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축 (10)- 곳곳의 검은 방, 괴승 신돈의 루樓 (그리고 황진이의 노년) 한국의 사라진 건축

오늘 소개하는 건물은 고려의 괴승 신돈의 '누각'입니다. 

공민왕대의 신돈(辛旽, 1322년 ~ 1371년)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듯 그 평가가 (종교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에서) 엇갈리는 인물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가지는 명확해 보입니다. '호색가'. 특히 처녀고 유부녀고 가리지 않는 그의 여러 야사와 정사기록들을 보면 거의 여불위가 연상될 정도이니까요.

이 글에선 그의 저택의 일부였던 '신돈의 누(루)'를 소개합니다. 실상 시리즈 아홉번째 건물들과 같은 맥락의 건축이지만, 최우의 우대루와 같이 하나의 단독건축으로 꽤 흥미로운 것인지라 따로 정리했습니다. 기록이 길지는 않지만, 앞선 연관글들 (연관된 글들은 위의 시리즈(8)에 리스트로 엮어두었습니다)과의 연장선상에서 한국건축사의 중요한 부분을 담고 있는 사료라 판단됩니다.

대동야승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辛旽宅尙餘層樓一區 平昔爲惠民局 審藥居之 李敞爲都事時 刊其層合爲一屋 今爲常平倉 余先人?廬 近在其前 余兒時嘗登其樓 處處陷作曲房 白晝如漆 蓋辛旽當路。故誣朝士。拘諸狴犴。朝士之妻委來乞哀。辛旽嘗殺白馬。以其陰曝乾。磨而作屑。和酒飮朝士妻使之醉。行淫於其樓云。

신돈(辛旽)의 집은 아직도 층루(層樓) 한 구역이 남아 있다. 지난날 혜민국(惠民局)이 되어 심약(審藥)이 여기서 살았다. 이창(李敞)이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위층을 헐어 합쳐 한 채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상평창(常平倉)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 집이 가까이 그 앞에 있어 내가 어릴 적에 그 누(樓)에 올라간 일이 있다. 

곳곳에 우묵하게 후미진 방을 만들어 대낮에도 깜깜했다. 이는 신돈이 요직에 있었을 때, 고의로 조정 관리들을 속여 폐간(狴犴 감옥. 옛날 감옥 문에 사나운 폐간을 그려 붙인 데서 나온 말)에 가두고 그들의 아내가 와서 애걸하게 되면, 신돈은 흰 말을 잡아 그 음경(陰莖)을 말려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그들의 아내에게 술에 타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이 누(樓)에서 음행(淫行)을 저질렀다고 한다.

곳곳의 검은 방들, 그리고 이층을 합해서 한층으로

이 기록은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데, 몇차례 소개한 저자인 차천로(車天輅, 1556~ 1615년)는 원래 고향이 개성입니다. 글에 보이는 장면이 신빙성이 높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것이 아닌, 차천로 본인이 개성에 살던 어린 시절 부친의 집에서 가깝던 신돈의 루에 오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은 살펴보면 곳곳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차천로가 어린 시절이라고 하니 아마도 1560-70년 사이가 아닌가 합니다 (그의 나이 5세~15세정도). 이때 그의 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이니 차천로 본인이 살던 자기집이었겠죠) 신돈의 오래된 저택의 '일부'가 남아 있어 가본 겁니다. 신돈의 사망해가 1371년이니 200년이 넘은 고택입니다. 아마도 어마하게 컸을 그의 저택중 다른 부분은 사라지고 층루의 '한 區' (일단 번역에선 한 구역)만 남아 있었는데, 층루라는 것은 복층건축을 말합니다.

그럼 우선 앞서 소개했던 '루 시리즈'와 관련있는 부분부터 살펴보죠.

辛旽宅尙餘層樓一區 신돈의 저택중 층루(여러층의 누각)한 구역이 남아 있었다.
刊其層合爲一屋  나눠진 그 층을 합해서 한 채로 만들었다.
余兒時嘗登其樓 내가 어릴때 그 루를 오른 경험이 있다.
處處陷作曲房  (루의) 곳곳에 우묵하게 구부러진 방들을 만들었는데
白晝如漆    밝은 대낮에도 깜깜했다 .
行淫於其樓云 그 누에서 음란한 짓을 한다.

보시다시피 확실히 복층건축(최소 2층)중 윗부분 층을 부수고 하나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 1-2층이 있는 건축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규모입니다. 2층부분에 올라갔더니 그냥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마루가 있고 곳곳에 방들이 숨겨져 있는 대형 건물인 것입니다. 정력가 신돈은 이 누각 상층을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게 구조하고 곳곳에 방을 숨겨둔 것입니다. 그 방들을 묘사하는 단어인 漆이라는 글자는 "옻칠 칠, 검을 칠"이라는 뜻이며 칠흑같이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려대 '루'의 형태상 매우 중요한 기록.
刊其層合爲一屋  나눠진 층들을 합해서 한채로 만들었다.

즉, 이창이란 자가 신돈이후 이 건물을 최소 2층의 복층구조를 합해서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고려대의 루중 복층이 분명 존재했음을 (앞선 글들에서도 살펴봤지만) 명확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그럼 이 누각이 실제로 존재하던 건물인지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봅시다.


혜민국과 신돈의 누각

이 건물의 위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저 기록에 다 나옵니다. 중요한 구절은 바로  "지난날 혜민국(惠民局)이 되어..." 이 부분입니다. 즉 신돈이 이 건물 (저택자체야 더 넓었지만 이 건물 하나만 보자면)을 차지하고 본인의 누각으로 쓰기전에는 고려시대의 의료기관인 '혜민국" 건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최초로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언제일까요?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임진년 예종 7년(송 휘종 정화 2, 요 천조제 천경 2, 1112)
9월 
○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였다.

즉, 그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면 1112년에 최초의 형태가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신돈시대보다도 200년 전이죠. 혜민국은 1163년에도 등장합니다. 역시 고려사절요의 기록입니다.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계미 17년(1163), 송 효종(孝宗) 융흥(隆興) 원년ㆍ금 대정 3년

혜민국(惠民局) 남쪽 거리에 어린아이들이 동서 두 무리로 나누어서, 각각 볏짚을 묶어 계집아이를 만들어서 비단으로 옷을 입히고는 또 계집종 하나를 꾸며서 그 뒤에 따르게 하였다. 앞에는 사방 한 장 되는 궤안(几案)이 금과 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다 반찬과 음식을 배설해 놓았다. 구경꾼이 둘러선 가운데, 두 대열에 서는 서로 아름다움과 기교를 경쟁하고 과시하여 떠들고 소란을 피웠다. 이러기를 5, 6일 하더니, 드디어 파하고는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혜민국이 위치한 건물을 신돈이 자신의 저택에 편입시켰다면 새로 짓지 않은 한 이 건물은 저런 복층형식의 누각이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그런 기록이 있을까요? 놀랍게도 남아 있습니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의 기록이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상(開城府上)
【공해】 개성부 본사(開城府 本司) 서부 암곶리(巖串里)에 있다. 혜민국(惠民局) 남대문 밖 네거리에 있으며 층각(層閣)이 있다. 

원문 중

분명 '층각' (복층건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따라서 오산설림초고의 저자 '차천로'가 16세기중반 오른 신돈의 14세기 누각(루)는 이 12세기 건설된 혜민루 층각을 기초로 확장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확장한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런 2층의 후미진 방들이 의료시설로 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나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모체가 양성지(梁誠之, 1415~1482년)의 [팔도지리지]였고, 이 팔도지리지의 모체는 [세종실록지리지]와 1432년의 [신찬팔도지리지]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기록은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 확실히 앞선 것입니다. 그 위치는 이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남대문 네거리 바깥에 있었다).
예전에 소개한 최충헌의 십자각과 비근한 지역 (당대의 개성남대문 사거리는 대단했을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록이 매우 중요해 보이는 것은 '층각'이라는 단어가 중국 일본뿐 아니라 (차천로의 경험담에서 파악되듯)이런 식의 중층건축 (상층에도 방이 존재하는)에(도) 최소 고려대까지는 쓰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이 기록은 다른 많은 사료가 보여주듯 '고려대이전'의 수백년된 건축물들이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까지는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차천로의 유년기가 바로 임진왜란직전입니다.


고려시대 행정구역, 혹은 저택구역 단위 區의 의미

그럼 신돈의 '누각(루)'는 여기까지 살펴보고 좀 더 눈을 넓혀 보겠습니다.
우선 다시 차천로 기록으로 돌아가 이 부분.
辛旽宅尙餘層樓一區 신돈(辛旽)의 집은 아직도 층루(層樓) 한 구역이 남아 있다.

'層樓一區' 층루 한 구역. 이 말은 신돈의 저택중 '일부'만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하겠죠- 신돈이 이 '루'에만 살았을리는 없으니까요. 당연히 이 누각외에 그의 저택은 광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 해주는 기록이 한 점 전합니다.

고려사절요
○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잡은 처음에 기현(奇顯)의 집에 기숙하면서 기현의 처와 사통하였는데, 기현 부처는 늙은 노비처럼 시종하였다. 신돈의 권위가 점차 성해져서 백성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 죽을 지경에 두고자 한다면 뜻대로 안 됨이 없었다. 만약 자색이 아름다운 사대부의 처첩이 있다고 들으면, 그 남편을 조그마한 죄과로라도 순군옥(巡軍獄)에 보내고는 기현 등을 시켜서, “만약 주부(主婦)가 친히 가서 부탁하면 억울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 부인이 신돈 집에 와서 대문을 들어서면 말과 따르는 사람을 돌려보내고, 중문을 들어서면 비복들까지 보내게 하였으며, 신돈 집안 사람이 데리고 안문으로 들어오면 신돈은 서당(書堂 서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옆에 마련된 이부자리에서 마음대로 간음하는데, 사랑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수일 동안 머물게 하였다가 보내고서는 그녀의 남편을 놓아 주었다. 만약 불손한 자가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죽게 된 자도 있었으므로, 부녀자들은 그 남편이 잡혔다고 들으면 반드시 단장을 하고 먼저 신돈의 집에 가는데, 하루도 빠진 날이 없었다. 신돈은 양도(陽道)가 쇄할까 염려하여 흰 말의 음경을 자르거나 지렁이를 회(膾)쳐 먹는데, 만약 황구(黃狗)나 흰 매를 보면 소스라쳐 놀라고 두려워하니, 그 당시 사람들은 늙은 여우의 정령이라 하였다.

(간음했다는 부분은 너무 많이 나와서 패스) 신돈의 저택의 구조중 일부가 드러나는 구절로 신돈의 저택중, 대문-중문-안문을 통과하면 그를 만난다는 묘사입니다. 따라서 이런 저택의 한 쪽에 저 '층루'가 서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어떤 연구를 찾아봐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단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려대 사료에 종종 나오는 '區'라는 글자입니다. 추후 다른 포스팅에서 소개하겠지만 고려대 기록에 무려 200칸 짜리 궁궐급 대저택이 있습니다. 바로 '정함'이라는 자의 저택입니다 (여기선 짧게 '구'만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병인 24년(1146), 송 소흥 16년ㆍ금 황통 6년
○ 5월에 내시 서두공봉관[內侍西頭供奉官] 정함(鄭諴)에게 좋은 집 한 채를 하사하였는데, 정함은 왕의 유모의 지아비이다.
○五月,賜宦者內侍,西頭供奉官鄭諴,甲第一區,乳媼夫也。

이 기록에 보면 1146년에 (즉 혜민국시절입니다) 정함이란 자에게 왕이 저택을 하사합니다. 그 표현이 번역에는 '한 채'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구' 입니다. 甲第一區

즉, 저택을 하사하는 단위가 건물수가 아닌 '영역'이라는 느낌이 강하죠. 그런데 이 저택의 넓이가 굉장합니다. 말씀드렸듯 무려 200칸에 달합니다.

정축 11년(1157), 송 소흥27년ㆍ금 정륭 2년
12월에 정함의 집을 경명궁(慶明宮)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정함의 집은 대궐동남방 30보(步) 거리에 있었는데, 크고 작은 행랑의 칸수가 무려 2백여 칸에 달하였으며, 누각이 우뚝하고 장식이 찬란하여 참람하게도 궁전과 견줄 만하였다. 음양가들이 모두 말하기를, 개[犬]가 머리를 들고 주인을 짖는 형상이니, 왕이 임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十二月,詔以鄭諴私第,爲慶明宮,諴第,在闕東南三十許步,大小廊廡,凡二百餘間,樓閣崢嶸,金磨交輝,僭擬宮禁,陰陽家,皆以爲犬擧頭吠主之勢,不宜臨御,不從。○以崔諴,爲政堂文學,金永夫,知樞密院事。

참고로 이 정함의 대저택에도 높은 '루'가 있었습니다. 崢嶸 (쟁영)이라는 말은 산의 형세(形勢)가 가파르고 한껏 높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관용적으로 쓰입니다.

樓閣崢嶸 누각이 가파르게 높다 (가파를 쟁, 가파를/높은 영).

이 기록을 보면 하사한지 12년이 된 1157년에 왕이 이 저택을 빼앗아서 '경명궁'이라는 궁궐로 바꿉니다. 저택을 궁궐로 바꿀만큼 대규모였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이 기록은 一區의 영역이 적어도 200칸짜리 저택의 영지정도의 넓이를 뜻하는 것이 됩니다. 적어도 이 시기의 이 기록에선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요.

비교맥락에서 다음의 두 가지 기록을 한번 고찰해 볼 만 합니다. '層樓一區' 앞서 소개한 기록으로 "신돈의 층루 한 '구' 가 남아있다." 이 것은 문맥상 행정구역보다는 '부분'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일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기록은 분명 좀 더 어떤 단위같은 느낌입니다.

기축년 고종 16년(송 이종 소정 2, 금 애종 정대 6, 몽고 태종(太宗) 와활대(窩闊台) 원년, 1229)
동11월 최우가 구장(毬場)을 만들고, 그 가병(家兵)을 사열하였다.

우는 이웃집 수백여 구(區)를 빼앗아 구장을 만들었는데, 동서가 수백 보나 되고, 평탄하기가 바둑판 같았다. 날마다 도방(都房)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擊毬)를 하게 하였는데, 혹은 창을 던지고, 말타고 활쏘기를 더러는 5~6일까지 계속하기도 하였고, 잘하는 자는 즉석에서 작(爵)과 상을 가하였다. 그래서 도방 별초의 안마(鞍馬)ㆍ의복ㆍ궁시(弓矢)는 모두 몽고 풍속을 본받아 곱고 아름다운 것을 서로 다투어 자랑하였다. 또 군사를 오군(五軍)으로 나누어서 전쟁 연습을 할 때면, 인마가 엎드러지고 쓰러져서 사상자가 많았다. 그것을 마치면 사냥하는 법을 익히는데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서서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었는데, 우는 그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

이 기록은 예전 [고려시대 大격구장의 규모와 위치추적]이라는 포스팅에서 소개한 최우의 격구장의 규모를 보여주는 사료로, 당시 이런 추정을 한 바 있습니다.

동문선이 성종대의 저작이니 세종대 영조척을 대입하면, 400여보라고 하면 약 790-800미터가 됩니다. 이것이 동서의 길이를 따진것인지 총 사면의 길이를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4면총합이라고 하면 약 4만평방미터㎡가 되지요. 상암구장이 이 크기입니다 (설사 주척으로 계산해도 총 520미터로 경기장면적만 14,400㎡가 됩니다. 현재 포항 스틸러즈의 스틸야드가 경기장순면적 9,594㎡입니다). 만약 격구장이 정사각형이었다면 한면당 200미터가 되고, 3:2 비율 직사각형이었다면 동서 266미터, 남북 133미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최우의 격구장 면적이 상암운동장만한데 이 격구장을 만들 때 '이웃 수백여 구(區)를 빼앗아' 만들었다는 기록과 이 '정함의 200칸 저택'이 한 구(區)였다는 비교분석이 가능해집니다. 정함의 기록이 1150년대, 최우의 대격구장이 1226년에 건설되니 시기적으로도 거의 동시대입니다. 물론 이 '구'라는 단위가 어떤 고정된 건축단위라기 보다는 '지역'이라는 글자뜻 그대로 '이웃 수백집의 지역' 혹은 '정함에게 한 지역을 하사'했다는 것일수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파악하는 한 아직 어떤 연구자도 이 부분을 터치하지 않고 있어 의문이 있습니다.

언젠가 북한과 공동작업을 할수 있다면 (혹은 통일 후), 개성의 수많은 고려대저택들, 최우의 저택이라든가, 최 충헌의 십자각이라든가, 이런 신돈의 건축유구를 발굴하는 기회가 온다면 정말 흥미로울 듯 합니다.  이런 고려 대저택들에 대한 위치비정시도조차 국내학계에선 아직 없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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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황진이는 의녀? 혹은 다른 '진랑'

마지막으로 신돈의 '누각'과는 관련이 없지만, 한국 기녀사의 대표주자 '황진이'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는 기록 하나를 찾아내서 이 김에 소개합니다. 진랑이라는 기생이 저 "혜민국"에서 일했다는 기록입니다. 

성소부부고
문부(文部) 17 ○ 척독 상(尺牘上)
이자민에게 보냄 경술년(1610) 4월

부(府)의 기생 진랑(眞娘)은 내가 조운(漕運)을 감독하던 때에 친했던 여자인데, 지금은 그가 혜민국(惠民局)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시 소식은 서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 계집은 곧 나의 계집 같은데 왜 그리도 심하게 독책하십니까? 꽃다운 나이 지나고 자식까지 있으므로 자못 찾아갈 흥취는 나지 않지만, 그의 괴로워하는 말을 들으면 역시 동정심이 생깁니다. 바라건대 나를 위해서 그를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하찮은 물오리를 잡으려다가 귀한 원앙새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혜민국은 고려대의 혜민국과의 연관관계는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의 혜민국은 태조 1년(1392)에 한양에 설치하고 세조 12년(1466)에 혜민서로 승격한 조선시대 기관입니다.그런데 황진이가 활약한 곳은 '개성'이죠. 따라서 개성에도 조선시대에 다른 혜민국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진이의 노년에 대해서는 그간 많이 알려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몰년대도 불분명하고 (1500년대초라는 설도 있고, 1520년대라는 설도 있고), 다만 서경덕이 살던 조선 중종대의 인물정도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는 허균자신이 이자민이라는 자에게 쓴 서찰 (편지)에 진랑(眞娘, 즉 황진이)의 근황을 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 보면 황진이는 이미 자식도 있고 나이가 들어 혜민국에서 일하고 있는 옛기생인데 괴롭히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것이지요. 그럼 허균이 말하는 '진랑'은 황진이가 아닌 다른 여자일까요? 같은 [성소부부고]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진랑(眞娘)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금강산의 별칭)에서 태백산(太白山)과 지리산(知異山)을 지나 금성(錦城)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어진 옷에다 때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虱]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이 기가 죽었다. 평생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墅]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유명한 러브스토리인 서경덕(徐敬德, 1489~ 1546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개성 장님의 딸이라는 것으로 보아 '진랑'은 확실히 황진이가 맞는 듯 합니다. 따라서 같은 저서의 같은 한자의 '진랑眞娘'은 황진이거나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개성에서 같은 직종(기생)을 가진 동명이인이 됩니다. 만약 황진이라면 이상한 것은 1538년에 이름을 날리던 꽃다운 황진이가 저 1610년의 편지에 나올 시기면 서경덕의 생몰년대로 보아 거의 90-100세가 되는 고령의 나이가 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선조대의 임제(1549~1587년)가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시를 읊었다는 걸 보면 동명이인인 것 같습니다.

만약 황진이라면 '서프라이즈' 소재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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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후반부의 황진이 이야기는 흥미로 쓴 부분입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또 하나의 고려대 '누각', 신돈의 '루'를 중심으로 그 형태를 생각해봤습니다. 언젠가 이런 특이한 한국역사의 건축물들을 누군가 하나하나 상상해서 여러 형태로 복원해보는 시도를 하고 (여러 형태의 매체로), 그 결과물을 보고 싶은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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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6/06 10:03 # 삭제

    정함 고택은 창녕성씨 고택이 1만여평에 200여칸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그리고 많은사람들이 99칸이 민가의 한계인줄 아는데 이 99칸은 상징적 숫자이지 실제 칸수의 한계가 아니거든요..
    조선시대에도 돈 많은 사람들은 서울에 수백칸의 저택을 짓고 살았다고하니 잘못된 선입견의 하나입니다.
    조선후기 자료에는 한성내 백칸 이상의 저택도 최소 50여곳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는 등. 큰건 310칸짜리도 있고, 소금부자 김한태 집이 200여칸이라고 했고.. 그 외에도 백여칸 짜리 집을 세배로 증축하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큰 집들은 많거든요.
    이 부분도 좀 다뤄주셨으면 좋을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06/08 03:21 #

    창녕고택이 그정도로 넓었던가요, 몰랐네요. 99칸론은 말만 그러했지 사실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죠. 아마도 신라의 옥사조 역시 그런 느낌입니다. 또한 1칸의 의미가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도 얼마전 나왔더군요.
  • ㅇㅇ 2015/06/06 11:13 # 삭제

    신돈의 평가 엇갈림 중에

    신돈 음행에 대한 기록도 왜곡가능성이 크다고 봐야죠

    공민왕 자제위 기록하고 비슷한거라고 봅니다

    블로그 주인장은 호색가라는 평가가 명확하다고 하셨는데

    솔직히 (유교사관에 입각한) 주관적인 견해라고 보여지네요

  • 역사관심 2015/06/08 03:23 #

    네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ㅎㅎ. 다만 저는 유교사관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 아래 존다리안님의 의견에 좀 더 가까운 편인데, 물론 신돈에 대해 후일 평가가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만, 그가 여색을 밝혔던 인물이 아니었다면 이정도까지 줄기차게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과하게 포장'해서 비난한 측면이 있을지언정, 그가 호색가였기때문에 (그의 정치적 역량이나 공과를 떠나)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 존다리안 2015/06/06 18:23 #

    어쩌면 신돈 본인은 정치적 개혁 의지는 분명했지만 사생활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책잡힌 걸 거고.... 그런데 과연 그의 반대파들은 그렇게 깨끗했는가 하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 역사관심 2015/06/08 03:24 #

    고려후기만 해도 조선중기 이후 유림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생활들인지라... 유교적 수행이라든가 하는 부분과는 거리가 있던 시절이죠.
  • 봉래거북 2015/06/08 13:47 # 삭제

    신돈의 음행은 과장이 있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아주 없다고 하기도 뭣한 게 사실이죠.
    당장 신돈을 비판한 자들 중에는 승려들도 있었고...(이 경우 중파 간 다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세세한 건 다 무시하더라도, 원래 권력이란 게 사람 바꿔놓는 데는 아주 신묘한 권능이 있으니까요.
  • 역사관심 2015/06/09 04:00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응가 2015/06/09 04:25 # 삭제

    개성은 폭격이 거의 떨어지지않아 남대문정도만 소실되어서 한옥들이 잘보존되어있는데다 여말선초의 한옥까지 있다고 하더라구요. 강세황의 옛그림에도 나오듯이 개성남대문을 중심으로 큰길이나있고 그 주변으로 시전이 늘어선 그모습이 구한말에도 그대로던데 지금은 주변에 현대식건물이 몇채들어오고 남대문양옆의 성벽도 사라지니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도 지금까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몇안되는 도시중 하나인데, 통일후에 자남산의 흉물을 어떻게 없애버리고 다듬기 시작하면 교토같은 도시가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 역사관심 2015/06/11 06:06 #

    저도 조선전기 한옥들이 백채이상 남아있다는 기사정보를 보고 놀랐습니다.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요. 말씀대로 개성의 여관거리등 오히려 경주보다도 미래에는 한국의 교토로 불릴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은 도시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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