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경회루 3층 추측 (추가글)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이번 포스팅은 뻘글까지는 아니지만, 예전에 쓴 글에 부합하는 내용을 추가하는 필자의 '감'에 의지한 글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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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임란전 3층 경회루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링크). 그 중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明日將登慶會樓上, 通望處立標, 標內公廨幾處、人家幾坐, 竝計以啓。
연산 57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3월 20일(을사) 
경회루에서 바라보이는 곳의 건물을 세어 아뢰게 하다    
전교하기를, “명일 경회루(慶會樓)에 오르려는데, 위가 바라보이는 곳에 표(標)를 세우고 표 안의 공해(公廨)가 몇이고 인가가 몇인지 모두 세워서 아뢰라.” 하였다.

공해(公廨)는 관가소유의 건물을 말합니다. 通望處立標 라는 뜻은 '위가 바라보인다'기 보다 툭 틔여서 통하는 곳에 표를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거리에 표를 세운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경회루 3층에 올라서 틔여있는 곳에 표를 붙여두고, 그 표안에 관공서들과 민가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측량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도성내의 민가와 관공서들의 숫자를 파악하려 하고 있지요.
1581년 기성입직사주도

경회루를 올라본 분들이면 아시겠지만, 현재 경회루 전각의 높이로는 아무리 여러 사항 (즉, 대원군대의 더 많아진 전각수, 현대의 고층빌딩들, 담장높이 등)을 고려하더라도, 즉 앞이 탁 트인 상태라 해도 담장너머 공공건물과 민가들을 일일이 셀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즉, 3층에 올라 세었다는 이야기라 필자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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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임진왜란 약 90년전인 1505년 연산군이 경회루에 올라 경복궁 밖의 민가수와 공공건물수를 세라는 명을 내리는 것으로 경회루의 높이가 현재의 2층보다 3층에 적합한 것이라는 논지를 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윗 포스팅을 쓰기 전부터 꽤 흥미롭게 보고 있던 비슷한 맥락의 글이 몇 점 더 있었습니다. 

그 글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우선은 조선전기의 문신인 한준(韓準, 1542∼1601년)의 집에 대한 글.

기언 별집 제16권
우참찬 청천군(淸川君) 한공(韓公) 신도비명

무자년(1588)에 성절(聖節)을 축하하는 사절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후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해서(海西) 고을에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고변한 일이 있어 그 공으로 자 헌대부(資憲大夫)에 특별히 가자되고 지중추(知中樞)에 제수되었으며 관찰사의 직임은 그대로 잉임하였다. 

얼마 후 우참찬으로 옮겼으며, 추충분의협책평난 공신(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그때 마침 두 아들이 진사시(進士試)에 함께 합격하여 문희연(聞喜宴)을 베풀었는데, 상이 경회루(慶會樓)에 있다가 집안의 불빛을 멀리서 보고는 그 연유를 물은 뒤에 곧바로 중귀인(中貴人)을 시켜 술을 하사하였으니, 그 총애의 정도가 이와 같았다.

[기언]에 나오는 이 글의 주인공은 한준입니다. 그는 선조 21년인 1588년 우참찬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가 되기도 한 인물이지요. 또한 임란직전 정여립의 난을 비밀장계로 올려 막아 2등공신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의 공으로 두번째 문단에 나오는 우참찬이 되는데 그것이 1590년, 즉 임진왜란 발발 2년전입니다. 

따라서 글중 나오는 선조가 경회루에서 한준의 집을 바라본 이 에피소드는 1590년이 됩니다. 아쉽게도 한준의 집이 정확히 경복궁바깥 어디쯤이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전기, 경복궁주변의 주택단지는 일단 백악산의 북쪽을 제외하고 전방과 좌우가 됩니다. 

보통 사대부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사이 지역, 즉 경회루를 정면으로 우측지역에 자리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경회루에서 가장 가까운 좌측지역은 중인이하 하급관리들이 살던 곳이죠. 따라서 좌측지역에 관찰사까지 지낸 한준의 저택이 있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육의전이 포진하고 있고 각종 주택이 있던 광화문앞 정면의 경우, 이전 포스팅에서도 살펴보고 필자의 경험상 현재의 경회루 2층에서 바라보았다면 주택들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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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개하는 두번째 사료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위치로 추정해 볼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손순효(孫舜孝)의 집 
남부 명례방(明禮坊) 상층(上層)에 있었다. 성종이 어느 날 저물녘에 두세 명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올라 남산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몇 사람이 숲이 드문 곳에 둘러 앉아 있었다. 성종이 그것이 순효인줄 알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가 두 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에는 오이뿐이었다. 임금이 술과 안주를 하사하니 순효가 손들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이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한준보다 약 120년전대의 인물인 15세기의 손순효(孫舜孝, 1427~ 1497년)는 성종과 매우 친밀했던 문신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이 기록을 보면 성종이 두명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에 올라, 남산쪽을 바라보는데 손순효의 집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집은 '명례방'이라는 구역에 속했다고 하는데, 이 곳은 당시 한양 5부중 남부에 속했습니다. 어디인가하면 지금의 명동와 충무로부근입니다 (남산 바로 앞동네들). 

한준의 집이 현재의 명동이나 충무로에 있었다는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글이 있는데 [명신록]에는 손순효가 “초정(草亭)을 남산 밑에 짓고 못을 파서 연을 심고서 날마다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스스로 즐겼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회루에서 명동을 바라보면 동남쪽이 됩니다. 아래지도를 보면 확실한데, 이 거리가 꽤 멉니다. 성종임금은 시력이 꽤 좋으셨나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명동쪽을 현재의 경회루 2층에 올라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의 나무는 없었다고 하고, 빌딩들도 지워주세요. 하지만 근정전이 당시에도 버티고 있었고, 멀리 남산이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시야확보로 저 남산 앞 명동부근에 있었던 손순효의 집을 볼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X 에 한표를 던지게 됩니다. 만약 한층이 더 있어 3층에서 근정전 위쪽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 모를까요- 글 서두에 나오는 기성입직도의 경회루와 근정전 높이비율처럼 말입니다. 

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 이렇게 경회루의 높은 곳에 올라 궁바깥의 '집'을 살피는 장면은 딱 이 세가지 기록 즉, 1400년대중후반, 1505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이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은 고종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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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조선전기 경회루와 관련된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우선 임란 직전 돌아가신 성리학의 대학자 율곡 이이 (李栗谷, 1536∼1584년) 선생이 전기 경회루에서 지은 시를 감상하시지요.

율곡선생 전서
경회루(慶會樓)에서 황 천사(黃天使)의 시에 차운하다

공중에 높이 솟은 누각에  迥入霄聳四阿 
주반 차려 놓고 사신 오기를 기다렸네  綠樽留待使星過
발에 떠오르는 아지랑이는 푸른 산을 둘러 있고  簾浮嵐氣圍靑嶂
못 가운데 얄랑거리는 달빛은 항아를 희롱하는 듯  池蘸蟾光弄素娥
두어 곡조 거문고 소리는 난간 밖에 들려 오고  數曲雲和軒外奏
만 그루 솔바람은 비 온 뒤에 많구나  萬株松籟雨餘多
밤 깊어 전각앞에 잔치가 끝나니  夜深前殿賓筵罷
은촉 사롱 불에 흩어지는 소리  銀燭紗籠散玉珂

첫줄에 나오는 '층'자와 마지막에 나오는 '각'을 합하면 '층각'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층각은 복수층의 건물을 뜻합니다. 건축적으로는 '이중처마'를 가진 건축을 뜻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지요. 앞서 소개한 [기성입직사주도]에 나오는 경회루처럼 말이지요.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흥미롭게도 아주 높은 건물을 뜻하는 '高樓百尺 (고루백척)'과 같은 형용구가 붙는 싯구는 전기의 경회루를 읊은 시에 몇번 등장합니다. 소개한대로 경회루에 올라 손순효의 집을 바라보시던 성종의 형님이자 시인인 월산대군 이정(1454~1488년)의 시처럼 말입니다.

속동문선 
경회루가(慶會樓歌)

이정(李婷)

백 척이나 되는 높은 다락이 중천에 비껴 / 高樓百尺橫天中
나는 듯한 기와와 복도가 하늘에 맞닿았네 / 飛甍複道連穹崇

아로새긴 난간, 수놓은 서까래에 운무가 겹쳐 있고 / 雕欄繡桷雲霧重
금설주, 옥기둥에 빛깔이 으리으리 / 金楹玉柱光朦朧
다락 앞에 머리 드니 사면이 탁 틔어 / 樓前矯首四望通
남산ㆍ북악에 가기가 서리었네 / 南山北岳佳氣葱

어구 앞에는 풀이 더북더북 / 御溝前頭草蒙茸
푸른 숲, 푸른 나무가 향풍에 흔들리네 / 靑林綠樹搖香風

천 그루 버들엔 연기가 자욱하고 / 千株楊柳煙濛濛
백 군데 연못에는 연꽃이 깔렸는데 / 百面池水含芙蓉
물고기랑 물새들이 조용히 즐겨 노니 / 沈浮翔集樂從容
때와 물건 서로 맞아 마음도 화락해라 / 時物適矣心和雍

아침 해 올라올 때 상감께서 나옵시니 / 重瞳屢御旭日東
어좌의 곤룡포가 찬란하게 붉을씨고 / 黼座赭袍生爛紅

사문이 열리자 정사를 시작하옵시니 / 四門初闢開宸聰
무도하는 신하들 모두 다 보국의 현신 / 群臣舞蹈皆夔龍
풍운이 경회하여 즐거움이 같으니 / 風雲慶會樂相同
천재 명량이 이곳에서 만나네 / 千載明良此處逢

만세를 삼호하여 남산수를 비옵고 / 萬歲三呼祝華嵩
황금보다 더 짙은 수주를 드리면서 / 拜獻壽酒黃金濃
천지ㆍ일월과 함께 성수무강하옵소서 / 天地日月同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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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언급한대로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과 상상이 난무하는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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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응가 2015/08/03 00:22 # 삭제

    경회루에대해서는 참 궁금한것이 임란후 경복궁이 파괴되고 경회루는 용과 꽃이 조각된 돌기둥이 부숴진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전해지고 또한 그림에도 많이 남아있는데, 이 돌기둥은 어디로 갔을지가 상당히 궁금합니다. 영제교와 섬세하게 조각된 천록들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경회루 돌기둥은 경복궁 중건을 하게 되면서 어디로 갔는지 전혀 감을 잡을수가 없습니다. 탁본이나 그림이 전해진다면 3층의 경회루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데 도움이 되었을텐데요.
  • 역사관심 2015/08/04 02:06 #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정말 그렇군요. 용기둥이 한부분만 온전하게 나와줘도 충분히 재건이 가능할 텐데 말입니다.
  • 평론가 2015/08/03 18:45 # 삭제

    서총대 높이도 100척이였는다는데 당시 누각 사이즈를 알만한 정보군요. 30미터 정도 되는 크기였군요. 개인적으로 3층디라고 해도 통층인줄 알았는데 올라가도록 설계했나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8/04 02:09 #

    사실 저도 처음에는 저 기록을 근거로 높이를 상정해보려 했는데 (말씀대로 30미터면 적당한 높이이기도 하구요- 3층전각으로), 고루백척이라는 말자체가 높은 누각을 일컫는 관용구로 쓰인 감이 강합니다. 서총대의 경우 '대'라서 10척으로 알고 있는데 다시 확인해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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