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집터 발견과 이상한 구조의 마루의 의미 (전기의 '루'관련). 한국의 사라진 건축

예전에 갈무리해둔 글을 정리해 보다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일단 나눕니다. 원래 알리고자 했던 기사의 주제는 나중에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합니다. 

이 뉴스는 올해 2015년 1월의 것으로 지금은 많이 잊혀졌을 내용입니다.

우선 기사중 발췌한 부분입니다.

서울 종로구 공평동 개발지구에 500여년 전 조선시대 집터와 골목길, 생활도구들이 대거 발견돼 역사건축학계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당초 이곳에 건립될 예정인 대규모 오피스타운 건립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유구(遺構·건축물 흔적) 중 일부는 조선시대 핵심 상권인 육의전(六矣廛)과 인접해 대청마루가 발달된 건축 형태를 보이는 등 지금껏 종로 일대에서 발견된 고옥(古屋)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인 사실을 CNB가 단독 확인됐다. 인근 청진동(피맛골) 지역의 대규모 유적들이 개발일정에 밀려 이미 사라진 터라 상대적으로 공평지구에 쏠리는 관심이 커지고 있다. 중략.

이런 가운데 15일 문화재청은 깜짝 놀랄 사실을 공개했다. 문화재청은 이곳이 16세기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시대 주거 밀집지였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발견된 37개의 건물터는 모두 규모가 제 각각이었다.

사용된 돌의 종류도 다양해 서민과 양반 등 다양한 계층이 어울려 살았던 동네로 파악됐다. 온돌 마루에 불을 지피던 아궁이와 대청마루, 건물 기둥을 올리기 위해 땅을 다진 돌터와 양반 가옥의 앞마당 등 16세기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기와 조각, 백자와 청자의 파편들 그리고 우물 속에 빠진 동물 뼈 등도 출토됐다.  

공평동에서 출토된 집터 중 일부는 가옥 면적의 대부분이 대청마루로 구성된 독특한 형태라 상업용도 건축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건축학계는 보기 드문 건축물인 만큼 세밀한 보존대책을 세워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제공=문화재청) 
▲ 16세기 집터, 우물, 백자 등 유물이 출토된 서울 종로 공평동 발굴현장

이곳의 역사적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개발에 앞서 면밀한 보존대책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학계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집터 중 일부가 일반 가옥과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집터에는 작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이 숙박시설의 전부였고 나머지 공간은 마루였다. 

안창모 교수(경기대 건축대학원)는 “여러 집터 중 2채가 디귿(ㄷ)과 미음(ㅁ)의 형태인데, 집의 전체 크기에 비해 대청마루가 굉장히 넓은 독특한 구조였다”며 “이 동네가 육의전과 바로 마주하고 있어 종로상권과 관련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많은 상인들이 오가는 지역이다 보니 주거(온돌)보다는 상거래 위주의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안 교수는 “이런 특이한 가옥구조는 조선시대 건축물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유일하다”며 “인접한 청진지구(피맛골) 개발 때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개발에 묻혀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학계가 이번 발굴에 주목하는 것은 과거 청진동 개발 때 발견된 많은 문화재들이 사장되는 바람에 종로 일대에서 이곳이 현존하는 유일한 집터 유적이 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거 발견된 유구들보다 보존상태도 훨씬 좋다. 중략.

이런 가운데 이번 공평동에서 발견된 유구는 어느 때보다 관심이 크다. 학계가 이번 발굴에 주목하는 것은 과거 종로 개발 때 많은 유적들이 사장되는 바람에 이곳이 사대문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집터 유적지가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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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을 위시한 수없이 귀중한 종로의 유적들이 묻히고 개발논리에 의해 사장되어 왔는데, 이번에도 그나마 발굴한 이 귀중한 유적지를 다시 묻으려하는 한심스럽고도 한심스러운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기사의 주제 (말하면 입만 아픕니다).

그런데, 필자의 눈을 확 잡아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굵은 체로 표기한 부분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번에 발굴된 이곳의 주택터들은 16세기이전, 즉 조선전기 (임진왜란 이전)의 중소형 집터들인데 사대문안 (즉 당대 한양이라고 부를수 있는 지역)의 유일한 조선 전기형 집터라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들입니다.

그런데, 이 건축물들의 특징으로 전공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매우 특이한, 현존하는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죠. 기사에서 보시듯 그건 바로 '광범위한 마루'의 영역입니다. 굳이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6세기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시대 주거 밀집지
집의 전체 크기에 비해 대청마루가 굉장히 넓은 독특한 구조
대청마루가 발달된 건축 형태를 보이는 등 지금껏 종로 일대에서 발견된 고옥(古屋)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이런 특이한 가옥구조는 조선시대 건축물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유일

이 가옥구조는 전공자들도 처음 보시는 것인지 밑줄 친 부분처럼 '종로상권에 있던 주거지들이므로 아마도 '주거(온돌)'보다는 상거래위주의 주상복합형 건물들이 아닌가' 라는 것이 현재의 추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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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리만치 마루를 강조한 집

그런데.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어찌보면 조선후기의 한옥구조와 문화에 치중한 (하나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시각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요.

얼마전 소개한 포스팅으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우리에게는 현재 우리가 보는 한옥과는 많이 다른 형태의 주거형태가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중층의 '루(누각)'에서 침거하는 형태의 기록들이 현전하고 있었지요 (이런 형태의 건축은 재건된 것 조차 한채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설명드린 사료중 이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부(附) 동명(洞名)
車洞 有洪慕堂履祥世居之宅 奉祀孫入居 凡爲十三世 而內屋四十間 甚宏傑 古之屋製 皆房少而廳多 蓋古之老人 始居溫? 少年輩?宿處于廳事 故如此耳

차동(車洞)에는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1549~1615)이 여러 대 거주한 집이 있는데 봉사손(奉祀孫)이 들어가 사는 지 무릇 13세(世)이다. 내옥(內屋)이 40칸인데 매우 굉걸하다. 옛날의 가옥 제도는 모두 방이 적고 마루[청(廳)]가 많다. 대개 옛날에는 노인이 되어야 비로소 온돌에 거처했다. 젊은이는 마루방에서 많이 잤다. 그러므로 이같이 생겼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한경지략]은 정조 (1752~1800년)때 한양의 모습을 적어둔 것으로 저자는 유득공 (발해고의 저자)의 아들로 추정되는 수헌거사(樹軒居士)라는 자입니다. 내용의 주인공인 홍이상은 1549~1615년의 인물인데, 그가 이 저택에 살던 당대에 이미 그의 13대선조부터 내려오는 집이라고 하니, 기록대로라면 무릇 줄잡아 30년씩만 잡아도 당대에 이미 거의 400년정도가 된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1세기에서 최소 12세기초반의 집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전기에는 보통 주택에 방보다 '마루'가 많았다고 나오고 있지요. 이전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본 기록이 중요한 것은 조선전기까지도 방과 방들이 마루와 행랑으로 연결 (현재보는 한옥처럼 뚝뚝 떨어진 '채'들이 아닌)된 구조가 많았다는 또다른 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인이나 온돌방에서 침숙하고 다른 사람들은 마루방에서 주로 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침루'를 포함하는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온돌방 (1층에 반드시 있어야하는)이 전기까지만해도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다른 말로 돌려보자면, 이번에 발굴된 저택지의 '마루'라는 구조는 저 당시만해도 후기의 시각의 '마루'만이 아니라 '마루방' (즉 침숙을 하는 장소)까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적어도 이 사료는 '상업지구형 주택'이 아니라도 일반주택 역시 이때까지는 '온돌'보다는 마루가 많은 구조가 대부분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임란전 주택지 역시 최초로 이 사료를 뒷받침하는 조선전기형 주택지가 아닐까 하는 것이, 따라서 모든 열린 가능성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종로 육의전 곁에 있었다고 꼭 상업건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급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때까지 우리가 보던 후기한옥과 다르다'는 이유로 보통의 주거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억측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윗글에서 소개했던 다른 사료를 다시 짚어보지요- 포스팅 글을 그대로 발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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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성종대 19년, 즉 1488년의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부(朝鮮賦)]라는 저서에 나오는 글인데, 이것은 명나라의 동월(董越)이란 자가 조선의 풍토를 부(賦)로 읊은 것으로 사신으로 왔다가 명으로 돌아가 지은 책입니다. 여기에 조선전기 양반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하는데 매우 희귀하면서도 그 형태가 현재의 한옥과는 달라 한국건축사에서 결코 소홀히 다뤄선 안되는 구절입니다. 한번 보시지요.

조선부(朝鮮賦)

富則陶瓦皆동(同+瓦) 而?序之翼東西者 棟反聳出於南北 塗?皆土而堂寢之位前後者 脊反低下於中間[堂寢皆一間?序乃反三間] 門則皆循東序之東設梯以升 必矩步乃可達於堂寢[其門雖皆南向 然不自中開 皆就東?之棟 南向以開 以基多高故須梯升 其面東西者亦然] 地則皆畏下濕之沾 鋪板以隔

곁채[무서(?序)]의 동서로 달린 것은 마룻대[동(棟)]가 도리어 남북으로 우뚝 솟아나왔고 모두 진흙을 발랐다. 마루[당(堂)]와 침실[침(寢)]의 앞뒤로 놓인 것은 용마루[척(脊)]가 오히려 중간에서 낮다[당과 침은 모두 1간이고 무서(?序)가 도리어 3칸이다]. 문은 모두 동쪽 곁채[동서(東序)]의 마룻대를 따라 사다리를 놓고 오르는데 반드시 직각으로 꺾어서 걸어야[구보(矩步)] 당과 침에 닿을 수 있다. [그 문은 비록 모두 남쪽을 향했지만 가운데부터 열지 않는다. 모두 동쪽 곁채[동무(東?)]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쪽으로 연다. 터가 많이 높은 까닭에 반드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동쪽과 서쪽으로 면한 것도 역시 그렇다]. 땅은 모두 하습(下濕)함이 스미는 것을 싫어하여 판자를 깔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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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중국사신이 보는 전기한옥의 주요특징은 두가지, 마루와 사다리입니다. 습한 기후였던 8세기~ 13세기까지의 한반도기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지요. 다음은 (출처는 추후에 다시) 온돌보급에 대한 논문의 한 부분입니다.

"보통 전면온돌이 널리 확산되는 것이 13세기경이라고 가정한다면 그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온돌 옆에 마루나 부엌과 같은 다른 실이 달라붙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짐작된다. 또한, 상류계층까지 온돌구조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東文選의 公州東亭記의 기록만으로는 온돌과 마루가 고려시대에 결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주택 안에서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문화의 지역적 이동과 전파에 따라 온돌과 마루가 다른 지역에 소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두개의 구조가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13세기가 되어서야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전면온돌형식이 한반도에 확산되게 되는데 (이 역시 최상류계층에는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때 온돌옆에 마루나 부엌같은 것이 달라붙는 형식이 나타났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즉 전면온돌의 극초기모습인 것입니다 (여전히 마루와 마루방이 많은 과도기적형태). 그런데, 이번 발굴은 그 짐작이 '실증적으로 증명'된 첫 사례가 아닐까요? 다음의 기사내용을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중심채에 양측으로 1×1칸 규모의 날개채를 덧붙여 ㄷ자형 평면을 조성하고 있다. 이 건물의 평면 양상을 보면 서측 1칸에는 온돌방을 두고 그 남측으로 연결된 날개채에는 부엌을 조성했다. 그리고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마루를 뒀는데, 동측으로 덧붙은 날개채까지 탄화된 마루의 흔적이 명확히 확인된다. 

이 건축물은 '조선전기의 소형저택'구조의 숱한 추정과 짐작을 어찌보면 많은 부분 실증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너무나 귀중한 유구입니다. 부디 밀어버리고 재건축따위를 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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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본 포스팅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즉, 조선전기의 저택구조를 분석하면서 후기의 시각에 맞춰진 안경을 끼고, 문화재/유구를 분석하는 오류는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관련자들이 눈을 완전히 중립적인 시선으로 둔채, 판단을 중지하고 조선전기의 주택지는 그것대로 사료와 꼼꼼히 대비해 보는등 엄밀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지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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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레이오트 2015/06/28 12:45 #

    우리가 아는 조선의 모습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라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의외로 조선 전기는 고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 역사관심 2015/06/29 02:55 #

    바로 그렇습니다. 제 많은 포스팅의 내용 역시 그 지점을 가리키고 있지요. 비단 건축뿐 아니라 머리모양, 의복까지도 그렇고, 불교등 종교적인 부분까지도 그렇습니다.
  • 대범한 에스키모 2015/06/28 16:14 #

    왜의 조선 침략이 어찌되었던간에 지금생각하는 유교적인 조선을 만들고
    20세기 내외로 또한번의 일본의 침략이 조선을 근대화로 이끈것이..

    뭔가 아이러니 하네요. 당하면당할수록 진화를 한다고 해야하나..??
  • 역사관심 2015/06/29 00:54 #

    음...조선후기의 교조화된 성리학적 시대는 개인적으로 철학적인 발전과 정치적인 세련됨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풍부함, 정교하고 화려한 세밀함등에서 전대보다 후퇴한 감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시기만의 다른 미학 (현재 한국미의 주담론이 되어있는)이 존재하지만요. 건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직선적인 발전으로 볼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임란덕에 큰 맥락에서 각종문화는 퇴보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근대화 역시 단면적으로 결코 볼수 없겠구요).

    글의 주제인 온돌의 보급시기와 마루방(침루를 비롯한)의 후퇴 역시 후퇴라든가 발달로 볼수는 없는 것이, 이것은 당시 기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주거형태의 큰 변화로 볼 뿐, 온돌이 더 발달한 형태의 주거형태라고 보긴 어려울 듯 합니다. 만약 임란이 없었다면 삼국에서 고려로 이어져온 풍부한, 현재 조선후기식 건축형태와 완연히 다른 느낌의 또다른 한국미가 도처에서 (현재 정형한옥과 더불어- 애시당초 정형이란 말을 후기건축에만 붙일수도 없었겠지만) 우리에게 풍부한 가시감과 실체로 다가오고 있었겠지요.
  • 대범한 에스키모 2015/06/29 02:16 #

    오히려 퇴보하게 되었군요.
    임란이 망할것이네. 좋은지식 얻고갑니다!
  • 역사관심 2015/06/29 11:21 #

    여러 견해가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조선후기의 문화는 전기후기 나눌것없이 일괄적으로 흐름이 내려갔을 가능성이 분명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 ㅇㅇ 2015/06/29 11:23 # 삭제

    제 생각에는 글쓰신 분이 조금 헷갈리신 것 같네요.

    기사중에도 있듯이 여러개의 집터 중 2개의 터만이 유난히 대청마루가 큰 것이고요.(이 말은 다른 다수의 주거용으로 생각되는 집들은 방들이 많다는 얘기죠.)

    또 기사의 사진을 보시면 온돌방과 마루방이 구분되어져 설명돼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온돌방보다 그냥 방이 많은데 이것은 조선시대 기록속의 '옛날에는 대개 노인이 온돌방에서 자고 젊은이는 마루방에서 잤다'고하는 기록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차치하고도 네면으로 벽이 없는 대청마루가 유난히 넓은 것은 확실히 주거용의 다른 건물들과는 조금 다른 목적의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말하고 싶네요.
  • 역사관심 2015/06/30 03:28 #

    우선 지적감사드립니다. 다만 정확한 논문이나 보고서를 보기전까지는 여러 가설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말씀처럼 약 30채중 2채만이 청(마루)를 강조한 건물입니다만, 아직 나머지 집터들과의 정확한 연대관계 정보는 알려지지 않아서 조금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선전기터라고는 하나 당대까지 남아있던 다양한 여러 시기의 건축이 공존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또한, 마루방이라는 것도 현재한옥에서는 드문 편인데, 이런 부분을 기사의 맥락에서는 발굴되자마자 깊은 고찰없이 그저 육의전이라는 맥락에 포함시켜서 상업용도의 이형건축정도로 결론지으려는 느낌이 있어 지적했습니다. 방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의 성격규명도 필요해 보입니다 (사실 조선중기이전의 건물터를 기존의 시각으로 한계지어 미리 결론짓고 유구를 살피는 태도는 이전에도 자주 보였고 비단 건축분야뿐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여러방면의 국내 문화담론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이 꽤 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상업건축인지 또다른 전기의 주거형 건축인지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이야기할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전문적인 분석논문이 나오기전에는 50/50이 아닐까 하는데, 조선전기형 주택지유구가 드문 현재상태에서 이런 귀한 유구가 나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연구를 진행하면 하는 바램에서 쓴 글이었습니다. 적어도 저런 사료를 들여다보고 유구를 살펴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분과의 시각차이는 분명 존재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ㅇㅇ 2015/07/08 02:02 # 삭제

    조선부의 기록은 기록보다는 좀 큽니다만 상주 양진당과 비슷한 모습이네요.
  • 역사관심 2015/07/09 09:40 #

    아 사진을 찾아보니 언뜻 정말 그러네요. 한번 시간있을때 찬찬히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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