나오는 '지락헌'이라는 건물에 대한 기문입니다.

속동문선 
지락헌 기(至樂軒記) 채수(蔡壽)

전 진잠 현감(鎭岑縣監) 변군(卞君)은 벼슬한 화려한 집의 자손이다. 젊었을 때에 조정에 벼슬을 하였으나 환유를 즐기지 않았으므로, 물러나와 상주(尙州)산양현(山陽縣)에 살면서 날마다 고기잡이를 기쁨으로 삼았다. 다만 그가 살고 있는 집이 잔산(殘山)과 단롱(斷壟) 사이에 있어서 상쾌하고 한가하지 못함을 한하여, 이제 옛 집 서쪽 삼리(三理)쯤 되는 큰 강가 반석 위에 터를 잡아, 바위와 벼랑을 깎고 담장을 둘러 40여 칸의 집을 지었는데, 냉방과 온실을 각기 겨울과 여름에 편리하게 하였다. 

그 남쪽에는 몇 길의 돌을 쌓아 높은 헌(軒) 세 칸을 세웠는데, 가히 30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 또 그 남쪽에 층루(層樓)를 세우니, 가히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나는 듯한 기와와 공중에 솟은 듯한 높은 집, 굽은 난간과 가로 놓인 난간이 잔 물결을 굽어본다. 또, 그 동쪽에 바위가 높으면서도 평평하고 통창함이 망루(望樓)와도 같았으므로 깎아서 대(臺)를 만들었다.
번역한 부분의 발췌부분입니다.
營高軒三楹。높은 집(高軒) 세 채를 지었는데 
可坐三十餘人。삼십명 이상이 앉을수 있고. 
又其南搆層樓。또다시 그 남쪽에 층루를 얽었는데 (올려짓는데)
可坐十餘人。가히 십인이상이 앉을 수 있다.
皆飛甍峻宇。나는 듯한 용마루와 가파르게 높은 집 (宇)
凌軼霄漢。曲欄橫檻。굽은 난간과 가로로 놓인 난간이 잔 물결을 굽어본다.

이 [속 동문선]은 역시 성종(成宗) 9년인 1478년 12월에 서거정이 지은 [동문선]을 보충해서 조선 중종 13년(1518년)에 신용개가 성종 이후의 시문(詩文)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최소 15세기이전의 기록이 됩니다. 침루는 아니지만 같은 저서에 당시 '루'의 높이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될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높고 낮은 형태의 다락(루)가 공존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속동문선 효망(曉望)
박은(朴誾)

새벽 별들 바다에 드리웠는데 / 曉望星垂海
다락 높아 추위는 사람을 엄습한다 / 樓高寒襲人
이 몸 밖에 건곤은 저리 크거니 / 乾坤身外大
앉았으면 고각 소리 자주 들리네 / 鼓角坐來頻
먼 산을 바라보면 안개 같은데 / 遠岫看如霧
시끄러운 새 소리에 봄임을 깨닫겠다 / 喧禽覺已春
어제 취한 술병을 풀어야 하겠는데 / 宿酲應自解
부질없이 시의 흥취 아울러 이네 / 詩興謾相因

읍취헌 박은 (朴誾, 1479 ~ 1504 년)의 시로 루(다락)이 높아 춥다고 되어 있지요. 추위와 높이에 대한 사료의 기록들은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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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본 글은 앞서 소개한 여러 글들 (주로 사라진 건축 카테고리 글들)에서 이어진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각개격파식으로 파편적으로 잘라서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언젠가 이런 작업을 통해 (최소)고려후기- 조선전기의 '루' (가루, 객사루, 가루(도로변))의 형태들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이 잡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아래 연관글중 '세종대왕이 오르신 침루'는 확실히 '침루'였음을 거의 보여주는 기록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산설림초고의 기묘한 이야기부터, 조선전기와 후기의 양반저택모습을 묘사한 기록, 조선전기의 저택을 상세히 묘사한 중국사신의 글등을 통해 현재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전통한국 건축미'를 보여줄 수 있는 '루'를 만나보았습니다. 언젠가 실물로 재건된 모습도 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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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 자료를 모아두고 글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한 분량보다도 더 긴 자료가 있는데 오늘 소개한 침루부분과 함께 소개할 경우, 글이 너무 길어집니다. 다른 부분은 추후 '조선전기 한옥저택'이라는 좀 더 큰 타이틀로 소개해 보려 합니다. 

연관글:

사족: 지금도 한문으로 '樓房누방'이라는 검색을 하면 이런 사진들이 뜹니다.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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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6/02 11:14 # 삭제

    좋은 글 잘봤습니다

    포스팅 중 사다리라는건 아무래도 나무 계단을 지칭하는 표현이 맞는듯 싶고

    (사실 조선 후기에도 돌계단은 물론 나무 계단이 많이 쓰였죠 당장 동궐도만 봐도

    쉽게 알수있는.. )

    노인이 아닌 이상 일반 사람들은 마루에서 일상 생활을 하고 잠을 잤다는 건

    한자로 청이라고 표현한 공간이 흔히 고려시대 거주지 내부공간을 말할때

    외부 벽체의 두꺼움과 더불어 내부는 커튼 같은 걸로 공간 분할을 했다는 얘기를

    많이 하던데 어느정도는 그것과 일맥상통하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습한 기후를 피하기 위해서 누 에서 거처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이건 조선중기 이후 소위 소빙기 이전 시절의

    한반도 기후와도 연관있는 중요한 내용인것 같네요

    이전에 말씀드린 조선 중기 이전 한반도 활엽수 중심의 나무 수종 분포와도

    관계가 있구요.

    마지막으로 성종때 일화 생략하신 부분은

    실제 요즘 의사들 말하기로는 그정도 충격으로

    소위 처녀성이 상실되는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여자들 사이에서는 자전거 자주 타거나 말뚝박기 하는것도

    처녀막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는 루머가 돌긴 돌았나 봅니다

    (글로 써놓고 보니 저도 좀 민망하네요 뭐 그런..)
  • 역사관심 2015/06/02 13:29 #

    아 그런 해석도 가능하군요. 기우에 관해서는 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구절도 다시 보입니다. 말뚝박기 도시전설(>)은 저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
  • 이 감 2015/06/02 12:21 # 삭제

    아무래도 기본적으로는 덕수궁 석어당과 가장 가까운 모습들이겠죠. 일부러 궁궐의 장엄은 하지 않았는데, 궁궐에 있던 침루들이라면 더 화려하게 꾸몄을 것이고요.
  • 역사관심 2015/06/02 13:30 #

    저도 석어당 생각을 했었습니다- 여러 형태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포스팅에서 더 들어가 보려 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ㅇㅇ 2015/06/02 14:23 # 삭제

    조선부 기록은 아산맹씨행단의 모습과도 매치가 되네요
  • 역사관심 2015/06/02 23:17 #

    사다리 기록은 다르지만 (맹씨행단내부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게 아니라 모르지만), 정말 한번 눈여겨 볼만하네요.
  • ㅇㅇ 2015/06/04 20:19 # 삭제

    그 밖에도 양진당, 오작당, http://younghwan12.tistory.com/m/post/4147

    등의 고택도 참고하기 좋을 것 같군요.
  • 역사관심 2015/06/05 00:33 #

    아 이런 고택이 있었군요. 흥미롭습니다! 고맙습니다.
  • 머글 2015/06/07 15:16 #

    제주관아의 망경루에도 벽체가 있던데....
    이것과 비슷한 것일까요?
  • 역사관심 2015/06/08 03:28 #

    머글님 댓글 감사합니다. 제 느낌이지만 고려대건축은 현재 남아있는 소수의 조선전기, 그리고 많은 현전하는 후기양식도 참고해야겠지만, 적어도 똑같이 그만큼 고려당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송대 원대 건축도 참고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전대인 통일신라대 건축도). 현재의 한옥과는 비슷하면서도 많은 차이가 있는 건축양식일 것 같아요. 어떤 건축의 경우 현전하는 건축을 참조하면서 그림이 나올 테지만, 어떤 특정 건축은 현전하는 건축과 기본적인 차이가 있는 건축들인듯 해요 (즉, 다시 생각해서 그려내야 할 것들도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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