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백제유민의 고구려 동명성왕 인식 역사

이런 구절을 보면 백제인들에게 고구려시조인 동명왕(주몽)에 대한 시조의식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보입니다.

기언 동사(東事) 고구려세가(高句麗世家) 상권

百濟飢。東北落亡入句麗者千餘家。立始祖東明王祠。
백제에 기근이 들어 동북쪽 부락에서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오는 자들이 1000여 가호였다. 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百濟飢. 백제, 기근이 들다.
東北落亡入句麗者千餘家. (백제의) 동북쪽의 망한 이들이 고구려(구려)로 천여호 들어왔다.
立始祖東明王祠。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물론 고구려에 정착하기 위해 억지로 세운 것일수도 있지만 맥락상 백제유민들이 스스로 세운 느낌입니다. '시조사당'을 세운다는 의미가 당시에 정확히 어떤 맥락인지를 파악해야 하겠지요.

온조와 비류가 어머니인 소서노를 따라 백제에 들어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 ? ~ 28년)이 되었지만 (비류시조설도 있습니다), 둘의 아버지인 '주몽'(동명성왕)을 심정적인 시조로 본다는 설도 있는데, 이런 구절은 그런 맥락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온조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역시 백제에서 동명왕 사당을 세운 기록도 있으니 어느정도 시기상 일맥상통하는 기록같기도 합니다.
평양 동명왕릉 옆의 동명성왕 동상

이 기록의 시기는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사망과 무휼 (즉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즉위 직후이니 AD 18년 (1세기)입니다. 백제는 초대 온조왕 36년째로 백제의 극초기 기록입니다.

===
추가: 고구려와 백제의 동명왕에 대한 전설은 후대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 만큼, 그리고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동명왕과의 관계등, 이 기록 역시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간략하게나마 아래 적륜님댓글과 답글로 달아 두었습니다.



덧글

  • 迪倫 2015/10/06 01:00 #

    고구려와 백제의 공통 계통인 부여에 원래 동명왕 전설이 있습니다. 보통 부여의 동명왕 전설을 고구려가 계승 차용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논형이나 후한서, 위략의 부여전에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백제의 기사는 부여 동명왕을 모시는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사무실이라 자세한 출전을 확인을 하기 어려워서... 대략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최근 송호정 선생이 부여에 대한 책을 내셨다고 해서 그 책의 소개들을 한번 찾아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10/06 23:35 #

    사실 글을 쓰고 자료를 더 찾아봤는데 일단 동북아재단에서 나온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라는 자료중 건국대 김기홍교수님은 이렇게 쓰고 있군요.
    ===
    주몽 신화에 대한 기존 인식은 두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화가 고구려 초 건국 과정
    에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경우와, 4세기 말 이후 5세기의 전성기에 정치적 의도에서 만들어지 고 그 후에 변형된 것이라고 보는 경우로 대별해볼 수 있다. 일제 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고구려 초기 역사를 불신하였는데, 장수왕이 고구려에 편입된 부여계 주민을 무마하고 부여계의 종가로 자부하기 위해 부여의 동명왕 전설을 개작하여 ‘추모왕(鄒牟王) 전설’을 만들었다는 견해를 내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같은 일시적 조작설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으나, 주몽에 관한 전설의 파편들이 전해지던 중에 그것들을 이용하여 4세기 말 이후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주몽 신화가 만들어지고 더 뒤에는 주몽의 출신 계통이 바뀌기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다.

    자료상으로 볼 때, 주몽이 활동했다는 기원전 1세기나 그 직후에 기록된 주몽 신화는 없다.
    따라서 신화가 후대에 조작되었던지, 당시에는 거의 구전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있을 뿐이다. 그런데 전해지는 주몽 신화 관련 자료들은 모두 5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점진적으로 그 양이 증가하는 것 같은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자료적으로 는 후대 성립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듯도 하지만 이에 대하여는 더욱 검토할 점들이 있다. 중략.

    그 뒤 고구려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여(夫餘) 방면에서 이주해온 일부 부여족이 합쳐져 맥족과 더불어 고구려인의 근간을 이루었다.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사실상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건국 신화인 동명(東明)신화를 변용한 것으로 양자가 동일한 계통임을 알수 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종족 및 계통적 관계를 아는 데에는 이들 나라에서 국가적
    으로 숭배한 동명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모두 부여족이 건국의 중심이 된 나라들
    이니 부여의 시조를 공동의 조상으로 숭배했다는 견해가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러나 새 땅에서 새 나라를 세우는데 과연 수백 년 전 옛 나라의 시조를 다시 시조로 섬기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무엇보다도 고구려 동맹제에서 압록변 큰 굴의 수신을 모셔와 제사 드리고 있는데 그 고구려 땅의 여신이 낳은 아들이 부여
    족 공동의 시조 동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활을 잘 쏘는 공통의 특징을 가지고 건국에 나
    선 새로운 졸본부여의 영웅을 옛 부여의 시조와 같이 동명이라고 부르고 숭배의 도를 더해
    갔을 듯하다.

    이렇게 볼 때, 온조가 부왕이 죽자 졸본부여를 이복형인 유리에게 양보하고 남으로 내려와
    건국과 동시에 동명왕묘 즉 동명왕 사당을 세운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막 서거한 자신
    및 동행한 주민들에게 큰 감화력이 있는, 이미 신화적 존재가 된 자신의 부왕을 추모하며 건국 사업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백제에서는 고구려와의 적대 관계가 심화되고 남천(南遷)과 더불어 그 시조를 구이(仇台)로 바꾸어 모시기 전까지 온조의 부왕인 졸본부여의 동명을 섬겼던 것이다. 사비로 천도한 백제가 남부여로 국호를 칭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때에 오히려 동명보다는 구이를 시조로 모셨던 사실은 백제에서 섬겼던 동명이 부여족 공동의 조상이 아닌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음, 여러 설이 있는데 확실히 흥미롭네요. ^^
  • 迪倫 2015/10/06 01:24 #

    고대사는 확실히 여러 학설이 나눠져서 어려운 분야인 것 같습니다. ㅠㅠ 최근 해석 경향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5/10/06 01:28 #

    아닙니다, 저도 이 분야는 잘 모르는데 저 기록을 보고 흥미가 동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적륜님말씀을 듣고 더 공부가 되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 요원009 2015/10/06 09:37 #

    근데 허목은 또 어떤 자료를 보고 저런 글을 남겼을까요?
  • 역사관심 2015/10/07 00:19 #

    사실 저도 정말 이 부분이 궁금해서 찾아봤지만, 동사가 외편으로 기재된 [기언]이 중국의 육경을 참조했다는 이야기만 나오고 깊이 있는 정보는 찾기가 힘들군요. 찾으면 업데이트 해드리겠습니다. 핵심정보인데 말이지요.
  • 역사관심 2015/10/07 00:35 #

    허목의 『동사(東事)』 저술(著述)과 그 동기 (2003) 일단 이 논문을 보고 싶은데 구할수가 없군요; 일단 기언의 '서문'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평소에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남겨서, 날마다 반성하고 노력하면서 나의 글을 《기언》이라 하였다. 이는 고인(古人)의 글을 읽기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고인의 실마리를 좇아 날마다 부지런히 힘쓴 결과였다. 《기언》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고 예악(禮樂)을 참고하고 백가(百家)의 변론을 널리 통한 것이니, 여기에 분발하여 힘을 다한 지 50년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간략하면서도 내용은 구비되었고, 장황하면서도 체제는 엄격하다. 천지의 화육(化育)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 풍우한서(風雨寒暑)의 왕래, 산천ㆍ초목ㆍ조수(鳥獸)ㆍ오곡(五穀)의 생장, 인사(人事)의 당연한 의리, 사람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 시서(詩書)ㆍ육예(六藝)의 가르침, 희로애락애오(喜怒哀樂愛惡) 등 형기(形氣)의 느낌, 제사ㆍ귀신ㆍ요상(妖祥)과 괴상한 사물 따위의 이변, 사방(四方) 풍기(風氣)의 구별, 음악과 민요의 차이, 기사(記事)ㆍ서사(敍事)ㆍ논사(論事)ㆍ답술(答述), 도(道)의 성쇠(盛衰)와 세상의 치란(治亂), 현인(賢人)ㆍ열사(烈士)ㆍ정부(貞婦), 간인(奸人)ㆍ반역자ㆍ우매한 자에 대한 경계 등 일체를 이 글에 포함시켜서 고인(古人)처럼 하기를 바란 것이다.
    정미년(1667, 현종8) 동지에 공암(孔巖)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쓴다.
  • 응가 2015/10/06 10:01 # 삭제

    상당히 흥미롭네요......
    조선시대때 시조로써 국가에서 평양의 단군릉, 기자묘, 동명왕릉, 김해의 수로왕릉, 경주의 오릉에 제사를 올렸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백제의 시조는 찾아볼수가 없었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동명성왕을 같은 시조로 두고있었다고 할수도 있는건가요?
  • 역사관심 2015/10/06 23:38 #

    사실 말씀하신 부분은 예전에 저도 궁금했던 부분인데, 확실한 건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정도로 생각되네요.
  • ㅇㅇ 2015/10/06 12:43 # 삭제

    애초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게 고구려 추모가 아니라 부여의 동명일수도 있겠죠

    그게 후대에 추모와 동명을 헷갈리게 사용하면서 잘못 알려질수도 있는거구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역사와 조선유교 조선사대부만 왜곡된게 아니고

    조선이전 한국사도 전반적으로 왜곡됬는데

    유독 요즘 한국 주류역사학계나 인터넷에서는

    조선이전 한국사왜곡에 대해서는 이상한 상대주의 논리 적용하고

    조선유교관련 한국사왜곡은 절대주의 논리 적용하더군요

    참 이상한 이중성입니다

    게다가 조선유교사대부 일제식민사관 운운하시면서

    조선왕조를 이조라고 부르는거 문제없고

    임진왜란을 한국은 조일전쟁이라고 불러야된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분로쿠 게이초의 역이라고 부르는건 아무 문제 안된다

    이딴 논리 펼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조선시대 왜곡된거 싫어하는 분들 맞나요?


    잘못된 무개념 상대주의 그것도 굉장히 이중적인 상대주의 논리로

    한국사 바라보는 태도 분명 문제있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5/10/06 23:50 #

    음 이에 대해서는 일단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2009)라는 동북아역사재단 발행 책자를 한번 보시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추모와 동명이라는 명칭에 대한 고찰도 꽤 다룹니다. 제가 찾는 것으로는 이 토픽에서는 가장 최신에 속하는 자료인지라...(혹 다른 자료가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만 옮겨드리자면 유리왕관련 이런 내용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일제 시기 이래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전설적 인물이라는 이유로 실재가 부정
    된 고구려 초기 5왕의 존재 여부를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재위기에 주몽
    신화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초기의 5왕은 동명성왕(주몽), 유리왕,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이다.

    이들을 검증하는 데 제3자 입장인 중국 사서의 기록이 크게 참고가 된다. 『한서(漢書)』권
    99 왕망전에는 고구려 후 추(騶)가 보인다. 『삼국사기』와 연대를 맞추어보면 그는 유리왕에
    해당될수있다.‘ 추’는‘말먹이는사람’이란뜻인데주몽신화에서주몽이청소년기에가졌던 직업이기도 하다. 한편 주몽(추모)의 뜻은‘활을 잘 쏘는 자’이다. 따라서 부친을 찾아 동부여에서 내려온 명사수 유리가 역시 추모나 주몽으로 불리고 중국 측에서는 그를 외자로‘추’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최소한『삼국사기』가 전하는 유리왕과『한서』왕망전에 보이는 추는 부합될 가능성이 높다. 유리왕의 존재가 신빙할 만하다면, 유리왕의 기반이 되었을 부왕의 실재를 상정하는 것이 비약은 아닐 것이다. 대무신왕은『후한서(後漢書)』와『삼국지』동이전에 보이는 후한 광무제 건무 8년(32)에 후한에 사신을 보내고‘고구려 왕’으로 다시 칭해진 바로 그이다. 다시『후한서』동이전에 의하면 광무제 건무 25년(49)에 고구려가 기왕의 우호적 관계를 깨고 후한의 우북평, 어양, 태원 등지에 약탈을 감행한일이 보인다. 대규모의 중국 약탈을 시도한 왕은 그 통솔력이 막강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재해로 고초를 겪던 모본왕이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대무신왕이 죽고 왕자가 너무 어려서 4년 간 재위했다는 민중왕의 존재를 굳이 부정할 이유가 없다면 고구려 초기 5왕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왕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

    말씀하신 조선이전과 조선시대에 대한 이중잣대에 대해서는 깊이 고찰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 즉각적인 답변을 드리기는 힘듭니다. 다만,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 동아시아 각국의 당대-근대로 이어진 각각의 시선이 현재의 각국의 정체성과 서로에 대한 인식태도에 직결되는 느낌이 있어, 최근 새로운 담론이 많은데 꽤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 낙으네 2015/10/06 17:09 # 삭제

    저기서 말하는 동명왕이 주몽인지, 부여의 동명왕설화의 동명왕인지가 확실하지 않군요. 백제는 후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한 걸 보면 부여쪽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저기서 말하는 동명왕은 부여의 동명왕이 아닌가 합니다.
  • 역사관심 2015/10/06 23:37 #

    저도 확실치 않은데, 일단 위의 댓글을 달아두었습니다. 첫댓글의 답글을 한번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단 남부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더군요).
  • 無碍子 2015/10/06 18:16 #

    앞의 여러분이 말씀하셨지만 여기서 동명왕은 추모왕이 아니라 부여동명왕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온조왕원년(BC18년)에 동명왕사당(東明王廟)을 세우지만

    고구려는 대무신왕3년(AD20년)에야 동명왕사당(東明王廟)을 세웁니다.
  • 역사관심 2015/10/06 23:34 #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부여의 동명왕설화는 알고 있었는데, 위의 적륜님 댓글에도 달았듯 이쪽은 아직 배우는 단계라 확실한 답은 할수가 없습니다만, 고구려보다 백제가 (즉 온조왕이) 더 먼저 주몽을 추모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고구려의 경우 말씀대로 수십년 더 뒤에야 사당을 세우지만, 2009년의 저 논문을 보면 백제의 온조왕대의 사당이 부여가 아닌 자신의 부친, 즉 주몽을 모신 사당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수는 없는 듯 한데. 만약 이경우라면 같은 온조왕대 (온조 36년)의 저 백제유민들이 세운 사당 역시 같은 맥락일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지요.

    또한 동논문에서는 이미 고구려 대무신왕이전인 유리왕대에 사당설치기록은 없지만 주몽에 대한 신격화가 생겨났고, 이를 근거로 대무신왕대에 이르러 사당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더군요.

    확실히 더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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