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건축을 솔직하게 담아낸 최초의 한국건축 대중서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김동욱 저 2015) 한국의 사라진 건축

김동욱 교수님의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은 불과 석달전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집어들고 구입한 책인데, 그럴 가치가 있었다. 김동욱 교수님은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을 지내셨고 현재 경기대 명예교수로 있는 원로이시다.
무엇보다 가장 의미있는 것은 이제까지 조선시대의 건축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이전의 건축에 대해 같은 안경을 끼고 바라보거나, 혹은 조선시대를 포장하는데 그친 것이 대부분의 한국전통건축 저서들 (혹은 한국학에서 다룬 책들)이었다면 이 책은 필자가 평소 다루고 있는 조선중기이전의, 즉 현대의 한국이 전혀 보유하고 있지 못한 (또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건축양식미를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한양대 한동수 교수님의 논문들의 맥락에서도 최근 들어 이런 솔직함이 보이고 있어 기쁜데 이러한 '인정'에서부터 우리의 전통건축의 잊혀진 미학을 되살리는 작업은 첫 단추가 끼워질 것이라 사료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54-59쪽의 '조선시대 목구조 기술의 쇠퇴'부분으로 그중 일부만을 발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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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건축은 2,000년 이상 긴 시간을 목조를 기본으로 해서 전개되어 나갔다. 이 시간 동안에 동아시아 목조건축은 다양한 구조적 창안과 기술 고안을 통해 갖가지 사회적 건축 수요에 부응해서 경이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각각의 시대 변화에 따른 정치권력의 요구와 종교적 열정은 그 원동력이 되었으며 각 시대 기술자들은 최선을 다한 노력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선시대는 사회적 건축 수요와 기술자의 대응 어느편에서나 쇠퇴 측면을 드러낸 시기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의 왕권은 몇몇 국왕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견제와 비판에 휘둘리어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역대 국왕들은 자신이 머무는 궁전을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지만 번번이 국와 스스로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사회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 역시 절약을 강조하는 유교의 덕목을 실천에 옮겨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사치스런 집을 짓거나 화려한 치장을 한 건물을 기피했다.

또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화려한 치장과 장대한 규모, 금빛 찬란한 장식 가득했던 불교건축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지배층의 외면 속에 퇴락을 거듭해나갔다. 겨우 서민들의 시주와 승려 스스로의 자구 노력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이런 여건에서 독창적인 창안이 넘치는 눈부신 건축의 출현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지어지는 건축은 최소한의 규모와 가급장 치장을 억제한 평범한 모습으로 이전의 형태를 답습하는 데 그쳤다. 

명청대 중국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황실과 관련한 건축을 다른 어떤 유형보다 우월하고 장대한 것으로 꾸미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략. 이를 위해서 황실 내에는 전문적으로 황실 건축을 설계하고 그 공사비용을 체계적으로 산정하고 이를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 건축전문가 집단이 존재했다. 후에 양식뢰라는 별명을 얻은 뇌씨집안이 그 과업을 맡았으며 뇌씨 일족은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고도의 건축술을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었다.

15세기 무럽부터 지방 각지가 분열되어 전란을 거듭하던 일본열도는 16세기말에 와서 드디어 통일을 보고 전국을 통일한 통치자는 전권을 손아귀에 쥐고 자신의 열망을 담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건축을 짓도록 했다. 전국통일을 달성한 오다 노부나가는 거성 아즈치성에 7층의 누각을 갖추고 누각내부는 금빛 찬란한 치장으로 채웠으며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후시미 성 역시 화려한 치장과 현란한 조각으로 빛났다. 이들의 과장된 건축 욕망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한번 정점에 도달한 건축 기술은 다른 곳으로 전파되어 일본열도의 전반적인 건축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통치자의 곁에는 이러한 과장된 건축을 계획하고 시행에 옮기는 전문장인집단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역시 대를 이어 후손들에게 자신들이 터득한 기술을 전승해나갔다.

이런 움직임에 비해 조선왕조는 유교로 무장된 양반들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었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과장된 자기과장을 하려는 지배자도 없었다. 그 때문에 도시에는 랜드마크가 될만한 돋보이고 독창적인 건축이 없었고 특별한 상징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주: 현재 중국, 일본등의 여타 아시아국가에 비해 우리 각 고도들에 거대미를 갖춘 랜드마크 전통건축의 심각한 부족은 물론 근대화의 영향도 있고 전쟁도 전쟁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임진왜란 이후 이어진 이러한 소극적인 전통건축 시도에도 그 지분이 있다). 불교 사원 역시 어려운 재정 여건과 탄압속에서 화려한 치장을 한 건물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존사례를 본다면 화엄사 각황전이나 금산사 미륵전이 그나마 규모가 크고 지붕 구조가 복잡한 정도였으며 고층 건물로는 법주사 팔상전이나 쌍봉사 대웅전을 들 수 있다. 이들 건물의 구조는 특별히 새로운 면모를 보이지 않으며 지붕 구조등도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여 새로운 기술 창안은 엿보이지 않는다. 중략 (19세기에 지어진 인정전과 근정전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설명한 후).

새로운 기술 창안이 요구되지 않는 여건에서 기술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 때까지만 해도 나라의 주요 건축을 책임 맡은 기술자는 정3품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1447년 숭례문을 수리할 때 공사를 주관한 대목은 정 5품 무관직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종대 다시 수리할때도 대목의 지위는 정 3품 무관이었다 (주: 1961~1963년에 시행된 해체 수리시 발견된 묵서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기술자들에게 주어지는 관직 수여는 양반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나날이 커지는 신하들의 목소리는 급기야 건축 기술자들이 관직에 오를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17세기 이후 건축장인들은 소수만이 군영과 관청에 소속되어 관리들이 정해놓은 작업 범위안에서 창의성을 가지지 못하고 한계를 가진 상태에서 기량을 발휘하는데 그쳤다. 불교사원의 경우에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사이의 사원의 신축이나 수리에 종사한 승려출신 장인들은 선사 또는 대선사와 같은 특별한 법계를 지니고 대목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7세기를 지나면서 승려장인들이 특별한 법계를 지니는 사례는 거의 사라졌다. 중략. 관청에 속한 장인들이나 승려장인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순수한 민간인 장인들이 나설 입지는 많지 않았다. 이들 민간 장인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이나 되어서나 가능했는데, 이들이 영업 조직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건축 활동을 펼쳐나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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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분명히 해 둘 점은 이 책은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책이 결코 아니란 점. 소개한 부분을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여타책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미를 조화시킨 조선건축 특유의 미학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소개한 부분은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건축문화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국한시켜 논의할때는 사회적인 유교의 도덕성이라든가,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든가 하는 점을 제외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논지로 필자는 크게 동감한다 (이러한 예는 유럽의 랜드마크 건축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한 부분을 걷어내고 평가할 때, 어떤 의미에서건 국뽕 (그것이 조선에 대한 것이건 vs. 그 전대에 대한 것이건) 식의 색안경을 벗고 혹은 포장지를 벗겨내고, 진정으로 (말 그대로 진정으로) 삼국과 고려시대의 거대건축군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흥미'가 생겨날 수 있다. 다시 언급하지만 조선시대건축과 고려시대건축의 단절과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찬란한 미학'도 조선이전의 또다른 우리의 미적감성이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출판된 저서에서 (넷상이 아닌) 다른 필자가 만난 최초의 저서라는 점에서 아주 의미깊다.

또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의 '수종' (목재)의 종류가 달랐음을 자세하게 설명한 거의 최초의 일반대중서가 아닌가 싶다. 덧붙여 매우 인상적인 부분으로 일본, 중국과 달리 '뒤틀린 목재'를 쓰는 조선중기이후의 전통건축을 포장해서 바라보는 시점을 버리고 (자연미라든가 하는 식으로), 목재의 부족으로 일어난 것으로 설명하는 부분 역시 백미다. 일부 발췌해 본다:

조선초기가 되면 (농경지 확장등으로 인해 느릅나무나 느티나무가 사라지면서) 이미 다른 수종은 거의 고갈되어 활용할 수 있는 대상에서 벗어났고 궁궐을 짓거나 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는 거의 소나무 일색이 되어 있었다. 그 소나무 역시 특별한 보호가 없으면 머지않아 모두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중략.

소나무 한 종류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합성재 개발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조선 후기 건물은 재료 수급측면에서 제약이 많았다. 그 결과 곧게 자라지 않아 건축용재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무를 억지로 이용해서 건물을 짓는 일도 잦았다. 자재 수습이 원활하지 않았던 영세한 불교 사원이나 민간에서 사정이 특히 나빴다. 지금도 산간의 불교 사원에 가면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살려 기둥을 세우거나 대들보를 올린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서까래는 반듯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인 집도 많다. 그나마 궁궐은 비교적 반듯한 목재들을 구해서 건물을 지은 편이지만 목재 수급이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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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씀드리자면 오류도 있으며 (우리나라 목조탑과 관련한 기록물에서 사람이 올라갔다고 단정할 만한 내용이 확인된 바 없다는 부분- 황룡사 목탑은 물론이고 앞으로 곧 포스팅할 연복사 목탑에 올라 지은 시가 많이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누각을 다룬 부분은 필자가 다룬 다른 형태의 가능성이 있는 고려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전형적으로 조선시대 형식만을 설명하는등 한계도 있지만, 여러모로 복원및 재건, 그리고 한국전통건축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시각을 담은 저서라 생각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나 저서가 많이 나와서 기존의 답습적인 연구나 시도외에 혁신적인 통시적 한국 전통건축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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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레이오트 2015/08/05 12:24 #

    뒤틀린 목제를 건축에 쓴 것에 대해 자연미다 뭐다 한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때 그 시절에도 그러지않았나 싶었네요. 쉽게 말해서 곧은 목재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체면 지키려고 자연미가 어쩌고 하는 드립을 공공연히 치고다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건 몰라도 역사적으로 금욕주의는 수많은 기술과 기교와 미적 요소에 대해 최강최악의 적이지요.
  • s와경제 2015/08/05 21:30 # 삭제

    건축학적 미감에서는 뒤틀린걸 가지고 뭔 드립을 쳤다가 아니고 그 뒤틀림을 건축적으로 어떻게 소화했느냐가 중요할 뿐이죠
  • 역사관심 2015/08/06 22:46 #

    당시 기록을 직접 살필 수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목재가 조선특유의 미학으로 발전도 했으니... 결국은 결과론이겠죠 이런 부분은 (하지만 실젝로 현재의 '결과'가 훨씬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다는).
  • 쿠사누스 2015/08/12 21:26 #

    유교적 금욕주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봐야합니다.
    한정된 자원을 지속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서는 일단 지배층의 금욕주의적 도덕의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 지배층의 금욕주의적 도덕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이스텀섬의 예라든지, 중국 상나라 시대의 그 살벌한 인신공양의 사례에서 추측할 수 있죠.
    물론, 조선은 오백년내내 금욕주의를 강조하고 여러 법률과 제도로 자원을 관리하려고 애썼으면서도 결국은19세기에 접어들어 삼림황폐, 지력고갈로 쇠망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안습이지만 말이죠.
  • santalinus 2015/08/05 12:35 #

    윤리적 이상이 예술의 미학을 특정 방향으로 강요하는 것은 참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존재한달까요....
  • 역사관심 2015/08/06 22:47 #

    동감합니다. 정도 차이가 중요하긴 하지만요. 어느시대고 '풀어주는'시대에 예술이 발전하는 것도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작금의 게임산업도...
  • s와경제 2015/08/05 21:28 # 삭제

    1.첫째는 부나 신분의 세습층이 왕족을 제외하면 존재치 않았고
    2.양천제로 인해 노비를 제외한 모두에게 신분상승인 과거가 허용되었기에
    유고체계의 내면화가 일반에까지 광범위하게 통용된 점
    3.이런 상황에서 16세기부터 소빙기적 기후변동이 시작되서 19세기말무렵에나 그친다는 점
    이 주요한 이유일듯 하고

    조선초기 농경지가 확장되면서 수종의 고괄은 그래도 전 국토의 70%가 산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도대체 어떻게 알수있는 사실인지 갸우뚱 하군요 더군다나 산림의 화폐라 명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삼남지방의 문제이지 북한에는 입방미터당 100이상을 하지하는 광범위한 수림지대가 존재했기에 ,물론 그걸 함경에서 공수할만한 경제력을 가진 세력이 1~3의 상황으로 가능했을지는 의문이지만.
  • 이 감 2015/08/05 22:58 # 삭제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조선 후기까지도 북쪽지역의 읍성 건축들이나 공공건물들은 남쪽지역의 읍성 건축물들과 공공건물들보다 다채롭고 규모도 더 크고 그럽니다. 아마 남쪽보다 여유롭던 목재수급과 비교적 더 중시한 북방방어와 지형의 형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
  • 역사관심 2015/08/06 22:28 #

    요즘 이런 분야의 논문들도 꽤 활발하게 나오더군요. 직접적인 자료도 언제 한번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 행인1 2015/08/05 22:24 #

    조선시대에 랜드마크가 될만한게 지어졌다면 그동안 조선시대에 아무것도 안 만들고 뭐했냐는 분들이 태세전환하여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이런거나 짓고 앉아 있었다니!"라며 입에 하이타이 물고 떠들게 안봐도 블루레이인지라...
  • 역사관심 2015/08/06 22:47 #

    졸견입니다만, 사실 이래도 불평 저래도 불평할 여지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정도 동감합니다. 다만, 그런 식의 태도는 분명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이 투영된 결과일 뿐이라 생각하는지라... 현재의 한국사회가 행복하게 된다면 사라질 태도같기도 해요.

    (국뽕사절님, 귀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제 블로그에서는 일단 비속어가 좀 강한 멘트는 자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단 댓글은 지웠습니다. 의견을 조금 정제해서 올려주시면 훌륭한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 零丁洋 2015/08/06 21:52 #

    조선시대 상황에서 거대 건축물를 축조하는 기술이 경험과 기회의 부족으로 낙후한 것은 사실이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확히 말하면 거대 기념물은 사람이 못만드는 것이 아니라 않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3국의 건축 기술 비교는 그렇게 의미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비교할 점은 어떤 현실을 반영했고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향했는가라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8/07 02:33 #

    음, 본문에서 썻듯이 물론 말씀하신 부분에서 조선후기의 미학도 돋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말씀대로 중요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것에도 당연히 한표를 던집니다. 또한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한 애민정신등은 건축기술이라는 분야와 독립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매우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다만, 오늘 소개한 부분은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랜드마크 건축의 경우 (제 블로그의 큰 축이기도 하지만) 한 문화권의 영향력과 인상을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고 있기에 졸견이지만 중요하게 보는 쪽입니다.

    특히 외국인들의 경우, 선술어적인 시각으로 한 문화권에 대한 인상을 반영하는 것이 우선이기때문에, 그러한 화려한 건축과 문화가 훨씬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당연히 부인할수 없습니다 (또한 해외에서의 시각은 우리가 '왜' 그러한 건축을 지향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극히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곤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않겠지요. 그건 거꾸로 우리도 해외의 건축문화에 대한 일반적태도에서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그 이후 그 문화권의 사상을 포함한 형이상학적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수순이라 생각해요.

    언젠가 소개할 예정이지만 그러한 좋은 예가 얼마전 역사건축학계지에서 발표된 바 있습니다 (조선말기에 미국의 건축가가 한중일 건축을 완전히 처음 보면서 평가한 부분을 전문 번역 공개했죠. 그 시각은 아주 솔직한 시각으로, 100년이 지난 현재의 3국 전통건축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과도 거의 같습니다. 현재 한국전통건축의 세계건축학계에서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에서도 최하위 레벨로, 전반적인 국가역량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낮은 인지도를 보여주는데 이에 대한 논고가 최근들어 학계에서 꽤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의 아주 큰 축이 고대-중세의 장대하고 화려한 미학을 갖췄던 건축들의 소멸로 보고 있습니다. 그건 조선시대 특유의 미학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갖추어야 할 우리 문화의 잊혀진 한 축이라 생각하고 있구요. 특히 우리 대중들에게 이러한 문화와 또다른 한국미가 완벽하리만큼 잊혀진 상태에서 발굴해 내지 않은채로 비교적 많이 남아있고 접근성이 쉬운 조선후기의 미학만을 답습하고 있는 점은 반드시 개선되야 할 혹은 거꾸로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분야로 보고 있습니다.

    항상 고견 감사드립니다.
  • 봉래거북 2015/08/06 23:10 # 삭제

    일견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뒤틀린 목재 사용은 사족을 안 달 수가 없네요.
    일단 뒤틀린 목재 사용시 거의 항상 언급되는 도랑주는 원래가 나무 껍질만 벗겨서 쓰는 물건인지라 뒤틀린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예로 곧은 나무를 그대로 쓴 전남 구례 화엄사 요사채 도랑주나 장수향교 도랑주는 곧습니다.) 굽은 도랑주/부재가 주류로 등장하는 건 1700~1800년대 이후부터고, 이 시기 이후의 도랑주도 위봉사, 갑사, 현등사, 귀신사, 군자정, 거연정, 쌍벽당 등은 곧은 도랑주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목재 부족의 이유만이라면 송광사 해청당이나 쌍계사 대웅전 칡넝굴나무 기둥처럼 곧은 부재만 토막내 이어 기둥을 만들거나 이진가옥 아랫채 기둥(http://blog.daum.net/dud9202/640), 금산사 미륵전 내부 기둥처럼(http://www.hanokschool.biz/community/library.asp?code=&subp=&mode=&bbsid=library&gbn=viewok&cate=&ps=12&sp=&sw=&gp=1&ix=3577 개보수 전입니다. 내부보수 후에는 안가봐서 지금은 기둥이 바뀌었을지 모르겠네요) 여러 부재를 철물 등으로 결합해서 기둥을 만드는 게 재료 문제 면에서도 더 경제적이죠.
  • 봉래거북 2015/08/06 23:10 # 삭제

    그리고 17~18세기에 들어서면 일본 민가건축에서도 굽은 부재의 사용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굽은 목재사용이 우리나라가 본의 아니게 선전(?)을 잘 해서 한국 건축의 고유한 것마냥 굳어진 측면이 있지만, 빈도와 규모 차이가 있을 뿐이지 주변국에서는 전무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우리와 같은 시기 목재가 부족해서 그랬나 하면 일본은 한국보다 이른 중세시기부터 목재부족을 겪어 켤톱이 널리 보급되고(켤톱 보급 이전의 일본에서는 나뭇결에 따라 끌이나 쐐기를 박아넣어 나무를 쪼갰는지라 건축에 쓰이는 나무는 나무결이 곧고 연한 노송나무나 삼나무 위주였고 재료낭비도 많았지만, 켤톱이 보급되면서 재로 낭비도 줄고 단단한 소나무, 느티나무 등도 쓰이게 됩니다.) 건축부재에서 최대한 목재를 절약하려는 풍조가 나타납니다. 단순히 목재 부족만으로 도랑주가 퍼졌다고 보긴 힘듭니다.
  • 역사관심 2015/08/06 23:55 #

    음 그런 측면이 있었군요. 어떻게 보면 고유섭, 최순우선생등의 후대의 시각이 투영된 결과도 있을수 있겠네요. 목재부족외에 정말로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말씀하신 철물을 이용한 결합재의 경우, 본 저서에서는 조선시대에는 시도된 바가 없다고 되어 있더군요.
  • 봉래거북 2015/08/06 23:28 # 삭제

    개인적인 취향 문제지만, 전 한국건축의 아쉬운 점이라면 지나치게 복잡하고 화려한 공포/첨차 구조보다 동남아 건축처럼 간결한 까치발을 같이 사용했으면 목재 소모나 중량 문제, 하앙의 퇴조 문제에서도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갑사 대웅전 풍판 안쪽이나 중국 한대 녹유누각(http://blog.daum.net/kelim/15715279)을 보면 안 쓴 건 아닌데, 아무래도 동북아 전통 목조건축에선 동남아보다는 까치발 사용이 적더군요.
  • 역사관심 2015/08/06 23:59 #

    동남아건축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과연 중량문제에서 확실히 도움이 되었을 듯 합니다. 저는 일본특유의 (당장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데) 지붕밑에 공간을 만들어주는 길게 빼는 방식이 한반도에 발달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다양한 형식의 지붕과 웅장미가 더해졌을 것 같아요.
  • 봉래거북 2015/08/07 01:06 # 삭제

    철물을 사용한 결합재가 없었다니요? 정말 본문에 그렇게 나옵니까? 하앙의 퇴조 이후 이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처마 자재를 내부에서 철이나 강다리라는 나무 부재로 묶는 건데요. 한국건축의 개설서인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링크한 금산사 미륵전의 경우 목재 부재를 연결하는 철물이 사진에 있긴 한데 전통건축에서 사용하던 게 아닐지는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일본의 건축부재는 하네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근데 그걸 쓰면 지붕처마를 내부에서 받쳐주는 자재들과, 그것을 고정하는 하네기의 크기와 자체중량이 엄청난지라 하네기를 쓰면 그게 자리잡을 공간이 필요한지라 그만큼 지붕이 크고 높아질 수 밖에 없고, 하네기가 있을 자리가 최우선이다 보니 다양한 디자인은 오히려 힘들지 않을까요.
    당장 기하학적이고 다각형인 지붕을 자랑하는 중국 건축을 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하앙조차 쇠퇴해 사라져 버립니다.
  • 역사관심 2015/08/07 02:27 #

    확인해봐야겠지만, 분명 없었다고 나온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지붕이나 왠만한 부재가 아니라 동대사처럼 기둥부분의 대규모 목재를 결합한 시도가 없었다고 나온 예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즉, 대규모 목재의 부족함을 메꾸려는 기술적 시도가 없었던 것이라는 맥락이었지요.

    하네기 맞습니다 ^^ 말씀듣고보니 오히려 하앙이 발달했다면 더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드네요 (한동수 교수님의 2009년 논문을 보면 하앙이 왜 발달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어 그 이유를 아직 잘 모르는 듯 합니다).
  • 봉래거북 2015/08/07 01:13 # 삭제

    금산사 미륵전의 문화재청 글(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1,00620000,35)과 다른 글과 사진(http://blog.daum.net/migiro/872)을 봐도 철물이 근현대의 것이라는 말은 없네요. 문화재청 글에서 기둥 구조가 특이한 경우라고는 하지만.
  • 역사관심 2015/08/07 02:20 #

    미륵전의 부재에 이런 구조가 있었는 줄 몰랐습니다.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
  • 봉래거북 2015/08/07 12:32 # 삭제

    http://portal.nrich.go.kr/kor/originalUsrView.do?menuIdx=591&info_idx=1966&bunya_cd=430
    ㄴ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전통목조건축결구법 이라는 자료집입니다. 읽어보시면 한국 건축 기둥에서 다른 부재끼리 이음으로 짜맞추어 만드는 자료들이 많이 나옵니다. 정연상 저, 맞춤과 이음(http://blog.naver.com/hanmun2014/220210029471)이라는 책도 참고가 될 수 잇을 것 같네요.
  • 봉래거북 2015/08/07 12:40 # 삭제

    뭐 일단 위 국립문화재연구소에도 나온 덕수궁 대한문 수리의 경우 근래에 있었다는데(http://gibumi.tistory.com/225) 자료집대로라면 수리 이전 대한문에도 장부촉 이음은 있었던 것 같네요. 자료집에 근래 수리 때 처음 장부촉을 넣었다는 말이 없으니...
    사실 고연령 교수님들이나 교수님이라도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쪽에 대해서는 시대에 안 맞는 설이나 미흡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문제는 저 책 저자분은 자신이 추천사를 쓴 책인 한국건축용어사전의 내용과도 상충되는 내용들을 실었으니... 뭐 추천사라는 게 대충 형식적으로 써 주는 경우가 많다지만 좀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네요.
  • 역사관심 2015/08/08 02:52 #

    좋은 정보 잘 보았습니다. 위의 결구법 자료는 아주 좋네요- 다운받았습니다^^

    음, 김동욱교수님의 이부분에 대한 원문을 언제 다시 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부분만을 소개하다보니 오해가 있을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제 기억에 이 기둥목조결구법에 대한 설명은 목조를 잇는 결구법자체의 부인이라기보다는 '대규모 목재를 써서 만들수 있는 장대한 기둥 (동대사같은)'의 부재를 설명하면서 목재부족이라는 한계상황에서 그런 시도자체가 조선시대중반이후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맥락같아요.

    하지만 의사도 그렇고, 교수도 그렇지만 말씀대로 전문분야가 아닌 쪽은 개괄서를 펴내면서 확실히 오류가 생길수 있는 듯 합니다 (포스팅 본문에서 언급한 '사람이 올라가는 목조탑'에 대한 오류도 있었구요).
  • 봉래거북 2015/08/07 12:49 # 삭제

    제가 말한 한옥 부재 중 강다리는 여기서 실물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oineksn/220201537366
    링크글이나 한국건축용어사전에 보면 처마를 고정시키려고 강다리나 철물(검색하다보니 이음용 철물을 띠쇠라고 부른다는 게 나오네요) 돌을 끼웠다는데, 이런 것들이 하앙과 경쟁하다 없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4679&cid=42671&categoryId=42671
    http://blog.daum.net/cpubang/15898481
    ㄴ여기 글들을 보니 한옥도 약한 곳(동자주 등)에는 띠쇠로 고정한다고 하네요. 근데 그래도 어느 정도 처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네요;;;;
  • 니쿠네이무 2015/08/07 13:24 # 삭제

    이건 그냥 큰 관계는 없이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보통 조선 건축을 까면서(사실과는 상관없는 경우도 이따금 있죠) 나오는 소리가 작아, 똑같애, 요 두가지인 듯 싶은데 저번에 조선건축과 한국 고중세 건축을 비교한 포스팅을 보니, 어디 하나가 죽는게 아니라 조선건축의 미학은 미학대로, 고중세의 건축은 건축대로 살아나듯 보이는게 꽤 인상적이였습니다. 
    뭐 우리나라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대물 컴플렉스만 해결되어도 조선미학에 대한 지나친 폄훼도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만 이걸 어디부터 해결해야하는 걸까요..


  • 역사관심 2016/01/11 02:55 #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 할거 없이 모두 소중한 우리문화인데, 어느 시대는 폄훼하고, 어느시대는 찬양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같습니다.

    다만, 현재의 한국사회는 개인적으로 모든 문화담론이 접근성에서 용이한 (그리고 선각들의 '관'에 힘입어) 조선후기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어, 그 부분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 그 균형을 맞추지 않는한 세계에서 주요문화권으로 발돋움하기에 힘들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물 컴플렉스 역시 그 시기의 한정된 미학으로 당연히 생겨나는 (날수밖에 없는) 문제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랜드마크격인 고대-중세 건축물의 재건에 한표를 던지는 쪽입니다. 이미 많은 해외의 예도 있듯 재건되는 '과정'자체를 담론화하고 치밀하게 다뤄낸다면 100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문화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보고 있지요.

    그렇게 통시적인 한국문화가 재정립되고 활발하게 살아날때, 조선특유의 미학 역시 지금처럼 일부는 무조건적으로 (해외의 시각과 관계없이) 찬양하거나 거꾸로 말씀처럼 무조건 비하하는 행태도 없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균형잡힌 문화담론이 이뤄질때 이런저런 쓸데없는 시대별 공격이라든가 폄훼도 없어지면서 시대별 미학이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제대로 된 건설적인 평가를 받으리라 예상합니다.

    그 중요한 첫단추가 현재 첫단추를 끼운 경주의 황룡사 재건이겠지요. 월정교복원보다 훨씬 치밀한 담론과 과정공개를 통해, 많은 학술적 성과가 쌓이는 기회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다가서는 재건이 되어야 셋트장이 아닌, 진정한 고대건축의 재건의 결과로 중요한 한 발자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감사 2015/10/15 10:53 # 삭제

    역사관심님 글과 댓글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역사관심 2015/10/15 22:37 #

    힘이 나는 말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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