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아- 재조지은 담론의 변화, 그리고 국론통합 역사

임진왜란 이후, 再造, 즉 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해준 은혜를 명나라에게 갚아야 한다는 담론이 조선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둘의 구분이 거의 없던 시대지만)사이에 많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문헌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선조자신이 국란직후 생전 내건 명국찬양의 내용과 그러한 일을 후일 곱씹는 글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국을 극찬하는 시조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갑진만록
○ 무술년(1598, 선조 31) 겨울에, 남쪽 변방에 남아 있던 적군이 다 달아난 뒤, 대평관(大平館) 서편에 형군문(邢軍門)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는데, 전하(선조)께서 크게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금으로 칠하여 걸어 놓았다. 성상의 필적에 신운(神韻)이 감돌고 웅건하여 이것을 본 중국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조는 하나만 뽑아보자면 임란을 당대에 유년기로 보낸 장유(張維, 1587-1638년)를 들 수 있겠습니다.

계곡선생집
황제 등극 축하 사절 한 지추 여직을 전송한 시[送登極賀使韓知樞 汝溭]

명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 聖祖樹藩屛
강헌왕의 봉호(封號) 명 받은 뒤로 / 命我康獻王
조종 대대로 조공(朝貢)을 바치면서 / 朝宗薦玉帛
제후의 법도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네 / 侯度靡愆忘
지나간 임진년(壬辰年)에 / 往在龍蛇歲
왜적이 제멋대로 기승을 부려 / 黑齒肆跳梁
팔도가 참혹한 화를 당하고 / 八路被荼毒
삼경이 전쟁터로 변하였는데 / 三京成戰場
선왕께서 멀리 몽진(蒙塵)하시며 / 先王在草莽
서쪽으로 신황에게 호소를 하자 / 西面愬神皇
신황께서 불끈 한 번 노하여 / 神皇赫一怒
칼을 손에 쥐고 어전 회의(御前會議) 열었구나 / 按劍開明堂
십만이 넘는 군대 출동시키고 / 發兵十萬餘
내탕(內帑)에서 백여만 금 꺼내어 주며 / 發帑百萬强
초와 촉 땅에서도 징발을 하고 / 徵調及楚蜀
군수물자 청주(靑州) 양주(楊州) 잇따랐는데 / 飛輓連靑楊
육칠 년 간 군사작전 감행한 결과 / 暴師六七載
왜적을 소탕하고 강역(疆域) 보존시켰네 / 掃寇完藩疆
그제야 종묘사직 다시금 안정되고 / 五廟奠鍾虡
억조창생 편안하게 생활하게 되었으니 / 兆民安耕桑
죽을 목숨 살려 준 깊은 그 은혜 / 深恩實再造
영원히 가슴속에 명심할 일이로다 / 百代銘衷腸
중략.
=====

그리고 도와준 측은 당연하게 크게 생색을 냅니다 (이는 현재 중국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지요). 다음은 1674년, 즉 임진왜란이 끝나고 76년후의 기록으로 명사신이 와서 한 발언을 기록한 것입니다. 

백호전서 
소차(疏箚)
갑인봉사소(甲寅封事疏) 갑인년 7월 1일중 발췌:

옛날 우리 강헌 대왕(康獻大王 태조(太祖))께서 고려 말기를 당하여 동녕(東寧)을 공격, 북으로 원(元) 나라를 끊고 요동에서 회군하여 역절(逆節)을 미연에 방지하였는데, 그는 사실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여 끝없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일로서 명 태조(明太祖)도 만리를 훤히 내다보고 특별히 사랑의 유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 유지에 의하면, “조선 국왕은 나 이상으로 기력을 발휘하여 중국을 치려던 군마(軍馬)를 되돌렸고 고려 국왕이 되어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천도(天道)가 본시 그러한 것이니 조선 국왕은 지성을 다하라.” 했는데, 그 교훈적인 말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귀에 쟁쟁하고 역사에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후로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조금도 폐추함이 없이 그 유업을 이어왔고 중국에서도 우리를 다시 변방 이족(夷族)으로 대하지 않고 본토인과 똑같이 대우하면서 사랑과 광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 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때는 임진ㆍ계사년 왜란으로 팔도 백성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종묘의 영령들도 다시 혈식(血食)을 못하게 됐었는데, 그때 만력(萬曆) 황제(명 신종(明神宗))가 천하 군대를 동원하고 대부(大府)에서 수백만금을 덜어내어 도왔으며 문무 장사들이 적의 칼날 아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7년 가까운 전쟁 끝에 우리를 수화(水火) 속에서 구출하여 편안한 자리에다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덕이야말로 끝없는 하늘과 맞먹는 덕으로서 일개 속국이 중국으로부터 그러한 대우를 받기란 고금을 통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소경 대왕께서는 우리의 힘이 그 은덕을 갚기에는 부족하고 당시 사세도 더 어쩔 수 없음을 알고서도 한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은 일이 없이 마치 물이 비록 일만 번 꺾이더라도 계속 동을 향해 흐르는 것과 같은 뜻을 보였고,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크게 써서 중국 장사(將士)의 사당 안에다 걸게 하여 그것을 자손과 신서(臣庶)들에게 두고두고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 처음에 나오는 선조가 직접 쓴 그 네글자를 정확하게 파악, 기억하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위정자들의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얼마나 애처로운 뜻이며 또 얼마나 원대한 계획입니까.
=====

개인적으로는 올해 도널드 트럼프의 태도가 겹쳐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입장에선 그럴수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모두 이렇게 재조지은을 외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임란이 끝나고 한두세대 뒤에 태어난 성호 이익의 문헌을 보면 곱씹을만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호사설 경사문(經史門)
석성(石星)

지금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임진년(壬辰年 1592) 재조(再造)의 은(恩)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괜한 허명(虛名)일 뿐, 실심(實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임진년에 명(明) 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로 나오게 된 것은 그 공이 오로지 석성(石星) 한 사람에게 있었으니, 재조라는 은공은 오직 석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심유경(沈惟敬) 같은 자는 본래 무뢰배(無賴輩)로 왜(倭)의 사정을 익히 알았던 까닭에, 석성이 신종에게 주달하여 유경에게 유격 장군(游擊將軍)을 제수시켰으니, 그것도 결코 우리나라를 위해서이지 딴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평양에서 용만(龍灣)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므로, 만일 유경이 날짜만 약속해 놓고 부동(不動)하지 않았던들 왜는 한 걸음 더 들어오게 되고 대가(大駕)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주상(主上)이 이미 나라를 버리고 가게 되었다면 민정(民情)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중조(中朝)에서는, “중국으로서 한 외번(外藩)을 위해 재력(財力)을 탕진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조선국을 둘로 나눈 다음 적을 능히 막을 만한 자를 골라서 맡겨 주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논이 많았다. 이는 중조 사체로써 말하면 좋은 계책이 아니라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만일 석성 같은 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서 다투지 않았다면 이 의논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그의 은공이 망극(罔極)할 만하다.

이보다 앞서, 본조(本朝)의 종계(宗系)를 개정할 때에도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석성의 애희(愛姬)에게 부탁하여 나라의 명예를 빛내는 공훈을 이루었으니, 그의 은혜 또한 막대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朝鮮)이 왜를 끌어들여 중국을 침략하도록 했다.” 하여, 여러 입들이 떠들어댈 때에도, 석성이 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온 가족의 목숨으로 보증했기 때문에 천병(天兵)이 비로소 우리나라로 나오게 되었다. 그가 전후로 적극 노력하여 우리나라에 큰 은덕을 입혔는데, 나중에 유경과 함께 죽음을 당한 것은 오로지 우리나라 일로써 죄책을 입은 것이다.

이백사(李白沙)가 연경(燕京)에 갔을 때 석성의 문인(門人) 양씨(楊氏)라는 자가 찾아와서, “귀국에서 그분을 위하여 한 마디의 해명이라도 해주기 바란다.”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가만히 보기만 할 뿐, 한 사신(使臣)도 보내어 그의 억울함을 변명해 주지 않았으니 무슨 이유였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큼 되었다.

그 당시에 천자(天子)가 절(浙)ㆍ섬(陝)ㆍ호(湖)ㆍ천(川)ㆍ운(雲)ㆍ귀(貴)ㆍ면(緬) 등 남북 지방의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 21만 명이 넘었으며, 군량을 사들이는 데 쓰인 은(銀)만도 8백 83만 냥이 넘었었다. 이로 인해서 남쪽 백성들의 재력이 거의 탕갈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 한두 명의 신하가 하소한 힘으로 될 일인가? 모두 석성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성의 죄는 봉공(封貢) 문제를 성사하지 못한 데 불과했고, 우리나라에서 석성을 탓한 것도 그가 나중에 주화(主和)했다는 데 불과했다. 그러나 아예 크게 승리할 수 없을 바에는, 그의 청공(請貢)에 따라 빨리 강화(講和)하여 파병(罷兵)시키는 것이 우리나라로서는 다행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외적(外賊)을 스스로 막아내지 못하면서도 남이 (즉 석성이) 힘껏 후원해 주지 않았다는 것만 노여워하였으니, 이는 우리에게 큰 덕을 입힌 것은 잊어버리고 조그마한 원망만 생각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나중에 우리나라 자체로는 도저히 싸울 능력이 없었고, 유적(流賊)이 또 천ㆍ섬(川陝)으로부터 일어나 명(明) 나라까지 드디어 멸망하게 되었으니, 석성의 주화한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없다. 봉공 문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한때의 불행이었을 뿐, 석성에게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이백사(李白沙)가 양씨(楊氏)의 간청을 받고도 마음이 감동되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 척화(斥和)의 의론이 한창 벌어져서, 서로 통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은 본래부터 석성과 서로 의논이 맞지 않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석성을 죽이기로 의논할 때 죽기로써 칙명을 받들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 명의 사신도 끝내 보내지 않았으니, 어찌 소대형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명 태조(明太祖)가 꿈에 볏단을 머리에 인[戴] 어떤 여인(女人)에게 떠밀려 자빠진 꿈을 꾸고 나서 왜(倭)의 침략을 예비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정동(征東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한다는 뜻)이라는 설(說)이 유행되었다.”는 것이다. 임진년 난리 때 별사(別使) 왕명학(王鳴鶴)이 우리나라에 와서 해방(海防)에 대해 거듭 경고한 것 역시 이 뜻이었다.
=====

이 글은 우리에게 정말로 은혜를 준 이는 '명국자체'가 아니라 신종대 병부상서였던 석성(石星) 개인의 은덕임을 강조한 논조를 펼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익 (1681~1763년)의 시대였던 18세기초중반에 사람들이 재조지은을 말하지만 이는 입으로만 말할뿐 진심들이 아니다라는 첫 구절입니다. 사실은 '석성'이라는 개인이 계속 우리를 도와주워 가능했다는 이야기며 그 석성이 모함에 걸려 죽임을 당할때 조선에서 아무런 손길도 내밀지 않았던 것을 한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진사록]을 보면 임진왜란 당대에도 유성룡(柳成龍, 1542~1607년)은 역시 이런 논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냉정하게 국제관계의 우방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사록 중:
대체로 옛적부터 남을 구원하는 것은 남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과는 그 사정이 같지 않으니, 중국이 왜적으로 토벌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 전쟁을 중지하기를 힘쓰는 데 불과할 따름이니, 어찌 우리의 이와같은 절박한 사정을 양철하겠습니까?

이러한 담론을 후세에 조금 더 깊게 설파하는 분이 18세기 영조대의 윤기(尹愭, 1741~ 1826년)입니다. 선조대에 그 분위기에 제대로 평가되기 힘들었던 충무공의 임란에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

무명자집(無名子集) 
임진년의 일을 논하다〔論壬辰事〕

임진년(1592, 선조25) 왜변의 승패에 관한 사실을 《명사(明史)》와 우리나라 기록에서 고찰해보면 합치하지 않는 곳이 많다 (주: 우선 명의 기록을 일방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증명할 문헌이 없지 않은데도 이러하건대, 하물며 까마득한 옛일이야 사람마다 설이 다르고 책마다 기록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드디어 사정(邪正)이 뒤바뀌고 명실(名實)이 어긋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우리나라 홍만종(洪萬宗)이 편찬한 《동국총목(東國總目)》을 고찰해 보면, 임진년의 일을 기록하면서 “이여송 등이 왜적을 격파하고 삼경(三京)을 회복하였다.〔李如松等 擊破倭賊 復三京〕”라고 하였고, 또 “황제가 양호(楊鎬)ㆍ마귀(麻貴)ㆍ형개(邢玠) 등을 보내 왜적을 토벌하여 크게 쳐부수었다.〔帝遣楊鎬麻貴邢玠等 討倭大破之〕”라고 하였다. 이는 왜적을 격파한 공로를 오로지 명나라 장수에게 돌린 셈이다 (주: 홍만종의 명에 집중된 임란논조를 비판합니다).

내가 일찍이 이 일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자고로 왜국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것이 여러 차례인데, 임진년의 참화만큼 혹독한 적은 없었다. 임금이 거빈(去邠)의 계책을 결단하고, 초나라 신하가 진나라 조정에 통곡할 결심을 굳혔으나, 다행이 신종황제가 출병을 명하여 특별히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려 주었으니, 우리나라가 만세토록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몰라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이제 각 서적의 기록을 고찰해보면 서로 맞지 않는 구절이 없지 않으나, 대략 절충해서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경탄(鯨呑)에서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힘이다. 그런데 평양성에서 왜적을 패퇴시킨 것은 이여송(李如松)의 공적이라 말하더라도 승패가 뒤섞여 있다. 여석령(礪石嶺)에서 패전하자 드디어 이여송은 의기가 꺾이고 목이 졸아들어 돌아왔으며, 이종성이 밤에 도망하다 스스로 목을 맨 것과 양호가 말을 채찍질하여 서쪽으로 달아나고 진린이 배를 버리고 도주하여 돌아온 것은 황제의 명을 욕되게 한 죄가 크다.

당시 중국 조정의 논의에 ‘왜와 무슨 원수가 졌는가?’라는 말이 있었고, 정부에서는 ‘겉으로 싸우면서 안으로 화의하며, 겉으로 토벌하면서 안으로 위무하라’는 8글자의 방침을 내려서, 곧 당시의 여론을 형성하여 드디어 억만의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8년 동안 도탄(塗炭)과 어육(魚肉)에 빠지게 하였고, 마침내 황제도 전쟁에 신물이 나 그 진위를 따지려 하지 않아 위엄을 손상시킨 채 구차한 논공행상을 일삼았으니, 애석함을 가눌 수 없다.

한편 이로 인해 유감스러운 일이 있다. 충무공이 왜적을 격파했을 때 진린이 자못 기뻐하지 않았고, 충무공이 왜적의 수급을 획득할 때마다 번번이 진린에게 주어 큰 공을 세우게 하니, 그제야 크게 기뻐하면서 ‘경천위지ㆍ보천욕일(經天緯地補天浴日)’의 칭송까지 하여 종내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충무공의 나라를 위한 충심과 남에게 양보하는 의리와 성공을 도모한 지혜는 참으로 왜적을 섬멸한 재주보다 훨씬 뛰어남이 있다. 노량에서 왜적을 토벌하여 적을 모두 섬멸하였으니, 이때의 공적은 갚을 길이 없는데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으니, 그 뜻이 몹시 애달프다.

아, 충무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왜가 되었을 것이다.
=====

18세기초의 이 문헌은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임진왜란을 주체적인 태도로 냉정하게 분석해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선배 지식인들이 일방적인 명에 대한 재조지은 태도를 비판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순신을 이야기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익이 쓴 글을 보며 우리자신이 왜 갈라지고 서로 싸워서는 안되는지 곱씹어 보면 합니다.

성호사설
수길범상국(秀吉犯上國)

흑룡(黑龍, 시베리아의 강이름) 해구(海寇)란 종시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저 조그만 도이(島夷, 섬나라 이적, 일본)로서 신주(神州, 중국)를 삼키려 도모한 것은 이치로 따져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가도멸괵(假道滅虢)’하려는 수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때의 일본 사람들의 의론을 참고해 보니, “조선(朝鮮)은 대명(大明)의 속국이기 때문에 대명에서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했으나, 수길(秀吉)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대명으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거짓말로 남을 속이려는 것이고,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본래 원씨(源氏)의 나라로서 대대로 계승하여서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는 터전이 이룩된 나라이다. 수길이 갑자기 틈을 타서 그 지위를 노린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원씨를 이을 아들이 어렸지만 가강(家康)의 형세가 점점 커져서 다시 원씨에게로 복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수길의 형편으로는 그런 수법을 써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길은 일개의 필부(匹夫)로서 남의 심부름을 하던 자인데, 갑자기 66주(州)를 모두 차지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문신과 무신이 모두 편안함만 생각하고 당화(黨禍)는 날로 심해 갔다. 더욱이 그들은 마도(馬島)에 접근하여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정탐했기 때문에 그때가 바로 노릴 만한 기회였다. 수길은, ‘명 나라를 먹겠다.’고 헛 선전을 해놓아서 명 나라의 세력을 얽어매어 우리나라를 돌아볼 수 없도록 한 다음, 우리나라의 당화가 치열한 것을 기화로 하여 일거에 집어삼켜서, 두 나라가 하나로 합친다면 설령 처음에는 실패할지라도 나중에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속셈이었는데, 청정(淸正)이 바로 그의 심복으로 종용하여 일을 성취한 것이었다. 석성(石星) 같은 이가 죽을 힘을 내어 우리나라를 돕지 않았던들 그들의 계획은 반드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안으로 정사를 닦지 않고 스스로 높은 체만 하면서, 후일에 닥칠 걱정은 아주 잊어버리고 도리어 도이(島夷), 일본)의 세력만 길러 준 것이다. 저 하찮은 벌도 사람을 쏘는데 하물며 억센 힘이 나보다 나은 자에게 있어서랴? 화의(和議)가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다만 나물만 먹고 마귀를 받드는 한낱 중[僧]으로 하여금 심유격(沈遊擊)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유격과 천사(天使 천자의 사신을 이름)가 함께 갈 신사(信使)를 요청한 데 대해 우리 조정에서는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왜(倭)가 노여워한다는 소문을 듣고야 황신(黃愼)으로 도정(都正)을 삼아 수행하게 하였다.

그때 황신은 아직 미관말직으로 있었다. 세자를 볼모로 보내고 폐백을 두둑이 소모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어찌 황신 이외의 중신(重臣)을 보내서 조약에 임하도록 하지는 못했던가? 정유(丁酉, 1597)의 재란(再亂)은 실상이 임진(壬辰, 1592)ㆍ계사(癸巳, 1593) 양년에서 연유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징계하지 않고 망령스레 이유자(夷猶子)의 구업(口業)만 본받았을 뿐이었다. 만일 수길(秀吉)로 하여금 그 수명을 약 10년만 더 연장시킬 수 있었다면 우리나라의 형편은 결국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 것인가?

그 중에도 한스러운 것은, 왜병(倭兵)이 침입한 후 맨 처음으로 평양(平壤)에서 겨우 한 번 승리하게 되었는데, 당론(黨論)은 또다시 치열해진 것이다. 외모(外侮)는 잊어버리고 내혁(內䦧)만 일삼다가,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조정(朝廷)을 떠나버린 자까지 있었으니, 하물며 세상이 평화한 때에야 오죽했겠는가?

이로 본다면 그때의 난리는 수길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이다. 진실로 군신(君臣) 간에 틈이 벌어지지 않고 정령(政令)이 물샐틈없이 되었다면, 아무리 해외에 있는 뱀과 돼지 같은 오랑캐일지라도 감히 침략할 마음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宣祖)는 이미 내부(內附)의 대책을 세우고, 울면서 지은 시에,

나라일로 허둥지둥하는 오늘날 / 國事蒼黃日
누가 이ㆍ곽 같은 충성을 낼 것인가 / 誰能李郭忠
서울을 떠남은 큰 계책을 생각해서인데 / 去邠存大計
후일의 회복은 제공을 힘입어야지 / 恢復仗諸公
관산 달빛에 울음이 절로 나고 / 痛哭關山月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아프구나 / 傷心鴨水風
조정의 여러 신하여, 오늘날 이후에도 / 朝臣今日後
또다시 서니 동이니 할 것인가 / 寧復更西東
=====

광복 70주년은 단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떤 국가도 넘보지 못하는, 그리고 다시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힘있는 국가가 되는 길을 모든 이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시대입니다. 아마도 그 첫단추는 집안에서 '우리 스스로의 분열'을 막는 일일 것입니다.

언젠가 만시지탄을 내뱉는 날이 오지 않기 위해, 앞으로 한국이 동서남북할것 없이 국론이 모아져서 언제가 자유민주국가로 통합되어, 어디든 갈리지 않은 강하고 멋진 선진국가로 발돋움 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선조들의 저러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다른게 뭐야'라고 현재형으로 한탄하는 것이 아닌, 정말 '한때 저랬었지'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덧글

  • 낙으네 2015/08/17 09:28 # 삭제

    저는 우리나라가 세계 문화의 주도국이길 희망합니다. 저도 거기에 보탬이 될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5/08/17 12:03 #

    동감입니다.
  • ㅇㅇㅇㅇ 2015/08/17 22:00 # 삭제

    조선인 전부가 미련한건 아니였었죠...

    다만 많은 수가 미련했으니 그것이 문제요

    또 이렇게 소수의 똑똑한 사람들이 그나마 조선을 뼈아프게 비판하여 개선의 의지를 보임에도 불구

    대한민국에 사는 소위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애써 과거를 무시하며 조선을 신성화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역사를 배우지 않는 이에게 미래가 없다는 구절은 일본인들 욕하라고 있는 구절이 아닐텐데 말입니다.
  • 역사관심 2015/08/18 15:30 #

    뭐든 이데올로기화되면 안경을 쓰고 보기 때문에... 자꾸 벗으러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零丁洋 2015/08/18 19:36 #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직시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존재와 당위, 가치와 사실, 현실과 이상이 뒤엉켜있어 어쩌면 절대 풀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어진 현실이 객관적으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해석하고 구성해 나가는 조건에 불과하다면 통일된 논리를 만든 것 보다 가능한 선에서 각자의 해석을 용납할 수 있는 아량이 더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지금의 남북문제, 지역갈등,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갈등도 배후를 관통하는 논리의 부재가 아니라 관용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 아닐까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