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진짜 검객들- 검선 김체건, 신선 김홍기, 무가자 김광택 (그리고, 조선전기 궁궐에서 칼차던 무관들) 역사전통마

무휼, 이방지, 길태미, 길선미, 조영규...

팩션 사극의 진수 '뿌리깊은 나무(2011)'의 제작진이 4년만에 다시 뭉쳐 다시 히트작으로 떠오르고 있는 '육룡이 나르샤(2015)'는 뿌나에서 보다 한층 '무협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검객'들에 대한 조명이 초반부에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다섯 검객중, 유일한 실존인물은 '조영규'입니다. 나머지는 뿌나와 나르샤에서 창조해낸 검객들이지요. 참고로 조영규는 정몽주를 철퇴로 내리쳐 암살한 바로 그 무사입니다. 즉, 고려시대의 검객이자 무인이죠. 고려시대는 '무신정권'의 이미지가 있어 무인들은 당연히 용맹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문인'들중에서도 무술실력이 종종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최고 중앙기관이었던 도첨의사사의 핵심직인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을 지낸 이춘부의 아들인 이옥(李沃, ? ~1409년)은 고려말의 '문신'(공민왕대 문과급제)입니다. 아버지인 이춘부가 신돈일파로 몰려 처형되자, 이 사람은 노비로 강등, 강릉으로 보내집니다. 이때 왜구가 동해에 침입하는데 이 때 이옥의 무예를 눈여겨 보던 강릉부가 그를 채용, 왜구를 격퇴합니다. 이게 1372년의 일로 그의 무예수준을 보여주는 일화가 [용재총화]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옥은 侍中春富의 아들이다. 시중이 誅殺당하자 이옥은 강릉부의 노비로 편입되었다. 이때 왜구가 동해바닷가로 몰려와서 州郡을 약탈하니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피하였다. 강릉부의 앞뜰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이옥은 밤에 사람을 시켜 화살 수백개를 나무마다 꽂아 놓았다.

다음 날 상복을 벗고 말을 달려 바닷가로 나갔다. 몇 개의 화살을 적에게 쏘고는 거짓 패한 체하면서 나무 사이로 달려 들어가니 왜적이 구름과 같이 몰려왔는데, 이것을 혼자서 당해 내는데 꽃혔던 화살을 뽑아 적을 사살했다. 종횡으로 치달리며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힘써 전투를 그치지 않았다. 시위를 헛되게 당기지 아니하여 쏘기만 하면 반드시 맞아 죽었다. 시체가 줄줄이 이어지니, 이로부터 왜적이 군의 지경을 범하지 못하여 한 道가 그의 힘으로 편안하니 조정이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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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말선초의 이야기. 즉, 뿌리깊은 나무와 육룡이 나르샤의 시대입니다. 그럼 다음대인 유교의 나라, 조선시대에도 검객이라든가 무사들의 분위기가 있었을까요?
뿌리깊은 나무, 이방지 팬CG 아트 작품 (출처-http://me2.do/FdPpcif8)


칼을 찬 입궐자들- 문무의 밸런스, 조선 전기

작년인가, 삼국시대의 자객과 조선시대의 칼을 찬 문신들에 대해 살펴 본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시대의 이름이 전하는 대표검객들입니다. 사실 조선하면 떠오르는 유교와 문신의 유악한 느낌은 성리학과 선비, 그리고 임진왜란에서의 초반부 육군의 참패와 구한말의 모습의 굵직한 역사적 아이콘들의 조합으로 인해 500년 내내 그럴 것이라는 것이 대중적인 일반적 이미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아무리 멀리 잡아도 성종(成宗, 1494~ 1495년) 이후, 엄밀히 말하자면 '인조반정'이후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조대는 물론 세종대까지도 (길게 보면 세조때까지도) 조선이란 나라의 지도층에게는 문무의 발란스라는 감각이 살아 있어, 양반중 무반들은 궁내에서도 칼을 차고 다닙니다. 이러던 것이 7대 세종대에 오면 슬슬 격구폐지론부터 시작, '무'에 대한 경시가 시작되는 느낌이지요. 세종때까지만 해도 '대신들이 (차지 않고) 하인들에게 칼을 들고 다니게 한다'라고 한탄하고 있을 만큼 분위기가 다릅니다.

우선 태조 이성계대의 모습은 마치 고려 무인정권같은 느낌입니다. 14세기말의 기록을 보면 동북야인(오랑캐) 추장들이 완전군장을 하고, 태조옆에서 지키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12월14일 (계묘)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3대 태종 (이방원) 역시 당연히 무를 중시하는데, 이 모습은 [용재총화]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종과 양녕대군의 관계
태종이 대궐에 감나무를 심고서 항상 열매를 완상하곤 했는데, 어느날 까마귀가 쪼아먹었다. 태종이 활 잘쏘는 이를 구해 쏘게 했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조정의 무사 가운데는 합당한 이가 없고 오직 세자가 합당하다고 아뢰었다.  태종이 즉시 세자에게 까마귀를 쏘라고 했다. 세자는 한 번에 두 마리를 맞혔다. 신하들이 모두 경하했다. 그동안 태종은 세자를 미워해서 오래도록 보지 않았는데, 이날에야 비로소 환하게 한 번 웃었다.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미워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 덕에 세종대왕님이 등장하시지만). 그 미워하는 세자를 순간이지만 좋아하고 인정하는 순간이 여기에 등장하는데 바로 양녕이 활로 까마귀를 한번에 두마리 잡자, 자기도 모르게 순간이지만 환하게 웃습니다. '무'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 지를 알 수 있는 일화죠.
이성계와 최영 (정도전 중)

다음대인 세종대왕 시절 역시 마찬가지. 이 때 기록을 보면 일반 백성들도 종종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이 나옵니다.

국조보감 세종 26년(갑자, 1444)
공수(龔遂)는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권장하였는데, 백성 중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자가 있으면 송아지를 사도록 권장하였다. 봄에는 들에 나가 일하기를 권하고 겨울에는 거두어들이기를 권하니 백성들이 다 풍요롭게 살았다. 

그런데 세종초기인 7년에 고려대의 대표적인 문화인 '격구'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있습니다. 격구가 무술과 어느정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기에 '무'에 대한 권신들의 시점변화가 이 시점에도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기록같습니다. 내용에도 '전투, 무예와 관계'를 강조하고 있지요.

세종 30권, 7년( 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1월 20일 을묘
격구를 폐하자는 사간원의 청을 윤허하지 않다

정사를 보았다. 사간원에서 계하기를,
“신 등이 가만히 병조의 공문서를 보니, 무과(武科)의 시취(試取)와 봄·가을의 도시(都試)에 모두 격구(擊毬)의 재주를 시험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졸들로 하여금 무예(武藝)를 연습하게 하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격구(擊毬) 유희는 고려가 왕성하던 때에 시작된 것으로서, 그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한갓 놀며 구경하는 실없는 유희의 도구가 되어, 호협(豪俠)한 풍습이 날로 성(盛)하여졌으나, 국가에 도움됨이 있었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옛날 중국의 한(漢) 나라와 당(唐)나라의 축국(蹴鞠) 격환(擊丸)이 다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비록 전투(戰鬪)를 익힌다고 하나, 다 유희하는 일이 될 뿐 만세(萬世)의 본보기가 될 만한 제도는 아닙니다. 선유(先儒) 주희(朱熹)도 또한 타구(打毬)는 무익한 일이므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과 태종 공정 대왕(恭定大王)께서 무예(武藝)의 기술을 훈련시키는 데 갖추어 실시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일찍이 이 격구에는 미치지 않았으니, 어찌 무익하다고 생각되어 실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 나라는 무예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이미 기사(騎射)와 창(槍) 쓰는 법이 있으니, 어찌 격구(擊毬)의 유희를 하여야만 도움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법은 다만 지금에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격구의 법을 정지(停止)하여 장래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격구하는 일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언(極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니, 지사간(知司諫) 고약해(高若海)가 대답하기를,

“신 등이 〈격구를〉 폐지하자고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성명(聖明)하신 이때에는 비록 폐단이 있기에 이르지 않으나, 뒷세상에 혹시나 어리석은 임금이 나서 오로지 이 일만을 힘쓰는 이가 있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옛 시[古詩] 한 귀절을 외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은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 때에 처음 시작하여 한(漢) 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송(宋) 나라·원(元)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 있었던 것이니, 저들이 어찌 폐단을 알지 못하고 하였겠는가. 다만 무예를 익히고자 하였을 뿐이다. 전조의 말기에도 또한 이 일을 시행하였으나, 그들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 어찌 격구의 탓이겠는가. 내가 이것을 설치한 것은 유희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군사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격구하는 곳이 성밖에 있으니,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하였다. (세종대왕은 강하게 반대하죠)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의 관원들이 나간 뒤에, 임금이 대언(代言)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이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 참으로 말타기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태종(太宗) 때에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유고(有故)하여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좌부대언(左副代言) 김자(金赭)가 대답하기를,
“전조의 말기에 모여서 격구를 보았으므로 인하여 음란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시대에는 비록 격구를 보지 않으나, 어찌 음란한 여자가 없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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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오던 무예겸 놀이인 격구를 없애자고 하는 김자등의 문신들에게 세종은 단칼에 없애지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이듯 이걸 없애고 싶어했던 문신들은 '여자와 함께 격구를 보기때문에 음란하다'는 되지 않은 이유를 대기에 이르지요.

이렇게 무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지 않던 세종대에는 '칼을 차고 시위'하는 제도를 부활시키기에 이릅니다.

세종 14년 임자(1432,선덕 7)  10월13일 (무술)
임금이 칼차고 시위하는 것에 관해 옛 제도를 상고하도록 이르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참찬관(參贊官) 권맹손(權孟孫) 등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매, 중국은 무신(武臣)만이 칼을 차고 시위(侍衛)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종왕(宗王)과 보신(輔臣)이라도 칼을 차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는데, 태종 때에도 찬성(贊成) 정역(鄭易)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중국의 신료(臣僚)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하니, 권맹손이 대답하기를, “중국의 제도는 안팎이 모두 큰 칼을 차고 시위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무반 재상(武班宰相)들도 모두 칼 차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심지어 거둥[幸行]할 때에도 별배[伴人]들을 시켜 칼을 차게 하니, 이것은 중국과 매우 같지 않다. 대저 칼을 차는 것은 단지 응변(應變)하자는 것만이 아니고 의식을 위한 것이니, 집현전(集賢殿) 관리들은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그리고 2주뒤 실행합니다.

세종 14년 임자(1432,선덕 7)  10월29일 (갑인)
병조에서 대소 무관이 입직하는 날에는 모두 칼을 차게 할 것을 아뢰다
중략.
오늘날 중국의 대소 무관(大小武官)이 모두 칼을 차옵는데, 오직 우리 나라의 무관(武官)만이 입직(入直)과 시위(侍衛)할 때에 원래 가지고 있던 병기(兵器)를 지닐 뿐이요, 칼을 아울러 차지 아니하옵니다. 2품 이상의 무관에 이르러서도 별운검(別雲劍) 이외의 무관들은 칼을 차지 아니하여, 역대와 현조정(現朝廷)의 제도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대소 무관이 입직하는 날에는 모두 칼을 차게 하옵시고, 행행할 때에는 본래 가지고 있던 병기를 가지되, 인하여 칼을 시위하도록 하는 것으로 항식(恒式)을 삼게 하소서. 대소 유신(大小儒臣)으로 무관의 직을 겸한 자도 위의 조항에 따라 칼을 차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뿐만 아니라, 세자가 머무는 '동궁' (원래는 궁밖에 있던 것이 세종대인 1427년에 궁안으로 들어오죠)의 '시종들'에게도 칼을 차게 합니다.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11월13일 (임진)
상정소에 동궁 시종인 중에 칼을 차게 할 사람의 수를 자세히 정하게 하다

임금이 상정소에서 동궁 시종인(東宮侍從人) 중에 칼을 차게 할 사람의 수(數)를 자세히 정하여 아뢰게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동궁의 시위 16인 중에 반수(半數)는 칼을 차게 하고, 반수는 활과 화살을 휴대하게 할 것이며, 중국 사신과 서로 만날 때에는 4품 이상은 칼을 차고 세자의 자리 뒤에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뒤의 영외(楹外)에 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뿐만 아니라, 보패갑사, 즉 조선초기까지는 대체로 부유한 층의 자제로 구성된 군대를 뜻한다는 갑사군의 경우, 이들 200명을 갑주를 입혀 무장시킵니다 (즉, 조선전기까지는 일반병사들도 갑주의 착용이 있었습니다).

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3월7일 (신미)
병조에서 보패갑사의 갑주의 개선을 건의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보패 갑사(步牌甲士)들이 착용한 갑주(甲冑)가 그 체제가 균일하지 않고 칠한 빛깔이 광채가 없어, 행행(行幸)하실 때나 사신(使臣)을 영접할 때 보기에 부끄럽사오니, 청하옵건대, 갑사 2백 명이 착용한 두모(兜牟)를 군기감(軍器監)의 첨(詹)이 있는 두모를 택하여 황단(黃丹)으로 이를 칠하고, 쇄아갑(鎖兒甲)의 아래 선[緣]과 소매는 홍염피(紅染皮)로 이를 장식하고, 사람마다 칼을 차고 바른편에 골타자(骨朶子)를 메게 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엄숙한 느낌을 갖도록 하소서.”
하였다.

황단을 칠했다는 것은 이런 색을 뜻합니다.
한손에는 칼을 한손에는 골타자를 둘러메게 했다는 부분이 있죠. 골타자라는 것은 긴 나무 끝에 마늘 모양의 둥근 쇠를 붙인 무기를 말합니다. 둥근 쇠붙이를 금, 은으로 도금한 금(은)골타자, 표범과 곰의 가죽으로 싼 표(웅)골타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일본의 질여골타疾藜骨朶)
말씀드린 대로 9대 성종대까지도 병조관원들은 병기를 모두 착용하고 입시합니다. 조참이란 말은 왕이 정전(正殿)에 친림(親臨)한 앞에, 모든 조신(朝臣)이 나아가 뵈는 일이며 평균 한달에 네차례, 그리고 조하는 조정(朝廷)에 나아가 왕께 하례(賀禮)함을 뜻합니다.

성종 4년 계사(1473,성화 9) 9월11일 (기해)
조참·조하에 입직하는 병조와 도총부의 당상·낭청은 병기를 갖추고 입시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이 뒤로는 조참(朝參)과 조하(朝賀)에, 병조(兵曹)에 입직(入直)한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각 1원(員)과 도총부 낭청(都摠府郞廳)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선전관(宣傳官)과 병조 낭청(兵曹郞廳)은 모두 칼을 차고 입시(入侍)하는 것을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병기의 경우 활은 이미 고려-조선시대에도 매우 뛰어나지만, 도검의 경우 임진왜란 이전인 14세기에도 이미 검을 만드는 기술은 일본이 뛰어났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시도가 많이 보입니다. 세종대의 기록을 보면 심을이란 사람이 검을 만드는 기술을 일본유학에서 전수받은 기록이 보입니다.

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6월 1일(경오)
일본에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을 한 자루 바친 심을에게 옷 등을 하사하다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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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선 전기의 궁내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종대에서 성종대를 살아간 문관인 허종(許琮, 1434 (세종16)~1494년 (성종25))의 경우인데, 같은 당대의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안로(金安老, 1481~1537년)가 쓴 야담집인 [용천담적기]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전합니다.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젊을 때부터 기개(氣槪)가 침착하고 굳세어 길을 가면서도 한 번도 좌우를 보지 않고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아서 간혹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다. 중략. 과거에 합격하여 군기 직장(軍器直長)이 될 때 광묘(光廟)가 문관(文官)을 뽑아 천문학을 연구하도록 하니, 공(公)이 추보법(推步法 천체 운행하는 법칙)을 연구하였다. 때마침 일식(日食)을 보고, 양정공이 일식법(日食法)을 추산하여 적어서 올리면서 끝에 소장(疏章)을 달아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사냥놀이를 그만두고 언론의 길을 열라는 등의 일을 말하니, 

국왕이 급히 내각(內閣)으로 불러들여 소장 중에 있는 말을 지적하며, 거짓으로 위엄과 노기를 띠면서 시험삼아 이르시기를, “내가 백 일을 돌아오지 않았다든지, 밀가루로 희생을 대신한 실수가 없는데, 네가 어찌 나를 하강(夏康)과 양무(梁武)에 비유하느냐.” 하고, 역사(力士)에게 명하여 그를 끄집어 내려서 원장(圓杖)으로 치게 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리를 떨었다. 

왕이 또 칼집에 든 칼을 무릎에 올려 놓고 명하기를, “내 칼이 칼집에서 다 빠지는 것을 보거든 곧장 목을 베라.” 하고, 서서히 칼을 빼니 서릿빛 같은 칼날이 사람에게 번쩍번쩍 비쳤다. 칼이 다 뽑혀 갈 때 역사(力士)가 도끼를 잡고 칼만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공은 여전히 변치 않고 질문에 따라서 틀림없이 대답하니, 왕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면서 이르기를, “참 장사로다. 늦게 만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잔을 드리라고 명하니, 공이 조용히 일어나 피를 씻어내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동여매고 술단지 있는 곳으로 가서 잔에 가득 부어서 올리는데 진퇴하는 품이 매우 찬찬하였다. 왕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더니, 마침내 정승에까지 이르렀다

여기 나오는 광묘는 7대왕 세조(世祖,재위1455~1468년)를 말합니다. 허종을 겁박하면서 세조가 직접 칼을 칼집에서 뽑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방지 (육룡이 나르샤 중)

조선 후기의 대표검객들

이제까지는 대체로 조선전기의 '왕'과 '궁내'의 무에 대한 시각을 맛보았다면 다음은 조금더 글의 주제에 맞닿은 인물들입니다. 즉, 조선후기 (18세기)의 이방지와 무휼같은 인물들입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이 시대는 이미 '무'는 약화되고 일반적으로 상대적으로 경시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기록이 없다뿐이지, 후기의 기록이 남아있는 다음의 인물들로 유추해보건데 드라마의 배경인 여말선초 (뿌.나., 나르샤)의 저러한 무인들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그 유명한 야뇌 백동수 (白東脩(1743 ~ 1816년)입니다. 사실 백동수의 경우는 소설과 드라마때문에 유명해진 경향이 강합니다. 그에 대한 실록등의 사서기록은 무예도보통지관련을 빼면 별게 없고, [야뇌당기]라는 백동수의 친구였던 이덕무의 글 (1761년)이 전하고 있지요 (야뇌라는 호도 이덕무가 짓습니다). 하지만 이 야뇌당기 역시 그의 인품에 대해 언급할 뿐 '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야뇌당기 원문

무예도보통지의 리더로서의 면모를 제외하면 백동수의 무를 측정할 수 있는 기록은 이런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연암 박지원의 [여한십가문초]의 기록입니다.

백영숙(永叔 백동수(白東修))은 장수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에는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있어 지금까지도 사대부들이 서글퍼하고 있다. 백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능하고 전고(典故)에도 숙달되어 있다. 젊어서는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무과(武科)에 급제도 했다. 비록 시운을 만나지 못해 영달하지는 못했지만 군주에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그 뜻은 충분히 선조의 공렬(功烈)을 계승할 만하여 사대부에게 부끄럽지가 않다.

사실, 현재 조선의 검객하면 대명사로 되어 있는 백동수는 따라서, 검객의 이미지보다는 조선후기 무예(검술포함)의 집대성자로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근해진 개념인 '조선 제일검'의 느낌을 백동수보다 훨씬 절절히 전해주는 검객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의 한세대 선배들이죠.
 
바로 백동수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실 추정일뿐 결정적 근거는 없습니다) 검선 김광택, 그리고 그의 부친인 검귀 김체건, 신선 김홍기의 3인방이 그들입니다. 다음은 조선후기의 유본학 (柳本學, 1770년~?)이 쓴 [김광택전]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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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선 김광택전[金光澤傳] 

金光澤者 漢京人 父體乾 斥弛之士也 
김광택은 서울 사람으로 아버지 체건은 느슨함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肅廟朝 益修鍊訓局武藝 以刀法莫如島夷 使軍卒肄習 
숙종때에 훈련도감의 무예를 수련함에 더하여, 칼 쓰는 법으로는 섬나라 오랑캐만 한 것이 없기에 군졸로 하여금 (왜검을) 익히게 하려 하였다. 

而倭之所秘 不可以學也 體乾自願得其法 遂潛入倭館 作雇奴 
그러나, 왜의 비밀이라 하여 배울 수가 없었던 바. 체건은 자원하여 그 기법을 얻고자 왜관으로 몰래 들어가 노비가 되었다. 

倭有神劍術 尤秘之 隣國人不得見 體乾瞰其相較 輒匿於地 中窺倣 
왜에는 신검술이 있었는데 그 또한 비밀이라 하여, (체건이) 이웃나라 사람이어도 보고 얻을 수가 없었다. 체건은 그 서로 겨루는 것을 엿보고, 바로 땅속에 움을 파고 숨어 엿보고 따라하였다. 

至數年 遂盡倭之技 無得可學也 
수년이 지나 드디어 왜의 기술을 다하여 더 배울 것이 없었다. 

嘗試於御前 眩幻驚人 莫知其端 
임금님(숙종)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환상인 듯하여 사람들을 끝없이 놀라게 하였다. 

又布灰於地 跣足用兩拇履灰 而舞劍如飛 舞竟 恢無足跡 其體輕如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上奇之 除訓局敎鍊之官 今諸營兵之用倭刀 自體乾始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훈련도감의 교사에 임명하였다. 오늘날 모든 영에서 병사들이 하는 왜도는 체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光澤生有異質 從金神仙字無可者 學却食輕身之術 
광택은 태어날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신선(김홍기)을 따르며 字를 '무가자'라고 하고는, 각식과 경신의 술법을 배웠다. 

楓岳去京四百里 金神仙一麻鞋三往而鞋不壞 光澤亦以一麻鞋再往而不壞 
서울에서 풍악(금강산)까지 400리를 가는데 김신선은 짚신 한 켤레로 3번을 왕복해도 신이 닳지 않았다. 광택 또한 짚신 한 켤레로 두 번을 오고가도 닳지 않았다. 

能胎息 冬月單衣 
능히 태식을 하며 겨울철에도 옷 한겹으로 지냈다. 

七八歲 體乾日推門往空  以筆 水 寫板廳上 學大字 故又善書  麗可愛 舞劍入神 作滿地落花勢 藏身不見云 
일고여덟살에 체건이 하루는 문을 밀고 텅빈 관사에 가서 붓을 물에 담그어 관청위의 현판을 베껴 쓰니, 배운 큰 글씨는 예스럽고 아름다웠으며 사랑할 만 하였다. (김체건의) 칼춤은 신의 경지에 이르러, 만지낙화세를 하면 몸이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年八十 顔如童子 死之日 人以爲屍解也 
나이 80에도 얼굴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죽는 날에야 사람들은 (체건이) 시해(도교의 술법중의 하나)하였음을 깨달았다. 

官至僉使 
관직은 첨사에 이르렀다. 

東方多緇徒而少道流 以修鍊得名 惟有金神仙一人 世皆稱之 而猶不知有光澤也 
우리나라에 많은 검은 옷을 입은 무리 -중 불자(佛者)- 가 있지만, 적은 도가(道家) 계열 중에 -검은 옷을 입은 무리는 많고 도가를 따르는 무리는 적으니- 수련으로 이름을 얻은 자는 오직 김신선 한 명으로 세상에서 모두 그를 일컬었다. 그러나, 오히려 광택이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體乾能得劍技 忠於國事 若用當其才 則是必立功邊 之士 
光澤又能傳其父之奇術 不亦異哉
체건은 능히 검기를 얻어 충성으로 나라에 봉사하니, 마땅히 그 재주를 사용하였다면, 곧바로 변방을 안위케 하여 공을 세웠을 것이다.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 또한 다르다 하겠는가? 

又卽劍仙之類乎
또한 이는 검선지류가 아닌가? 

尙判官得容 好奇士也 與光澤相識 嘗言其事 故錄之 
오히려 판관 득용이 기이한 선비를 좋아하여, 광택과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내며 일찍이 그 일을 이야기하니, 고로 그것을 기록하였다. 

夫委巷人有奇才異節 而泯沒無傳者又何限 豈獨體乾光澤也哉 
무릇 위항인 (비양반층의 지식인) 들은 기이한 재주가 있고 남다른 데가 있어도, 민몰하여 전하는 것이 없으니 또한 얼마나 한스러운지, 이런 것이 어찌 체건과 광택뿐이겠는가? 

重爲之嗟惜焉 ! 
실로 애석하고 아깝다 하겠다! 
=====

김광택전에는 김광택 (金光澤,1709?∼?) 뿐 아니라, 그의 부친인 김체건,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검객인 김홍기 (김신선)이 모두 등장합니다. 조선후기라는 시대적배경과 걸맞게 검술의 나라였던 왜관에 몰래 노비로 들어가, 움막을 파고 몰래검술을 마스터 하고 돌아옵니다. 그의 아버지인 김체선 역시 사도세자의 유고 문집인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의 「무예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조를 보면 "군문인(軍門人) 김체건이 일본에서 8종의 검법을 배워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아버지와 비슷한 행보를 보입니다.

아래 링크글의 조선살상조직인 '검계'를 소탕하고 궁에 침입한 자객과 드라마같은 접전(조선자객, 드라마자객 링크글)을 펼치기도 한 (그것도 노년에) 대장 장붕익(張鵬翼, 1674~1735)이 영조에게 ‘왜검은 선조(先朝) 무오(戊午)년에 김치근(金致謹)이라고 불리우는 자를 보내어 왜국에서 배워오게 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1678년 (숙종 4년)입니다. 이 해에 김치근이라는 이가 왜검을 일본에서 배워왔다는 것인데, 숙종대에 왜검을 배우기 위해 갔던 이는 '무예도보통지' 등의 기록을 통해 김체건이 확실하기 때문에 김치근이라는 인명은 김체건의 이름을 명확히 알지 못한 장붕익의 오해, 또는 당시 임금과 장붕익의 말을 옮긴 사관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설이 있습니다. (링크)

1678년의 사행에는 무인으로는 선전관 양익명(梁益命)과 마상재인 오순백(吳順伯), 형시정(邢時廷) 등이 동행합니다. '마상재인'라는 것은 기마술과 온갖 마상기예에 능한 인물을 뜻하는데 (아래 그림), 허인욱 선생에 따르면 오순백이 김체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언급한 숙종 8년 통신사행의 기록을 담은 '동사일록'과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을 보아도 5월 15일 통신사행이 경북 예천에 머물렀을 때, 사또가 그로 하여금 검무를 추게 했다. 그의 검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보는 자마다 그의 기이한 재주를 칭찬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오순백이 마상재 뿐 아니라, 검무에도 매우 빼어났음을 말하는데, 오순백과 관련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가능성이 매우 적기는 하지만, 혹 오순백이 김체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바로 이 기록이죠.

임술년 5월 15일(임술)
맑음.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아침밥을 먹고 일찍 떠나 예천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밤 달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 삼사가 객사 동헌(客舍東軒)에 모여 마상재 오순백(吳順白)을 시켜 검무(劍舞)를 추게 했더니, 구경꾼들이 담을 친 듯이 많이 모였다. 이날 30리를 갔다.
마상재도(馬上才圖·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마상재인들이 보인다 (1784년 통신사추정)

참고로 [학산록(學山錄)]이라는 일본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마상재인'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선국에는 마희(馬戱)라는 기예가 있는데 참으로 절묘하고도 기이한 재주이다. 와기(臥騎)·도기(倒騎)·전기(顚騎)같은 기술은 말하자면 잡희산악(雜戱散樂) 중의 일종이다. 나는 박경행(朴敬行)이라는 제술관을 만나 글로서 대화하였는데, 그는 붓으로 써서 말하기를 ‘적진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기술을 조선에서는 무예로 꼽는다. 봄·가을로 이 재주를 고시하여 그 우열을 가려 상을 내린다. 이와 같은 마상재인이 400~500명 있는데, 이기예가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유래는 이미 오래 된 것이다. 창검이 빽빽하고 깃발과 북소리 요란한 적진 속을, 이 기예로써 몸을 감추고 달려 들어가 적군의 깃발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어버리면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게 된다. 이런 무예는 중국에도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기예는 절박한 싸움터에서 일대 장관을 이루는 무예가 아니겠는가”.

그런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에게는 어린 시절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신선 김홍기입니다. 글에도 나오듯 이 사람은 무예가 출중, 400리를 세번 왕복해도 짚신의 바닥이 닳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재를 뿌려둔 바닥을 밟으며 검술을 해도 발바닥에 재가 묻지 않습니다. 그 추운 조선후기의 겨울에도 홑겹옷 하나로 거뜬합니다.

김광택의 아버지인 김체건도 마찬가지. 80세에도 어린아이 얼굴을 하고 죽은 이 사람은 칼춤을 추면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무협지...). 저자 유본학은 김체건같은 인물이 만약 장수가 되어 변방을 지켰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김광택전에 나오는 그의 스승 김홍기(김신선)에 대한 글이 따로 존재합니다. 바로 연암 박지원이 1764년경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김신선전]입니다. 그 중 일부를 볼까요?

김신선전

김신선의 이름은 홍기다. 나이 열 여섯 살 때에 장가들어서, 한 번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 뒤에 다시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곡식을 물리치고 벽만 바라보고 앉았더니, 두어 해 만에 몸이 별안간 가벼워졌다. 국내의 이름난 산들을 두루 찾아 노닐면서, 늘 한숨에 수백 리를 달리고는 해가 이르고 늦음을 따졌다. 다섯 해 만에 신을 한 번 바꿔 신었으며, 험한 곳을 만나면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가 언젠가 말하기를 "옷을 걷고 물을 건너거나 달리는 배를 타면, 내 걸음이 오히려 늦어진다." 하였다. 그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중략.

주인이 그제야 웃으면서 '너는 김홍기를 찾는구나. 아직 오지 않았어.' 하였다. '그러면 언제 오나요?'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더군.

'그는 일정한 주인이 없이 머물고, 일정하게 놀러 다니는 법도 없지. 여기 올 때에도 미리 기일을 알리지 않고, 떠날 때에도 약속을 남기는 법이 없어. 하루에 두세 번씩 지나 갈 때도 있지만, 오지 않을 때에는 한 해가 그냥 지나가기도 하지. 그는 주로 창동(남창동, 북창동)이나 회현방(회현동)에 있고, 또 동관. 이현(梨峴), 동현(銅峴:구리개), 자수교, 사동, 장동, 대릉, 소릉 사이에도 가끔 찾아다니며 논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 주인들의 이름은 모두 알 수가 없어. 창동의 주인만은 내가 잘 아니, 거기로 가서 물어 보게나.'

곧 창동으로 가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거기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이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소. 장창교에 살고 있는 임동지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김씨와 더불어 내기를 한다던데, 지금까지도 임동지의 집에 있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그 집까지 찾아갔더니, 임동지는 여든이 넘어서 귀가 몹시 어둡더군. 그가 말하길 '에이구, 어젯밤에 잔뜩 마시고 아침나절 취흥에 겨워 강릉으로 돌아갔다우.' 하길래 멍하니 한참 있다가 '김씨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지. 임동지가 '보통 사람인데 유달리 밥을 먹지 않더군.' 하기에 

'얼굴 모습은 어떤가요?' 물었지. '키는 일곱 자가 넘고, 여윈 얼굴에 수염이 난 데다, 눈동자는 푸르고, 귀는 길면서도 누렇더군.' 하기에, '술은 얼마나 마시는가요?' 물었지. 

'그는 한잔만 마셔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아. 그가 언젠가 취한 채로 길바닥에 누웠었는데, 아전이 보고서 이레 동안 잡아 두었었지. 그래도 술이 깨지 않자, 결국 놓아주더군.' 하더군. '그의 말솜씨는 어떤가요?' 물었더니 '남들이 말할 때에는 문득 앉아서 졸다가도, 이야기가 끝나면 웃음을 그치지 않더군.' 했다

'몸가짐은 어떤가요?' 물었더니, '참선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수절하는 과부처럼 조심하더군.' 하였다.

나는 일찍이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다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신생도 수십 집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그의 말도 윤생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홍기의 나이는 백 살이 넘었으며, 그와 함께 노니는 사람들은 모두 기인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홍기는 나이 열 아홉에 장가들어서 곧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그 아이가 겨우 스물밖에 안 되었으니, 홍기의 나이는 아마 쉰 남짓일 거야." 하였다. 어떤 사람은 "김신선이 지리산에서 약을 캐다가 벼랑에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지 벌써 수십 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도 그 어둠침침한 바위틈에서 무엇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게 있다." 하였다. 그러자 또 어떤 사람이 "그건 그 늙은이의 눈빛이야. 그 산골짜기 속에선 이따금 길게 하품하는 소리도 들려." 하였다.
=====

[김광택전]에서도 김신선의 '놀라운 도보법'은 교차로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김광택전'의 마지막 부분은 꽤 시사적입니다. 즉 위항인, 지도층이 아닌 지식인들은 이렇게 뛰어난 자들이 야인으로 많은데 전혀 기록으로 전하지 않으니 김체건, 김광택, 김홍기같은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라는 것을 한탄하고 있죠. 한반도 역사상 가장 무가 약세였던 조선후기도 이럴진대, 무를 중시했던 삼국시대나 고려, 조선전기는 당연히 많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김광택보다 더 대단한 무예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고려시대의 여장부 기록 한 점을 소개하고 마무리합니다.

용재총화
○ 고려 원수(元帥) 이방실(李芳實)은 젊었을 때에,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일찍이 서해도(西海道)에서 노닐 적에 노상에서 우연히 훤칠하고 키가 큰 사나이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나이는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말 앞에서, “영공(令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방실은 그 사람이 도적인 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약 10리 남짓 가니 논 가운데 비둘기 한 쌍이 앉아 있었다. 도적이, “공(公)은 쏠 수 있습니까.” 하니, 이방실이 화살 한 개로 두 마리를 맞혀서 잡았다. 해가 저물어 빈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도적에게 주면서, “나는 잠깐 동안 말을 보고 올 터이니 너는 여기 있거라.” 하고는 마굿간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으니 도적이 힘껏 활을 쏘자, 이방실은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마구간에 끼어 두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차례 하니 한 통에 있던 화살이 모두 떨어졌다. 

도적이 그 용기에 탄복하여 빌면서 살려 달라고 하였는데, 옆에 높이가 몇 길 되는 상수리 나무가 있었다. 이방실이 몸을 위로 솟구쳐 나무 끝을 휘어잡더니 한 손으로 도적의 머리칼을 붙잡아 나무 끝에다 매고 칼로 머리 가죽을 벗기니 휘었던 나무 끝이 튀겨 일어나는데, 그 기세(氣勢)가 하늘을 뚫을 만큼 세차므로 머리칼은 모두 뽑히고 몸은 땅에 떨어졌으나, 이방실은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가버렸다. 

지위가 높아진 만년(晩年)에 다시 그곳을 지나다가 농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집안은 매우 큰 부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맞이하던 노인이 크게 술상을 차리더니 술이 취하자 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어렸을 때 용맹스러운 것만 믿고 도적이 되어 무수한 행인을 죽이고 약탈을 하다가 한 소년을 만났는데, 비할 수 없이 용맹스러웠습니다. 내가 그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내가 해를 당하여 하마터면 죽으려다가 살아났습니다. 이로부터 개과하고 농업에 힘써 다시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하고는, 모자를 벗어 보이는데, 머리가 이마처럼 번들번들하여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다. 

이방실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역시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항상 작은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두고 형제가 나뭇가지 위를 올라다니는데, 이방실이 올라 가면 가지가 움직였으나, 누이동생이 지나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하루는 누이동생이 파리한 사동(使童)과 파리한 말을 타고 강남(江南)으로 건너가는데,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다가 누이동생을 들어 내리니, 누이동생이 크게 노하여 배의 노를 들고 배 타려던 사람들을 난타하였는데, 굳세기가 나는 새매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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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이방실(李芳實, 1298~1362년)은 고려후기의 무인입니다. 고려후기 홍건적과 왜구등을 섬멸한 장군이기도 한 이방실의 무예솜씨가 도적과의 전투씬에서 드러나지요. 그 여동생 (이름이 전하지 않는)은 한 수 더 뜹니다. 이방실과 둘이 무예를 연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두고 올라타는데 여동생이 올라타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의 시대가 바로 '육룡이 나르샤'의 시대. 이방지와 무휼은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이런 숨은 검객과 무예인들이 얼마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던 시대입니다.
길태미 (육룡이 나르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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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관련글들:
칼을 허리에 찬 선비들 (여말선초)육룡이 나르샤의 시대
살수집단 '검계劍契'와 18세기 창포검- 백동수, 김체건, 김광택의 시대

한국 도검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한국도검의 역사

덧글

  • 2015/10/24 09: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10/24 09: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Nocchi 2015/10/24 10:10 #

    재미있네요
    오늘 글 처럼 세상에는 무술연구가 도사 등등 다채로운 세력들이 백가쟁명 하는 것이 원칙인 데
    조선후기의 사회 질서는 유교 유학 한 가지로 정해져 버렸다는 게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반증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 역사관심 2015/10/25 01:46 #

    동감입니다. 조선의 정치시스템은 확실히 당대 여타사회와 비교해 볼때 선진적이며 또한 성리학적 질서가 한 몫 단단히 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이랄지 그래서랄지 한편으로랄지 문화사적으로는 또한 다양성이 떨어지는 시대인 것도 사실인 듯 해요. 사실 '혼란'과 '다양'성이 있는 시대일수록 문화사적인 변주와 소스가 넘치죠... 중국은 삼국시대와 제자백가시대, 진 통일기...일본은 전국시대를 그렇게 드라마와 소설등에서 이용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아직 우리의 전국시대같은 삼국전쟁시대를 제대로 활용하는 감이 떨어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중국과 비교해서는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사료와 유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거의 기억상실수준), 일본과 비교하자면 시대면에서 확실히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21세기를 한참 넘어 요즘들어 게렉터님의 고구려배경 소설이라든가 만화쪽에서 삼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등이 90년대-2000년대중반의 국수주의위주의 저급한 수준을 넘어 최대한의 고증아래 여러 시도가 나오고 있어 기대가 되는 중입니다.
  • 레이오트 2015/10/24 09:22 #

    조선 전기는 건국 배경과 주도계층을 생각해보면 그려려니 하지만 조선 후기는 몇 번을 봐도 놀랍기 그지없네요.
  • 역사관심 2015/10/25 00:22 #

    후기의 꽉 짜여진 사회의 틀안에서도 역시 기저에 무인기질이 흐르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고, 이들의 생활과 이야기는 거의 잊혀지고 사회적으로도 쓰이지 않고 묻혀갔겠죠. 그 파편적인 단서들이 저런 인물들과 일화들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무인이 초대국왕이 된 국가라 할지라도 조선전기의 궁내에서의 검착용에 꽤 놀랐었습니다. 여러모로 (건축이든 문화든) 전기와 후기의 분위기는 차이가 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그저 임란이전 이후로 시대적 구분을 하는 것이 아닌, 각 분야의 차이 (개괄적 수준이 아닌 구체적 수준의)를 세세하게 연구하는 흐름이 있었으면 해요.
  • 迪倫 2015/10/24 10:58 #

    김체건은 실은 좀더 학술적으로 연구가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숙종대 장길산과 명나라 유민의 후예가 관련된 반역 사건에 범인 체포를 책임진 하급장교 별무사(別武士)로도 등장합니다. 또 동래왜관에서 왜검을 익혔다는 내용 외에 통신사행으로 일본에 가서 검법을 익혔다는 내용도 전해집니다. (又以訓鍊都監言啓曰, 倭劍之法, 曾於通信使行時, 別送將校, 學得於異國,)
    한편 인조대에 무관 중에 김체건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동명이인으로 보입니다.

    곽낙현 선생과 허인욱 선생이 김체건에 대한 연구들을 했는데, 곽낙현 선생의 "조선의 칼과 무예"에 한 부분을 김체건과 왜검의 추이에 대해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해서 참고하십시오.
  • 역사관심 2015/10/25 00:06 #

    오 그렇군요! 찾아보고 첨가할 것이 있으면 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 김광택전을 제외하곤 너무 정보가 없어서 아쉽기만 했는데. 감사합니다!
  • K I T V S 2015/10/24 13:39 #

    다른 말이지만 만약 대한제국이 일제에 패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유지되는 형식이었으면 이런 검객관련 자료가 다르게 다가왔을까요...
  • 역사관심 2015/10/25 00:11 #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비단 검객뿐 아니라 사실 조선의 문화, 즉 우리가 현재 '전통'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장 친근한 개념(시대)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80년대후반까지의 '근절해야 하는 구습'과 비근한 것으로 왜곡되어 단절되어 간 흐름은 확실히 덜 했을 것 같습니다 (거의 확신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 없이 우리 힘으로 근대화를 차근차근 이뤄낼수 있었다면, 분명 전통에 대한 강압적인 단절과 억한 감정에 의한 단절없이 연구대상으로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든 의식주와 정치, 경제를 비롯한 문화의 여러 측면에 전통의 각각의 항목들이 쓰이고 계승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컨대 어쩌면 화학소주대신 우리는 가양주전통을 비롯한 여러 전통주들을 생활속에서 구현하고 있었겠죠. 바로 이웃국들인 일본이 사케를 생활속에서 마시고, 중국이 빼갈을 생활속에서 당연하게 계승하고 있듯 말입니다. 지금의 우리처럼 재발굴하고 21세기에도 애써 홍보하고 노력해야 하는 수고는 없었을 듯 합니다.
  • 2015/10/27 02: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ff 2015/10/30 17:01 # 삭제

  • 존다리안 2015/10/24 14:12 #

    조선 초의 일본이면 전국시대 그쯤일 텐데 당대의 무술이나 무기제조 등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를 도입한 국내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본도 전통제법 자체가 메이지유신 이후로
    소실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도 국내 기록에서부활의 단초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 역사관심 2015/10/25 00:14 #

    아랫분의 푸념처럼 저 역시 아쉽기만 한 대목인데요. 사실 역설적으로 고려대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유파라든가 검법의 구체적 모습들이 (무예도보통지외에 각 유파가 정리되어) 있었다면, 제가 굳이 오늘 이렇게 파편들을 끌어모아 소개하지 않아도 우리 대중 일반에게 진즉에 조선시대의 무술과 무기류등이 더 알려져 있고 여러모로 쓰였을 것 같습니다 T.T

    일본쪽 이야기는 모르던 사실인데 흥미롭군요. 사실 무사시의 무사도같은 책 (물론 편찬자는 후대의 인물로 다르지만) 정도만 있어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대중의 '전통 무예'에 대한 인식이 펼쳐졌을 듯 합니다 (물론 망국으로 인해 그 매력도는 사뭇 희석되었겠지만).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5/10/26 14:33 #

    일본의 예에서는 그러한 설(說)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때에 일시 쇠퇴해지고, 연합국에 점령되고 있는 시기도 무도가 금지되어, 카부키 등의 연극조차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금도 큰 인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뿌리가 있는 문화는, 상부에서의 강제로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사라졌다로 하면, 그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는가, 뿌리가 약한, 그 민족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은은 없습니까?
  • ㅇㅇㅇㅇ 2015/10/24 19:54 # 삭제

    대다수가 전래동화 수준의 가치없는 이야기 수준이네요

    서구처럼 진짜 기록을 통해 체계적으로 소드 마스터니 뭐니 하는 싸움꾼들 이야기가 전해졌더라면 좋을텐데
  • 역사관심 2015/10/25 00:28 #

    일견 무슨 말씀인지 공감합니다. 저 역시 구체적인 검법의 묘사라든가, 체계적인 정리가 된 정보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으니까요 (어찌보면 그 자체가 300년의 조선후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역으로 보자면 성리학의 경우, 주변 어떤 나라보다도 그 체계와 철학의 깊이가 굳건한 우리였으니. 요컨대 일본의 성리학관련 책들은 간혹 놀라운 부분이 있지만, 확실히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죠).

    다만 가치없는 수준의 이야기로 보시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저런 단편적인 기담류의 이야기들이 그래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가 이런 저런 흐름에 대해 추정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시대가 한면으로만 흐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파편정보이기도 하고, 또한 본문에서도 썼듯이 무에 대한 경시가 극에 달했던 이 시대의 이러한 기록들로 인해, 사료가 부족한 시대인 그 전대의 우리 사회에서의 '무'에 대한 분위기를 유추해 볼수도 있는 귀한 자료라 생각합니다.

    다만, 말씀대로 유럽쪽이나 일본처럼 (혹은 중국처럼) 고유한 유파라든가 무술의 체계적인 전승과 기록이 정리되거나 남아있지 않아 가장 아쉬울 뿐입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를 볼때 저건 거의 정두홍이 만든거야가 되버리는 것과, 이건 무사시의 무슨 검법이네 라는 것과는 벌써 매력도가 비교가 안되니까요). 하지만 또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같이 체계적으로 무의 기록을 정리할 분위기의 사회였다면 그건 또 조선후기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조선의 무에 대해 이런 추측글을 쓸 필요도 없겠죠.

  • 샹크스 2015/10/25 13:03 #

    재미있게 잘보았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지나치게 성리학 문치 위주로 사회질서가 경직되다보니 국력이 문약하게 균형을 잃은듯 합니다.
    근데 윤승운 작가의 맹꽁이 서당 오랜만에 보네요. ^^;
  • 역사관심 2015/10/26 04:03 #

    성리학의 발전과 위민정책의 경우 아시아전체에서도 꼽힐만큼 선진적인 시대기도 했지만, 동시에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 약해진 측면이 도드라진 시대기도 했지요 (현재의 '무'에 대한 시각까지도 그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볼 정도로 깊은 뿌리를 남기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불교의 쇠퇴로 인한 화려한 미학도 급속히 사라진 시대이기도 하고...

    맹꽁이 서당의 윤승운 선생은 사실 요철발명왕을 더 좋아하는데, 윤 선생의 경력에서 중반기에 해당하는 이 맹꽁이서당이 더 유명세를 타서 이젠 거의 대표작으로 꼽히죠 ^^ 언제봐도 우리에게만 있는 그림체라 더 좋습니다. ㅎㅎ
  • ㅇㅇ 2015/10/30 01:00 # 삭제

    애초에 한자 선비 士 이게 무사를 지칭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더군요

    한국역사에서도 고려 무신정권시절 문사라는 호칭으로 기존의 士 개념이

    분리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한국사에서 문인과 무인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고려 전기 문벌귀족만 해도 단순히 문인적 기질뿐만 아니라

    무예도 애초부터 출중한 계층이었다는 거죠 그게 예전부터 죽 이어져오던 거고..

    그러다가 고려 중기 무인정권 시절 문사라는 계층이 분리되면서

    그 사람들이 신진사대부의 기초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흔히 무인정권 성립 배경이 무신 차별 운운하는데

    이게 잘못된 전제조건응로 판단된 오류라는 거죠

    사실은 그냥 고려 황제 측근세력의 반목으로 부터 시작된거에 불과한데

  • 역사관심 2015/11/05 05:15 #

    저도 그 이야기는 들은 바 있는데 확실한 연구가 있다면 한번 보고 싶더군요.
  • 액시움 2021/12/05 17:49 #

    6년 후의 미래에서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원래 무술이란 것 자체가 쓸모가 없어지면 생각보다 순식간에 사라지더군요. 편전 쏘기는 나름 국가적 장기였는데도 조총이 도입되자마자 순식간에 실전되어서 인조대에 이미 쏠 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할 정도니...

    중국도 이미 명나라대에 양손검술의 맥이 끊겼던 걸 조선에서 겨우 다시 구해서 조선세법이란 이름으로 남겼으니까요. 조선 조정도 삼한 전통의 검술이 있다는 것에 흥분하여 조선세법을 역수입해왔습니다만 백 년 좀 넘게 지나자마자 또 실전되어 버렸죠. 서양도 근세에 들어 중세 롱소드 검술의 쓸모가 다하자 실전되어서 20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복원해냈고요.

    18세기 즈음이면 이미 실전성을 잃을 대로 잃은 검술을 현대까지 수백 개의 유파가 남아서 현전하는 일본이 특이한 경우일 겁니다. 아무래도 정권을 잡은 사무라이들의 후원 덕에 가능한 것이겠지만요.

    사실 후기의 조선도 무를 마냥 천시했다고는 뭐한 게 진짜 실용 무술인 사격술은 동양 3국 중에서 최고로 열심히 연마했죠. 반면에 동시대 청나라는 한족 억압을 위해서, 일본은 막부 치하의 평화에 젖어서 다같이 조총술을 등한시하는 동안 조선은 나선정벌 때 기술적으로 앞선 플린트락으로 무장한 러시아 전열보병을 순전히 병사들의 저격 실력만으로 격파할 정도로 사격술이 발달했고요.

    어찌 보면 이웃나라들이 쓸데없는 주먹질, 칼질의 환상에 젖어 있는 것과 다르게 조선은 군사적으로 제일 깨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후의 망국 때문에 이런 모습들마저 무시당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근대화에만 성공했더라면 미국의 카우보이 건맨 같은 무인상이 한국에도 형성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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