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건축 (11)- 주막이전의 전통술집 건축, 주루와 다점(찻집) 한국의 사라진 건축

우리에게 '전통술집'이라고 하면 인식에 떠오르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주막'이죠. 이런 강력한 인식적 프레임에 한몫하고 있는 것은 역시 조선후기의 풍속화들, 그리고 이에 따라 활용되고 있는 현대식 전통술집들일 것입니다.

단원의 주막도와 혜원의 주사건배

주막 酒幕

참고로 '주막'이라는 곳이 어떤 형태인지는 우리에게 위의 단원의 주막도등을 통해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만, 역시 텍스트 묘사에서도 일치하는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5
맑음. 날씨가 어제처럼 따뜻했다.
평명에 출발, 30리를 가서 난니보(爛泥堡)에 이르러 조반을 먹었다. 그 사이에는 접관파(接官罷)ㆍ방허소(防虛所)ㆍ삼도파(三道把)의 촌가(村家)가 있었는데, 가겟집마다 모두 탁자를 배설(排設)해서 꽃 자기(磁器)에다가 갖가지 찬물(饌物)을 담아 둔 것이 우리나라의 주막(酒幕) 같았다.

이 부분은 [계산기정(薊山紀程)]이라는 작자미상의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당시 연행사의 일행이던 '서장보의 친구'가 지은 문헌에 등장합니다. 여기보면 청나라의 농촌지역의 집에 들렀더니 가게인데 탁자를 늘어놓고, 꽃이 꽂힌 도자기와 饌物 (찬물), 즉 반찬들을 늘어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치 '우리나라 (즉 18세기초 조선)'의 주막같더라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주막의 18세기초 형태'연구에 꽤 큰 도움이 될 만한데, 꽃도자기를 놓고, 여러가지 찬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사실 현재 살려내고 있는 주막'상'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현재의 전통주막들의 이미지는 이보다 더 소략하죠.

그런데, 주막 (酒幕)이라는 말은 현대한국에서 전근대 한국술집의 고유명사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조선중기이후에만 일부 등장합니다. 고용후(高用厚, 1577~1652년)의 [청사집], 이민환(李民寏, 1573~1649년)의 [자암집], 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 의 [동주집], 오시수(吳始壽, 1632~1681)의 [수촌집]등에 나오지요. 하지만 조선전기까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필자가 찾아보지 못한 기록이 있을 수 있어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최초의 등장은 18세기초인 1703년의 숙종후기부터입니다.

번역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위에찾아본 가장 오래된 '주막'단어 등장부분들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자암집(紫巖集)- 이민환 (李民寏,1573-1649년)

大路里數。一一打量立標。而每三十里。募民以居。如今酒幕之規。

청사집(晴沙集) 고용후(高用厚, 1577~1652년)
南下時遇施伯於葛川酒幕下馬敍別

東州集(동주집)-  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
聞慶酒幕。奉寄月沙先生。

위의 세 기록만이 17세기초반 것이고, 나머지 문헌들은 대부분 17세기후반에서 18세기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습니다. [후재집], [갑봉유고], [오재집], [송와집], [학산유고], [존재집], [낙하생집], (김종직이 아닌 김유의) [점재집]등이 그런 문헌들입니다. 대신 1570년대이전의 조선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까지도 '주막'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재 건축학계에서 통용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이후 주막이라는 형태의 술집이 대중화되었다는 이야기와 어느정도 일치하는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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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의 전통술집

그럼 조선전기까지는 어떤 단어가 많이 쓰였을까요. 많이 쓰이는 말은 '주점', '주가', '주헌', 그리고 주요주제인 '주루'가 있습니다.


주점 酒店

우선 요즘도 심심찮게 술집명으로 쓰이고 있는 '주점'이라는 단어입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어디까지나 필자가 찾아낸)으로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고려초, 983년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흥미로운 것은 민가가 아니라 '고려 성종'대에 공식적으로 술집을 여섯군데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고려사절요
계미 2년(983), 송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ㆍ요 성종(聖宗) 통화(統和) 원년
○冬十月,置酒店六所
○ 겨울 10월에 주점(酒店) 여섯 곳을 두었다.

고려시대의 사료에는 주점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몇가지만 살펴보지요. 우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입니다.

동국이상국집
여섯 가지 무내하(無奈何)

어쩌면 좋을까 저 푸른 버들 / 無奈綠楊何
휘늘어져 살구꽃을 이웃하였다 / 依依傍杏花
기를 짝하여 주점에서 흔들리고 / 伴旗搖酒店
춤을 시새워 창가에서 흔들거린다 / 妬舞拂倡家
비 온 뒤에 걷잡을 수 없이 휘늘어지고 / 雨後難勝嚲
바람결에 멋대로 휘날린다 / 風前自任斜
이 봄에 구경하지 못하면 / 趁春如未賞
시절은 지나가고 말리라 / 時節急蹉跎

이 기록은 추후 다른 기회에 살펴보겠지만, 요즘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주점이라고 쓰인 등'대신 고려대에는 '깃발'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깃발에 대한 묘사는 아주 자주 나옵니다.

동국이상국집 (보제사 앞의 주점)

앵계에 와 거처하니 / 鶯溪來卜宅
곡령이 마루에서 마주 보이네 / 鵠嶺正當軒
늙은 전나무는 남쪽 골목에 울창하고 / 老檜森南巷
이 마을에 늙은 전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회동(檜洞)이라 하였다.

푸른 소나무는 조그만 담장에 덮였네 / 靑松覆小垣
정원의 네 그루 소나무가 담장에까지 뻗쳤다.
상마는 들에 가득하고 / 桑麻饒野壟 
울타리는 산마을을 실감케 하네 / 籬落似山村

창문은 선궁의 탑을 마주 보고 / 窓對禪宮塔
주: 보제사(普濟寺)를 가리킨 것이다 (필자주: 즉, 60미터짜리 보제사 5층 목탑을 보고 있는 겁니다).
누각(루)은 주점 문에 임해 있네 / 樓臨酒店門

복숭아나무 옆에 푸르른 대를 심고 / 傍桃栽翠竹
가시나무 베어내고 꽃다운 향풀을 보호한다오 / 剪棘護芳蓀

역시 같은 저서의 기록으로 예전에 소개한 개경 한복판의 대사찰 '광통보제사'의 바로 앞에 주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또한 주점은 '문'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주점에서 (당연히) 보제사의 5층 목탑(전각)이 보입니다. 이 목탑을 보면서 한잔 하는 그림이 보이네요. 다음 기록입니다.

동국이상국집
대장(大丈) 김자유(金子由)가 윤학록(尹學錄)에게 주등장(朱藤杖, 붉은 등나무 지팡이)을 선물로 받고는 나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다
장안에 주점 많으니 / 長安多酒店
동전 백 닢쯤 매달고 다니소 / 遊必掛百錢

이 기록을 보면 고려 개경의 술문화를 엿볼수 있는데, 장안이란 것은 아마도 당시 개경을 뜻하는 은유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등장하는 세 인물이 모두 고려인이고, 이 시를 전후해서 쓴 모든 글이 고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보면 당시에 술집에서 계산을 할때 '錢' 즉 동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개성이라면 술집이 많았음을 알 수 있겠지요.

기 등장하는 김자유나 윤학록은 아마도 고려후기의 인물들로 추정됩니다. 예를 들어, 윤학록의 경우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인 이규보 (李奎報 1168∼1241년)의 다른 저작인 [백운소설]에서 함께 술을 나누던 친구로 나오기 때문이지요. 아래 문장의 '나'는 이규보를 뜻합니다.

드디어는 윤학록(尹學錄)과 술을 마시며 10여 편의 시를 지었는데, 한참 흥이 나자 취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윤(尹)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 하여 나는 즉시 운을 따라 시를 짓기를,...중략.

그럼 주점이란 말은 주막이 쓰이던 조선후기에는 쓰지 않던 단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점이란 말은 조선후기에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주점은 주막을 포함하는 모든 술을 '팔던' 상점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기록은 임진왜란의 중요사료중 하나인 조선중기 문신 윤국형(尹國馨, 1543∼ 1611년)의 [갑진만록]중 등장하는 주점표현입니다.
 
갑진만록 

湖嶺大路。雖有酒店。而行人所資。
而行人所資。不過酒壺蒭柴而已。故行者必載行具。遠則數三馬。近亦不下二馬。我人之病之也久矣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행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술과 꼴, 땔나무에 불과할 뿐이다.그러므로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 물품을 가져가는데, 멀리 가는 사람은 두세 마리의 말에 실어가고, 가까워도 한두 마리의 말이 필요할 정도여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병통(단점)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임란 직후의 사회를 표현한 것인지라, 주점자체도 소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전라-경상도의 큰 길가에는 주점이 있고, 술과 나무등을 팔았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행에 본격적으로 필요한 물품은 팔지 않아 스스로 지니고 다녀야하며 그것이 병폐로 여겨지고 있었음이 등장합니다. 이를 보면, 주점이란 곳에서 그전에는 이러한 물품등이 제공되었을 가능성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주가 酒家

또다른 술집 표현인 '주가'는 말 그대로 '술집'이 되겠지요. 이 '주가'라는 표현 역시 고려대부터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등장합니다. 첫 기록은 고려후기의 대학자인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이 쓴 글로 고려말에도 이미 '저당' 즉 '외상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동문선
서강 즉사(西江卽事)
이숭인(李崇仁)

맑은 휘파람과 긴 노래는 곧 훌륭한 놀이이니 / 淸嘯長歌卽勝游
기심을 모두 없애고 모래밭 갈매기와 친하네 / 機心消盡狎沙鷗
질항아리의 막걸리는 집집마다 있거니 / 瓦盆濁酒家家有
지금부터는 강 머리에서 날마다 갖옷을 전당 잡히리 / 從此江頭日典裘

서강은 고려시대 개경 서쪽에 있는 현 예성강을 뜻하는데 엄밀히 말해 이 기록은 '주가'라는 단어대신 예성강가의 집집마다 탁주, 즉 막걸리를 파는데, 이를 마시기 위해 이숭인 자신의 '갖옷', 지금으로 말하면 모피코트를 저당잡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주가라는 단어는 아니지만 강가의 집집마다 '판매목적'으로 술을 빚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지요.

다음은 예전에 한번 살펴본 기록으로 80명이 들어가는 대형술집입니다.

고려사절요
又旗頭,告同領旗頭八十人,會飮酒家,謀簒博仁於獄,仲夫,鞫之,亦無驗
또 기두가, 같은 영내(領內)의 기두 80명이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박인(博仁)을 옥에서 빼앗아 올 것을 의논하였다고 고하니, 중부가 국문하여 보았으나 역시 증거가 없었다.

이 기록은 무신정권에 대한 반란을 꾀하던 기두, 즉 깃발병 80명이 고려의 술집에서 모여서 모의를 꾀하는 장면입니다. 예전 글에선 이 주가라는 것이 주막식으로 마당에서 술을 마시는 형태인지, 어떤 실내에서 술을 마시는 대형술집인지 확실히 알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주가에 대한 기록은 꽤 많지만, 흥미로운 기록 두가지로 마무리 합니다 (주인공은 아직도 등장하지 않았으니..).

기옹만필(畸翁漫筆)  
日與其表弟鄭韸比隣。相對以酒爲年。隣里有酒家。日取以飮。不問其直。酒主亦不責以時償。及其南船載米穀。到泊江上。便卽分米。送于酒家。不計多少。絶意人事。不出門庭。嘗對余言。入京三年。以親屬弔喪。掛冠束帶以出者。僅兩度云。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으며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내는데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이 글은 조선중기 문인 정홍명(鄭弘溟, 1582~1650년)의 [기옹만필]로 저자의 집 곁에 '술집(주가)'가 있는데 외상으로 꾸준히 매일 술을 가져다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전까지도 한국의 술집에선 단골손님이 많은 경우 외상을 부탁하고 주인은 쿨하게 장부에만 기입하고 하는 장면이 많았죠. IMF이후 요즘처럼 삭막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비슷한 장면으로 '朝衣 조의' 즉 관리의복을 저당잡히고 술을 마시는 강극성 (姜克誠,1526∼ 1576년)의 모습도 닮아 있습니다.

차우인운(次友人韻)
친구의 운을 빌어-강극성(姜克誠)

朝衣典盡酒家眠 조복을 전당잡혀 술집(주가)에서 자다가
司馬將謀數頃田 하사 받은 말로 몇 이랑 밭을 사련다
珍重國恩猶未報 귀하고 중한 나라 은혜 갚지 못하고 
夢和殘月督朝天 꿈에서 새벽달과 같이 임금을 보는구나

길었네요. 이제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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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루 酒樓

주막이라는 단어가 조선후기, 엄밀하게는 1590년대 이후, 즉 임진왜란 이후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로 조선전기까지 꾸준하게 등장하다가, 임란이후 전혀 등장하지 않는 술집형태가 있습니다. 바로 '주루酒樓'입니다.

우선 글자 그대로 '주막'과 '주루'라는 말을 살펴보지요.

주막은 '술을 마시는 '酒 장막 (장막 막)' 형태의 간략한 술집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주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휘장 혹은 처마를 두른 어떤 바깥마당아래 평상을 깐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로 이렇게 말이지요.
이에 반해 조선전기까지 등장하는 단어인 '주루 酒樓'는 '술을 마시는 '樓 누각''이라는 뜻입니다. 이 '주루'라는 말은 이미 조선후기에는 조선사회에서 사라져버리고 없어서, 유일한 기록은 청나라와 일본을 선비들이 기행하며 쓴 [기행문]기록에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기록을 보면 이런 형태의 건축에 대해 거의 문외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산기정
부록(附錄)
주점(酒店)은, 큰 것은 방이 수십 칸은 될 만하고 작아도 10여 칸 못 되지 않는다. 더러는 지붕 위에 집을 가설하고 구름다리를 놓아서 오르내리니, 이것이 주루(酒樓)다. 다 가운데에 큰 탁자 하나를 놓고 사면에 의자ㆍ등자(凳子)를 놓아서 각 사람이 걸터앉기 편리하도록 했다. 1칸에 다 탁자 4, 5개를 놓고 차ㆍ안주ㆍ과일ㆍ떡 등 차려 놓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먹는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돈을 받는다.

[계산기정], 어디서 들어보셨죠. 바로 포스팅 서두에 첫 사료로 등장하는 18세기초의 연행기입니다. 이 저자는 술에 관심이 많았는지, 주막도 써두고 따로 이렇게 '주점'과 '주루'도 자세히 묘사해 두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적어도 이 기록에서의 '술집'의 모습은 세가지입니다. 

조선의 주막과 같은 간단한 술집, 그리고 실내에서 술을 마시는 '주점', 그리고 주점에서도 지붕위에 중층누각을 짓고 다리를 연결한 '주루'. 이런 중층의 술집을 '주루'라고 하는 전통은 중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도) 꽤 오래된 것으로 예를 들어 이 기록보다 약 800년전인 1120년의 북송 개봉시를 묘사한 '청명상하도'의 주루 역시 이 묘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청명상하도 중 酒樓 (1120년)

그런데 건축의 형태는 파악할 길이 아직 없을지언정 적어도 같은 글자를 쓰는 '주루'라는 단어는 한국사에서도 꾸준히 나옵니다. 이 사실을 아는 현대의 보통 일반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차근차근 길더라도 살펴보지요.

우선 공민왕대의 문인인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년)의 글입니다.
 
익재난고
강 하늘의 저녁 눈

저녁으로 접어들어 가는 배 돌려 / 向夕廻征棹
추위를 무릅쓰고 주점누각으로 올라가니 / 凌寒上酒樓
장강의 구름 눈이 되어 사람을 시름겹게 만들고 / 江雲作雪使人愁
옛 담주가 보이지 아니한다 / 不見古潭洲  중략.

겨울에 주점의 '루'로 올라가는 (上酒樓)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다른 글에도 '주루'가 등장합니다.

8월 17일 배를 놓아 아미산을 향하며[八月十七日放舟向峩眉山]
이제현(李齊賢)

금강 강 가에 흰 구름 가을인데 / 錦江江上白雲秋
이구곡(이별곡) 부르고 나서 주루에서 내려오네 / 唱徹驪駒下酒樓
한 조각 붉은 기는 바람에 펄렁펄렁 / 一片紅旂風閃閃
어여차 노젓는 소리 강물이 넘실넘실 / 數聲柔櫓水悠悠
송아지는 비에 몰려 어점(생선가게)으로 돌아가고 / 雨催寒犢歸漁店
갈매기는 물결에 실려 객선에 다가오네 / 波送輕鷗近客舟
서생이 불우하다 그 누가 일렀던고 / 孰謂書生多不偶
내 노상 왕사로 하여 싫도록 놀며 다니거니 / 每因王事飽淸遊

다음은 거의 동시대 문인인 이곡(李穀, 1298~ 1351년)의 가정집(稼亭集)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다만 가정집은 원대 원나라의 묘사도 섞여 있음으로 이 기록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가정집 稼亭集
귀향하는 벗을 전송하며

명리가 사람을 들볶아 조금도 못 쉬게 하며 / 名利馳人不少休
어버이 곁을 떠나 만리타향에 떠돌게 하네 / 辭親萬里作羈遊
하지만 또 귀향 객을 어떻게 차마 보낼 수야 / 那堪又送還鄕客
성곽 주위 가을 산에 주루가 꽉 차 있으니 / 繞郭秋山滿酒樓

역시 고려후기의 유명학자인 이색(李穡 1328 ~ 1396년)의 [목은시고]의 이 시는 당시 '주루(술집누각)'과 고려시대의 특징중 하나인 사찰의 '다도문화'가 함께 엿보여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목은시고 
한적한 삶을 스스로 읊다.
중략.
술집누각에선 통달한 선비를 생각하고 / 酒樓思達士
차 자리에선 고승을 생각하는데 / 茶榻憶高僧 (茶榻: 즉, 차를 놓는 탁상)
흥취 푸는 일을 시구에 의탁하여 / 遣興憑詩句
붓을 휘둘러 종이 가득 써내리네 / 揮毫滿剡藤

고려시대 마지막 기록으로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인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1369(고려 공민왕18) ∼ 1430(세종12))의 문집인 [춘정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춘정집 시(詩)
양곡(陽谷)과 중려(中慮)에게

좋은 계절 유독 더 유람에 알맞으니 / 佳節偏堪作勝遊
눈에 뜨인 그 춘의를 금할 길이 없구려 / 眼看春意不能休
바람은 수양버들 황금색을 나부끼고 / 風吹弱柳黃金色
눈 녹은 물은 맑은 호수 벽옥류로 흘러들지 / 雪漲晴湖碧玉流

다사한 오늘날에 유람하기 어려우니 / 多事卽今難浪迹
어디서 한 잔 들며 수심을 털어 본담 / 一杯何處可開愁
한가한 틈을 타서 매헌과 약속 정해 / 乘閒好約梅軒子
새 시를 읊조리며 주루로 올라가세 / 共詠新詩上酒樓

역시 '올라간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요. 조금 후대인 조선초기의 기록으로는 서거정 (徐居正,1420~1488년)의 [사가집]기록이 있습니다.

사가집 (발췌)
가슴속엔 티끌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고 / 胸中了無査滓塵
만사는 평온한 마음을 간섭지도 않으며 / 萬事不干心地春
코가 있어 차라리 초 서 말은 마실지언정 / 有鼻寧飮醋三斗
입은 있으나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네 / 有口不飮一杯酒

못생긴 아내 사나운 첩도 가까이 않거니 / 醜妻惡妾不相親
더구나 노래하고 춤 잘 추는 미인이리오 / 況乃歌舞佳麗人
북쪽은 장악원이요 남쪽엔 주루가 있지만 / 北畔梨園南酒樓
일생의 풍미가 흡사 풍마우와 같았었네 / 一生風味風馬牛

이 기록에 나오는 장악원은 1466년부터 현재의 명동 남산자락에 있던 음악과 춤을 담당하던 관청이었습니다. 이 장악원(掌樂院)은 梨園 (이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시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지요. 그 근처에 주점누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조금 후대로 15세기 중후반 인물인 남효온(南孝溫, 1454 ~ 1492년)의 [추강집(秋江集)] 기록입니다. 

추강집(秋江集)
정중(正中)을 찾아가다

뉘엿뉘엿 해 떨어져 주점누각이 으스름한데 / 落日看看隱酒樓
끊어진 담장 머리로 살구꽃이 피었구나 / 杏花開向斷垣頭
좋은 술 한가하게 지니고 벗을 찾는 곳 / 閒隨美酒尋朋處
십리 길 민가에는 주렴 반쯤 걷혀 있네 / 十里人家簾半鉤

임진왜란 발발 10년전에 돌아가신 조선전기의 문신인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의 [후청쇄어]라는 수필집에는 이 주루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등장합니다.

청강선생 후청쇄어(淸江先生 鯸鯖瑣語)
○ 집의 강극성(姜克誠)은 계해년 봄에, 꿈에 선객(仙客)과 함께 주루(酒樓)에 올랐었는데, 한 선녀가 잔을 들어 술을 권하였다. 선객이 강극성에게 시를 보여 주기를 청하므로 절구 한 수를 지어 보여주기를,

술집 방자하게 단장된 다락(루)에 방종한 광인 / 酒肆粧樓放縱狂
만인의 입가에 그 성명이 향기롭네 / 萬人牙頰姓名香
그대를 만나 전세의 일을 말하니 / 逢君說着前身事
향안 앞에서 옥황을 받들던 몸이네 / 香案前頭奉玉皇
라 하고, 이어 말미에 ‘선적(仙謫)’이라고 썼더니, 선객이 보고 묻기를, “‘선적’이라는 것은 즉 ‘적선(謫仙) 이냐?” 하였다.

이 기록에 보면 그냥 '주루'가 아니라 酒肆粧樓 (술집의 방자하게 단장된 루(누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조선시대전기까지도 그냥 관망용 '루'가 아닌, 술을 마시는 전용 누각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다음은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의 [청음집]에 나오는 주루기록입니다.

청음집(淸陰集)

문경(聞慶)에서 유숙하면서 사군(使君) 심사경의 운에 차운하다

오랫동안 남쪽 돌아 향수병이 동하는데 / 南州久客動鄕愁
객사에서 그대 만나 잠시 체류하게 됐네 / 客舍逢君爲小留
삼종 형제 본디 멀지 않은 친척 사이이고 / 三從弟兄元近戚
같은 때에 붕우 되고 다시 동료 되었다네 / 一時朋友更儕流

구름 사이 조령 고개 산골 역에 잇달았고 / 雲間鳥棧連山驛
말머리와 꽃가지는 주루 안에 드는구나 / 馬首花枝入酒樓
이제 가면 어느 곳서 서로 간에 그릴거나 / 此去相思定何處
서호에는 봄 깊어서 봄물은 또 유유하리 / 西湖春盡水悠悠 

시기적으로 가장 마지막의 '주루'기록은 조선중기, 정두경(鄭斗卿 1597 ~ 1673년)의 것이 있습니다. 두 작품에 등장하고 있어 연이어 소개합니다.

동명집 
서면중 정리의 화첩에 제하다〔題徐勉仲 貞履 畫帖〕

삐죽삐죽 구름 산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 嵂嵂雲峯四起
졸졸대는 시냇물은 서로 겹쳐 흘러가네 / 泠泠澗水交流
이 땅 이에 신선 경치 되기에 충분한데 / 此地足爲仙境
어느 누가 술집 누각 다시 지어 놓았나 / 何人更造酒樓

동명집
칠언절구(七言絶句) 175수
강여수의 주루에 제하다 2수〔題姜汝受酒樓 二首〕

어떤 객이 동해에서 단사 달이다가 와선 / 客從東海鍊丹砂
성 서쪽의 술집에서 술에 취해 지내누나 / 來醉城西有酒家
주인옹은 성시 속의 은자인 줄 알겠거니 / 知道主人城市隱
문 나서자 골목길엔 온통 복사꽃이구나 / 出門門巷盡桃花

삼월이라 성 서쪽의 나무에 꽃 가득한데 / 三月城西花滿枝
주루 위에 올라 보니 슬픔 금치 못하겠네 / 酒樓登眺不勝悲
그 당년의 만사 모두 묵은 자취 되었건만 / 當年萬事皆陳迹
술에 취해 거꾸로다 접리를 쓴 게 생각나네 / 尙憶樽前倒接䍦

뒤의 기록은 중요한데, '술집'(주가)안에 '주루'가 공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루라는 단어는 이 시점, 즉 임진왜란 직후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고 (필자가 살펴본 한) 맥이 끊깁니다. 이 '주루'라는 형태가 앞서 다른 글에서 살펴본 침실용 루인 '침루'나 다른 '벽체가 있고 창문이 있는' 고려-조선전기 루와 비슷한 것인지, 혹은 현재 우리가 흔히 보는 정자형 건물을 말하는 것인지는 현재로썬 더 이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러한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는 전통술집은 현대한국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겠지요.

'마시는 문화'와 건축에 대해 살펴보는 김에 한가지 더, 오랜시간 우리에게 맥이 끊겼던 장소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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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茶房

바로 '다방'입니다 (근대의 다방이나 요즘 일부에서 다시 부활한 다실은 이 원래의 우리전통 다실과 오랜기간 맥이 끊겨와서 다른 흐름일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사찰과 관련지어져야 전통다방은 의미가 더 살겠지요). 

임춘(林椿, 생몰연대 미상)은 고려 인종 때의 문인입니다. 생몰년도를 정확히 알수 없지만, 고려사 기록으로 무신정권시대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그의 시를 보면 고려시대에 사찰외 '찻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李郞中惟誼茶店晝睡 二絶 

頹然臥榻便忘形 午枕風來睡自醒 
夢裏此身無處着 乾坤都是一長亭 
虛樓罷夢正高春 兩眼空 看遠峰 
誰識幽人閑氣味 一軒春睡敵千鍾 

낭중 이유의가 찻집에서 낮잠을 잔 두절구 

무너지듯 평상에 누우니 문득 형체를 잊고 
한낮의 베개에 바람 불어오니 잠이 절로 깨누나 
꿈속의 몸은 이를 데가 없었어라 

건곤은 도무지 한 채의 큰 여관인 것을 
빈 다락에 꿈을 깨니 정히 넉점인데 
두 눈은 부질없이 어두운 먼 봉우리를 바라본다네 

뉘라서 숨어사는 사람의 한가한 기미를 알리 
한 집의 봄잠이 천종에 맞먹느니 

====
이 기록은 낭중(郎中), 즉 고려 초중기의 향직에 있던 '이유의'라는 사람이 다방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그린 시입니다. '다방'에서 낮잠을 잔 사실은 다름아닌 시 제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李郞中惟誼茶店晝睡.  "茶店(다점)", 즉 차를 파는 상점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양반이 낮잠을 깬 곳이 '빈 다락(루)'라는 것입니다.

虛樓罷夢 (빈 다락(루)에서 꿈을 깨니)

참고로 다점에서 잠잔 이유의는 고려 명종 초에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중서시랑 문하평장사(中書侍郞 門下平章事)를 지낸 이광진(李光瑨)의 일곱 형제 중에서 둘째 아들입니다. 최근 논문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조정에서 만든 다방도 있었고, 여염(즉 민가)에서 만든 다방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아마도 민간의 다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정에서 만든 다방기록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002년의 목종대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당시 술집과 찻집에 통용되던 화폐와 물물교환을 엿볼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고려사절요
목종 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
임인 5년(1002년), 송 함평 5년ㆍ거란 통화 20년

○ 가을 7월에 교하기를, “요사이 시중 한언공(韓彦恭)의 상소를 보니, 그 소에 '지금 선조(先朝)를 이어 돈을 사용하고 추포(麤布)의 사용을 금지시켜 시속을 놀라게 하여, 나라의 이익은 되지 못하고 한갓 백성들의 원망만 일으키게 됩니다.' 하였다. 다점(茶店)ㆍ주점(酒店). 음식점 등 여러 상점에서 물건을 매매할 때는 그 전대로 돈을 사용하고, 그 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물건을 매매할 때는 그 지방의 편의에 따라 하도록 맡겨 두도록 한다." 하였다.

고려말의 대학자인 이숭인(李崇仁, 1347~1392년)의 기록은 매우 흥미로운데, (아마도) 개경의 모습을 유추하게 합니다.

戱賦一師念珠 
어떤 스님의 염주를 희롱하며 읊다 

念念循環無盡期 짧은 순간의 순환 다함이 없고
茶房酒肆也相隨 
다방과 술집은 서로 이어졌네 
問師百八邇陀佛 스님은 백팔염주로 아미타불에게 예의를 갖추니 
那箇邇陀解道師 저 아미타불이 스님을 이해한 다오

茶房 다방과 酒肆 주사 (주사라는 말도 주점과 같이 술집이라는 뜻입니다. '방자할 사'자로 '가게'라는 부수적 뜻이 있죠)가 연이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당시 고려에서는 술집과 다방이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즉, 고려시대에는 선종계열 사찰에서만 차문화가 발달한 것이 아니라, 대로변에도 다방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려뿐 아니라 사찰에서의 '찻실'은 그 유래가 훨씬 깊습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 경주 남산의 8세기 창림사(昌林寺)에 다연원(多淵院)이라는 다도실이 따로 마련되어 왕이 자주 들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루와 똑같이 이러한 우리의 고유문화였던 '다점' (혹은 다방) 이라는 말도 조선중기 이후에는 일절 등장하지 않고, 다만 청과 일본의 여행문에만 간간히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이미 남의 일). 첫 기록은 청나라 여행기, 두번째와 세번째는 일본 여행기입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 계사년(1833, 순조 33) 2월[7일-30일] 
성 밖 인가(人家) 또한 모두 물에 임했으니, 다방(茶房), 주루(酒樓)들이 물빛에 반사되어 그림 같고, 성안 화포(花鋪)에는 아름다운 국화를 많이 재배하는데, 그중 흰 것은, ‘통주백(通州白)’, 붉은 것은 ‘통주홍(通州紅)’이라 하며, 그 나머지 황색과 흑색 역시 다 그러하다.

부연일기(赴燕日記)  
주루(酒樓)가 있는 여러 곳은 모두 유람할 만하였으니, 중문(重門)과 층루(層樓)가 천백 사람을 용납할 만하였고, 칸마다 교의(交椅)와 고상(高床)을 베풀어놓아서, 마시며 기분을 풀기에 편리하였다.

청장관전서
인가(人家)는 흔히 널빤지로 지붕을 이었으며, (일본인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茶店)을 두며, 인가가 곳곳이 천백(千百)으로 모여서 저자를 열고 가게를 둔다. 

임진왜란을 거치고 한참 지난 이 시기 (그리고 불교문화는 완전히 사회적으로 잠적한)가 되면 '다방'은 이미 타국의 문화가 되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결론

계속되는 '루' 기록들과 연장선상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는 16세기말 아무리 못해도 17세기정도의 한국건축사를 비롯한 여러 문화사는 그 전후가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오늘 살펴본 '주루'와 '다방'이라는 고려-조선전기의 문화 (다방의 경우 고려후기까지만) 역시, 그 단어의 출현이 여러 사료에서 약속이나 한듯 16세기말을 전후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주루의 경우 마치 그 자리를 채워넣듯 '주막'이 등장합니다. 아주 최근 (올해 2015년)의 논문 (언젠가 소개하고자 하는)에 임진왜란 전후를 기점으로 건축의 양식이 시공면에서 단순화됨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이 주막의 기록을 보면서 언뜻 느껴지는 것은, 전후 혼란스러운 조선사회에서 '술집' 역시 '간소화'되는 (즉 술집의 누각(같은 맥락에서 객사의 침루)이 사라지고, 그 형태를 간단히 장막을 치는 형태로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대담한 가설을 세워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술집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주막처럼 소략한 술집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화사라는 것은 그렇게 단면적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조선후기 정조대왕 (1752~1800년)의 [홍재전서]에는 당시 화려했던 한양 종로거리의 술집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홍재전서
만약 오늘의 폐단을 논해 보자면, 안영(晏嬰)의 해진 덧옷은 들을 수 없어도 경계(慶季)의 아름다운 수레는 많다. 경쾌한 거마와 화려한 복장이 진씨(陳氏)의 자제들뿐만 아니며, 연탄으로 밥을 짓는 것이 어찌 건부(乾符 천자 혹은 황실을 뜻함)의 귀족 가정뿐이겠느냐. 관청의 일은 던져 두고 재상은 황금과 주옥으로 계권(契券)을 꾸미며, 문방의 도구를 빙자하여 선비는 붓과 벼루를 다투어 화려하게 한다. 

교장(郊莊)과 강서(江墅)는 모두 누대를 짓는 장소로 들어가고, 종로 거리 술집에는 거문고와 대금 소리가 그칠 때를 보지 못하였고, 머리 장식의 값이 천 금에 가까운 것도 있으며, 음식상의 비용이 열 집의 재산을 넘을 정도다. ... 심지어 채찍을 잡는 사졸까지도 모두가 온통 초서관(貂鼠冠)을 착용하고 있으며, 농부와 장사꾼의 자제들도 도포와 좋은 신발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이것은 모두가 백 년 전에는 없었던 일로 근래에 들어오면서 더욱 고질화된 폐단이다. 

거문고와 대금을 타던 당시의 종로 술집은 김홍도의 주막도에 나오는 그런 초가집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2015년 현재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전통술집은 바로 이 형태밖에 없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각종 드라마에 단골주막으로 쓰이는 용인 MBC 사극셋트장 (동이에서도 나왔죠)

인식적으로 조선후기에 그려진 단원과 혜원, 그리고 몇 주막그림밖에 없으니, 거기서 활용해도 결국 비슷한 양식만이 창출될 뿐입니다. 아래는 조금더 큰 규모의 민속촌내부에 있는 장터주막입니다. 이 곳에서 국밥도 팔고 전도 팔고...꽤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곳이죠.
앞으로는 '주막'은 주막대로, 그리고 우리의 또다른 잊혀진 전통술집인 '주루'와 또한 '다방' 역시 맥이 오랜 동안 끊겼을 뿐 일본과 중국만의 역사가 아님을 알고 활발히 즐기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즐기다보면 문화라는 것은 다시 맥을 잇고, '우리고유의 문화'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니까요.

인사동의 한 다방 (찻집)- 바로 이렇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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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사실 '주막'만 해도 이런 형태도 만들어 볼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에 소재되어 있는 김준근의 19세기 주막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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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Fedaykin 2015/06/22 12:26 #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막과 주루가 어떻게다른지 궁금했는데 궁금증을 풀 수 있었네요. 이런 생활사는 따로 검색을 해서 찾아보기도 쉽지 않으니 이렇게 블로그에 매번 올려주시는게 참 감사합니다.

    보통 일반인 입장에서는 주막 = 술 + 국밥 을 파는 일반 음식점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럼 옛날에도 술보다는 요리를 주로해서 파는 요리집도 많았을까요? 평양에는 평양 냉면 전문점이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 역사관심 2015/06/22 13:57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음식사쪽은 깊은 지식은 없는지라 정화하게 답변해드리기는 힘들지만, 기록을 보면 고려사기록에서부터 '다점, 주점, 그리고 음식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술에 어울리는 음식을 팔던 주점과 음식을 주로 파는 곳이 따로 있었을 가능성도 엿보이는 듯 합니다 (하나의 기록만으로 단정할수는 당연히 없겠습니다).. 다만, 주막이 있었던 시기에는 주막에서 밥과 술을 모두 해결했고, 장터에 국숫집이라든가 국밥집이라든가 하는 일시적 음식점이 주로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셨네요 ^^ 감사합니다.
  • 응가 2015/06/25 16:09 # 삭제

    요리집도 있었다고 알고있습니다. 고종이 배냉면을 즐겨먹었는데 궁밖의 요리집에서 사왔다고 전해지고 종로에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평양 대동문앞에 냉면집이 있었다고 전해지고(대표적인게 지금의 우래옥입니다.) 기방에서도 화려한 교방음식이 만들어졌습니다.
  • 역사관심 2015/06/26 12:24 #

    아 고종 배냉면하니 한식대첩의 백종원씨 말이 생각나네요 ^^
  • 라비안로즈 2015/06/22 13:43 #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누각이 있었는데 아마 임진왜란이후 호란을 거처 생활이 피폐해지다보니 단순화된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5/06/22 13:54 #

    여러 사료를 들여다보면서 느낌이란 게 있는데, 확실히 그 흐름은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한국미 (소박미, 담백미)의 경향으로 바뀌어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처럼 더 규모가 커지는 경우도 있으니 일방적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개인적으로는 조선전기까지의 문화사는 건축사를 포함한 여러 면에서 지금 볼 수 없는' (만약 지금 본다면 꽤 새로운) 양식미가 있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봉래거북 2015/06/25 14:06 # 삭제

    주점과 다점 이야기를 읽으니 예전에 봤던 이야기들이 떠오르네요. 중국의 황제는 자신의 신하 중 하나가 술을 발명하자 그 신하를 멀리하였고, 다산은 차를 마시는 나라는 흥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나라는 망한다고 했죠. 지금 한국을 보면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 돌아가는 일에 대처를 해야 할 텐데 다들 술에만 취해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시름을 잊기만 원하는 것 같습니다. 잊는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닌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15/06/26 12:26 #

    말씀 감사합니다. 어서 다점 다방을 많이 만들어야 할텐데.... 이 술공화국 ㅠㅜ
  • 응가 2015/06/25 16:50 # 삭제

    찻집이나 주점의 형태는 아무래도 청명상하도에 나오는 형태가 아닐까요?? 북송의 카이펑이나 고려의 개경이나 그 번성함은 비슷했을것 같을텐데요. 2층이나 3층정도의 누앞에 가건물을 놓고 탁자나 의자를 가져다 놓은뒤 말차나 엽차를 마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6/26 12:28 #

    상상의 영역이지만 개경에서 이런 누각형태의 건물유적지가 나와주면 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분명 중국건축과 큰 영향을 주고받았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고려도경 누관부분에서도 그런 맥락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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