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전 백제군 쌓은 나무울타리 성 드러났다 (기사링크) 역사뉴스비평

경기도 안성에서 4~6세기 백제군 병사들이 고구려군을 막기위해 쌓은 나무울타리인 목책성(木柵城) 터가 드러났다. 기남문화재연구원은 9월부터 안성시 도기동 산 51-5번지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구덩이 파고 나무말뚝을 박아 만든 목책성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2일 발표했다.

이 목책성은 안성천과 맞닿은 구릉지에 쌓은 방어시설로, 길이는 4개 구간 130m에 이른다. 먼저 흙을 쌓은 요새인 토루(土壘)를 짓고 주변에 나무 말뚝으로 목책을 열지워 세운 얼개다. 눈길을 모으는 나무 울타리는 토루의 안쪽에 1열, 바깥쪽에 2열로 둘렀는데, 나무말뚝 사이는 4.5~5m로 간격을 벌여놓았다. 토루는 구릉의 바깥면을 깎아 계단처럼 파낸 뒤 빈 공간에 깬돌을 넣고 점토 덩어리를 겹겹이 올려 벽의 강도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중략.

연구원 쪽은 “나무 울타리의 얼개와 출토 유물의 양상으로 미뤄 4세기께 백제가 쌓았으나 이후 고구려 군이 성을 점령해 쓴 것으로 보인다”며 “삼국시대 목책시설의 구조를 처음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중략.
2015. 11.2일 발굴소식이 들려온 안성시 백제 목책 
기사전문: http://news.zum.com/articles/2623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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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목책이면 시기상 장보고(?∼846년)의 청해진 목책 (840년 추정)보다 약 200여년전의 시대입니다. 청해진 목책이 약 300미터이니, 그 보다는 짧습니다. 
완도 장도섬 청해진 목책 흔적 (나무기둥 밑단이 다 남아있죠, 약 12기- 밀물때는 잠긴다고..)

일부 신문에서는 4~6세기로 보고 있어 결과에 따라 청해진 목책과 시대차이는 더 좁혀질 수도 더 커질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발굴된 이 고대백제 목책유구와 가장 비근한 시대의 것으로는 훨씬 더 원형이 잘 남아있는 신라시대 반구동 목책 (220미터 이상)이 있습니다. 2007년에 발굴된 반구동 목책은 6세기로 추정되는데, 결구방식과 기둥이 그대로 드러나서 그대로 복원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6세기 반구동 목책유적

뿐만 아니라 지름 70cm정도의 대형 나무기둥 4개씩이 박힌 망루 유적 4곳도 목책에 걸쳐진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이런게 망루죠.
가야 봉황동 유적지의 복원된 망루 (1-4세기)


이런 목책은 비단 삼국시대뿐 아니라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활용됩니다. 다음 장면은 김부식 vs 묘청 전투에서 김부식측이 목책을 쌓는 모습.

1135. 3월 기록 [고려사 김부식열전]
3월 오군(五軍)이 일제히 공격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도록 적과 서로 대치하며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10월이 되어 양식이 다 떨어지자 적은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가려 성 밖으로 쫓아내었는데 모두 굶주리고 여위어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없었으며 군졸들도 이따금 나와서 항복했다. 김부식은 이제 공격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서,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흙산을 쌓게 했다. 먼저 양명포의 산 위에 목책을 세우고 진영을 배치한 다음 전군(前軍)을 이동시켜 거점을 삼고서 서남지역 주·현의 군사 2만 3천 2백 명과 승려 550명을 징발하여 흙과 돌을 운반하고 목재를 모아 놓게 했다. 장군(將軍) 의보(義甫)·방재(方宰)·노충(盧冲)·적선(積先)에게 명을 내려 각각 먼저 정예 군사 4천 2백 명과 북계(北界)에 있는 주·진의 전투병 3천 9백 명을 거느리고 유격전의 병사로 삼아서 약탈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래는 순천왜성전투 (임진왜란)을 묘사한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図券)에 나오는 목책입니다.
순천왜성 목책

삼국시대나 고려의 전쟁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목책과 망루를 제대로 구현한 모습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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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도 최근까지 유용하게 씁니다. 사진은 1941년 모스크바의 독일전차용 목책.

목책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이리로 (팬저님 글).


핑백

덧글

  • 레이오트 2015/11/03 09:51 #

    1.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목재는 의외로 보존이 잘 된다는데 이 목책성 유적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네요.

    2. 목책성은 서양 역사드라마에서 바이킹이 나온다면 필수요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나오지요.

    3. 소련군의 대전차 장애물로 만든 목책을 보니 대서양 방벽에 설치된 상륙정 저지용 말뚝(대전차 지뢰를 설치하기도 했다네요)과 대 글라이더 장애물인 롬멜의 아스파리거스가 생각나네요.
  • 역사관심 2015/11/05 03:54 #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스파리거스가 있었군요 ^^
  • 낙으네 2015/11/03 10:34 # 삭제

    나무의 성질상 고대의 것은 제대로 전해지는게 없는줄 알았는데 영 없지는 않았군요.
  • 역사관심 2015/11/05 03:55 #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보존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한번 관련자료를 시간될때 보고 싶네요.
  • b 2015/11/04 16:31 # 삭제

    요시노가리 유적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8B%9C%EB%85%B8%EA%B0%80%EB%A6%AC_%EC%9C%A0%EC%A0%81#/media/File:YoshinogariIseki.jpg
  • 역사관심 2015/11/04 16:38 #

    잘 알겠습니다.님의 다른글에 답글을 달았으니 더 이상의 댓글은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 b 2015/11/04 16:41 # 삭제

    요시노가리 유적을 유용해서 복원,과 정직하게 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당신은 알고 있는데, 그 정보를 은폐한 것은 왜입니까?
    한국인 안에서도, 조선 시대에 일본에서 발전이 늦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지만, 3국시대이전에는 조선의 국가가 일본에서 우월이었다라고 하는 것이, 최후의 마지노선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거기는 만지면 폭발하는 최후의 자존심의 방위 선인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5/11/04 16:56 #

    의견 고맙습니다만 다른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 더 이상의 댓글은 삼가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예의를 갖추고 정중히 부탁드리는 것이니 존중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글 쓰시길.
  • b 2015/11/04 16:57 # 삭제

    또 무언으로 삭제했네요. 정말로 사람을 성나게 하는 재능만은 있네요. 어른이라면, 어른답게지세요.
  • b 2015/11/04 16:59 # 삭제

    사죄에 진정성이 없다. 피해자의 측이 납득할 때까지, 사죄는 끝나지 않아요.
  • b 2015/11/04 17:04 # 삭제

    나에게는 발언하는 자유가 있다. 당신에게는 제 발언에 답변을 보내지 않는 자유가 있다. 그래서 충분하지요.
  • ㅇㅇ 2015/11/04 21:07 # 삭제

    누구보다 유치한 태도로 말을 하는 사람이 어른답느니 어쩌니 운운하는 것이 보기 우습네요
  • b 2015/11/04 17:36 # 삭제

    봉황동 유적의 망루 형이, 일본의 요시노가리 유적(기원전1세기∼기원후4세기)의 망루와 완전히 같습니다.
    이것은, 요시노가리 유적의 복원 연구를 한국측이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
    요시노가리 유적의 발굴 성과를 참고로 해서 정비했다고 하는 봉황대유적공원내를 나아가면, 안내판에 일본어로 「국제교류를 이야기하는 중국계 유물(청동거울)이나 일본계 유물(야요이(彌生)토기)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인공유물에 하나가, 대형의 병관이다. 병관은, 요시노가리 유적을 비롯해, 야요이(彌生)시대의 북부 규슈(九州)만큼 보여지는 특징적인 매장 형태이지만, 봉황대유적에 인접하는 김해(金海)패총(貝塚)에서는 많은 병관이 출토하고 있다.

     현해탄(玄海灘) 연안으로부터 한국 남쪽 언덕까지 직선거리로 200킬로. 돈관 가야가 자랑한 철제품등을 구입하고, 사람들은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옮겨 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인 일한 교류사에 자세한 현(縣)문화과의 히로세(廣瀨) 유우이치(雄一)씨는 병관에 매장된 사람들을 「바다를 건넌 왜인들이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덤제는 대단히 보수적인 것이며,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로다.

     왜인들은 교류하는 중에서 공존을 인정을 받아, 돌아가시면, 동료들의 손으로 고향과 같은 병관에 매장된 것일 것이다. 매장 예의라고 하는 고유 문화의 정착은, 물건의 왕래뿐만 아니라, 정신면을 포함시킨 깊은 교류를 살필 수 있다.

     김해 패총의 출토품은 가까운 국립 김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었다. 「철의 왕국·가야」를 이미지했다고 하는 흑 벽돌 관내에는, 병관과 함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주형이 출토한 뒤범벅형 (뒤범벅쪽) 동 그릇이나, 요시노가리 유적의 출토품에 매우 흡사한 섬세함형 구리검이 나열해 있었다.




     -이번방문한 유적이나 박물관에는 상호교류가 명확히 적혀 있었다. 어떤 의미, 의외의 생각이 들었지만.
     연구 성과가 모자란 시기에는 문화가 규슈(九州)에 일방 통행으로 전해져 갔다고 생각되고 있었지만, 연구의 진전에 따라 맞은 모습이 되어 왔다. 고대사연구에 민족주의를 가져오면 일방적인 견해가 되어버린다. 과거는 선입관을 버려서 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인수(부산시립 박물관 복천박물관관장)
    http://www1.saga-s.co.jp/yoshinogari3_1_2



    사실 국내에서 출토되어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본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고대의 한국이나 일본은 공통점이 많았고, 일본에서는 이런 유물들이 풍부하기 때문에 봉황동유적의 복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7896
  • 끝소리 2015/11/04 19:32 #

    문득 나이테연대측정법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데 그냥 목책성의 '흔적'을 발견한 수준이라면 나이테를 확인할만큼 보존이 된 것은 아니겠지요? 국내 나이테 데이터베이스가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알고 있는데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목재 유적이 더 발견되었으면 합니다.
  • 역사관심 2015/11/05 03:53 #

    끝소리님 반갑습니다. 어제자 기사로 뜰만큼 새로운 유구라 어떤 보고서도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성이 워낙 산성이라 고대 중세 목재가 저정도로 보존되는 예도 드물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말씀대로 그런 목재유적이 더 많이 발굴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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