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건축 (15)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의 2층 저택들 한국의 사라진 건축

80년대에 시작, 21세기들어 정리되기 시작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최대 성과중 하나가 바로 [한국구비문학대계]입니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군단위'로 수십명의 정리자가 녹음기를 가지고 설화와 민요등을 채록 정리하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이자, 한국 문화의 근간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핵심 프로젝트였습니다.

이중 1983년 10월 20일 대구직할시 북구 산격1동에서 수집한 설화에는 숙종대의 건축문화적인 면에서 흥미로운 설화가 전합니다. 대강의 이야기는 강원도를 기행하다 길을 잃은 숙종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촌부를 도와주고 한양으로 찾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녹음기록이므로 활자화 한 자료는 너무 길어, 여기서는 필자의 관심사 부분만 발췌했습니다. 그리고 대구사투리는 모두 고치지는 못했지만 어느정도 이해가능하게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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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설화가 전편이라고 하면서 후편을 이을까고 묻는 제보자에게 요청해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옴니버스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전편이 총석정 주변에 얽힌 이야기라면, 이 후편은 총석정을 벗어나 내금강,외금강 쪽으로 그 배경이 바뀌어지게 된다.

숙종대왕의 강원도 순행기 (2)

그래 이제 그 이듬해 일 년 지냈지. 팔월 스므 이튿날 강원도 총석정에서 인자 내금강을 가만 인자 외금강 안 되나 그자? 이제 갈 때가 됐는기라. 팔월 스무 이튿날 강원도 총석정에 가서 딱 내리니 손빠닥 같은 눈이 막 내린다. 작설로 오는 기라. ‘야, 이거 큰일났구나.’ 한 시간만 되면 교통이 두절되고 동사(凍死)하는 사람이 널럴하고 널부라지고. 곧 널리 흩어져 깔리고. 이런데 ‘내가 인자 올게 똑 죽을 운을 만냈구나.’ 하다, 한참 가다 보니 한 집에 불이 빤하고 아 글쇠리가 좌악짝 나는기라.' (주: 숙종의 이야기입니다)

중략.
[웃으면서]이러거든. “아, 나도 많이는 못 배웠다. 사서삼경(四書三經) 구경은 했네.” 지필묵은 떡 갖다줐는데 마 붓꼭대기 떡 거머쥐고 마 일필휘지 날리대는데 보니, 맹자 사천독 한 늠이 삼분지 이는 모르는 글자더구만. 얼마나 휘갈겼는지. 딱딱 접어가지고, “낼 아침에 일찌기 조회시에 고을원님한테 이, 이거 갖다 줘보고 이 소지를 보고도 내나 미 파 내라 하거들랑 한양으로 나를 찾아 오너라.” 

“하이구 할아버지, 어예든지 그 주소 좀 정확히 좀 적어 주십쇼.”
“내 주소는 적을 것도 없다. 서울 장안 안에 와서 제일 큰 집이 내집이다. 검은 개와집에 이층이라 하면 다 알 것이다.” 캤다 말이여. 그래 마 가 버맀네. 중략.

“내가 당신한테 시집 온 제가 올게가 칠 년째 아이가? 시집 오던 그 날 부모 형제 일가친척 아잡삼촌 이모외가꺼지 한 량, 두 량들도 돈을 칠년 동안 지라니 돈이 수십량이라. 그 돈을 내가 여어 준비해났고 행여 이 돈도 가가 모지래까 싶어가줄랑 내가 월짜아 팔았다.” 중략. 준비해 놓고. 살매망태기에다가 떡을 한 뭉치나 해 놓았네. 덮어놓고 이름도 성도 없이 껌은 개와집에 이층이라고 찾다가 못 찾고 서방님 고상하고 굶어 죽으까봐 감자, 서숙, 메물, 콩 오곡을 집어 넣어가지고, ...한뭉티기 넣어 짊어지고 가라한다.

“고맙기는 고맙소만은 여보, 나는 댕겨오먼 되지만 범이 개끓듯이 끓는 골짝에 밤에 자다가 대변이 매렵으면 나는 등불 써가주고 둘이 변소꺼정 갔다왔다 갔다.했는데, 당신 어쩌겠소?” 물으니, “걱정 마시요. 나는 하늘이 난 사람이요. 어는 범이 날 자묵겠소? 개유 급하마 요강 방아 들라놓고 내 똥누면 안되겠소? 댕겨 오시오.” ...“여보, 다녀 오겠소.”

중략. 이렇게 참 혼자 대깜작이 하나 거머쥐고 살매망태를 걸머지고 참 옛날 한양 천리 고마 몇 날 걸어야 되거든, 안 그래요? 이러니 혼차 걸어가는거야. 이래가 참 몇달 몇일을 갔는지 모르지만서도 한양을 턱 당도하여 요새같으면 하숙집이고 여관이지만 옛날은 봉래방이라. 봉래방아 주인을 떡 정해놓고, 그날부터 이제 가재 뒤지듯 막 뒤진거지. 인자 마, 어디든지 마 검은 기와집에 이층집 막 찾는거야.

하로 이틀내내 찾아 봐도 못 찾고, 효자동, 삼청동 겉은 데는 옛날 집이 그대로 있고 거기는 옛날부터 삼정승 육판서들이 자자하게 사는 곳인데 이 집에 가도 이층집, 저 집에 가도 이층집, 찾을 도리가 있나 하는거지. 그 때 이왕(李王) 시절에는 가까운 집안에다가 높은 벼슬 다 줘 놨으니, 전신만신 이가들 밖에 없는데 찾을 도리가 있나. 하여 이틀 수일 가야 십 여일이 넘어가고 한 보름 쯤 돼가지고 보니 여행노잣돈이 똑 떨어졌버리고 없네. 이제 굶어죽을 행편인데, 마 떡 주무이 뭉치난 바짝말른 그거 빾인 없다 인자. 중략.

“그 무슨 주소가 그런 주소가 있노? 범은 가죽을 쓰는 법이요, 사람은 이름 석 자 쓰는 법인데, 이름도 성도 없이 ‘검은 기와집에 이층집이라 하면 알 걸세. 아이구 그놈의 주소 더럽네.”

숙종대왕이 야순(夜巡) 나왔다가 그걸 봤다 이거지. “여보 여보, 당신, 산골 중놈이 길도깨비를 만났나, 똥을 밟았나 뭐어로 그래 혼차 자꾸 되뇌이나?” 물으니, “예, 할아버지. 그런게 아니고 제가 살기를 저 강원도 총석정에 사는데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에, 작년 팔월 스므 이튿날 저녁입니다. 한양성내 있는 할아버지가 약사약소 이런 일이 있어서 그 어른 찾으로 인사하려고 보름을 찾아도 안 되니 우리 참, ... 돈은 다 써버려서 ‘검은 기와집에 이층이라 하면 알 걸세’ 라고 해서 못 찾고 오늘밤 세고 이제 고향을 내려가는 길입니다.”

(숙종이) 가만 보니 맹자 사천독 한 사람이라. 여보게, 그 날 나무 내벼려두고 나 따라오면 내일 아침이면 검은 기와집, 이층집을 만날 수 있다.” “아이고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디든지 만나도록 좀 해 주시요.” 라고 하고 데리고 갔다... 중략. 따라가니 효자동을 들이미네. ‘쳇, 효자동은 옛날 들으니 삼정승 육판사 문무대신들이 사는 곳인데. 옳지, 이런 양반들 대성가집이 종놈 자는 방에 하룻밤 재워주려고 날 데리고 가나보다’싶어 따라가니, “이리 오이라.” 하니 육모벙치 쓴 놈이, “예에이.” 하고 대니,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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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1661~ 1720년)대면 17세기 후반이 됩니다. 물론 '구전설화'이며 사료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눈치채셨듯)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즉, 당시 고위직들의 2층집이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현전하는 조선후기의 저택들은 2층이 아주 드문 경우(문 등)를 제외하고는 전무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성리학적 관념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건축학적으로도 전면온돌이 일상화된 '단층한옥'이 보편화되었다고 생각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 2층 대감집들에 대한 저 이야기는 공상인 듯 들립니다. 하지만, 필자는 저 기록을 보았을 때 어떤 위화감 같은 것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선 숙종은 정확히 1590년대의 임진왜란 직후 황폐해진 한양과 전소된 경복궁을 가졌던 전후의 왕입니다. 따라서 숙종이 말하는 '검은 기와집의 2층집'은 근정전이 아닙니다. 그럼 어딜까요? 

당연히 창덕궁이라는 생각입니다. 창덕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지만, 선조 40년(1607)에 복구가 시작되어 광해군 2년(1610)에 재건되고, 다시 1623년 인조반정때 정전인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는 역사를 가집니다. 그러다가 인조 25년(1647)에 가서야 복구가 완료되어 왕들은 약 300년간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되죠 (물론 창경궁도 씁니다만). 

숙종이 1674년 어린나이로 즉위하기 직전에 창덕궁에는 새로운 건물도 들어서고, 그 자신이 왕이 된 후에 화재도 일어납니다. 효종 7∼8년(1656∼7)에는 만수전(萬壽殿), 춘휘전(春輝殿, 현재는 선원전), 집상전(集祥殿), 천경루(千慶樓) 등을 건립하였으나 정면9칸의 45칸 규모의 왕대비를 위한 만수전과 천경루는 숙종 13년(1687)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 두 건물은 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 설화가 만약 '진짜 있었던 일'을 각색한 것이라면 검은 2층집은 17세기에 있었던 창덕궁의 어떤 '루'가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현재도 창덕궁에는 다른 궁과 달리 복층구조의 건축이 꽤 있습니다 (인정전과 억석루- 이중 억석루는 올라가는 구조). 

또한 당시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에도 복층루가 있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희궁은 1617년을 시작으로 1623년 광해군대에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집니다. 따라서 이 초창기 '루'들은 위의 기록과 비슷한 17세기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저 '숙종 설화'의 숙종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이궐체제를 갖췄기 때문에, 설화의 누는 경희궁(경덕궁)의 건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년)의 [홍재전서]에는 봉상루를 묘사한 시가 전합니다.

홍재전서 춘저록(春邸錄)
봉상루(鳳翔樓)

층루가 구중의 푸른 하늘에 날아 나오니 / 層樓飛出九重霄
역력히도 은하수 위에 다리를 놓을 만하네 / 歷歷明河上可橋
봉황이 대궐 뜰에 나는 건 다 성왕의 세대라 / 瑞鳳翔庭渾聖世
축하 소리 들레는 원일에 우소를 연주하도다 / 賀騰元日奏虞韶

봉상루라는 건물로 현재 경희궁 홈페이지에서는 그래픽으로 복원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같은 경희루의 이층루로 용비루(龍飛樓)라는 건물도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추후 포스팅에 다룬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에서 보이는 모습보다 오히려 앞뒤너비가 짧은 모습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용비루와 봉상루 (서궐도 중 확대)

이런 루중 하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궁궐이야 그렇다치고, 이 구절이 참 재미있습니다 "효자동, 삼청동 겉은 데는 옛날 집이 그대로 있고 거기는 옛날부터 삼정승 육판서들이 자자하게 사는 곳인데 이 집에 가도 이층집, 저 집에 가도 이층집, 찾을 도리가 있나 하는거지."

즉, 임진왜란이후에도 효자동, 삼청동의 몇 대관들의 집은 오래된 저택들이 있는데 여기는 온통 이층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임란 직후는 무조건 단층한옥의 정형화'라는 하나의 편견을 깨주는 기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일까요, 혹 그냥 구전 설화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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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저택 2층건축들

21세기 들어 많은 자료가 디지털화되고 아카이빙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택에서 보존되어 오던 고문서들이 하나하나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중 한국 건축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글이 길어져 추후 이런 자료들은 나누어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우선 첫 주자로 [인평대군저택 상량문]이라는 중요한 문서와 연관된 회화가 있습니다. 우선 집을 지을때 쓰는 글인 '상량문'의 원문을 보시죠.

계곡선생집 잡저(雜著) 76수
인평대군의 새 저택에 대한 상량문[麟坪大君新第上樑文] 이하는 속고(續稿)임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성스러움에 경사가 저절로 후손에까지 이르렀고, 위(衛) 나라 공자(公子) 형(荊)은 검소하게 생활하여 공자(孔子)의 칭찬을 받았는데, 이는 경전(經傳)에 기록된 바로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이치라 하겠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타고난 자질이 특출하고 금옥(金玉)과 같은 정기(精氣)를 몸에 간직하였는데, 그 인후(仁厚)한 성품으로 말한다면 어찌 꼭 일각(一角 기린(麒麟))에게 양보해야만 하겠는가. 그 빛나도록 존귀한 자태야말로 다생(多生)에 걸쳐 복의 씨앗을 뿌린 결과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아보(阿保 유모(乳母))의 손에 맡겨져 있을 때부터 부왕(父王)의 가르침을 듬뿍 받았는데, 더구나 지금 주저(朱邸 서울에 있는 공후(公侯)의 저택)를 하사받음에 어찌 좋은 집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터를 물색하며 거북이에 물어보니 바로 저 낙산(駱山) 언덕을 점지하였다. 내[川]가 반으로 나뉘어 두 갈래로 흐르는 이곳이야말로 평소 낙양(洛陽) 동촌(東村)의 승지(勝地)로 일컬어져 온 곳으로서 거리가 또한 금어(禁籞 비원(祕苑)을 말함)와 가까워 멀리 천극(天極) 북신(北辰 북극성)의 존엄한 처소를 우러러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기공식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공인(工人)들이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다시금 듣건대 노위(魯衛)처럼 사뭇 가깝다 하니 당체(棠棣)의 아름다운 정의(情宜)를 더욱 알 수 있겠다. 누각 세우고 연못 팔 필요 없이 높은 덴 높게 하고 낮은 덴 낮게 하며, 오직 대[竹]가 들어차듯 아래를 굳게 하고 소나무 무성하듯 위를 치밀히 손질하여 비 새고 바람 불 염려만 없게 했다. 그리고 위엔 왕골 기직, 아래는 대자리 깔아 종 치는 소리 듣고 모여들 와 식사하게 하였다.

차공(次公)이 조심하며 몸을 단속한 것이야말로 잠규(箴規)라 할 것이요, 장로(長老)가 ‘으리으리하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선송(善頌)과 선도(善禱)가 다 같이 이루어졌다 하겠다 (주: 이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 헌문자(獻文子)의 집을 보고 장로(長老)가 으리으리하다고 하면서 은근히 비난하자 문자가 삼가는 태도로 답변을 하면서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를 두고 군자가 장로에 대해 선송(善頌)했다고 하고 문자의 말에 대해서 선도(善禱)했다고 평한 것, 禮記 檀弓下). 이에 나름대로 옛사람들이 진술했던 뜻을 사모하여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을 기려 볼까 한다.

여보게들 들보 동쪽에 떡 하나 던지게나 / 兒郞偉抛梁東
낙타봉 그늘이 집에까지 들어오네 / 駞駱峯陰入戶中
앞으로 이름난 동산 주인 맞게 되었으니 / 從此名園還有主
대나무며 꽃잎새에 봄바람 불겠구려 / 一區花竹更春風

여보게들 들보 남쪽에 떡 하나 던지게나 / 兒郞偉抛梁南
비온 뒤 남산의 빛 마냥 더 푸르르네 / 雨後終南色勝藍
운무(雲霧) 끝없이 눈 아래 펼쳐지니 / 無限雲煙供眼底
버선 신고 신발 신고 산 오를 일 뭐 있겠나 / 不煩鞋襪强登探

여보게들 들보 서쪽에 떡 하나 던지게나 / 兒郞偉抛梁西
멋진 집 오르락내리락 가지런히 보인다네 / 華屋參差望裡齊
형과 아우 이웃하여 사는 것 알겠느니 / 知是弟兄聯棟宇
상체(常棣)의 시 그 누가 그런 제목 붙였던고 / 棣花詩什爲誰題

여보게들 들보 북쪽에 떡 하나 던지게나 / 兒郞爲抛梁北
밤이면 난간 마루 북극성 보인다네 / 夜夜憑闌瞻紫極
상제님 앉으신 자리 분간하기 어려우나 / 淸都帝座逈難分
상서로운 오색 구름 찬연히 빛난다오 / 唯見祥雲騰五色

여보게들 들보 위에 떡 하나 던지게나 / 兒郞偉抛梁上
지붕 너머 푸른 뫼 그림처럼 둘러 있네 / 屋上靑山如畫障
창문에 발일랑 드리우지 마오시라 / 軒窓不許下朱簾
맑은 바람 불어와 안부를 물을 테니 / 爲愛晴嵐來獻狀

여보게들 들보 아래 떡 하나 던지게나 / 兒郞偉抛梁下
제비며 참새며 큰 집 좋다 들고 나네 / 燕雀紛紛喜大廈
달 누각 바람 누대 이 아니 좋을손가 / 月榭風臺豈不佳
방 안에 향로 하나 적요하기 그지없네 / 薰爐一室偏瀟灑

삼가 바라노니 들보를 올린 뒤에 집안과 나라 환락을 같이하고 몸과 마음 다 같이 편안해지시기를. 동쪽과 서쪽으로 마주 향해 서 있는 집, 하늘 위의 삼신(參辰)을 비웃는 듯 보이는데, 형님은 질나발 아우는 피리 불며 인간 세상 깊은 낙 모두 다 누리시라. 양궁(兩宮)의 은총 듬뿍 받아 백 년의 복록 향유하고 후손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명성 떨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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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기문의 주인공인 인평대군과 봉림대군 (후일 효종)의 집이 아래 그림에 그려져 있습니다. 위의 기문말미에 나오는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마주 향해 서 있는 집' 그대로입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형제의 집이 지척으로 마주 봅니다.
麟坪大君坊全圖 (규장각 소장)

거의 건축평면도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인평대군방전도] 즉 1650년대의 인조(仁祖)의 셋째 왕자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 1658년)과 형인 봉림대군 (1619 ~ 1659년)의 저택을 그린 작품입니다. 17세기의 조선후기저택을 살필 수 있는 아주 귀한 회화로 바로 올해 (2015년) 6월의 논문인 '麟坪大君房全圖』와 御製祭文을 통해 본 朝鮮王室의 友愛 宣揚'에서는 이 회화의 연대를 1792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792년에 정조가 徐榮輔에게 인평대군 사당을 봉심하고 인평대군 제택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 명하였다는 제문기록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저택구조연구에도 도움이 되지만, 필자의 관심사는 역시 '복층루'에 있는 만큼 이에 촛점을 맞추고 글을 씁니다. 우선 확대된 그림을 보시지요. 첫 그림은 동생인 인평대군의 저택입니다. 
석양루(夕陽樓, 1641)

이 저택중 붉은 색 동그라미 부분을 봐 주십시오. 이 건축물은 현재 한옥저택 (민속촌등)에서 보기 힘든 형태로 2층입니다. 이것은 1641년 인평대군이 건립한 '석양루(夕陽樓)'라는 건물입니다.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조선시대의 '무슨무슨루'라고 할때 생각하는 벽체가 없이 정자를 높은 마루로 올린 단층형태 혹은 복층 (경회루)의 기둥구조물이 아니지요. 필자가 고려시대의 '벽체와 창문'이 있는 침루를 비롯한 수많은 '루'에 근접한 모습으로 비록 이중의 처마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2층의 벽체가 있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조양루(朝陽樓)'로 이것은 그가 15세때인 1633년에 지은 것입니다. 즉, 위의 석양루가 8년이 늦은 건물이 됩니다. 아래 확대그림에서 오른쪽의 중심건축물을 말합니다.
조양루(朝陽樓, 1633)

이 두 건축물은 그 형태도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스토리텔링적인 측면에서도 매력이 넘칩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형이 1633년에 "아침해누각"이라는 의미의 朝陽樓를 세우자, 8년뒤 동생이 "저녁해누각"이라는 夕陽樓를 지은 것이죠. 이 두분은 3살 터울의 형제로 (삼형제중 둘째 셋째, 큰형이 그 불행한 소현세자) 매우 친밀했는데, 당시로썬 획기적인 이 2층루의 창문에 각각 동아줄을 연결, 령색(鈴索)으로 불리는 방울을 달아서 서로 서신을 왕래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이 기록만으로도 두 누각의 높이가 여타 저택 단층건물보다 높았음이 드러납니다.

형인 봉림대군이 1649년 효종이 된 후 인평대군은 여러 가지 보호를 받아 제택의 규모를 화려하게 늘렸다고 나오므로 이 저택보다 커지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1641년 석양루의 건립에서 49년사이의 두 저택을 묘사한 것입니다. 참고로 또다른 2층추정 루인 왼쪽의 건물은 계경헌이라는 건물입니다.

현재 통용중인 번역본의 오류 하나를 지적하죠. 위에 굵은체로 표기된 부분 즉, "누각 세우고 연못 팔 필요 없이 높은 덴 높게 하고 낮은 덴 낮게 하며," 이 부분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不必崇臺曲池。極高高下下之觀。

여기에는 어디에도 '누각' (루)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臺' (대 대)가 있을 뿐이죠. 臺 (대)와 樓(루)는 엄연히 다른 건축물입니다. 워낙 벽체와 창문이 있는 2층 전통건축이 전하는 것이 없다보니, 亭, 樓, 그리고 臺 까지 혼용해서 대충 번역하는 느낌이 있는데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정'과 '누'는 확연히 구분하는 기록이 많습니다. 건축용어를 잘 모르는 경우 원문의 단어를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이 조양루, 석양루가 그냥 관망용 루가 아닌 실제로 먹고자는 침숙형이었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 이 조양루, 석양루에 관해서는 꽤 연구가 현재진행형으로 가는 느낌이 있어 다행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이와 아주 비근한 건축물이 조선시대 실사 회화에 전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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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도에 나오는 17세기 2층 청풍각

아래 보이는 그림은 겸재 정선(鄭歚, 1676~1759년)이 그린 청풍계도(淸風溪圖)라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청풍계(淸風溪)라는 인왕산 동쪽 기슭,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에 있던 선원 김상용의 별장을 실사로 그린 작품입니다. 즉, 김상용의 상주저택이 아닌 별장으로, 1607년 김상용이 지은 별장입니다. 여기가 어디냐하면 경복궁에서 서북쪽으로 조금가서 인왕산 기슭, 그러니까 백운동 바로 아래쪽입니다. 지금은 서울 한가운데죠 (현재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림에서도 보이듯 가운데 방형 연못등 조선중후기 별장의 형태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淸風溪圖 (17세기, 고려대학교)

그런데 그림의 왼편을 잘 보시면 2층의 누각이 하나 서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확대해 보죠.
난간이 있고, 2층에 창이 있는 형태의 건축물입니다. 17세기의 이 건축물은 '청풍지각 (청풍각)'이라고 합니다- 즉 당시 관직자의 별장의 중심건축물이 됩니다. 그럼 이 건물과 앞서 살펴본 조양루, 석양루, 그리고 계경헌을 한번 비교해 보죠.
이 거의 같은 시기의 (1600년대 초중반) 네 건물은 매우 흡사해 보입니다- 계경헌의 경우 아주 높은 기단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세 건축물은 거의 동일합니다. 그런데, 같은 정선의 그림으로 호암미술관에도 또다른 청풍계도가 있습니다 (사실 정선이 그린 청풍계는 꽤 많습니다).

淸風溪圖 (17세기, 호암미술관)

이 그림을 보면 특이하게도 이 건물의 앞에 서 있는 나무를 기점으로 뒷편은 단층, 앞쪽은 2층건축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이 건물은 앞서 조-석양루처럼 비교적 짧은 길이를 가진 이층건축이 단층옆에 바로 붙어있을 가능성과 혹은 다른 겸재그림에도 보이듯, 단층건축이 이어지다가 경사가 급해지는 부분을 2층으로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도 복층누각을 17세기 (조선후기)에 만드는 경우 난간의 형태를 비롯, 이런 식의 양식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청풍지각을 확대한 버젼입니다.
또다른 청풍계도로 역시 간송미술관 소장판의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확대해 보죠
이런 형식의 '루'를 한번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언급한 건물들처럼 세력가의 한양내 저택의 루는 아니지만, 이렇게 기록과 회화로만 전하는 17세기 혹은 18세기의 당시 건축물이 작은 부속건물이지만 두 채 (필자가 파악하는 한) 남아 있습니다. 감로루(感露樓)와 영풍루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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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루(感露樓)

감로루(感露樓)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에 이있는데, 바로 17세기인 1600년대에 박종린(朴從鱗)의 묘하 재사(墓下齋舍)인 예천 희이재사(醴泉 希夷齋舍)의 부속건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희이재사(希夷齋舍)는 박종린(1496∼1553년)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건물로, 17세기에 박종린의 손자 희이당(希夷當) 박수겸이 희이정사(希夷精舍)로 건립했는데 18세기 중반 희이정사가 쇠락하여 원래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옮겨 지으면서 희이재사로 이름을 고칩니다. 따라서 감로루 역시 18세기 중반의 건축으로 봐도 되지만, 임란등의 소실이 아니라, 있던 건물을 이전한 것으로 본다면 17세기 형식을 그대로 따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화재청의 설명에도 1600년대 건립된 건축으로 원형보존이 양호하고 구조에서도 건물당시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감로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복층 누각 건물로, 누하층(樓下層)에는 대문을 내서 재실로 통하게 만들었고, 좌우에는 마구간과 함실아궁이를 설치했습니다. 하층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으로 조선후기의 온돌결합 2층건물을 보여주는 특이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소규모 누각임에도 벽체가 있고 창이 있는 드물게 남아있는 당시의 건축으로 2층에 올라서면 이런 풍경이 됩니다.
뒷쪽은 이런 모습입니다. 

필자가 나름 주목한 것은 이 감로루의 옆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모습이 청풍각과 매우 닮아 보입니다.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일단 난간의 구조라든가 형태가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봉화 송석헌(奉化 松石軒)

더 후대인 18세기의 2층건물로 또 하나는 사복사정(司僕侍正)이었던 권이번(權以番, 1678~1763년)이 아들 권명신(權命申, 1706-1778년)에게 1700년대 중반 지어준, 송석헌의 별채인 영풍루(迎風樓)가 있습니다. 
이 건축은 앞서 살펴본 대저택에 있는 루는 아니지만, 벽체가 존재하는 후대의 건축물로 꽤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사랑채 역시 2층은 아니지만 높은 기단으로 복층의 효과를 냅니다.
두 건물은 이렇게 일종의 짧은 통랑으로 멋지게 이어져 있습니다.

결언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글은 어디까지나 17세기 이후, 즉 1592년의 임진왜란 발발 이후의 건축중 복층구조에 관한 글입니다. 예전에 다루었던 고려시대의 침루를 비롯한 2층루나 임진왜란이전으로 분류되는 조선전기의 경복궁의 누각형태가 이런 식이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다루고 싶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건축의 변화에 대해서는 최근 꽤 자세한 연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가지만 보여드리자면 윤국형 (尹國馨, 1543~1611년)의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나오는 이런 부분을 보면 그 극심한 단절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소만록 聞韶漫錄 중:
내가 상주를 다스린 지 3년 동안 온 집안의 위아래가 아무런 병 없이 늙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서 명절이나 좋은 때든 혹 그런 때가 아니라도 잔치를 벌여 즐겼으니, 망극한 임금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었다. 난리(임진왜란) 후에 다시 이곳을 지나가니, 노래하던 집이나 춤추던 누각이 모두 여우나 토끼의 굴이 되었으니, 마음이 상하고 보기 참혹함을 어떻게 이루 형용하겠는가. 높은 것이 극에 달하면 무너지는 것이 비록 이치의 당연함이라고는 하지만, 뜻밖에 재앙을 당하게 되니 하늘이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고 눈을 닦고 기다렸건만, 요망스러운 기운을 쓸어내지 못하니, 통곡한들 무엇하랴.

위의 기록은 경북상주의 임란후 황폐한 건축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올해 (2015) 3월에 나온 한국학논집의 [임진왜란 전후 영남지방 건축의 전개]라는 논문을 보면 이 영남지방의 전후 건축술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간략해지죠.

서원의 사당 건축은 대공 위치에서 촉주와 운공이 소로와 결구된 형식에서 판대공으로 (전후) 간략화되는 현상이 확인된다. 서원의 강당 역시 동일한 간략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택건축에서 별당형 사랑채는 임난 이전에는 추녀를 사용하지 않은 형식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한쪽에만 추녀를 사용하는 형식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시대가 더 지나면 이런 모습은 사라지게 되고 추녀를 사용하는 형식이 우세하게 된다. 중략.

또 임난 직후 사찰 불전과 향교 대성전은 서로 다른 용도에도 불구하고 5량의 기본 구조, 다포 공포 형식, 간략한 맞배지붕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공통점을 통해 전란 직후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공이 단순화되는 경향을 추정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한 건물들은 임진왜란 바로 다음 시대인 17세기의 건축물이라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극히 드문 당시의 건축물들의 직접적인 가시적 회화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합니다. 예를 들어 당장 위에 설명한 '조양루'와 '석양루'를 참조해서 문화컨텐츠닷컴에서 만든 고려시대 침루입니다. 고려사에 김준등의 대저택의 건물높이가 '수 장'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런 규모는 작아 보이지만 당연히 여러 형태를 시험해 볼수 있는 것이고, 이런 시도는 아주 바람직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오산설림초고의 조선전기 저택의 침실 누각]은 이런 요즘의 2층한옥 형태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겠지요.
전주한옥마을의 2층여관, 교당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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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레이오트 2015/10/08 08:13 #

    굳이 주자학 근본주의를 들먹일 것도 없고 순수한 건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온돌이라는게 그 당시 건축기법과 자재로 봤을 때 2층 이상 건물을 짓지못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이제는 세계가 기억하고 연구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식당에 깔아놓은 온돌이 구조 붕괴를 가속화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현대 철근 콘크리트 건축에서도 상당한 부담인게 온돌인데 그 당시는 오죽했을까요.
  • 역사관심 2015/10/08 08:17 #

    그렇죠 온돌이 전면적으로 쓰이면서 확실히 단층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요즘 2층 한옥이 원래 우리에게는 전혀 없던 일식가옥이라는 식의 단순한 논조의 기사가 가끔 있는데, 오히려 통시적으로는 발란스를 맞추는 시도들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 레이오트 2015/10/08 08:41 #

    그런 기사를 보면 느끼는게 사실 기술이나 기법이라는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는데 일직선적 발전사관이 주요 논리로 작용하는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네요.
  • 역사관심 2015/10/08 08:46 #

    또한 현재까지의 자료부족으로 인한 연구의 미진함에도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런부분이 기사로 연결이 되는 것이니...
  • 낙으네 2015/10/08 10:27 # 삭제

    통량을 보니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군요 허허...
  • 역사관심 2015/10/08 12:40 #

    긴 통랑의 구조물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걸어 보고 싶네요. :)
  • 2015/10/08 17:33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역사관심 2015/10/10 05:05 #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당장은 답변이 어렵고 블로그의 상업화에 대한 부분인지라 고민을 조금 해봐야 할 듯 합니다. 이메일을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ㅇㅇ 2015/10/08 18:27 # 삭제

    보기에 송석헌이나 청풍계도 그림의 누각은 1층은 돌기둥 2층은 나무기둥으로 세운 누각, 누마루로 보이네요.
    그런데 저런 누는 많이 있지 않나요?
  • 역사관심 2015/10/08 23:51 #

    송석헌중 안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맞습니다. 본문에 썼듯 높은 기단(혹은 기둥)으로 받치고 난간을 뺀 구조고 이런 것은 꽤 많죠- 다만 영풍루같은 식의 2층건축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청풍각의 경우, 사실 회화의 묘사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이는 것같습니다- 예를 들어 하층의 빗살무늬를 그림자나 임시적으로 막는 목재판으로 본다면 말씀에 가까운 구조물이 될것입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석양루와 꽤 비근하게 본지라 일단 적어 두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s와경제 2015/10/08 19:28 # 삭제

    조선후기가 되면 저러한 이층가옥등이 점차 사라져 거의 자취를 감추고
    그 이유를 온돌과 비하여 소빙기의 영향으로 추측하는게 합리적이유라 생각이 되어도
    기존 통설에는 17세기까지만이 주로 연유되어 상당한 의문이 있었는데
    최근 동아3국 그중 조경남을 위시한 석순 프록시 활용으로 본 약 10년간의 연구결과를 보면
    단순히 17세기만이 아닌 19세기 말까지도 상당히 그 이전과는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일례로 하야미의 일본지역 인구변화르 보면 아열대기후인 관서의 인구가 2배 성장할때 반대로 관동지역의 인구는 절반가까이 감소하는 것을 보아도 학제간 연구성과의 반영이 너무 부실한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 역사관심 2015/10/08 23:57 #

    말씀하신 학제간 성과에 대한 통섭연구가 확실히 부족해 보입니다 (사실 다른 학과/분야간이전에 같은 역사쪽에서도 유구자료와 문헌자료간의 연계도 종종 끊어지는 감이 있으니). 이젠 온라인 DB의 활성화로 많은 인접 저널들의 접근성이 좋으니 서로 참조해가면서 좋은 연구가 많아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겠죠. ^^ 사실 '통설'이란 것을 특히 인문학쪽에선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쪽인데, 건축역사학의 경우 삼국, 고려, 조선식의 거대담론으로 묶어온 기존의 행태는 이젠 지양되어야 한다는 쪽입니다. 조선전기, 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문헌사료를 보면 조선극초기-15-6세기, 17세기 (특히 임란후 몇십년), 18세기, 19세기등 그 변화가 실로 생각보다 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이런 세부적인 시대구별과 통시적 시각이 필요해 보입니다. 조선후기 300년은 무조건 단층에 온돌이라는 개론적 설명은 조심할 필요가 있고, 조금 거칠게 사견을 피력하자면 이젠 폐기되어야 하는 20세기식 설명이라 생각됩니다.
  • 평론가 2015/10/09 13:45 # 삭제

    조선시대에도 누각이 어느정도 존재했었죠.
    그런데 봉상루가 육간 누각이군요. 시에서 과장된걸 보니 어느정도 규모가 있었던거 같고..
    고려시대 우대루에 대해서 한번더 생각해보면 좋은 자료군요.
  • 역사관심 2015/10/10 04:47 #

    사실 봉상루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도 유구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도 본 일이 없어 뭐라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저 규모인지, 3D복원의 근거나 Logic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묘사된 것을 보면 저런 규모보다 더 큰것 같기도 하구요.
    기실 가장 궁금한 주제는 엄밀히 말해 '루'와 '정'의 형태가 언제부터 유독 조선에서는 혼합되어 쓰이기 시작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현재 남아 전하는 경관용의 사방이 뚫린 단층 (사실 기둥이 있어 복층같아 보이지 실상 1층에 가까운)의 확장된 정자개념의 건축을 유독 '루'라고 주로 부르고 있어 (파악하는 한 동아시아에선 거의 유일하게) 부르고 있어 그 기원이 언제부터인지 궁금합니다. 고려대에만 해도 이런 식의 건축을 주로 루라고 하진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응가 2015/10/10 15:45 # 삭제

    그냥 단지 기단을 높게해서 밑을 비워두는 형태로 생각을 했는데 그게 전혀 아니군요. 지금도 남아있었더라면 더 좋았을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외에도 석어당같은 건물이 더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게 만드네요.... 징광루니 수원궁궐도의 2층누각이니 그런 누각이 남아있었으면 이야깃거리도 훨씬 다양할텐데 말입니다
  • 역사관심 2015/10/15 03:47 #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저런 식의 2층루형태보다 외려 일본 금각사처럼 중첨형식의 이중처마가 더 일반적인 것 같은데, 어떤 연유로 저런 형태가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또한 중첨형식의 일반 가루가 문루등을 제외하고 있었는지도...
  • 평론가 2015/10/18 17:23 # 삭제

    솔직히 중간에 기와집이 있어야만 루가 된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고려시조에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이야기하신듯 한데.. 그 당시 다른 나라에서도 루중에서 중간에 기와집이 없는 형태도 있고 고려시대를 재현한 위봉루도 중간에 난간만 있더군요.
  • 역사관심 2015/10/20 04:05 #

    그렇죠. 중간에 처마가 있건 없건 2층이면 다락개념으로 충분합니다. 위봉루는 사진을 보고 싶은데, 못찾겠네요.
  • 평론가 2015/10/25 00:04 # 삭제

    http://pds14.egloos.com/pds/200902/24/94/a0100594_49a38a38b53e0.jpg
    가상 복원건물인데 궁에서 제일큰 누대문입니다. 격구등을 관람하기도 해서 별명이 위봉루라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5/10/25 00:30 #

    아 고려정궁의 위봉루를 말씀하신 것이었군요. 이름이 낯이 익더라니 ^^;
    그런데 위봉루에 중첨형식이 없었다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 ㅇㅇ 2015/11/02 14:31 # 삭제

    제가 기억하는 것은 반란 승려가 도끼로 궁궐 누문의 기둥을 찍자 누각 위의 군인이 활로 그 승려의 머리를 쏴 죽였다는 기록이 있든 갈로 알고 있습니다. 중간에 처마가 있는 누각이었다면 그럴수가 없었겠죠.
  • ㅇㅇ 2015/11/02 14:36 # 삭제

    그리고 고려도경에서도 서긍이 말하길 무슨 건물에는 지붕이 중첨이 아니라 마치 문루같다 이런 표현을 했던 것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한옥도 과거의 마루를 깐 고상식 가옥과 흙바닥식(구들식) 가옥이 합쳐져서 만들어 진 것이죠.
    제 생각에는 이 고상식 가옥이 한국의 누각이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도.
  • 남중생 2017/01/27 00:49 #

    서울역사박물관의 "1784, 유만주의 한양" 전시를 가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쇠락한) 석양루에 자주 올라갔다는 내용의 유만주의 일기를 소개하면서, 여기 올리신 인평대군 방 전도도 실물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museum.seoul.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02&seq=20161122231340854&ss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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