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목우병마와 고대의 마리오네트, 그리고 비차 설화 야담 지괴류

비슷한 어감이나 다른 두가지 신기한 기계류에 대한 잡이야기. 임방(1640~1724년)의 17세기 후반의 기담서 [천예록]에는 원래도 이상한 이야기가 많지만, 특히 주목을 끄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입니다.

===
천예록
선비가 꿈의 계시로 요괴를 제거하다

어떤 선비가 한강을 건너가다가 배 위에서 선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누에 같은 눈썹에 봉황의 눈을 가졌으며 얼굴을 짙은 대추빛이었다. 신장은 8척이나 되었으며 푸른 도포에 긴 수염을 한 위풍이 늠름하기 짝이 없었다. 큰 칼을 비껴 차고 붉은 말을 타고 다가와서는 선비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한수정후 관운장이니라. 긴한 말이 있어서 너를 찾아 왔느니라.” 그러고는 선비더러 손바닥을 편편하게 펴라 하더니 검은 먹으로 화압(자필서명)을 하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강을 건너거든 한양으로 들어가지 말고 나루터에서 잠시 머물러 있거라. 그러면 가는 줄로 역은 삼정 (상자등을 넣기 위해 노끈으로 망태처럼 만든 물건)으로 싼 궤짝 일곱 바리를 배에 가득 싣고 강을 건너 한양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있을 게야. 네가 그자들을 불러 손바닥의 화압을 보여주면 저들은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 궤짝을 쌓아두되 절대 열어보지 말고 즉시 조정에 보고하여 속히 태워 없애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야. 이는 나라의 대사이므로 결코 처리가 잘못되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순간 선비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났다. 전율이 온 몸을 엄습해왔고 식은 땀이 등에 흥건하였다. 혹시나 하여 손바닥을 펴보니 화압이 선명하여 먹자국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놀랍고 의아한 마음을 누를 길 없어 꿈속에서 교시한 대로 나루터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 뒤 과연 삼정으로 묶은 궤짝 일곱 바리를 싣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건너오는 일행이 있었는데, 의관을 차린 한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다 건너오자 선비는 궤짝을 실은 사람을 불러 세웠다.  “전해줄 말이 있으니 잠시 한 곳으로 모여주기 바라오”.

그자들은 서로 쳐다보며 놀라는 눈치였으나 금세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선비는 가리고 있던 손을 내어 보여주었다. “이것들은 어떤 물건들이오? 한번 보십시다!” 라고 했다. 그들 눈에 화압이 들어오자마자 의관을 차린 자가 먼저 왼손으로 갓을 벗어 들더니 정신없이 내달려 강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따르던 8, 9명도 뒤따라 강으로 내달려 몸을 던졌다. 이들은 한순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선비는 나루터를 지키는 자를 불러 일렀다.

“이 궤짝 안의 물건은 재앙의 빌미가 되는 것이니라. 내 장차 조정에 들어가 이를 처리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이것을 잘 지키면서 대기하도록 하여라.”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하면서 곧장 말을 내달려 성안으로 들어가 병조에 이 변괴를 자세하게 알렸다. 소식을 접한 병조에서는 즉시 낭감을 파견하여 이 물건을 싣고 와서 선비의 말에 따라 섶을 쌓고 태워버렸다. 

불길이 타오르자 궤짝하나가 쪼개졌는데, 그 속엔 목우병마(木偶兵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길이가 한 마디쯤 되었고 궤짝마다 열네개씩 가득 들어 있었다.  선비와 병조의 관리들은 이것을 보고 놀란 마음에 혀가 빠질 정도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 타 잿더미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요사한 자들이 환술을 부려 도성을 어지럽게 하려고 목우병마를 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때 마침 조정에서 처음 동관왕묘와 남관왕묘를 창건하고 제례를 시행했던 까닭에 관왕의 신이 나라를 위해서 이와 같이 음우를 내렸던 것이다.
=====

즉, 조선 선비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큰 궤짝 7개를 실고 오는 배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막으라고 한 것입니다. 꿈에서 깬 선비가 관운장의 말대로 이를 막아내고 병조에게 알린 후, 궤짝을 태우니 그 안에서 각각 14개씩 목우병마(木兵馬)가 들어있더란 것입니다. 길이는 고작 한 마디, 즉 한 촌(寸. 약 3센티)씩입니다. 즉, 총 98개의 소형 목우병마가 들어 있는거죠. 이 스토리는 임란이후 관우의 국내에서의 신격화가 드러나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짐작으로는 이 목우병마들을 어떤 환술로 사람으로 만든다거나 움직이게 하여 도성을 어지럽히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문화컨텐츠로 좋은 소재로 보입니다).
4-5세기경 고대그리스 목우偶 (puppet)

목우병마란 것은 음만 보자면,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신박한 재주로 만든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말과 소를 만들어서 병기로 사용한 것을 말하는 목우유마(木流馬)와 비슷한 어감인데, 다른 물건입니다. 우선 한자가 木偶兵馬, 즉 나무병사와 병마라는 뜻으로 '偶 (허수아비 우)'라는 글자로 소 우를 쓰는 제갈량의 목우와는 다르죠. 참고로 제갈공명의 목우병마는 이렇게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어, 그냥 이야기가 아닌 실제했던 기계로 보통 추정하고 있습니다. 

‘목우는 배가 네모지고 머리가 구부러져 있으며 다리 하나에 발이 네 개 달려 있다. 머리는 목에서부터 나오고 혀는 배 쪽에 있다.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으나 걸음은 느리다. 따라서 대량 수송에는 사용이 가능했지만 소량 운반에는 적절치 않았다. (중략) 목우는 한 쌍의 원(轅, 수레 앞쪽 양옆에 대는 긴 채)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람이 가면 여섯 자리를 목우는 네 걸음에 간다. 한 번에 1년치 식량을 싣고 하루 20리를 간다. (중략) 유마의 갈빗대의 길이는 3자 5치, 너비는 3치이며 두께는 2치 3푼으로 좌우가 같다. 앞 축에 있는 두 개의 검은 구멍에서 머리까지는 4치이며 지름은 2치이다. 앞다리에는 2치쯤 되는 두 개의 검은 구멍이 있는데 그곳에서 앞 축 구멍까지 4치 5푼이며 너비는 1치다.’

송나라대에도 목우유마의 자세한 모양과 성능이 나옵니다. 송대인물인 진사도(陳師道)의 [담총 談叢]에 "촉에는 작은 수레가 있어 혼자 밀고 다니는데, 곡식 8석을 실을 수 있고 앞쪽이 소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또 큰 수레가 있어 네 사람이 밀고 다니는데 10석을 실을 수 있으니, 이것이 대체로 목우 유마이다.〔蜀中有小車 獨推 載八石 前如牛頭 又有大車 用四人推 載十石 蓋木牛流馬也]"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산군대 직접제작된 목우유마

그런데 조선에서도 이 나무기계를 진지하게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시험제작까지 마친 상태의 목마가 나옵니다. 바로 그 연산군대의 이야기.

연산군 5년 기미(1499,홍치 12)
7월7일 (을축)
군사에 쓰는 작은 유마를 김응문이 제작하여 올리다

이보다 앞서 김응문(金應門)이, 작은 유마(流馬)를 만들어 올렸는데, 이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윤필상이 의논드리기를,
목우유마(木牛流馬)의 제작은 제갈양(諸葛亮) 후로는 그 기술을 전한 자가 없었으며, 세종·세조 같은 성군으로서도 또한 시행하지 못하셨는데, 지금 비록 그 제작을 강구한다 할지라도 만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김응문이 여기에 생각을 두어 그 형체를 만들어서 아뢰었으니, 폐각(廢却)할 수 없는 일이므로 공장(工匠)을 명하여 그 제작을 세밀히 살펴서 사용 여부를 시험하도록 함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신승선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유마를 보옵건대, 옛날 제도와 합치하는 것 같으니, 교장(巧匠)으로 하여금 이 양식대로 조작하여 시험하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다만, 우리 나라는 산천이 구불구불하여 중국의 평원 광야의 지대와 같지 아니하므로 행용하지 못할 듯하옵니다.” 하고 정문형은 의논드리기를,

목우유마의 제도를 후세에서는 사용할 수 없음은 전일 의논할 때에 이미 다 말하였으며 또 지금 김응문이 만들어 올린 체제가 너무나 작아서 사용 여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으니, 김응문으로 하여금 그 체제를 크게 제작하도록 하여, 미곡을 실어 시험하면 그 운용의 편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한치형은 의논드리기를, “목우유마는 비록 옛날 제도의 전한 바라 할지라도 세종·세조조에서 행용하려고 여러 모로 제작하였으나 행용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뜻으로는 행용할 수 없을 듯하옵니다.”

하고 성준·이극균·이계동은 의논드리기를, 김응문이 만들어 올린 유마(流馬)의 제도가 교묘하기는 하나 그 높은 데로 끌어올리고 낮은 데로 밀어 내림에 있어서 지족(支足)이 파괴되기 쉬우므로 행세가 멀리 운행하기 어려울 것이며, 또 구부리거나 주선할 수 없어 험한 데를 운행하기도 또한 어려우므로, 이는 반드시 옛사람이 만들었던 제식과는 다른 듯합니다. 그러나 이를 시험한 후에 폐기하여도 늦지 않으니, 군기시로 하여금 이 양식에 의거, 제작하여 시험해보게 하소서.” 하고 박건·신준은 의논드리기를, “유마는 제갈양이 사용한 것이오나 후세에 이를 계승한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김응문이 스스로 만든 소형을 보건대, 이것으로는 그 행용 여부를 헤아릴 수 없으니, 교장(巧匠)으로 하여금 김응문의 지휘를 받아 1건을 만들어 시험하도록 함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홍귀달은 의논드리기를, “목우·유마의 제도는 《촉한기(蜀漢紀)》의 주(註)에 갖추 기재되어 있으나, 이를 알아 볼 수도 없고 그 제도를 상세히 아는 자도 없으므로, 제갈양 이후로 행용한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김응문이 올린 글과 제작한 바를 보옵건대, 자못 의연(依然)하니, 김응문은 지교(智巧)가 있는 자인 듯하오나 어찌 다 공명(孔明)의 제도에 합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지리는 대부분 험악한 데가 많으므로 비록 이를 사용코자 하여도 어려울 듯합니다. 평지에서 자그마한 운반에는 혹시 쓸 만도 하거니와, 대군중에서 이것으로 군량을 운반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하고 여자신은 의논드리기를, “김응문이 만들어 올린 목마(木馬)는 가령 운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 나라 산곡의 험한 곳에 어떻게 운용하겠습니까. 듣자옵건대, 세종 대왕께서 옛날 제도를 강구하도록 하였으나, 마침내 제작하여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혹은 하였으나) 성준의 의논을 좇았다.
=====

세종대와 성종대의 실록기록에도 목우에 대한 제작시도는 여러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연산군대에는 이미 소형으로 시험제작을 마치고 (실제로 움직이는) 대형 모델제작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홍귀달등은 국내의 지세에 이런 자동수레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박. 그런데 글 말미에 '성준'의 의논을 좇았다라는 것으로 보아 대형모델의 1기 시험제작까지는 한 듯 합니다.

그런데...

실학의 본고장 청나라에서는 그 후속모델이 실제로 제작되었음을 조선의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 1731~ 1783년)이 보고 하는 내용이 [담헌서]에 등장합니다.

담헌서 연기(燕記)
납조교(拉助敎)

납조교의 이름은 영수(永壽)다. 그는 만주 사람이며 심양부학(瀋陽府學)의 조교인데, 12월 초 8일에 사신의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을 적에 그의 집을 주인으로 정하였다. 납씨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수재요 잘 생겼다. 맏아들은 문자를 약간 아는데, 무슨 업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히 하는 업(業)은 없고 오직 만주의 사서(四書)를 공부하여 고시(考試)에 대비합니다.”고 하였다. 그의 책을 청하여 보았더니, 그것은 만주 글자로 번역하여 풀이한 사서로서, 우리 나라의 언해(諺解)와 같았다. 밑은 한문 글자로 되고 위는 만주 글자로 되었으며, 모두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향하였다. 만주식인 듯하다. 판본이 매우 정밀하였다.

밤이 깊어 막 취침하려는데, 맏아들이 와서 ‘조교인 자기 아버지께서 만나 보기를 청한다.’고 하는데, 이때 벌써 조교가 문에 들어섰다. 나는 방을 내려가 맞이하였다. 그는 나를 붙들어 앉히면서 말하기를, “아이들한테 들었는데, 조선의 귀한 분께서는, 문장이 훌륭하신 큰 군자시라시지요?” 하고, 이어서 우리 나라의 과거 제도와 관방(官方)을 물었다. 나는 모두, 중국말로 대략 대답하여 주었다. 조교는 그의 아들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처음 중국에 들어온 분으로서 말씀이 아주 정확하시다. 참으로 총명하신 분이다.” 하고 다시 말하기를, “조선은 참으로 예의의 나라이며, 다른 외번(外藩)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하였다. 중략.

내가 말하기를, “공의 말씀이 지당하오. 그런데 마군의 병기(兵器)는 몇 가지나 됩니까?” 조교가 말하기를, “궁시가 주기(主技)이고 총포가 가장 정예(精銳)하며, 그 밖에 장창(長鎗)과 쌍도(雙刀)와 채찍과 도끼 등의 종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병기들 가운데 혹 새로 만들어 낸 신기한 제품이 있습니까?”

조교가 말하기를, “새로 창조한 것은 그리 없습니다. 오직 대문개(戴文開)라는 중국 사람은, 재주와 학문이 매우 뛰어나고 교묘한 생각이 있어서, 일찍이 제갈무후의 유법(遺法)을 의지하여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만들었는데, 두 짐의 쌀을 싣고 하루 40리를 능히 갔었지오. 황제께서 들으시고 칙령(勅令)을 내리어 황제께 바치게 하여 어고(御庫)에 간직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목우유마는 제갈무후 뒤로 수천 년 동안, 아무도 그 기술을 풀어 안 이가 없었고 보면, 대군이야말로 신인(神人)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언(傳言)들은 대개 허무한 낭설(浪說)이 많으므로, 믿기 어렵습니다.” 조교가 웃으며 말하기를, “대군은 나의 벗으로서 그가 죽은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소. 목우유마는 내가 직접 본 것입니다. 헛소문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그림 부채 한 자루를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대군의 필적입니다.”
하였다. 중략.
=====

여기 보면, 홍대용과 만주출신인 납조교라는 인물과의 대화가 나오는데 신병기를 묻자, 납조교가 답하길 '새로 창조한것은 없지만 제갈량이 만들었던 목우유마를 대문개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라고 합니다.

주제와는 약간 다르지만,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해 보이는데 청인(만주출신)인 납조교가 (아마도 한인으로 보이는) 대문개를 '중국사람(중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惟此中人戴文開 (비교로 '납조교'에 대한 홍대용의 설명은 이렇게 나오죠. 拉助敎名永壽。滿洲人)

아무튼, 목우유마로 돌아가서 이 자동나무말을 실제로 만든것을 홍대용이 믿지 못하자, 대문개는 자신의 친구이며 자신이 직접 두눈으로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글은 사실일까요? 적어도 우리측 사료에서 이 사실은 한번 더 확인됩니다.

문견잡기(聞見雜記) 
청인(淸人) 대문개(戴文開)는 재학(才學)이 높고 교묘한 생각이 있어 일찍이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유법(遺法)에 따라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만들어 쌀 두 짐을 싣고 날마다 40리를 가는데, 건륭(乾隆 청 고종)이 듣고 칙령으로 이를 바치게 하여 어고(御庫)에 간직하였다 한다.

[문견잡기]는 1777년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압(1737~1795)이 청나라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을 견문하고 지은 기행문입니다. 따라서 홍대용이 북경을 방문한 1765년보다 약 9년후의 기록입니다. 기록을 보면 [담헌서]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직접 청에서 듣고 적은 것으로 보여 신빙성이 높습니다. 목우유마는 18세기에 한번 부활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종 부활하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좀 희안한 표현이 신라시대의 문집에 나옵니다.

계원필경집 
별지(別紙) 
염철사 이도 상공에게 보낸 글〔鹽鐵李都相公〕

제가 은혜를 입고 관직을 차지하게 되어서 감격스럽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납언(納言)의 높은 직질과 진식(眞食 식실봉(食實封))의 특수한 영광으로 말하면, 사직을 부지한 공로가 있고 음양을 섭리하는 능력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지위에 거하면서 여론을 만족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략.

게다가 오래도록 관화(筦貨)의 직무를 맡으면서도 실로 주모(籌謀)가 부족한 까닭에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군량을 넉넉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목우유마(木牛流馬)로 운송하는 일도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출삭(黜削)당하는 것을 달게 여기며 길이 한가하게 물러나 거할 생각뿐이었는데, 성상의 은택이 치우침이 없으시어 번진(藩鎭)을 맡게 해 주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중략.

이 글은 한국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인 고운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린 것으로 이 저작은 87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즉 9세기의 기록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 당(唐)으로 유학하여 관리가 되었고 이때 집필한 여러 시문 작품을 신라로 돌아온 뒤인 886년에 책으로 엮어 왕에게 헌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당나라말기 9세기에 최치원이 당의 관리에게 보낸 편지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深愧於木牛流馬 (목우유마에 의지해서 부끄럽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떤 은유인지 정말 목우유마를 쓴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는 동아시아의 최고 전성기중 하나였습니다. 계속 이어가 보지요.
=====

비차 (날틀)과 나무인형(목우, 마리오네트)

아직 번역이 안된 신기한 기록을 소개합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의 [정유각집(貞㽔閣集)]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記里皷(기이고)

御製條問曰。注言記里皷。所以識道里。車上有二層。上有木人。行一里下層擊皷。行十里上層擊鐲。意其制有機括轉運。如璣衡漏鐘之類。璣衡漏鐘皆以斡旋之遲速。合於晷刻之遷移。則遲速宜有一定之限。今夫道有遠近而行有疾徐。則機發之遲速。亦當隨而不同歟。不然則一里擊皷。十里擊鐲。不幾近於膠珠之瑟耶。

臣對曰。記里皷之制。本注雖引宋天聖年大章車爲證。而此非晉時之原制。按晉書輿服志云記里皷車形制如司南。中有木人。執槌向皷。一里打一槌。司南卽指南。義煕五年劉裕屠廣固時所獲。使張綱補緝者也。司南下云駕四馬。如樓三級。四角金龍銜羽葆。大駕出行。爲先啓之椉。夫司南也記里也。兩車俱爲天子之鹵簿。天子行必治道。吉行不過三十里。則其行之必徐道之必坦。槩可以想矣。意其必以徐行平道爲準。而疾行倍行。亦當以比例爲差。如以日行百里爲率。而倍道者必二里擊一槌。三百里者必三十里擊一鐲。又或使其中之機輪。以行爲轉。疾行則急轉。徐行則緩轉。不行則不轉。期於一里十里而擊皷擊鐲。則自無膠柱皷瑟之患矣。葢古之人。運智創物。有非文字言語所可形容摸索。故自成湯之飛車。偃師之木人。諸葛之木牛流馬。後世都無傳焉。至如璣衡漏箭之㳒。議如聚訟。臣本蔑學。固不敢指一仰對。而記里皷之制。不過是度地之物。則步數尺度。最近而易驗。非若日晷星刻之積累而易差也。其㳒之深淺。恐當少遜於問時測天諸器之逾細而逾巧者矣。

주목할 만한 세부분.

成湯之飛車 성왕(탕왕)의 비차
偃師之木人 언사偃師의 나무인간 
諸葛之木牛流馬 제갈의 목유유마.

목우유마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기록이므로 같은 맥락 (즉 자동기계)류를 소개하는 글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차'가 등장합니다. 사실 '비차(비거)'라는 개념은 중국의 고대 진나라의 [제왕세기]에 이미 등장하고 있어 임진왜란대 조선의 정평구가 만든 비차가 유일한 고유단어는 아닙니다. 중국측의 이 최초 기록 (제왕세기)의 묘사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굉씨는 나는 수레를 만들어서 바람을 따라 멀리 날아다닌다.〔奇肱氏能爲飛車 從風遠行). 

이게 다죠. 그런데 이 박제가의 비차묘사는 은나라의 성왕(탕왕=성탕)대의 비차로 되어 있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건 뭘 묘사한 걸까요? 그리고 진나라의 기록과는 연대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요.

신경준(申景濬, 1712~1781년)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이규경(李圭景, 1788~ 1856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1923년 권덕규가 쓰고 광문사(廣文社)에서 출판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마지막으로 궁금하실까봐 두번째 기계인 '언사의 나무인간'을 소개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것은 (무려) 8세기 당나라시대에 언사라는 고대변방부족의 장인이 만든 '배우인형'입니다.
=====
몽구蒙求 (당나라 8세기, 이한(李澣))
언사가 나무를 춤추게 하다 (언사무목)

열자가 말하기를 주나라 목왕이 서쪽으로 순수했다. 길에서 공인을 바치는데, 그 이름이 언사라 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잘하는가?
신이 만든 것이 있으니 원컨대 보시기 바랍니다.

이튿날 그는 왕을 알현하고, 왕이 묻기를 
그대와 함께 온 사람이 몇명인가?
대답하길, 이것이 어제 아뢴 바 있는 신이 만든 것인데 배우흉내를 냅니다 라고 했다.
왕이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걸어가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것이 마치 사람과 같이 교묘했다.

그 턱을 끄덕이면, 노래가 음율에 맞고
그 손을 들면, 춤이 가락에 응한다.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여, 뜻대로 움직여졌다.

왕은 이것이 실제로 사람이라 하여, 데리고 있던 미녀들과 왕을 모시는 여관들과 함께 보는데
기이한 재주가 끝나가자 배우는 그 눈으로 눈짓하여, 왕의 좌우 시첩을 부르는 것이다.

이에 왕이 노하여 언사를 벌하려고 하자, 언사는 그 자리에서 배우를 쪼개어 왕에게 보였다.
그것은 모두 나무를 쪼개고 이어서 만들고, 아교와 옻칠을 하여 희고 검게 단청해서 만든 것이었다.

말 그대로 자동 마리오네트입니다. (무려) 배우흉내를 내는 나무인형인데 오죽 정교하면 주왕이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에 몇명이 온건가? 라고 묻고, 나중에는 왕의 시첩을 희롱한다고 노하죠)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 제작자인 언사를 죽이려하자 나무라는 걸 부숴서 보여줘야 할 정도의 정밀한 인형 (만번 동작한다는 표현이 말해주죠).
만화 꼭두각시 서커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기담이 실린 저작 [몽구]의 저자인 '이한'이 전주이씨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한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전주이씨 (위키글에도 두가지 주요설로 정리되어 있네요).

몽구저자인 이한을 瀚으로도 翰로도 쓰는데,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 ? ~ 754년?)에 대해서는 사실 추정 사망년도는 있는데 생일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되어 있지요: 시조 이한의 선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명확하다).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에 신라의 35대 경덕왕(景德王, 739~761년)때 사공(司空) 벼슬을 하였던 이한(李翰)이란 사람이 나오는데, 이 인물이 [몽구]의 저작자인 듯 합니다.

"이한(李翰)의 아버지는 이화종(李華宗)이며, 李翰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라고 되어 있죠.

시기적으로도 매우 비슷하고, 한자이름도 같은 동시대인물인지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연구하기전에는 확신할수 없을 듯 합니다. 특히 이시기 경덕왕시대인 동시대 (8세기중엽)인 신라시대의 만불산과 비교하면 흥미롭죠. 동시대에 이런 기계류 기록이 양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몰론 나무인형은 '주나라시대'의 것입니다만). 

8세기에서 9세기의 동아시아는 그야말로 문화의 황금기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덧글

  • 낙으네 2015/07/03 09:12 # 삭제

    상상력을 들끓게 만드는 고대의 기술력이란 참... -0-
    기록이 있으니 분명히 뭔가 만들기는 하였을 것인데 그 모습과 운용은 알 길이 없으니 조금 답답하군요.
  • 역사관심 2015/07/04 02:53 #

    상상도라도 좀 많이 그려봤으면 좋겠습니다.
  • 네비아찌 2015/07/03 09:37 #

    물을 끓여 가는 비차는 열기구 같네요^_^
  • 역사관심 2015/07/04 02:53 #

    호...그럴수도 있겠네요.^^
  • 존다리안 2015/07/03 10:02 #

    물을 끓인다면 증기기관? (설마 목우유마 동력원도?)

    그러고 보니 꼭서에서는 꼭두각시들을 암살자들이 조종했지요. 설마 도성에 들이려 했던 것도 암살자들인가?
  • 역사관심 2015/07/04 02:54 #

    만화소재로도 좋은 것 같습니다. 풍부한 상상력에 연출을 곁들여서. =)
  • 봉래거북 2015/07/03 23:45 # 삭제

    확실히 연구할 만한 가치는 있어 보입니다만, 본문에도 나오듯이 목우유마는 그냥 수레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기도 한지라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으로 보입니다. 당말의 점점 열악해저가는 재정상황에서 지방에서 짐 수송용으로 수레 형태가 아닌 꼭두각시 형태의 묵우유마를 만들어 썼다고 보기는 좀...
  • 역사관심 2015/07/04 02:54 #

    저도 최치원의 기록은 아마도 자동기계는 아닐거라 보지만...어쨌든 한번 검토해 보면 좋겠어요.
  • 무지개당당 2015/07/14 10:26 # 삭제

    예전 우리 산대놀이에도 기계인형이 쓰였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죠. 가온마츠리 인형과 차인형과 유사하게 쓰였을 거 같습니다.

    <언사무목>에 나오는 인형은 정교함 측면에서 보면 꼭 일본 분라쿠 인형의 모티브가 될 거 같기도 합니다. 눈짓으로 시녀를 가리키고 말에 따라 움직이는 정교함은 눈꺼풀을 따로 움직이거나 조루리에 따라 반응하는 분라쿠 인형과 매우 닮은 거 같아요. 어쩌면 중국에서 건너간 건 아닌지... 아무튼 어떤 측면에선 매우 정교한 인형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되네요. ^^

    별개로 올리신 목우유마 사진을 보니 얼마전 웨스트앤드에서 공연됐던 <War Horse>라는 공연도 생각납니다. ^^
  • 역사관심 2015/07/14 10:54 #

    허 그런 산대놀이에 추정이 있나요? 전혀 몰랐는데 관심이 갑니다. 정보를 급알고 싶어지네요 ^^
  • 무지개당당 2015/07/18 07:26 # 삭제

    박세연. <조선시대 산대 기관인형 연구>. 중앙대 박사. 2014. 논문 읽어보시면 참고 되실 거 같습니다. ^^
  • 역사관심 2015/07/19 07:24 #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꼭 찾아보겠습니다.=)
  • SV001R 2016/01/26 16:29 #

    비거에 관한 기록이 이제까지 알려졌던 것들 외에 또 있다는 것이 흥미롭군요. 세간에는 이외에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의 기록 가운데도 비거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혹시 여기에 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 역사관심 2016/01/27 00:06 #

    저도 '소문'만 들었을 뿐, 일본측 기록은 굉장히 관심이 있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혹시 제목이라도 아신다면 나누어주신다면 찾는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 SV001R 2016/01/27 11:43 #

    제목이 '왜사기'(倭史記)라고 알려져 있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제목의 책이 전혀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 역사관심 2016/01/27 15:45 #

    허.. 그렇군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정보 정말 고맙습니다.
  • 장기튀김 2019/01/10 06:09 #

    정유각집의 비차 구절은, "성탕(=탕왕)의 비차를 비롯하여" 라는 뜻입니다. 기굉이 비차를 만들었다는 게 탕왕 때의 일이거든요. 증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역사관심 2019/01/12 04:32 #

    아! 그렇군요. 수정하겠습니다. 귀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 무명병사 2021/04/01 06:50 #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는 관운장을 유독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임진록에서도 관우가 나서서 파병을 하도록 설득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장비는 왜...(막내는 서럽다)
  • 역사관심 2021/04/02 06:44 #

    오죽하면 사당이 전국에 있을 정도니... 워낙 유교가 교조화된 국가였던지라 딱 모시기 좋았던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장비는 유교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예전 방송의 글귀를 보면:
    숙종은 관우를 경모하며 직접 시문을 지어 관왕묘인 동묘와 남묘에 걸어둔다.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신하들의 충의를 강조하는 자리로 관왕묘를 선택한 것이다. 숙종 이후 영조대에는 관왕묘 제사가 정식 국가의례로 편입되었고, 정조대에는 기존의 소사(小祀)에서 중사(中祀)로 격상된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에게 충의를 강조하고자, 조선의 왕들은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