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어떤 왕의 무덤일까요? 허균이 쓴 인골이 남아있던 고대왕총 역사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 1569~1618년)의 글중 '상원군왕총기'라는 신기한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1607년, 평양외곽의 상원군이라는 곳에서 명확히 주인을 알 수 없는 '왕릉'이 발견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상원군(祥原郡) 왕총기(王冢記)

상원군의 북쪽 시오리 되는 곳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왕산촌(王山村)이라 하며, 그 마을의 북쪽에 산이 하나 우뚝하니 솟아 민둥하니 나무가 없는데 왕총(王冢)이라 한다.

정미년(1607, 선조40) 7월에 큰비가 내려 왕총이 무너졌다. 마을 사람 조벽(趙壁)이란 자는 어려서 중이 되어 글을 조금 이해하는데, 왕총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부리는 자들을 인솔하여 와서 살펴보니, 광중(壙中)의 깊이가 두길 남짓한데 벽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를 빙 둘러 수도(隧道)는 없으나 돌로써 덮개를 해 놓았다. 

들어 보니 푸른 옥돌로 덮고 재로써 그 이음매를 막았으며, 그 속에 와관(瓦棺)을 안치시키고 풀로 된 인형과 나무 인형을 늘어놓았으며, 도자기ㆍ솥ㆍ술잔들이 매우 많았다. 북쪽에는 등이 있는데 기름이 반쯤 차 있었으며, 뼈 두 무더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광(壙) 남쪽에는 돌로 된 종이 흙 속에 묻혀 있으므로, 씻어서 보았더니 신명대왕묘(神明大王墓)라는 다섯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자획(字劃)이 크고 졸(拙)했다. 조벽은 마을의 노인들을 모아 삼태기와 가래로써 흙을 날라 덮어 버렸다. 

조벽의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금띠를 두른 신인(神人)이 나타나, 조벽 및 그와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두루 감사한 다음,
“나는 왕총(王冢)의 신이오. 그대들에게 뼈를 묻어 준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풍년을 들게 하여 보답하겠소.”
하였다. 이후부터 3년을 연달아 과연 큰 풍년이 들었으며, 노약들이 병을 앓거나 요절하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그 얼마나 신령스러운가. 조벽이 내게 와서 한 말이 이러했다.

내 생각으로는, 나라에 지도와 서적이 드물어 삼국 이전의 일은 상고할 수가 없지만, 신명왕(神明王)이란 호칭은 고구려 역사에 보이지 않으니 주몽(朱蒙)의 후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무덤이 또한 성천(成川)에 가깝고, 성천은 옛날의 송양국(松壤國)이니, 아마도 이는 그 왕이 아닐까 하나 내가 감히 알지 못하겠다.

옛날에 제후들은 수도(隧道)를 하지 않았고, 묘라 하여 능(陵)이라 하지 않았으며, 성인은 후장(厚葬)하는 것을 그르다 했는데, 지금의 이 왕총은 수도(隧道)를 않고 묘라 칭했으니 예의에 맞고, 금은 보배를 저장함으로써 도적을 맞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지혜롭다 할 것이며, 또한 백성들에게 능히 복을 가져다 줌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였으니 인(仁)이라 하겠다. 지혜롭고 어질고 예의를 알진대 그가 살아서는 좋은 임금이었고 죽어서는 밝은 귀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애석하게도 사관(史官)들이 빠뜨려 그 이름이 드러나지 못했구나. 이를 인하여 글을 써서 역사의 빠진 것을 보충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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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체를 보시면 알겠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무덤의 양식과 내부의 장식이 아주 상세히 묘사되고 있으며 (인골도 그대로 있으며, 북쪽의 등잔에 기름까지 그대로 보존상태), 다음으로는 이 왕에 대한 추정입니다. 우선 무덤내부에는 푸른색 옥돌로 덮개를 만들고, 왕총안은 꽃무늬 벽돌로 장식이 되어 있으며, 재밌게도 풀입과 나무 인형을 늘어놓았습니다. 석종도 있었고, 기름이 든 등잔도 북쪽에 있었죠.

그 다음으로 매우 중요한 기록이 '신명대왕묘(神明大王墓)'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돌이 남쪽 흙속에 묻혀 있더라는 겁니다. 이 기록은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외에는 거의 드문 '지석'(무덤주인 명패)가 남아있는 왕릉기록이 됩니다.


신명대왕묘(神明大王墓)
그럼 이 신명대왕, 즉 신명왕이라는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허균 선생은 고구려 역사에서 이런 왕명은 없으니 고구려왕은 아닐 것이라 추정합니다.

不現於句麗史 고구려 역사에 보이지 않으니
라고 되어 있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이 '성천'이라는 곳에 가깝고 성천은 옛 송양국이라는 나라였으니 아마도 이 나라의 왕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죠. 허균선생은 아마도 이런 전대의 기록을 참조했을 듯 합니다. 다음은 15세기 문인인 성현(成俔, 1439년∼1504년)의 기록입니다.

용재총화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이라 하고, 옛 강동(江東)을 양국(壤國)이라고 한다. 

그럼 '송양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기자조선보다 단군조선쪽으로 역사를 서술한 조선후기의 학자 이종휘(李鍾徽, 1731~1797년)의 저작인 [수산집]에는 이런 재밌는 기록이 나옵니다.

수산집(修山集)
東史列傳
濊貊,沃沮,沸流,樂浪列傳

沸流王松壤。其先檀君之苗裔。國於沸流水上。與卒本靺鞨扶餘相隣接。至神明王。有聖德。百姓神明之。死而因謚之神明。今祥原郡。盖有神明王塚云。至王松壤。扶餘人朱蒙。自稱天帝子。據卒本。來見王。王曰。

비류(沸流)는 단군(檀君)의 자손이다. 비류수(沸流水)위에 나라를 세워 졸본(卒本) · 읍루(挹婁) · 부여(夫餘)와 서로 인접해 있었다. 신명왕(神明王)에 이르러 성스러운 덕이 있자, 백성들이 이를 신명(神明)하게 여겨, 죽은 뒤에 시호를 신명(神明)이라 했다. 지금 상원군(祥原郡)에 신명왕(神明王)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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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비류는 주몽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송양(松壤)이라는 왕은 동명왕 2년(주몽)에게 투항해서 나라를 바치는 왕이죠. 그래서 이 송양국(松壤國)을 '비류국(沸流國)'으로 비정하게 됩니다 (현재 고전번역원에서도 이렇게 해석해두고 있지요).

수산집의 해석을 보면 따라서 이 '신명왕'은 원래 비류국의 왕인데, 그가 죽은뒤 '신명'이라는 시호를 붙여, 신명왕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기록만 보면 허균의 왕총기에 나오는 무너진 무덤의 주인은 비류가 세운 나라(비류국)의 후대왕이 됩니다 (어디까지나 이 사료내에서만입니다) . 다만, 이 기록은 18세기의 것이므로 허균의 기록등을 참조해서 무덤기록을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외에도 안정복(安鼎福, 1712~ 1791년)의 [순암복부고]에도 참조할 만한 기록이 있습니다.

順菴覆瓿稿 下 (순암복부고)
高麗史地誌, 成川本沸流王松壤故都, 故成宗時改號松壤, 成宗麗初之君, 自麗初以成川爲沸流, 可見矣. 

여기 보면 성천이라는 지역이 곧 비류왕 송양의 도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고고학적인 발굴와 문헌쪽의 연구를 교차해가며 치밀하게 파고 들어가 봐야 하겠지요. 다만, 이러한 재미있는 발굴소재가 현재 북한에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아는 이는 일반적으로 많이 없을 것 같아 소개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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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국(송양국)? 신명왕의 무덤의 위치

그렇다면 이 무덤은 지도상 어디일까요? 의외로 쉽죠. 허균선생이 제목에서부터 '상원군'이라고 그 지명을 적어주셨고, 상천이라는 (즉 송양국 추정) 곳이 이 곳에서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祥原郡之北十五里(상원군지북십오리) 상원군의 북쪽 15리 되는 곳에 
有村曰王山(유촌왈왕산) 마을이 하나 있는데 왕산촌(王山村)이라 하며

상원(祥原)은 고구려 때에는 식달현(息達縣)이라 불렸고, 신라 헌덕왕 때 토산현(土山縣)으로 고쳐 부르다가, 1018년(현종 9)에 황주(黃州)의 영역이 되었다가, 1322년(고려 충숙왕 9)에 공신인 조인규(趙仁規)의 고향이라 하여 상원군(祥原郡)이 된 곳입니다. 1914년 이후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에 속해 있다가, 다시 평양시에 속했다가 현재는 황해북도(북한은 황해도를 둘로 나누었죠)에 속해 있습니다.

지도에서 대강 보자면 이 곳입니다. 평양의 동남쪽이죠.
저 상원군에서 15리 북쪽, 약 5-6킬로 위에 '왕산촌'이라는 부락이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왕산'에 있던 부락으로 보이는데, 위성에서 보시다시피 상원군 위는 온통 산지죠. 그런데 이 '왕산'이라는 이름이 특별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이 곳에는 고구려관련 왕릉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비류와 뗄수 없는 관계인 (송양과도 뗄수 없는) 주몽의 무덤인 '동명왕릉'이 아래 사진을 보시면 상원군 (오른쪽 아래 오렌지색 동그라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왼쪽 위 동그라미 부분). 동명왕릉고분군은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있는데, 재밌게도 무진리 왕릉동 고분군의 전면에 동명왕릉이 자리 잡고 그 배후 산기슭에 20여기의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관련 무덤이 워낙 많은 곳이죠.

아마도 그래서 저 무진리의 산들이 16세기에는 왕산王山으로 불리웠고, 거기 있던 마을을 '왕산촌王山村'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입니다. 즉, 고구려왕들의 산이란 뜻이죠. 그리고, 허균의 기록에 나오는 저 신비의 왕릉은 그곳에서 약간 아래쪽에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따로 묻혀 있는 고분인 셈입니다.
참고로 언급한 동명왕릉 부근의 고분군을 진파리 고분군 (1-15호)라 합니다. 가운데 사각형이 동명왕릉이고 바로 아래는 고구려 정릉사죠.

북한학계에서 이 무덤관련 기록을 파악, 연구하고 발굴시도를 해봤는지는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다만, 한국에서도 이 기록에 대한 관심을 좀 가져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기록인 것은 틀림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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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원문과 해석

상원군(祥原郡) 왕총기(王冢記)-허균(許筠)

祥原郡之北十五里(상원군지북십오리) : 상원군의 북쪽 15리 되는 곳에 
有村曰王山(유촌왈왕산) : 마을이 하나 있는데 왕산촌(王山村)이라 하며, 
村之北有山隆然而起(촌지북유산륭연이기) : 그 마을의 북쪽에 산이 하나 우뚝하니 솟아 
童無樹(동무수) : 민둥하니 나무가 없는데 
曰王冢(왈왕총) : 왕총(王冢)이라 한다.
丁未歲七月(정미세칠월) : 정미년(선조 40, 1607) 7월에 
大雨水(대우수) : 큰비가 내려 
王冢崩(왕총붕) : 왕총이 무너졌다. 
村人趙璧者(촌인조벽자) : 마을 사람 조벽(趙壁)이란 자는 
少爲僧稍解文(소위승초해문) : 어려서 중이 되어 글을 조금 이해하는데, 
聞其毀(문기훼) : 왕총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率其傭往審之(솔기용왕심지) : 그가 부리는 자들을 인솔하여 와서 살펴보니, 
則壙深二丈許(칙광심이장허) : 광중(壙中)의 깊이가 두길 남짓한데 
甃石爲花紋(추석위화문) : 벽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周四隅而不隧(주사우이불수) : 네 귀퉁이를 빙 둘러 수도(隧道)는 없으나 
以石爲蓋(이석위개) : 돌로써 덮개를 해 놓았다. 
揭則靑珉覆之(게칙청민복지) : 들어 보니 푸른 옥돌로 덮고 
灰以錮其縫(회이고기봉) : 재로써 그 이음매를 막았으며, 
中安瓦棺(중안와관) : 그 속에 와관(瓦棺)을 안치시키고 
列芻靈木偶(렬추령목우) : 풀로 된 인형과 나무 인형을 늘어놓았으며, 
瓷鼎彝甚多(자정이심다) : 도자기ㆍ솥ㆍ술잔들이 매우 많았다. 
北有釭(북유강) : 북쪽에는 등이 있는데 
油實其半(유실기반) : 기름이 반쯤 차 있었으며, 
骨二堆猶在焉(골이퇴유재언) : 뼈 두 무더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壙之南有石鍾埋土(광지남유석종매토) : 광(壙) 남쪽에는 돌로 된 종이 흙 속에 묻혀 있으므로, 
洗而看之(세이간지) : 씻어서 보았더니 
有神明大王墓五字款(유신명대왕묘오자관) : 신명대왕묘(神明大王墓)라는 다섯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字畫大而拙(자화대이졸) : 자획(字劃)이 크고 졸(拙)했다. 
璧會村父老(벽회촌부로) : 벽(壁)은 마을의 노인들을 모아 
畚鍤而土掩之(분삽이토엄지) : 삼태기와 가래로써 흙을 날라 덮어 버렸다. 
夢有紅衣金腰神人(몽유홍의금요신인) : 조벽의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금띠를 두른 신인(神人)이 나타나,
遍謝於璧及同事者曰(편사어벽급동사자왈) : 조벽 및 그와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두루 감사한 다음,
我王冢神也(아왕총신야) : "나는 왕총(王冢)의 신이오. 
蒙君等掩骼之惠(몽군등엄격지혜) : 그대들에게 뼈를 묻어 준 큰 은혜를 입었으니,
當以登歲相報也(당이등세상보야) : 마땅히 풍년을 들게 하여 보답하겠소."하였다.
是後連三年果大熟(시후련삼년과대숙) : 이후부터 3년을 연달아 과연 큰 풍년이 들었으며, 
而老稚無瘥恙夭札者(이로치무채양요찰자) : 노약들이 병을 앓거나 요절하는 이가 없었으니, 
噫其神矣(희기신의) : 아아 그 얼마나 신령스러운가. 
璧來言於余如是(벽래언어여여시) : 벽이 내게 와서 한 말이 이러했다.
余惟國家尠圖籍(여유국가선도적) : 내 생각으로는, 나라에 지도와 서적이 드물어 
三國以前之事(삼국이전지사) : 삼국 이전의 일은 
無可攷者(무가고자) : 상고할 수가 없지만, 
神明王之號(신명왕지호) : 신명왕(神明王)이란 호칭은 
不現於句麗史(불현어구려사) : 고구려 역사에 보이지 않으니 
其非朱蒙嗣明矣(기비주몽사명의) : 주몽(朱蒙)의 후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冢且近成川(총차근성천) : 무덤이 또한 성천(成川)에 가깝고, 
成川古松壤國(성천고송양국) : 성천은 옛날의 송양국이니, 
意者是其王歟(의자시기왕여) : 아마도 이는 그 왕이 아닐까 하나 
吾不敢知(오불감지) : 내가 감히 알지 못하겠다.
古者諸侯不隧(고자제후불수) : 옛날에 제후들은 수도(隧道)를 하지 않았고, 
墓而不陵(묘이불릉) : 묘라 하여 능(陵)이라 하지 않았으며, 
聖人以厚葬爲非(성인이후장위비) : 성인은 후장(厚葬)하는 것을 그르다 했는데, 
今王冢則不隧而稱墓禮也(금왕총칙불수이칭묘례야) : 지금의 이 왕총은 수도(隧道)를 않고 묘라 칭했으니 예의에 맞고, 
不藏金寶以啓盜智也(불장금보이계도지야) : 금은 보배를 저장함으로써 도적을 맞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지혜롭다 할 것이며, 
又能致福於民(우능치복어민) : 또한 백성들에게 능히 복을 가져다 줌으로써 
以謝其惠仁也(이사기혜인야) : 그 은혜에 보답하였으니 인(仁)이라 하겠다. 
智仁而知禮(지인이지례) : 지혜롭고 어질고 예의를 알진대 
則其生爲令主(칙기생위령주) : 그가 살아서는 좋은 임금이었고 
死爲明神可知矣(사위명신가지의) : 죽어서는 밝은 귀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惜乎史氏之闕漏不著其名也(석호사씨지궐루불저기명야) : 애석하게도 사관(史官)들이 빠뜨려 그 이름이 드러나지 못했구나. 
因爲疏之(인위소지) : 이를 인하여 글을 써서 
以補石室之遺云(이보석실지유운) : 역사의 빠진 것을 보충하는 바이다.



덧글

  • 낙으네 2015/07/14 10:02 # 삭제

    신명왕이 비류라면, 인천으로 비정되는 미추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무덤이 있다는 건 조금 이상하군요.
  • 역사관심 2015/07/14 15:26 #

    글 해석에 오류가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비류가 신명왕이 아니라, 비류가 세운 비류국의 후대왕중 한명이었습니다.
  • 낙으네 2015/07/15 10:45 # 삭제

    아~ 그렇군요. 그렇다곤 해도 비류 이후의 세력이 미추홀(인천)에서 상원지역까지 세력을 넓힌것으로 봐야하는지, 세력권은 아니지만 모종의 이유로 미추홀을 떠나 상원에서 묻힌것인지, 애초에 미추홀=인천의 위치비정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신명왕이 비류국의 사람이 아닌데 기록자들이 착각한 것인지 여러가지 의문이 남는군요. 누가 연구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 역사관심 2015/07/16 18:03 #

    그러게 말입니다. 확실한 것은 통일이 되고 나면 역사학이나 고고학계도 두배 세배정도 지평이 넓어질 듯 합니다. 분명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사도 깊게 들어가게 될테구요...
  • 네비아찌 2015/07/14 10:26 #

    송양국은 만주 졸본 유역에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고구려의 왕릉이 맞는거 같습니다. 왕명이야 삼국사기의 왕명은 실제 고구려 왕명의 일부분만 따서 기록한 것이니 삼국사기랑 다른게 오히려 당연하죠.
  • 역사관심 2015/07/14 12:25 #

    고구려왕중 누구의 무덤이라도 정말 귀중한 기록인데. 연구주제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 ㅇㅇ 2015/07/14 11:15 # 삭제

    주몽과 관계된 비류라면 인천으로 갔다는 그 비류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뜬금없이 평양 인근에서 왕이 되고 거기서 죽어 무덤이 있다는게

    좀 이해가 안되네요..
  • 역사관심 2015/07/14 15:36 #

    첫 댓글처럼 오류가 있어 수정했습니다. 인천에서 세력이 확장되었던 것일까요?
  • 응가 2015/07/14 13:31 # 삭제

    조선시대에 도굴이 되었을리는 없을테고 만약 일제시대에까지 도굴이 되지않았고 더구나 벽화까지 남아있다니 발견이 되지 않았더라면 후대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될것같습니다.
    그당시의 상원과 현재의 상원군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원군에 고구려고분군이 발견되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글과 좀 다른점으로는 상원군 고분군에서는 수십기가 골짜기안에 분포되어있고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말은 없네요.
  • 역사관심 2015/07/14 15:16 #

    그럼 정말 좋겠습니다. 전혀 소식이 없어서 외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
  • ㅇㅇ 2015/07/15 12:41 # 삭제

    신명왕이 비류가 아니더라도 통상 인천으로 간 비류세력은 비류사망후

    온조에 통합되었다고 보는게 이제까지 널리 알려졌던 당시 역사인데

    뜬금없이 평양인근에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게 좀 황당하네요

    비류세력이 고구려세력권으로 세력확장했다는 얘기는 들은적 조차 없어서요

    차라리 인천을 떠나 충청도나 전라도로 이주했다면 이해가 되지만

    만약 평양으로 간게(?) 사실이라면

    초기백제는 한성과 평양 양쪽에 세력을 뒀다는 건가요??

  • 역사관심 2015/07/16 18:01 #

    현재로썬 모르겠습니다. 후에 이장된건지, 어떤 의미인지 알길이 없네요. 뭔가 전공자들이 연구해주면 좋겠습니다. 일단 화두만 던져본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ㅎㅎ.
  • 고래범 2015/07/15 22:15 # 삭제

    역사관심님 덕분에 좋은글 읽고갑니다
  • 역사관심 2015/07/16 18:01 #

    고래범님 감사합니다.^^
  • 2015/07/16 11:4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7/16 17: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봉래거북 2015/07/16 21:55 # 삭제

    정말 미지의 물건이로군요. 그렇다고 문헌들을 보니 무시할 수도 없고...벽돌무덤이라면 백제에서 중국 남조의 양식을 따른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데 저 기록대로라면 그 이전에도 벽돌무덤 양식이 시도되었다는 얘기도 되고...
  • 역사관심 2015/07/16 22:09 #

    북한학계와 공동으로 한번 진행시켜 보면 좋을 텐데, 동아시아 정치꼴을 보면 한숨만 나오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5/07/17 15:45 #

    전체적인 고분의 형태는 벽돌을 썼다하니 전축분인데 일단 고구려의 전축분이라는 점이 특징이고, 내부에 와관을 따로 뒀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무덤 형식만 놓고 본다면 삼국시대때 무덤이라고 생각되는데, 워낙 짬뽕이라 감이 안 잡히네요. 서로 다른 2개의 묘제가 하나로 합쳐졌다면, 뭔가 과도기적인 성격일텐데...(아니라면 무령왕릉처럼 특정 시기, 특수한 인연으로 특수하게 조성됐을 가능성도...)

    그나저나 송양왕의 비류국 관련 전설이 황해도 에서 갑자기 등장하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막연히 비류국은 졸본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 어딘가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죠.
  • 봉래거북 2015/07/19 00:38 # 삭제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송양과 주몽의 마찰이 있었다는 기록을 본다면 한반도 북부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 역사관심 2015/07/19 07:26 #

    논문과 일은 잘 되고 계시겠지요? (블로그 보고 알았습니다- 축하드릴 일이 많아 좋습니다 ^^) 저는 이쪽은 상식적인 지식선에 머물고 있었는데, 좀 특이한 기록이라 생각은 했지만 쓰고 보니 의외로 많은 분들께서 흥미로운 소재라고 말씀해주셔서 뿌듯합니다.

    정말 전공자들이 한번 분석해볼 소재같기는 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5/07/28 19:54 #

    @봉래거북님. 송양과 주몽의 마찰 기록 때문에 한반도 북부보다는 중국 동북지역이 더 의심이 됩니다. 당시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 소국들이 중국 동북지역부터 한반도 북부까지 폭넓게 산재되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서요.

    @역사관심님, 논문과 일은 그럭저럭 병행하고 있습니다. 올해 말과 내년 초가 고비일 듯 합니다. 역사관심님이 발굴해내는 자료들이 흥미로운게 한두개가 아니라 종종 들리는 제 입장에서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
  • 봉래거북 2015/07/29 15:42 # 삭제

    그렇군요. 전 요령에도 어느 정도는 한수군의 영향력이 제법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의외로 한사군의 현지 통제력이 미치는 범위가 제 생각보다 좁았던 것 같네요...
  • 역사관심 2015/07/30 16:16 #

    감사합니다 W.A. 님. 논문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년초에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5/07/30 23:17 #

    @봉래거북님, 한군현 문제는 이번 것과 달리 더 살펴볼 것들이 많겠지만...암튼 현재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한군현에 대해 그 위치를 떠나, 범위나 영향력면에서 이전에 알려진 것들과 다르다는 의견들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역사관심님, 네~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좋은 자료 발굴 부탁드립니다.
  • 無碍子 2015/07/19 13:30 #

    좀 늦은 감은 있는데요.

    灰以錮其縫(회이고기봉) : 재로써 그 이음매를 막았으며

    여기서 회는 재가 아니라 석회같습니다. 석재와 석재 사이를 공구리 친 거로 보입니다.
  • 역사관심 2015/07/19 20:04 #

    음 말이 되는 말씀입니다. 더 옳은 해석같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5/07/30 23:20 #

    고구려 횡혈식 석실분의 경우, 석회로 마감된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얼마전 재밌는 논문도 하나 나왔고요(제껀 아니고, 딴 선생님껀데 조만간 소개하겠습니다). 그걸 보면, 역사관심님이 소개해주신 위의 내용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내부에 와관이 있었다는 점인데...중국에서는 옹관과 와관이 혼용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아서 이 부분은 한번 제대로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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