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연복사 5층목탑을 오른 기록들- 황룡사 9층목탑 복원의 실마리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언제가 해야지 하면서 늦어진 글중 하나입니다. 소개하는 글들은 한국목탑(혹은 고층누각)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사람이 올라간 (그것도 한두명이 아닌 다수가) 명확한 사료가 됩니다. 또한 최근 재건프로젝트가 시작된 황룡사 9층목탑의 내부구조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연복사 (고려시대에는 보제사)는 고려의 대찰로 이미 몇번 다룬 바 있습니다. 아래 글들을 순서대로 읽으시면 연복사와 당대 최고목탑(전각)중 하나였던 5층목탑에 대해서 파악하기 쉽습니다.


부록으로 이것은 역시 5층고층전각인 사리각의 소실기록

연복사는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지만 1037년의 거동기록이 있어 최소 11세기부터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이 나오는 16세기까지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목탑의 경우 12세기초인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이미 구경한 바 있지만, 1393년 중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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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미터 5층전각/목탑

우선 이 목탑의 규모에 대해서는 앞선 글중 발췌한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려도경 개경 보제사 중-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무엇보다 유명했던 것은 5층 목탑으로서는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안에 들어갈법한 규모라는 연복사 5층 목탑이 있었는데, 높이가 무려 60미터에 이르렀습니다 (미륵사 9층목탑과 같은 수준입니다). 이 탑은 200척으로 당시 개성의 모든 사람이 이 탑을 어디서나 보았다고 합니다 (경주와 황룡사탑, 익산의 미륵사 목탑과 같은 느낌이었겠죠- 황룡사포스팅참조 (중간사진참조)). 특이한 건 9층목탑이 아닌, 5층이라는 점입니다.

200척 즉 60미터짜리 5층목탑 혹은 전각이라...가장 비교하기 쉬운 것은 어디일까요 (연복사 목탑의 경우 전각으로 불려도 무방합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국내에선 직접 비교대상이 없고 아마 가장 쉬운 것은 중국의 3대 누각인 황학루일 것 같습니다. 황학루는 55.47미터이며 5층전각입니다.

우한 황학루 (55.5미터)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황학루는 외부에선 5층이지만 내부는 9층입니다 (물론 현재의 황학루는 청대에만 4차례 중건되었고, 마지막으로는 1985년에 재건된 것이지만, 그 전에도 이런 구조였다면 확실히 높이면에서 연복사 5층 전각과 비교해서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앞서 200척 (약 60미터)라는 높이는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그럼 이 전각의 면적은 얼마나 될까요? 그 단서가 다음의 기록에 있습니다.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김자수(金子粹)의 상소(上疏)

공양왕 3년(1391)에 대사성 김자수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연복사(演福寺)의 탑을 수리하여 넓히느라 민가(民家) 3, 4십 호를 허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처럼 크게 부도(浮屠 승려의 사리탑)를 세우시니, 이는 곧 확실성이 없는 명복(冥福)을 얻기 위하여 현재 살아 있는 백성들에게 실화(實禍)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임하필기]에 나오는 고려말기 (생몰년대미상)의 문신인 김자수의 상소문입니다. 여기보면 '연복사 탑을 넓히느라 민가 30-40채를 허물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그 규모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지요. 참고로 연복사가 얼마나 화려했던 사찰인가를 보여주는 기록이 한 점 있습니다.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정미 16년(1367),

왕이 연복사(演福寺)로 행차하여 문수회(文殊會)를 크게 베풀었다. 불전 한 가운데에 채색 비단을 연결시켜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산을 빙 둘러 촛불을 켜니 촛불의 크기는 기둥만하였고 높이는 10척이 넘었으며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실로 만든 꽃과 비단으로 만든 봉(鳳)의 광채가 눈부셨다. 폐백은 채색 비단 16속(束)을 썼으며, 중 3백 명을 뽑아 수미산을 돌아다니게 하니 범패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일을 맡아 본 사람이 무려 8천 명이나 되었다. 왕은 신돈과 함께 수미산 동쪽에 앉아 양부의 관원을 거느리고 부처에게 경배하였다. 신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선남 선녀가 왕을 따라 문수(文殊)의 좋은 인연을 맺기를 원하오니, 여러 부녀들에게 불전에 올라와서 설법을 듣도록 허락하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남녀가 혼잡하여 붐비고, 과부들 중에는 신돈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얼굴을 예쁘게 단장하는 자까지 있었다. 중에게 밥먹일 적에 왕이 손수 금로(金爐)를 받쳐들고 중을 따라 향을 피우면서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신돈이 떡과 과실을 부녀들에게 나누어주니, 기뻐하여 말하기를, “첨의(簽議 신돈)는 문수의 후신이다." 하였다. 왕은 홀치충용위(忽赤忠勇衛) 2백 50명에게 명하여 밤낮으로 신돈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날에 폭풍이 종일토록 불고, 누런 흙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였다. 법회는 무릇 7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폭풍이 3일 동안 불고 서리가 3일 동안 많이 내렸다.


공민왕대에 연복사에서 문수회를 하는데, 불전 (즉 오늘 소개하는 5층전각)을 채색비단으로 연결해서 수미산을 만들고, 이 인공산의 주위를 기둥만한 촛불로 밝히는데 그 촛대의 높이가 각각 10척, 즉 약 3미터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행사를 하는데 8천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으로 연복사의 위상을 가늠해 볼수 있습니다.

국내의 5층전각으로는 위의 링크글에서 소개한 '사리각'외에 같은 고려시대의 대전각인 남원 만복사 5층전각이 있습니다. 만복사 역시 연복사와 그 시기가 얼추 비슷합니다. 11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며 16세기말까지 존속했습니다. 만복사의 5층불전의 높이는 최소 30-40미터로 보는데 그 이유는 11미터짜리 대불이 같은 사찰내의 2층전각에 들어 있었다는 기록때문입니다.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14)-11미터 동불상과 5층 전각, 고려 만복사 萬福寺



연복사 층각에 오르며 登演福寺木塔

다음의 문헌들은 모두 시로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조선중기인 1477년 일행으로 이미 쇠락한 개경을 돌아본 [유송도록]과 여타 개인문집에 나오는 싯구들로 따라서 이 기록들은 15세기중엽의 기록이 됩니다. 우선 성현(成俔, 1439∼1504년)의 기록입니다.

연복사 층각에 오르며
성현

금벽은 저녁노을에 번쩍번쩍 빛나고
오층누각은 우뚝하게 드높구나.

사다리를 돌아 오르면 온종일 소란스럽던 새들도
발밑에서 날아다닌다.

마을마다 봄이 깊어가자 붉게 핀 꽃들도 반쯤 시들고
사방의 산에 구름이 걷히자 푸른 빛으로 연이어졌다.

오층 꼭대기에 올라도 
천년의 한을 다 삭힐 수는 없지만

한줄기 맑은 바람이 
나그네의 옷자락을 치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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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碧煌煌耀夕輝 五層樓閣聳巍巍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목탑을 '오층누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과 꼭대기(상층)까지 올랐다는 기록입니다. 새가 발밑을 날아다닌다는 기록으로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지요.


빙빙도는 내부의 사다리와 난간
같은 성현의 기록으로 전반부는 일치하지만, 시의 후반부가 다른 버젼이 그의 문집인 [허백당시집]에 등장합니다.

백당시집 제5권 시(詩)
연복사탑에 오르다〔登演福寺塔〕

휘황찬란한 단청이 석양에 으리 빛나라 / 金碧煌煌耀夕輝
오 층 높은 누각이 우뚝하게 솟아 있네 / 五層樓閣聳巍巍

돌아가는 사다리는 하늘을 향해 오른 듯 / 回梯若向天心上
놀란 새들은 항상 발밑에서 나는구나 / 駭鳥常從脚底飛

만 마을에 봄은 깊어 꽃이 반쯤 떨어졌고 / 萬落春深紅半墮
사방 산엔 구름 걷혀 푸른빛이 에워싸네 / 四山雲捲翠相圍

난간 기대니 수많은 시름 다할 길 없어라 / 憑欄不盡千愁恨
도읍의 번화함은 오래전에 글러버렸네 / 都邑繁華久已非

이 버젼에서는 憑欄 (기댈 비, 난간 난) 즉 난간에 기댄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어 역시 황룡사 목탑이나 위사진의 황학루처럼 난간에 나와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구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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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채수(蔡壽, 1449~ 1515년)의 기록입니다.

연복사 층각에 오르며
채수
登演福寺木塔與獻之,罄叔,大虛,子珍,如晦。遊松京時作。後十八首同。地拆天分王氣終。惟餘廢寺萬家中。粉墻剝落頹春草。木塔崢嶸倚晩風。迹息無人悲黍稷。僧殘何客證圓通。百年興廢無多說。回首靑山落照紅。

천지의 기운이 꺽이고 나누어져
고려의 왕기도 다하고

오직 무너진 절터만 남아있다.
색칠한 담장엔 꽃장식도 떨어져 나가고
봄풀도 모두 시들었는데

목탑만 하늘 높이 오똑하게
저녁바람 속에 서있다.

인걸은 간데없고
절터에 자란 피서리만 슬픔을 자아내네.

스님도 없으니 
어떻게 원통무애를 징험할까?

인생 백년의 흥폐도 
허다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머리를 돌리니
청산엔 낙조만 붉게 물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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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의 기록에서 재밌는 것은 성현의 '전각'기록과 달리 같은 건물을 '목탑'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木塔崢嶸倚晩風

따라서 연복사 목탑은 목탑과 전각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었던 건축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은 황룡사 목탑을 비롯해 한국의 고대-중세 고층목탑의 내부구조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황룡사 9층목탑의 난간과 처마에 대한 묘사글(링크)도 다룬바 있었습니다만, 흔히 황룡사 목탑을 오른 김극기등의 시를 보면 '층계로 된 사다리를 빙빙 오르는' 식입니다.  이는 앞서 소개한 성현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돌아가는 사다리는 하늘을 향해 오른 듯 / 回梯若向天心上). 그런데 다음의 기록에서는 이 사다리가 외부로 연결된 것이 아닌, 내부에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복사 층각에 오르며
허침

누각 속 사다리를 쉬지 않고 오르는데
갑자기 밖에서 언뜻 우리가 치는 듯

비로소 하늘 밖으로 나오니
사방은 한 점 막힘없이 탁 트였다.

세속의 시끄러움에 싫증이 나서
절집을 찾아왔노라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니 
원기는 떠있는 먼지와 뒤섞여 있다.

산으로 에워쌓인 옛 서울엔
무너진 성만 남아있고

봄을 뒤쫓아 부는 동풍에
이슬비만 소리없니 내린다.

시력이 멀리 보일때엔 
근심 또한 멀어지는 것

서둘러 주어 담아서
금술동이에 붙여야 하리.

허침 (許琛, 1444~1505년)의 이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다음은 앞선 두 문장의 원문입니다.
殷殷雷 (어두운 (갇혀서) 속의 사다리를 수없이 오르는데 별안간 우레가 치며)

幽 그윽할 유, 어두울 유, 검을 유, 갇힐 유,
梯 사다리 제
殷殷 많을 은, 우뚝할 은
乍 별안간 사
驚 놀랄 경
雷 우레 뇌

一點開 (비로소 밖으로 나가니 공중에 티끌하나 없이 트였다)
始 비로소 시
出 날 출
空 빌, 공중 하늘 공
明 밝을 명
一點 일점 (티끌)
開 열 개

즉, 이 기록은 허침이 5층목탑의 내부를 빙빙 두른 구조의 사다리를 장시간 오르다가 상층 (4-5층) 바깥에 설치된 난간부로 나아가 공중에서 경치를 감상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현전하는 가장 높은 목탑인 12세기의 중국의 응현사 목탑내부와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흥미로운 것이 이 응현목탑 역시 외부는 5층, 내부는 9층이라는 점입니다.
1196년 완공된 현전하는 최고목탑 응현목탑 (외부 5층)

이 기록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단서 (혹은 확인)은 난간구조가 외부로 돌출, 최소 사람이 앉을 정도의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부의 사다리에서 바깥으로 나온 장면다음에 이런 구절이 나오죠.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니 
원기는 떠있는 먼지와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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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5층전각들을 비교해보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됩니다.
응현목탑 (1196년 완공)- 외부 5층, 내부 9층
황학루 (현재 모습, 청대)- 외부 5층, 내부 9층
연복사목탑- 5층 (11-16세기 (1563년 전소))
만복사불전- 5층 (11-16세기)
사리각- 5층 (14세기(1398년)-16세기 (1510년 전소))

송나라와 고려가 건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임을 감안하고, 현재 남아있는 유구의 면적비례등을 살펴보면 연복사나 만복사 5층전각의 내부를 9층으로 한번 고찰해 볼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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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대장경)과 보물들, 그리고 불상의 안치

다음은 조위(曺偉, 1454~ 1503년)의 문장으로 역시 내부구조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기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록 역시 같은 5층전각인 사리각과 연관이 있다는 점입니다.

연복사 층각에 오르며
조위

나라가 망한 뒤라 
절간도 쓸쓸하게 퇴락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각들
보이는 것마다 허전하다.

해가 지자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마을까지 들리고

봄이 왔건만 
아직도 시든 풀이 마당가를 덮고 있다.

회오리바람이 불자 
옥진(눈)은 천화가 되어 내리고

먼지 쌓인 보석상자에는 
불경서만 들어 있다.

어리석은 중들은
많은 서적을 사들였지만

정중과 진여를 
누가 바로 깨달았겠는가?
 
이 기록을 통해 연복사 5층목탑의 내부에 보석상자들이 있었고 불경들이 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헌은 교차비교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6세기의 [오산설림초고]의 기록을 보면 더 자세한 구조가 나옵니다.

“황계창(黃繼昌)이란 자는 송경(松京) 사람인데, 용력(勇力)이 뛰어나서 날아다닐 수 있었다. 연복사(演福寺) 5층(層) 전각(殿閣) 위의 감실[龕]에 금은자(金銀字)로 쓴 불경(佛經) 수백 본(本)이 있었는데, 황계창이 이를 훔쳐가지고 나가려 하자, 중들이 그 기색을 알고 앞을 다투어 올라가 그리 못하도록 붙잡고 막았으나, 계창은 그 경축(經軸)을 모두 챙겨서 허리춤에 어지러이 꽂고 또 두 손에도 각기 수십 축씩 움켜쥐고는, 5층에서 몸을 던져 날아 내려오는 것이 마치 나는 새와 같았으므로 중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였다. 

예전에 소개한 기록으로 무려 5층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나오죠. 이 기록에서는 감실에 금과 은자로 쓰인 불경이 수백권 있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15세기에 조위가 구경한 이 불경들을 16세기의 황계창이 훔쳐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스펙타클하군요. 그런데 연복사 목탑안에는 불경만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상'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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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연복사탑 중창기

우리 동방(東方)에는 신라 말기부터 받들어 섬김을 더욱 근실히 하여, 성안에 승려(僧廬 사찰)가 민가보다도 많았고, 그중 전각(殿閣)이 굉장히 높고 특별한 것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남아 있으니, 당시 존숭하여 받듦이 지극하였음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고려 왕씨(王氏)가통합한 초기에 변함없이 그대로 시행하여 신비한 도움이 있기를 바라 이에 중외(中外)에 사사(寺社)를 많이 설립하였으니, 이른바 비보(裨補)라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실로 도성  시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본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이다방언(方言) () () 서로 비슷하므로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집이 가장  천여 칸이나 되는데안에 [ 군데와 우물 아홉 군데를 팠으며 남쪽에 또한 5층탑을 세워 풍수설(風水說) 맞추었다 내용은  문적[舊籍]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덧붙이지 않는다왕씨가 나라를 누린 5  동안에 누차 전란을 겪었으니  절의 흥폐가  차례만이 아니므로 탑의 파괴가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없으나공민왕 때에 이르러 다시 영조(營造)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뒤에 광승(狂僧장원심(長遠心) 권귀(權貴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들을 징발하여 재목을 모았으나 결국에는 성사하지 못했다공양군(恭讓君) 장상(將相)들의 힘을 입어 조종(祖宗) 왕업을 회복하고자 하여즉위한 뒤로부터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써 이에  천규(天珪등에게 명하여 공장(工匠)들을 모아 역사를 일으키도록 했었다.


이에 공장(工匠감독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공사가 완성되니실로 임신년 겨울 12월이었다계유년 봄에 단청을 하니,구름 밖에 꿩이 날듯하늘가에 새가 날듯금벽(金碧) 휘황하여 반 공중에 비치었다위에는 부처의 사리(舍利) 봉안하고중간에는《대장경(大藏經)》을 간직하고아래에는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 안치하니국가에 복을 내리어 만세토록 영원히 이로울 것이다. 여름 4월에 문수 법회(文殊法會) 열어 낙성(落成) 하고주상께서 ()권근(權近)에게  시말을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권근이 그윽이 불설(佛說) 듣건대탑을 세움은 공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층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덕이 높고 낮음을 밝히는 것인데, 5 이상의 것을 불탑(佛塔)이라 한다고 한다그들이 말하는 공덕보응(功德報應) 설이 지극히 크고 넓으므로아육왕(阿育王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존숭하여 믿어 세우기를 끊임없이  것이다.


고려말 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년)의 이 기록을 보면, 명칭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하나 나오는데, 바로 왜 5층의 '전각'임에도 이 건축물을 '목탑'이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죠. 즉, 불가에서는 5층이상의 것은 '불탑'이라고 (그 형태에 관계없이) 부른다는 것입니다. 권근은 이 탑을 목탑이라고 부르지도, 그렇다고 전각이라고 칭하지도 않고 '탑전'이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동문선(東文選) 

演福寺行大藏經披覽䟽 연복사에서 대장경의 열람을 행하는 소

一音所演。大藏至萬軸之多。萬機甚繁。小子無一日之暇。意欲致邦家之鞏固。必須憑佛法之加持。迺與臣僚。同發誓願。營五層之塔殿


부처님이 일음(一音)으로 말씀하셨으나, 대장경은 일만 축(軸)이나 많으며, 모든 정치가 번거로우매 소자(小子)는 하루의 여가가 없습니다. 국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불법의 가피(加被)를 기대야 하겠기에, 이에 신하들과 함께 서원(誓願)을 세워서 다섯 층의 탑전(塔殿)을 이루어 옛터를 빛나게 하였고, 일천 함(函)의 장경을 출판해서 새로운 경전을 이룩하였습니다


또한 구조적으로 기록에는 상층(4-5층)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 (3층)에는 대장경등 수백권의 불경을, 그리고 하층(1-2층)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배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동문선]기록을 보면 이 대장경을 '열람'할수 있게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도면은 중국 응현목탑의 구조로 역시 하층에 큰 불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서 링크건 또다른 한국 중세의 대건축물이었던 '5층 사리각' 기록에서도 불경을 고층전각안에 보존하는 모습이 나오죠. 참고로 이 사리각이 화재가 났을 당시 밤이었는데 얼마나 높았는지 한양내의 골목골목이 환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이 절은 본래 신라 때 지은 고찰로서 우리 태조(太祖)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절 안에 사리각을 창건하라고 명하였는데, 높이 5층으로 서울 복판에 우뚝 섰고, 또 보물과 불경을 그 속에 두게 하였다.

따라서, 감히 유추하자면 연복사, 사리각, 그리고 만복사 5층불전에는 불경과 각종 불가의 보물들, 그리고 불상들을 모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경우 역시 그러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 응현목탑의 내부와 비슷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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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고려전성기, 개경의 심볼과 같았던 연복사(보제사)는 개경이라는 접근성의 한계로 아직 제대로 된 발굴조차 한국측에선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 소개한 연복사 5층목탑의 기록은 고려대 같은 5층건물들인 사리각, 만복사 5층전각과 비교연구도 도움이 되지만, 황룡사 복원에도 큰 도움이 될 기록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황룡사 9층목탑이 원래 건설된 시기는 7세기인 645년입니다. 하지만, 고려대인 10세기 (945년)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인 1021년에 완성했고, 그 후 1035년과 1095년에 보수공사 3년(1012)에 고려전기 별궁중 하나였던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고려건축'으로 보아도 될 만큼 중건과 재건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응현목탑은 1196년의 것이고, 연복사 목탑뿐 아니라 만복사 5층전각은 황룡사 9층목탑이 재건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11세기에 완공된 건축물들입니다. 즉, 연복사 5층목탑을 건설하던 당시, 동시에 황룡사 9층목탑이 같이 재건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고려대의 건축술이 신라의 것과 합쳐졌을 것이고, 당시 최신기술인 연복사 목탑 (이나 만복사 전각)의 내부구조와 비슷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12세기경 황룡사를 방문 목탑을 오른 고려중기 문인 김극기(생몰년미상)와 12-13세기 고려중기 승려인 혜심(慧諶, 1178~ 1234년)의 다음의 두 시는 11세기 연복사 목탑과 함께 재건립된 황룡사 목탑을 오른 것입니다.

황룡사 목탑을 올라

層梯繞欲飛空
萬水千山一望通
俯視東都何限戶
蜂窠蟻穴轉溟

층계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수많은 하천과 산들이 한눈에 보이네.
굽어보니 옛 도읍지의 수많은 집들이
벌집과 개미집 같이 아득하게 보이네.

一層看了一層看
步步登高望漸寬
地面坦然平似削
殘民破戶平堪觀

한 층 다 둘러보고, 또 한 층을 보면서
걸음걸음 올라서 점점 더 멀리 바라보니
지면은 깎은 듯이 평평하게만 보이는데
가난한 백성들의 부서진 집을 차마 볼수 없구나.

따라서, 오늘 소개한 연복사 목탑의 구조는 황룡사 목탑의 구조파악과 복원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침 (安琛, 1445~1515년)의 싯구를 보며 필자가 가지고 있는 저녁노을의 응현목탑 사진이 오버랩되어 나눕니다. 우리에겐 아기자기한 한옥과 단층건축의 소박한 미학만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미학의 광경을 언제간 보고 싶습니다.

연복사 층각에 오르며
안침

한 번 높다란 누각에 올라
저녁노을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솟은 모습
참으로 드높구나.

바람 앞에 풍령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듯 속삭이며

구름 밖에 있는 나의 심산은
하늘 향해 곧장 날아갈 듯

청산에 에워쌓인 황성에 
부질없이 꼿꼿하게 서 있으며

연기오르는 황량한 마을
저물도록 눈을 뗄 수가 없구나.

더구나 해마다 올라와
한탄하는 자가 있으리니
저녁노을속 중국 불궁사 응현 5층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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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8/31 19:42 # 삭제

    잘보고갑니다 ^^
  • 역사관심 2015/08/31 23:03 #

    감사합니다 ^^ 좋은 한주 되시길.
  • 나무꾼 2015/09/04 17:26 # 삭제

    너무좋은자료 잘보고갑니다
  • 역사관심 2015/09/05 11:52 #

    고맙습니다~.
  • 오징어쨈 2015/09/26 16:49 # 삭제

    정말안타깝습니다.. 하루빨리복원됫으면..
  • 역사관심 2015/09/27 01:44 #

    동감입니다.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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