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미(鴟尾)란 것이 정말로 '권위의 상징'이었을까?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보통 치미(鴟尾)가 고대건축터에서 나오면 "치미가 있으면 장대한 규모나 중요한 권위있는 건축"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대체로 현전하는 건축물과 건물터의 규모와 유구로 추정하는 것이지, 확실한 그 의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정보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이 주제에 대한 담론으로는 외향 즉, 솔개꼬리니 뭐니하는 이야기만 돌 뿐입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의미없는 공회전식 논쟁같습니다- 어차피 사료가 나오지 않는 한 무엇을 본따 만들었는지 확증할 길은 없으니까요). 오늘은 필자가 찾아본 결과 이에 걸맞는 사료가 있어 소개합니다.

백과사전의 치미에 대한 정의와 설명은 보통 이렇습니다.

대체로 용마루에 얹을 수 있도록 밑부분에 반원형의 홈이 패어 있고, 옆면에는 몸통과 깃부분을 구분하는 굵은 융기선이 있는데 그 바깥쪽에는 날짐승의 깃털이 층단을 이룬 형태를 띠고 있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봉황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중기까지 성행했으나, 당나라 후기에 유행된 치문(鴟吻)의 영향을 받아 화마(火魔)를 잡아먹고 살아서 억화(抑火)와 금화(禁火)의 효능이 있다는 물고기 형상으로 의장이 바뀌면서 쇠퇴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지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으며 대신 용두(龍頭)·취두(鷲頭) 등이 등장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부여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치미(국립부여박물관 소장),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출토된 고신라시대의 치미(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에서 발견된 치미(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기림사(祇林寺)에서 출토된 화강암제로 된 치미(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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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고려중기까지라고 되어 있지요. 고려(高麗, 918~1392년)를 500년으로 잡고, 전-중-후기로 나눈다면 10세기~11세기초중반 (성종대), 11세기중반~13세기후반 (무신정권까지), 그리고 13세기말~14세기말(원간섭기)로 잡곤 합니다. 그럼 정말 '고려중기' (즉 11-13세기)까지 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로 사용된 건축요소인지 사료를 들여다 보지요.
황룡사 치미

11세기-12세기, 치미의 의미

우선 고려전기인 11세기초 고려사 기록입니다. 

목종(穆宗) 9년(1006년) 6월 무술일. 
천성전(天成殿) 망새[鴟吻]에 벼락이 쳤다.

망새는 치미를 말합니다. [고려사절요]의 더 자세한 같은 1006년 기록입니다. 

1006년 ○ 6월 무술일에 벼락이 천성전(天成殿)의 치문(鴟吻)을 치니, 왕이 근심스럽고 두려워 자신을 책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리며, 효자ㆍ순손(順孫)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에게는 모두 은상(恩賞)을 주고 국내의 신기(神祇)에게 훈호(勳號)를 더하며, 문무관 3품 이상은 훈작(勳爵)을 더하고, 4품 이하는 1급(級)을 더하며, 9품 이상으로 벼슬한 지 만 20년이 된 자는 개복(改服)하게 하고 나이 60세 이상이 된 자에게는 관직을 차등 있게 더하고 금년 세포(稅布)의 반을 감면하며, 갑진년(1004) 이전의 포흠(逋欠)된 조세를 아울러 덜어 주었다.

천성전(天成殿)은 고려전기 개경의 별궁중 하나인 연경궁(延慶宮)에 있던 전각이며 원래의 이름은 천복전(天福殿)입니다. 우선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별궁인 '연경궁'에도 치미가 있는 건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려 정궁인 만월대의 전각들에는 많은 수의 치미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1454년에 편찬된 [세종지리지]를 보면 연경궁이 꽤 규모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연경궁 옛터[연경궁구기]-【송악 남쪽에 있는데, 지금 서울 사람들이 본대궐(본대궐)이라 일컫는다.

치문(鴟吻, 올빼미 치, 끝 문 (혹은 입 문))으로 역시 치미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참고로 통일신라시대 명문에는 누각의 꼬리 즉 누미(樓尾)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한치윤 (韓致奫, 1765~1814년)이 쓴 [해동역사]를 보면 이런 명확한 설명이 나오지요.

궁실지(宮室志) 성궐(城闕) 
이문(螭吻)은 바로 치미(蚩尾)라는 것인데, 어떤 이는 치문(鴟吻)이라고도 하고, 《소씨연의(蘇氏演義)》에는, “치미는 바다에서 사는 짐승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栢梁臺)를 지을 때 이 치미가 나타났는데, 수정(水精)을 타고난 짐승으로서 능히 화재를 막을 수 있다 하여, 그 백량대 위에다 이 치미 모습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지금 소위 치미(鴟尾)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18세기의 기록은 이미 '치미'가 위의 황룡사 치미와 같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고, 고려시대에 유행한 (위에 언급된) '물고기 모양 형상'이라고 불리는 다음의 그림과 같은 모습의 부조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려 변상도에도 자주 나오죠, 그리고 송대회화나 원대건축에도 보입니다). 이문(螭吻)이란 의미는 '교룡의 입술'이라는 뜻이니까요.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 고려초와 원대의 장식이 거의 같은 생김새죠.
금동삼존불감(고려초기 추정)

원대 춘추루의 종루

권위와 진취의 상징

다음의 기록 역시 위의 1006년 고려사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시대의 것으로 [송사]에 나오는 부분인데, 이 기록이 필자가 주목한 부분입니다. 한번 자세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 《손공담포(孫公談圃)》에는, “거란에 불사(佛寺) 하나가 있는데,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며, 사신이 거란에 가면 반드시 그곳에 가서 분향하였다. 풍직(豐稷)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보니, 모두가 신종황제가 고려에 하사한 것이었다. 대개 고려는 거란에 제압당하여 매번 거란의 사신이 올 적마다 고려의 전각(殿閣)의 지붕을 덮은 치미(鴟尾) 기와를 모두 잠시 철거하였다.” 하였다.

[손공담포(孫公談圃]는 송나라 손승(孫升, ?~1099년)이 지은 책입니다. 이 11세기말의 사료에 당시 거란에 매우 웅장하고 화려한 사찰이 하나 있는데, 그 거란사찰의 기물이 모두 송의 신종황제가 고려에 하사한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더 주목할 부문은 "고려는 거란에 제압당하여 매번 거란의 사신이 올 적마다 고려의 전각(殿閣)의 지붕을 덮은 치미(鴟尾) 기와를 모두 잠시 철거"했다는 부분입니다. 

이건 무슨 뜻이냐하면,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고려에 거란사신이 오면 고려의 건축물들 (전각들)의 지붕을 덮은 치미를 임시적으로 모두 치웠다는 겁니다. 사신이 와서 치미를 끌어내려 가져갈까봐 그랬을 리는 없습니다- 또한 치미를 송에서 보냈을리는 만부당하지요. 더군다나 거란에서 가져갔다는 이 기물들은 고려에서 직접 뺏은 것이 아닌, 송나라에서 온 물목들을 탈취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송사]에 이런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금나라 사신이 고려에 가서는 더욱 거만하고 사나워서,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이 조금만 뜻을 거스르면 문득 머리채를 휘어잡고 매질을 하였으며, 우리 (남송)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고 와서 엿보고는 하사한 물품을 나누어 가졌다. 

따라서 인용한 치미에 관한 구절은 글 첫부분인 송나라 기물과는 상관이 없는 '국가의 기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이 기록은 역설적으로 치미라는 건축장식이 '웅장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이를 거란- 고려 등 당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서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원대의 치미를 보면 이 정도로 화려하니 그럴만도 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 영락제 궁 치미

이제 1100년대로 넘어가 봅니다. 다음은 12세기인 1123년의 고려도경의 기록입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궁전(宮殿)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에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위무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

무릇 바라보이는 궁전 이름과, 치미(鴟尾) 장식을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작은 일로 오랑캐를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여기에서도 역시 '치미'가 있는 건물을 '거리낌없이' 고려에서 장식했다고 나오며, 이를 송황제가 질책하지 않는 모습을 담대하다고 칭찬하고 있어 (고려도경은 송나라 사신이 쓴 것이니 당연한 맥락), '치미'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만월대에서는 용두도 나오고 있어 용두와 치미가 골고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월대 출토 용두파편


참고로 용두는 용마루끝에 장식되는 치미(망새, 치문) 혹은 조선시대의 취두와 달리 내림마루 끝에 장식되는 용모양의 장식을 말합니다. 그 용의 생김새도 시대별로 꽤 다릅니다 (삼국, 고려, 조선 등). 조선시대에는 용두와 더불어 취두(鷲頭)라는 걸 썼지요. 현재 근정전 용마루 끝에 있는 것이 치미가 아닌 취두입니다.

3년뒤인 1126년의 기록을 보면 만월대 전각중 회경전에 대한 결정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병오 4년(1126)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ㆍ 금 천회(天會) 4년
○ 간관이 여러 번 소를 올려 아뢰기를, “이자겸의 두 딸은 주상께 이모가 되니, 주상과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두 왕비를 내치고, 전중내급사 임원애(任元敱)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비(妃)의 어머니는 이씨요, 문하시중 위(瑋)의 딸이다. 왕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가, 누런 큰 기를 그 집 중문에 세웠는데 깃발이 바람에 날려 선경전(宣慶殿) 치미(鴟尾)쪽으로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 왕비를 낳자, 이위가 특히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선경전에서 놀 것이다." 하였다.

여기나오는 선경전은 1023년 지어진 중궁인 회경전의 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아래처럼 회경전에 치미가 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구절이지요.
만월대 회경전

'치미'형태는 언제까지 남아 있었을까요? 조선사람들은 취두가 아닌 '치미(치문)' 형태의 건축구조를 보았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당연히) 많습니다. 임란전에까지만 해도 통일신라-고려대 건축물들이 존재했을테니까요. 이런 사료들에서 그 흔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다만, 중국측 기록을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이 포스팅에서 단정짓지는 못합니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년)의 16세기초 임란 직전의 작성된 문집의 기록입니다.
震太廟鴟尾。史臣以爲蒸嘗不數。有此天譴。非徒鴟尾。至震柱木折破之。憲宗元和間及穆宗時。又震太廟鴟尾

박홍미(朴弘美, 1571∼1642년)의 [관포집(灌圃集)]에도 치미라는 단어가 나오죠.
秦耶漢耶將近代耶。乃有趙國遷王。齊家俘虜。陰山降將。長門怨姬。梁獄上書之人。嘯聚無告。燕市悲歌之士。寔繁有徒。拘囚我放臣逐客。繫累我孀婦棄妻。侵竊我壺頭之關。焚燒我鴟尾之闕

고신라대 불령사전탑 대소형 건축부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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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본 바와 같이 치미는 고대-중세의 대표적 건축들에는 들어가야 하는 '권위의 상징'이 맞는 듯 합니다. 백제재현단지의 사비궁이나 능사금당에서 재현된 바 있는 이런 치미가 있는 고대 중세건축의 미학을 황룡사재건프로젝트에서도 두 눈으로 확인할 날을 기다려 봅니다.
사비궁 (부여 백제재현단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황룡사 재건 그래픽-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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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바람불어 2015/12/04 07:53 #

    제목이 일종의 낚시군요 ㅎㅎㅎ. 결론, 치미는 권위의 상징이 맞다.
  • 역사관심 2015/12/04 08:09 #

    그런가요 ㅎㅎㅎ. 스스로 저 질문으로 시작해서 시작한 글인지라 ^^;
  • 더러운 이누이트 2018/12/04 01:50 #

    중국의 경우 당나라, 송나라때 영선령(건축법령)을 보면 궁전, 지방관의의 정문 등이 아니면 치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8/12/06 04:16 #

    이 댓글을 포함 여러 좋은 글을 한꺼번에 달아주시다니...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추후 차근차근 읽고 답글 달 부분은 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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