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에 나오는 적루'敵樓'를 닮은 가옥들. 한국의 사라진 건축

고려시대 건축구조를 다룬 정보중 단문이지만 이런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해동역사 속집
성읍(城邑)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당(唐)나라 이전에는 평양에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고려는 여러 대에 걸쳐 겪은 병란에 징계되어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지금의 왕성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바,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둘레가 60리인데,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 지형에 따라 쌓았다. 

성 밖에는 참호(塹壕)가 없고, 여장(女牆)을 만들지 않았다. 줄지어 잇닿은 집들은 행랑채와 같은 모습으로,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성에는 비록 병기(兵器)를 설치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는 하였으나, 산의 형세에 따라서 성을 쌓은 탓에 전체가 견고하지는 않다. 이에 낮은 곳의 경우는 적을 막아 낼 수 없는바,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능히 지켜 내지 못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원문중 

해당부분을 확대해보죠.
列延屋  연이어 집이 늘어서 있어
如廊廡狀 행랑집과 같은 형상인데
頗類敵樓 적루와 꽤 비슷하다

"(성외곽에) 줄지어 잇닿은 집(屋, 집 옥)들은... 자못 적루 敵樓 와 비슷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인이 말하는 敵樓는 어떤 건물일까요?

이게 중국의 전통적인 적루입니다 (사진은 서안성벽의 적루로 당-송대에 이어졌지만, 현재의 형태는 1378년 명초기의 것입니다).
西安城墙 敵樓

중국의 적루관련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성벽위에 지은 망루"입니다.
敌楼

城墙上御敌的城楼。也叫谯楼。 宋 曾巩 《瀛州兴造记》:“乃筑新城,方十五里,高广坚壮,率加於旧,其上为敌楼、战屋。” 金 董解元 《西厢记诸宫调》卷一:“西有 黄河 东 华岳 ,乳口敌楼没与高,仿佛来到云霄。” 清 蒲松龄 《聊斋志异·罗刹海市》:“少时,抵城下,视墙上砖,皆长与人等。敌楼高接云汉。” 何垠 注:“敌楼,城上守御之楼,即《唐书·马燧传》所谓谯橹,俗云谯楼也。”明 汤显祖 《牡丹亭 御淮》“(老旦等跑介)文武属官,迎接老大人。(外)起来,敌楼相见了。”

하지만, 꼭 이런 형식의 전통적인 누각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고 성의 방어시설중 루형태로 구멍을 내서 적과 교전하게 만든 구조물 같습니다. 다음은 다산의 [다산시문집]중 중국인 모원의(茅元儀, 1594∼1644) 저서의 인용부분입니다.

“무릇 성 위에는 모두 여장(女墻)이 있는데 10보(步)마다와 마면(馬面 치 위의 평면) 위에는 모두 적붕(敵棚)이나 적단(敵團), 또는 적루(敵樓)를 설치하는데, 적루는 반드시 쌓아올린 성벽으로부터 똑바로 벽돌을 쌓아올리되 높이는 얼마라고 한정하지 않으며 반드시 처마는 만들지 말 것이며, 창문은 넓게 만들어 두 사람이 한꺼번에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 적루를 만드는 제도는 모나게 하거나 길게 하기도 하며, 또는 몇 층씩도 만든다. 층과 층의 거리는 반드시 9척(尺)이 되게 하여 화살이나 돌, 화기(火器)들을 설치해 두는데, 앞쪽의 창문 아래 창대(窓臺)는 낮게 하는 것이 좋다. 너무 높으면 활이나 기타 화기를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송대것으로 알고 있는 공성법 그림에 나오는 '적루의 모습'입니다.
적루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또 다른 상세기록으로, 1804년의 중국 기행기인 [계산기정]이 있습니다.

조양문(朝陽門)

조양문은 일명 제화문(齊華門)이라고도 하는데, 이 문은 바로 황성의 동문이다. 문루가 모두 3층인데 모두 청기와로 이었으며, 옹성(瓮城)의 위에 누가 있는데 이것을 적루(敵樓)라고 일컫는다. 
김홍도가 그린 조양문 중 일부 (현전하지 않음)

이 그림이 조양문이고 옹성내의 복층누각이 바로 적루입니다. 앞의 구멍난 건물을 말합니다.

정양문 문루는 4층이고, 조양문 문루는 3층인데, 모두 옹성이 있다. 그 위에 역시 층루(層樓)를 세웠으며,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고 벽돌을 처마와 가지런하게 쌓았다. 구멍 난 벽돌로 집을 설치했는데 총 30여 호이니, 내루(內樓)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서 이것을 적루(敵樓)라 한다. 이 이외의 여러 문에는 모두 적루가 없다. 정양문 서ㆍ남ㆍ북에 각기 문 하나씩이 있는데, 그 남문은 늘 굳게 잠가 두고 황제가 거둥할 때에만 연다.
- 계산기정

참조할 만한 다른 기록으로는 홍대용(洪大容,1731~1783년)의 기행기인 담헌서(湛軒書)에 나오는 청대의 적루모습이 있습니다.

송씨 집의 북쪽엔 적루(敵樓)가 있는데, 그것은 성을 임하여 반공중에 높이 솟아 있었다. 성을 지키면서 관망(觀望)하는 누대로 올라가 조망(眺望)하면 장관이라 한다. 이야기를 끝내고 올라가 보기를 청하였더니, 송씨는 그러자고 일어났다. 네 겹의 문을 지나는데, 문마다 좌우에 행랑[廊]이 있고, 비단 발을 쳐 놓았는데, 부인들이 발 틈으로 내다보는데 보니, 모두 성장을 하고 있었다. 섬돌과 뜰 사이에 군데군데 솥과 가마 등 음식을 익히는 도구가 설치되어 있어, 아직도 부호의 냄새를 풍겨 주고 있었다. 누(樓)의 아래에 이르니, 누는 4층으로 되었는데, 다 두세 길의 사닥다리[胡梯]가 놓였다. 맨 위에 올라가니, 4면으로 창문이 있어 시원하였으나 티끌과 모래가 휘몰아쳐서 그만 흥이 없어지고 말았다.

특히 "문마다 좌우에 행랑이 있고"라는 구절은 고려도경과 비교해서 흥미로운 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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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려도경의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고려시대 성외곽에 이런 층루형식 혹은 단층이지만 구멍이 많은 가옥들이 행랑채처럼 이어서 존재했다는 것인지 (같은 고려도경에 열에 여덟이 초가라고 되어 있어 민가는 분명 아닙니다), 혹은 성위에 적루가 존재했다는 것인지 필자의 역량으로는 구분하기 힘듭니다. 다만, 글의 문맥상 아래 고전번역원의 고려도경 번역부분처럼 해석한다면 성벽바로 외곽에 이런 적루형식의 건축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현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호참(濠壍)과 여장(女墻 성가퀴)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관련전공자들이 그 형태와 건축정체성을 한번 생각해 볼 구절같습니다.


덧글

  • ㅇㅇ 2015/06/05 14:18 # 삭제

    글 잘봤습니다 근데

    현재 사진의 서안 벽돌 성곽은 명나라때 새로 쌓은 거죠

    당나라때보다 전체 둘레가 짧구요.. 물론 성곽 두께나 높이는

    명나라때 새로 쌓은게 더 거대하지만 말이죠

    (당나라때 장안성은 판축토성이고 성 높이도 현재 서안성곽보다 낮음)
  • 역사관심 2015/06/08 03:32 #

    네, 본문에도 명대에 다시 쌓은 것이라고 써두었습니다. 당대정보는 몰랐는데 고맙습니다.=)
  • ㅁㅁ 2015/06/05 22:46 # 삭제

    항상 잘 배워갑니다
  • 역사관심 2015/06/08 03:33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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