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폭력승려들- 만불향도 (그리고 조선중기의 당취 (땡추)) 역사

올해 초 '무武'에 능했던 고려승려들'에 대한 글 두편을 썼었습니다. 당시 글 말미에 '폭력집단'으로 변모한 고려승려에 대한 이야기도 쓴다고 이야기해놓고 이제서야 올립니다.

순서대로:

요즘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장삼을 걸친 느긋한 모습'으로 지내다가 소집되는 느낌의 승려군은 사실 맞지 않는 연출로 보입니다. 유교의 억압을 받기 이전의 긴 역사동안의 한국역사의 승군은 최소 8세기-13세기 (그리고 다시 16세기말 임란때도)에 걸쳐 수백년간 관군만큼이나 강한 무력을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살펴보았듯 갑옷으로 중무장한 승려군도 있었으며 대부(대형도끼)와 활, 검등으로 제대로 무장한 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현재 드라마에서 보인 적이 없지요).


한국불교의 무武에 대한 이론

한국 승가에서 무력은 대표적으로 호국불교라는 이름아래 국가를 지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호국불교의 배경으로 통일신라- 고려대의 무력을 갖춘 사찰의 호위승군집단에 대해 알아보았었지요. 이러한 호국불교의 배경이론을 조금만 살펴보자면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7-8세기 승려인 의적은 무력에 대한 이론체계를 해석해 내고 있습니다. [범망경 제10 불축살생구계]에 대해서 “왕, 왕자 등의 귀인들은 외환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기를 지녀도 되고, 평민들도 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지녀도 되지만 살생만은 삼가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어, 살생도구를 승가를 포함한 평민들의 집에서 보관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승려인 태현 역시 같은 경전인 [범망경 제10 불축살생구계]를 설명하면서 “가벼운 죄를 범한 자라도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재가신도가 무기를 지녀도 죄가 되는 바 없다.”라고 하고, 또 제11 통국사명계를 설명하면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아가 살생하면 안 되지만, 싸움을 조복하고 중지시키기 위해서 나라의 일을 맡는 것은 죄가 없다.”라는 해석을 합니다.

신라고승들의 이러한 해석을 보면, 삼국전쟁을 막 마친 당시 남북국시대의 초창기 통일신라에서 '무'에 대한 인식이 승가를 포함한 일반 여염집에서 어떠했는지 잘 엿볼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의 수호를 위한 무력의 정당성을 확보해 가던 신라후기의 불가는 적어도 9세기경이 되면 (즉 호족의 지역패권다툼이 본격화되는), 스스로의 대규모 부를 축적하고 있던 대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삼보정재(三寶淨財)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속인으로 구성된 일종의 사찰방위대를 편성하게 됩니다. 이 집단이 '승군'이 되며, 앞서 살펴본 거란군을 격퇴시켰다는 설이 나오는 고려시대 '재가화상집단'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특히 고려대의 불교무인집단은 단순히 호국불교가 아닌 호족 귀족집단간의 후원을 받으며 귀족 파벌간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투입되게 됩니다. 고려 광종(925~ 975년)대에 승록사, 승과, 승계등의 체계적인 관리가 만들어져 국가에서 관리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던 '승군'은 윗문단에 언급한 1010년 고려-거란 전쟁에서 역사상 최초의 정식징발을 거쳐 대승을 이끌어 냅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 지채문(智蔡文) 장군이 승려 법언(法言)과 함께 9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적군을 공격하여 3천 명을 죽였고, 대장승려인 법언은 전사하게 됩니다. 이 전투의 성과는 이로부터 94년 후인 윤관의 여진정벌대의 그 유명한 '항마군' 탄생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13세기의 대몽항쟁기에도 자기의 사찰을 지키는 것은 물론, 관군과 함께 대규모 전투에 흔하게 투입됩니다. 

그 상징적인 두 전투로 1232년 고려 승려출신 김윤후가 몽고의 명장 살리타이를 활을 쏘아 사살해버린 장면과, 1254년 황령사 승려였던 홍지는 신궁의 레벨의 사격술로 적장및 정예군을 사살, 적군의 과반수를 전사시킵니다. 이 기록이죠:

고려사절요
○ 겨울 10월에 (몽고군)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황령사(黃嶺寺) 승려 홍지(洪之)가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러나, 항상 무엇이든 차면 넘치는 법. 이렇게 '무'를 쌓아가던 고려후기의 승려들중 일부는 정치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폭력'집단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하는 부분은 주로 이 지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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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헤이(僧兵)- 14세기

9~11세기 술마시는 화려한 복장의 승려들

통일신라대인 9세기부터 이미 조짐을 보이던 폭력성은 다음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의 사료들에 보이듯 고려후기 '만불향도'로 일컬어지던 폭력승려단의 존재를 탄생시킵니다. 기록은 9세기부터 순서대로입니다.

○ 향(鄕)·부곡(部曲)·진(津)·역(驛) 및 양계(兩界) 주진(州鎭)의 편호인(編戶人)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한다.
○ 개경과 지방의 돈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빚을 진 가난한 사람을 강제로 데려다가 노비로 삼아 부리는 일을 금지한다.
○ 승려가 여염집에 머물러 묵는 것을 금지한다.

우선 승려의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편호인, 즉 호적에 편입되어 있는 민간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가 '여염집'에 머물던 당시의 세태를 금하고 있습니다.

성종 원년(982) 6월. 정광(正匡)38) 최승로(崔承老)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승려들이 군현(郡縣)을 쏘다니느라 관(館)과 역(驛)에서 묵으면서 영접과 물품제공을 제대로 못한다고 그곳에 근무하는 관리와 백성들을 매질하며 꾸짖는데 관리와 백성들은 그가 어명을 받고 온 것으로 착각하고서 겁을 내어 감히 말도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금후로는 승려들이 관·역에서 숙박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폐해를 없애도록 하십시오.

민간 풍속에 선(善)을 심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저마다 소원에 따라 절을 짓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습니다. 또한 전국의 승려들이 남에게 질세라 온갖 건축물을 만들면서 널리 주군(州郡)의 장리(長吏)들을 꼬드겨 백성을 징발하여 부리는데 공역(公役)보다 더 급하게 재촉하는 통에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982년, 고려초기 승려들이 (무려) 관리를 포함한 백성들을 때려서 관가나 객잔에서 영접을 받는 모습이 나옵니다. 또한 사찰의 각종건축에 장니(長吏), 즉 지역의 수령들을 꼬드겨 백성들을 징발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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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대인 현종대의 기록을 보면 더 구체적인 행위가 등장합니다.

현종 원년(1010). 승려와 노비가 서로 다투는 행위를 금지하고, 또 비구나 비구니가 술을 빚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현종 3년 (1012) 무늬를 놓은 비단으로 만든 부채를 사고 파는 것을 금지하였다.
왕이 하교하여, “요즘 승려들이 입는 의복을 보니 점점 분수에 넘치게 사치를 부리는 일이 많아 속인(俗人)과 다를 바가 없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승려의 복식에 대한 규정을 만들도록 하라.”고 하였다.

승려와 노비가 싸움질을 하고, 더군다나 여자승려인 비구니가 술을 빚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듯 고려시대를 표현하는 사극들은 당시 승려의 복장을 조선시대후기의 Earth color로 표현해선 안될 것입니다. 고려대의 승려들은 사치스러운 복장으로 일반인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무려 비단부채도 등장하고 있지요.

그럼 저렇게 비구니가 빚은 술은 일반에게만 돌린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종 12년(1021) 6월. 사헌대(司憲臺)에서 모든 절의 승려들이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히는 것을 금지시키라고 왕에게 건의했다. 7월. 사원(寺院)에서 술을 빚는 것을 재차 금지하였다. 

고려후기의 승려들이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고 있습니다. 앞서 11세기 고려승려들의 복장은 화려하다고 했습니다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음의 1027년 기록에 나옵니다.

현종 18년 (1027) 8월. 
승려들이 흰 저고리[白衫], 말두 바지[韈頭袴], 비단 허리띠[綾羅勒], 비단으로 테를 두른 난삼[帛旋襴衫], 가죽 신[皮鞋], 채색 모자[彩冒], 갓[笠子], 갓끈[冠纓] 등을 착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19년 2월. 왕이, “승려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말로 꾀어 재물을 거두어 모은 다음 역마(驛馬)로 실어 나르는 통에 그 피해가 막심하니 관청에 지시해 엄하게 금지시키도록 하라.”고 하교했다.

비단허리띠, 비단 난삼에 가죽신과 색깔입힌 모자에, 갓까지 씁니다. 다음해 기록에는 백성들을 꼬드겨 재물을 약탈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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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폭력집단, 만불향도(萬佛香徒)의 탄생

이렇게 막장화를 보여주던 일부 고려승려들은 12세기 '만불회'라는 집회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 만불회를 위해 사택을 사찰로 귀속시키는 행위도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숙종 6년(1101) 6월.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남녀 승려들이 떼를 지어 만불회(萬佛會)에 모이는 것과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는 것을 금지하였다.

인종 9년(1131) 6월. 음양회의소(陰陽會議所)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근래에 승려와 속인 및 잡류(雜類)들이 떼를 지어 모여 만불향도(萬佛香徒)라고 자칭하면서, 염불과 독경을 하며 황당무계한 짓을 하거나 혹은 전국 사찰의 승도(僧徒)들이 술이나 파를 팔기도 하고, 혹은 무기를 지닌 채 흉악한 짓을 하거나 마구 날뛰면서 놀이판을 벌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풍속을 패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사대(御史臺)와 금오위(金吾衛)로 하여금 순찰을 실시해 금지시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왕이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1131년 기록을 보면 음양회의소라는 곳에서 지적한 바에 의하면 (지금으로 치면 공공윤리위원회정도 되려나요) 승려와 일반인 그리고 잡류가 만불향도의 구성원으로 나오는데 잡류는 지금으로 치면 건달, 깡패와 같습니다. 이들은 그저 술만 파는 것이 아니라 (파도 팝니다...), 염불을 하며 이상한 행위를 하고, 더군다나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이로부터 50년뒤인 명종대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승려들의 행위는 전혀 나아질 기색이 없습니다.

명종 18년 (1188년) 3월. 다음과 같이 제(制)하였다.
“개경 사람이 고향 마을에 농장을 크게 만들어두고 민폐를 끼칠 경우 그 농장을 없애 관(官)에다 넣고 법에 따라 개경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절에서 불도를 닦는 승려들이 여러 곳에 농사(農舍)를 지어두고 공호양인(貢戶良人)을 자기 소유의 노비라고 허튼 소리를 하며 그들을 사역시키고, 또 품질이 조악한 종이와 베를 강제로 빈민들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챙기고 있으니 이런 행위를 일절 금지시키도록 하라. 중략".

이때가 되면 그냥 단순 폭력행사를 넘어 農舍 (즉 농장)을 지어두고, 양인들을 불법으로 노비화해서 노역을 시키고 있어 중앙의 관리가 지역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질낮은 종이와 베등을 강제로 빌려주고 고리이자를 받아가는 전형적인 조폭의 행태중 하나인 '불법사채업'까지 진출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불향도로 집결되던 고려폭력승려들의 모습은 1240년 고려사에 그 구체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경자 27년(1240), 송 가희 4년ㆍ몽고 태종 12년

최우의 서자인 중 만종(萬宗)ㆍ만전(萬全)이 다 무뢰배인 악한 중들을 모아 문도로 삼고, 오직 돈 모으기를 업으로 하여 금은ㆍ곡식ㆍ비단이 거만(鉅萬)으로 계산할 정도였다. 이 문도들이 이름난 절에 갈라서 웅거하여 권세를 믿고 횡포한 짓을 함부로 하여 원근에 횡행하였으며, 안마(鞍馬)와 옷을 달단(韃靼)을 본뜨고 서로 '관인(官人)'이라 호칭하였다. 불의(不義)한 짓을 함부로 행하고 혹 남의 아내를 강간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제멋대로 역마(驛馬)를 타기도 하고 관리를 능욕하기도 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권력가 무신 최우의 서자인 만종, 만전(최항)이 거느리던 깡패집단 중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돈에만 환장해 있는데 그 모은 정도가 鉅萬 (즉 수만으로 셀만큼 많은 액수)에 달합니다. 또한 유명한 사찰에 각개로 모여서 서로 싸움질을 일삼고 당시 유행하던 韃靼 (달단) 즉 타타르족의 복장과 안마 (즉 말의 타는 장식)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관인을 사칭하고 남의 아내를 강간(...), 관리까지 쥐어패고 다니는 막장짓을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원문에서도 '무뢰배'라는 말을 쓸 정도라는 것. 皆聚無賴惡僧 (개취무뢰악승), 즉 '무뢰한 악한 승려들'을 모아서 라는 뜻입니다.

계속 이어가 볼까요.

이들 이외에도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은 중들이 제자라고 사칭하며 도처에서 침탈하고 소란을 일으켰으나, 주ㆍ현에서는 모두 벌벌 떨고 누구 한 사람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백성들이 다 원망하였다. 경상주도(慶尙州道)에서 그들이 저축한 쌀 50여 만석을 백성에게 꾸어 주고 이윤을 거두어 들였다. 가을 곡식이 겨우 익으면 문도(패거리)를 나누어 보내어 징수를 매우 가혹하게 하니, 백성은 가진 것을 그들에게 다 빼앗기고, 조세를 여러 번 거르게 되었다. 

1188년의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사채업이 60년후인 여기서도 보입니다. 門徒 문도라는 것은 제자들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패거리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일단, 승려가 아닌 자들까지 사칭하면서 온갖 악행을 하고 다니던 시대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의롭게 제지하기 위해 안찰사 왕해와 김지대라는 분이 막아 나서는 모습이 나옵니다.

안찰사 왕해(王諧)가 영을 내리어 말하기를, “백성이 조세를 납입하지 않았는데 먼저 사사로운 빚을 독촉하는 자는 죄로 다스리라." 하니, 두 중이 위업에 눌리어 감히 방자히 하지 못하였다. 

만전이 일찍이 진도(珍島)의 한 절에서 살았는데, 그 도당이 또한 횡포한데 그 중에도 통지(通知)라는 자가 더욱 심하였다. 안찰사 김지대(金之岱)가 그들이 청탁하는 바를 다 억제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지대가 일찍이 그 절에 이르니 만전이 거만스럽게 꾸짖으며 나와 보지 않았다. 지대가 곧장 당에 올라가니 당상에 악기가 있었다. 이에 거문고 두어 곡조를 타고 저[笛]를 부니 음절이 비장하였다. 만전이 기쁜 낯으로 나와 말하기를, “마침 병이 있어서 공이 이에 이른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고, 서로 더불어 날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기쁘게 놀았다. 인하여 십여 가지 일을 부탁하는데, 지대가 그 자리에서 일체를 들어주어 행하고 두어 가지 일은 유보화며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행영(行營)에 가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니, 통지를 보내어 연락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대가 영(營)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 뒤에 통지가 과연 왔다. 지대가 명하며 결박한 채 그가 불법을 자행한 죄를 따져 묻고 강물에 던져 죽였다. 만전은 바로 최항(崔沆)이다. 비록 묵은 감정이 있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근신하여 과실(過失)이 적으므로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최항이 거느리던 깡패중인 '통지'를 안찰사 김지대가 강물에 익사시켜버리는데, 워낙 청렴한 분이라 최항조차 해하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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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만불향도의 여전한 막장짓

의복이야기로 조금 더 가보자면, 11세기 현종대에 금한 '승려의 갓착용'은 고려후기인 13세기- 14세기초까지도 전혀 통제가 안되고 있습니다.

원종 원년(1260) 2월. 어사대(御史臺)가 다음과 같은 방(榜)을 붙였다.
“참상(參上)의 관원이 격에 맞지 않는 의관(衣冠)을 착용하는 행위, 승려가 규정에 어긋난 삿갓을 쓰는 행위, 천예(賤隸)가 조정 길에서 말을 타는 행위는 앞서 내린 판문(判文)에 따라 일절 금지한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잡아다가 담당관청에 넘기도록 한다.”

충렬왕 33년 (1308년)
려들이 다 함께 설립(雪笠)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대선사(大禪師)와 대덕(大德)이상은 팔면팔정립(八面八頂笠)과 원정립(圓頂笠)을 쓰게 하였으며,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도록 하였다.
요즘도 일본승려들은 이런 설립(雪笠)을 씁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에는 이런 모자를 승려들이 쓴 것이지요. 다음대인 충선왕대의 기록을 보면 '만불향도'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충선왕 3년 (1311년)
3월.관직을 가진 사람과 승려들의 상행위를 금지하였다.

1. 근년에 선종과 교종 사찰의 주지(住持)들이 절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에 욕심을 부려 서로 차지하려고 투쟁질을 일삼는 바람에 결국 절간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할 경우 여자와 간음하여 추잡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이러한 짓을 금지하고 처벌할 것이다.
1. 도성 안에 사는 부녀들이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향도(香徒)를 맺고는 재(齋)를 열고 등을 켜느라 떼를 지어 산사(山寺)에 가서는, 승려와 사통(私通)하는 사례까지 있다. 일반 백성의 경우 그 아들에게 죄를 묻고 양반 집의 경우 그 남편에게 죄를 묻는다.
1. 승려가 민간마을에 들어와 사는 것과 발원문(發願文)을 가지고 함부로 권화(勸化)하는 행위를 불허한다.

종파간에 전투를 벌이고, 만불향도는 여자를 간음하는데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어, 귀족층 여자까지 사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민간마을에 그냥 들어가서 마음대로 여염집에 눌러 앉아 살기도 합니다. 또한 권화한다는 것은 보통 기부금을 받는 행위를 말하지요. 공민왕대에는 이미 승려가 되는 자들이 노예, 천민들이 마구잡이로 유입, 그 수준이 낮아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불교를 숭상한 공민왕이지만 한편으로는 전대의 폐단을 익히 알고 있어서인지, 아주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민왕 5년(1356년) 6월.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향리와 역리 및 공·사(公私)의 노예들이 부역(賦役)을 피하기 위하여 제멋대로 승려가 되는 바람에 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금후로 도첩(度牒)을 발급받지 않은 자가 사적으로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한다.”

8년 (1359년) 4월. 중방(重房)에서, “자고로 승려들은 대궐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데, 지금은 불교를 높이 떠받든다고 이들의 출입을 막지 않고 있으니 이를 금지시키십시오.”라고 건의하자 왕이 허락했다. 
12월. 사람들이 제멋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10년(1361년). 어사대(御史臺)에서 승려가 시가지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였다
12년 (1363년) 8월. 승려들이 말타는 것을 금지하되,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는 나귀를 타게 하였다.

어사대에서 승려가 말타는 것도 금지시키고 개성시 문안으로 들어오는 것자체를 금지하고 있지요. 왕의 스승격인 왕사와 국사조차 정식말이 아닌 '나귀'를 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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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고려승려들의 무력수준

전성기(?)의 고려무력승려들의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12세기의 기록인데 1131년에 만불향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니만큼 여기 나오는 승군의 모습은 색감은 다르지만 당대 만불향도의 구체적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가늠케하는 기록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볼 점은 '그 무력의 수준(레벨)'입니다. 고려무신정변의 주역중 하나인 이의방(李義方, ? ~ 1175년) 열전의 기록을 잘 살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 이의방 열전
 
이고는 감히 자신이 왕이 되려는 꿈을 꾸고서 은밀히 불량배[惡少]와 법운사(法雲寺) 승려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승려 현소(玄素) 등과 결탁하여 밤낮으로 같이 술을 마시면서, “큰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너희들은 모두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제멋대로 법제를 만들기까지 했다. 태자(太子)의 관례(冠禮)를 행하는 날 왕이 여정궁(麗正宮)에서 베푼 잔치에 이고는 선화사(宣花使)로 참석하기로 되었다. 그는 몰래 현소를 시켜 불량배들을 법운사 승려 수혜의 방으로 불러 모아 말을 잡아먹은 다음 각자 칼을 소매 속에 품고서 담장 사이에 숨었다가 난을 일으키려 했다.

얼마 후에 위위경(衛尉卿)·흥위위(興威衛) 섭대 장군(攝大將軍)·지병부사(知兵部事)로 옮겼다. 이듬해에 귀법사(歸法寺)승려 백여 명이 도성의 북문으로 침범해 들어와 선유 승록(宣諭僧錄) 언선(彦宣)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의방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승려 수십 명을 쳐죽이자 나머지는 뿔뿔히 흩어져 도망갔으나 관군의 사상자도 많았다. 

이튿날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귀법사(歸法寺)·홍화사(弘化寺)등 여러 사찰의 승려 2천여 명이 도성의 동문에 집결했는데 성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자 도성 밖 민가를 불지른 후, 숭인문(崇仁門)까지 불태우고 들어가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했다. 이의방이 이를 알고 부병(府兵)을 불러 모아 이들을 쫓아내고 승려 1백여 명을 죽였으나 부병도 전사자가 많이 났다. 이의방은 부병을 시켜 도성의 각 문을 분담해 지키면서 승려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한편 또 부병을 보내 중광사·홍호사·귀법사·용흥사(龍興寺)·묘지사(妙智寺)·복흥사(福興寺) 등의 사찰을 파괴했다.

형인 이준의(李俊儀)가 이를 제지했으나 이의방은 성을 내며, “만약 형님 말씀대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라고 뿌리친 후 사찰들을 불태우고 재물과 기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승려의 무리들이 중도에서 습격해 탈취해간 물건들을 되찾아 갔는데 이 싸움에서 많은 부병들을 전사시켰다.
1235년 추정 고려승려 모습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들이면서 더욱 권세를 제멋대로 부려 조정을 혼탁하게 만드는 통에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윤인첨이 재차 서경군 토벌에 나서기 위해 도성 서쪽 교외에서 병사를 훈련시켰는데 승려들도 종군했다.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宣義門) 밖으로 나오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몰래 승려 종참(宗旵) 등을 꼬드겨 부탁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이의방을 뒤따르다가 틈을 타서 그를 살해하게 한 후, 그 형 이준의와 동생 이린 및 그 일당인 고득원(高得元)·유윤원(柳允元) 등을 체포해 모두 죽였다. 승려들은 또한, 역적의 딸이 태자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왕에게 건의해 내쫓게 했다.

명종 6년(1176), 이의방의 문객인 장군(將軍) 이영령(李永齡), 별장(別將) 고득시(高得時), 대정(隊正) 돈장(敦章) 등이 이의방의 원수를 갚으려고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일이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먼 섬으로 유배당했다. 당시 무신들이 모두 이의방의 부하였으므로 그들은, 국가의 중요한 권력을 중방에 속하게 한 것은 사실 이의방의 힘이었다고 추키면서 결국 종참 등 십여 명의 승려를 섬으로 유배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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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오는 굵은 체를 보시면 알겠지만 무인 이의방이 애초에 난을 꾸밀 때도 여정궁에 칼을 소매춤에 숨기고 들고 들어가는 불량배들을 지휘하는 인물로 승려 수혜와 현소를 세웁니다. 법운사의 승려였던 수혜의 방에서 말고기까지 먹고 출발하죠. 그 다음해세는 귀법사의 승려 100명 이상이 개성북문으로 진격, 관군까지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 이의방이 부병 (府兵) 즉 마을의 병사들을 모아서 격퇴하지만, 전사자가 다수 발생합니다. 또한 이의방이 뺏아오던 사찰의 재물을 다시 승군이 공격, 이 와중에 병사들이 다수 전사합니다. 이후에 윤인첨이 이의방을 공격할때도 선봉격으로 승려들이 앞장서고, 결국 그를 살해합니다. 

사실 이 시기 (12세기)전후의 고려무승들의 레벨은 이미 충분히 살펴본 바 있습니다. 포스팅서두에 링크를 덧붙인 대표적인 괴력을 보여주는 승려 관승과 상숭은 1135년이었고, 중국의 북송사신 서긍이 묘사한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적의 '재가화상'기록 역시 1123년으로 이 시기의 것입니다. 다만, 이 정도의 무력을 갖춘 이들이 좋은 일에 힘을 썼을 때는 앞선 글들처럼 호국을 하는 효과를 보여주지만, 오늘 소개한 사료들처럼 한심한 부작용도 일부세력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이런 한심한 깡패승려를 포함한 막장승려들을 요즘의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지 다들 아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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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추 (當聚)

그렇습니다. 땡추라는 말은 사실 그 어원을 이러한 만불향도와 같은 폭력승려집단의 부활을 꿈꾸던 조선중기 선조대의 승려 비밀 조직인 당취(當聚)로 보고 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이들은 한참 유교국가이던 당대의 조선을 타도하고 불교국가의 부활을 꿈궜습니다. 구성원들은 당연히 무술을 배웠고 음주도 하였으며, 타락한 중들을 응징함과 동시에 절과 마을에 약탈과 방화를 일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의 난 때 서산대사가 역모 혐의로 붙잡혔으나 조사과정에서 풀려났고, 야사에 따르면 이때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그림을 받았다는 설이 전합니다 (이 '당취'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해 볼 것입니다).

당취라는 말은 19세기말 조선말기의 대스님인 경허대사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경허선사(鏡虛禪師, 1846~1912년)는 근대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인물로 기행도 잦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인 1938 6월에서-39년 1월까지  근대잡지 비판(批判)에 7회에 걸쳐 연재된 [인간 경허―경허대사 일대평전]을 보면 경허대사가 10대때 살았던 즉 1850년대의 청계사는 당취승(땡추)들의 소굴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 당시 경허의 스승인 '계허'는 당취승의 두목이었으며 비교적 점잖았다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일부를 발췌해 볼까요.

김태흡 〈人間 鏡虛 ― 鏡虛大師 一代評傳(1)〉 비판 6호(1938년 6월호) 102-111쪽

대사(大師)는 청계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오계를 받고 중이 되었으나 상경(上京, 청계사에 온 지)한 지 6년째 되던 14세였다. 그러나 그때나 이때나 청계사는 변두리 절이요, 승려라고 있는 것은 모두 무식한 사람들뿐이라. 그들의 행리(行履)라는 것은 당취(黨聚)로 몰려다니면서 동령승(動鈴僧, 동량승)으로 기인취물(欺人取物)과 같은 권선(勸善)으로 탁발 벌이를 하여서 계집이나 보러 다니고 도박장이나 벌려서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술과 계집이 눈에 보이고 그들의 잡행(雜行)과 난행(亂行)이 이목(耳目)에 익혔을 뿐이다. 그중에도 계허(桂虛)라는 이는 가장 점잖고 나은 편이었으나 그다지 배울 것은 없었다. 대사는 이러한 암굴(庵窟) 속에서 2년 동안 글 한 자 배우지 못하고 사역(使役, 심부름) 시봉(侍奉)만 하고 경과(經過)하였었다. 
철종(哲宗) 13년 즉 1844년을 그린 영화 군도중 이경영이 분한 무술승려 (바로 이 시기가 이 기록의 주인공 경허대사의 시대)

확실히 조선시대를 지나 현대 한국에서는 ''에 대한 색감이 문화적으로 많이 옅어졌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 이 땡추라는 단어에서도 엿보입니다. 현재 땡추(=땡중)라는 말을 들으면 '무력' (폭력)의 색감은 제외된 '한심' '계집질' '술' 정도의 연관단어가 떠오를 뿐입니다.

사실은 조선중기의 '당취'라든가 고려대의 '만불향도', 그리고 '재가화상'은 '무력'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되는, 그리고 당대 우리 선조들에게는 그러한 색감이 확실하게 인식에 박혀 있던 집단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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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존다리안 2015/08/10 08:23 #

    고려시대는 생각 외로 살벌한 시대였군요. 뭐 이웃 일본도 농민들이 이웃마을 털러다니던 걸 당연시하던 시대가 있었다니....
  • 역사관심 2015/08/11 07:37 #

    확실히 중앙집권이 약하던 시대인지라 당시 사람들은 괴롭기도 했겠지만, 지금와서 보면 흥미로운 문화사적 포인트가 많은 시대이기도 합니다.
  • 낙으네 2015/08/10 09:15 # 삭제

    조폭승려는 일본의 것을 떠올렸었는데 우리나라도 만만찮았군요 -_-
    우리도 이걸 여러가지로 써먹(?)을 수 있겠네요.
  • 역사관심 2015/08/11 07:38 #

    활발히 다루면 좋겠어요. 다만 불교계의 반발이 걱정인데, 호국불교와 상반되는 일부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기도 하구요.
  • 엑스트라 2015/08/10 09:49 #

    고려때만해도 불교가 타락하고 종파로 나뉘어 싸움박질 엄청 했다는 예기는 들었는데, 조폭단체라니..... 무섭네요.
  • 역사관심 2015/08/11 07:38 #

    생각보다 ㅎㄷㄷ한 모습들이죠...
  • 좀좀이 2015/08/10 10:49 # 삭제

    조선이 건국되고 숭유억불정책을 펼친 이유가 있었군요. 조선 건국후 숭유억불정책이 단순히 성리학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게 아니라 조폭 세력 근절 같은 정책적 성격도 강했겠어요 ㅎㅎ
  • 역사관심 2015/08/11 07:39 #

    확실히 당시 유교학자들에겐 척결대상이었을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레이오트 2015/08/10 11:05 #

    어느 종교든 타락하면 보이는 모습은 크게 차이가 없네요.
  • 역사관심 2015/08/11 07:40 #

    그러게 말입니다. 뭐든 권력화되면 썩는 건 자연스런 속성이라...
  • 지나가던과객 2015/08/10 11:14 # 삭제

    저런 무력을 가진 단체가 경제력을 가진 상태에서 타락했으니, 조선왕조가 불교 억압 정책을 펴는게 당연한 결과군요.
  • 역사관심 2015/08/11 07:40 #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데 척결대상으로 삼을수 밖에...(문화사적으로는 불교국가시대에 비해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서 아쉽긴 합니다만).
  • 존다리안 2015/08/10 13:36 #

    정작 숭유억불책을 쓴 조선도 선비들이 서원갖고 장난치는 바람에...ㅜㅜ
    불교가 깽판치는 거 막으니 결국 유학이 난리치더라...
  • 역사관심 2015/08/11 07:41 #

    뭐든 세월이 흐르면 고여서 썩는지라;;
  • 알베르트 2015/08/10 15:40 #

    세상에나...
  • 역사관심 2015/08/11 07:41 #

    @.@ 확실히 그렇습니다..
  • 零丁洋 2015/08/11 18:41 #

    재미있군요.^^ 그동안 역사에서 문화, 제도, 예술, 학문이라는 고아한 외피에만 현혹되어 완력이라는 거칠게 숨쉬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려 호족들에게 절은 지역민의 민심을 붙잡아 주고 중요한 친위부대를 양성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자원을 축적하던 장소 같군요.
  • 역사관심 2015/08/21 13:01 #

    동감입니다.
  • 응가 2015/08/12 00:36 # 삭제

    고려시대의 승려그림과 조선시대의 승려그림을 비교해보면 당시 불교에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잘 알것같습니다. 고려시대는 국교가 불교인만큼 불교의 힘도 강했을것이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절대자에서 벗어나, 만중과 좀더 가깝게 다가간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시대의 불교를 잘 말해주는 작품이 김홍도가 그린 남해관음도나 염불서승도 가 잘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김명국의 달마도 참 멋이나긴하지만 따듯함과는 거리가 멀죠
  • 역사관심 2015/08/21 13:02 #

    말씀대로 불화도 느낌이 확 다르죠. :)
  • 요원009 2015/08/12 16:03 #

    와....
  • 역사관심 2015/08/21 13:02 #

    @.@ 다른 세상이었죠...조선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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