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정신없고 호들갑난 모습에 '호떡집에 불 났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의 유래를 최근 여러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중 한 기사를 볼까요.
구한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자신들의 병사를 조선땅에 파견했는데, 이때 이들과 함께 따라온 청나라 상인들이 만들어 판 음식이 바로 호떡이라고 한다. 조선사람들이 호떡이라 명한 것도 호(胡), 즉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온 떡’이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떡과는 달리 이들 청나라 사람들이 만든 호떡 속에는 달콤한 조청이나 꿀을 떡 속에 넣은 아이디어 상품으로 사람들이 무척 좋아해 호떡집은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인 농민과 조선인 농민 사이에 유혈사태가 일어났는데, 이 일로 인해 화가 난 조선사람들이 전국에 있는 중국인 상점이나, 호떡집에 불을 질러 버렸던 것이다. 호떡집에 정말로 불이 난 것인데 그때의 소란함과 정신 없음을 표현한 말이 바로 ‘호떡집에 불 났다’라는 말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이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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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청나라 병사를 따라 들어온 음식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짚어볼 구석이 보입니다. 우선 '청나라 사람들이 만든 호떡은 달콤한 조청이나 꿀을 떡 속에 넣은' 형태만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글 중간에 소개합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쓰는 저 표현이 글에 나오는 1931년의 사건하나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호떡집에는 '종종' 불이 났으니까요.
호떡집에 불났다!
호떡집엔 기름이 많아서인지 정말로 불이 잘 납니다. 이건 20년대 기록중 몇가지만 발췌한 것인데 이보다 훨씬 많은 화재사건기사가 보입니다.


아래기사에서 보이듯, 호떡집장사의 '집'은 호떡가게와 1-2층으로 붙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청인들의 호떡집 vs. 조선인의 팥죽집과 설렁탕집
오랑캐 '호'를 쓴 명칭답게 근대시기에는 호떡집을 청나라사람들이 직접 경영합니다. 그러니까 이당시까지만 해도 호떡은 지금처럼 한국화된 한국간식이 아니라, 청나라 외국음식이었습니다.
매우 인기가 많았습니다. 24년의 이 기사를 보면 경성부내에 설렁탕집이 100군데, 호떡집은 150군데라고 하면서 조선사람들이 청나라 사람들이 경영하는 호떡집을 더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윗 기사에서도 그랬지만 이 호떡집을 '설렁탕집'과 비교하는 모습인데, 호떡을 20년대에는 음식의 일종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호떡집과 맞물려 청인들의 증가와 상권장악에 대해 이미 20년대에 큰 고민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0년대의 마지막해인 1929년의 통계를 보면 잘 보이죠. 마치 '박테리아'같다고(...)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중국인들의 급격한 상권장악률에 대한 우려가 보이죠.
호떡이란 형식 진화
호떡으로 돌아가 보죠. 흥미로운 점은 20년대의 초기호떡은 지금의 것과 다른 것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조청이나 흑설탕이 떡안에 들어간 형태가 아니라, 마치 요즘도 먹는 구운 가래떡을 잘라 조청에 찍어먹는 형식입니다. 보면 화덕에서 따끈하고 말랑한 구운 떡을 어린 중국아이가 도마칼로 썰고 있죠.
이 묘사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흑설탕 (*이때는 흙설탕이라고 했군요)에 "꾹 묻혀 찍어서" 먹고 있습니다. 신문지에 흑설탕을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다시 흑설탕에 떡을 찍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식이었을 가능성이 있죠.
현금많은 호떡집, 강도의 대상
그런데 호떡집에는 현금이 많았는지 호떡집에는 항상 강도가 많이 듭니다. 이런 기사가 비일비재했죠.
위생불량 호떡집
호떡집의 위생상태를 비판하는 기사는 20년대에 꽤 자주 나옵니다. 심지어 가래뱉는 통에 호떡굽는 판을 씻는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범죄의 무대, 호떡집
1920년대의 호떡집은 매우 아스트랄하고 많은 검은 범죄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근대화시기를 다룬 영화중 이 '호떡집'을 매개로 하거나 무대로 한 영화가 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래기사처럼 14세소녀 강간사건도 일어나고.
청나라인이 조선소녀를 호떡으로 유인해 인신매매하는 일도 잦습니다.
5살배기 여자아이까지...
오원춘사건이 연상되는 토막살인까지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더 심한 것이 소년을 동성추행하고 살인한 사건이죠. 당시 아이들이 호떡을 꽤나 좋아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엽기적인 범죄도 일어납니다. 5세 소녀를 인신매매해서 호떡집 마루밑에 가둬두고 가축처럼 기른 사건이지요.
호떡집에는 범죄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태어난지 2-3일 된 신생아를 살해하는 강력살인을 저지른 호떡집 중국인 부부가 호떡집에서 검거되고.
위조화를 발행한 범인이 잡힌 곳이 호떡집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중국인들끼리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거기다 '아편밀수'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호떡가게 이층은 도박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스팅 맨 처음 기사에서도 보이듯 호떡집은 윗층은 살림집으로 아래층은 가게로 이용한 곳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이 없어 아쉽지만 1931년 1월 15일 동아일보에 '만평'이 나와 있는데, 주제가 '호떡집'이라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는 전형적인 청나라출신 주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호떡집에서 손님들이 손으로 집어먹고 있는데, 반대편 2층건물 형태 역시 1층은 '중화요리집', 2층은 살림집으로 보입니다.
1931년 1월자 동아일보
5년뒤인 1936년 동아일보의 한 소설에서도 당시 호떡집을 묘사한 삽화가 등장합니다. 이런 모습입니다.
사건은 끊이지 않습니다. 폭력배들이 호떡집을 습격, 린치를 가하는 일도 일어나고.
호떡집은 30년대까지도 이런 아편밀수나 중국인도박단과 같은 아스트랄한 일이 잦은 무대였습니다.
31년 8월기사에는 호떡집 천장에서 여자백골까지 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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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보산사건, 그리고 청나라식 호떡집의 소멸과 한국음식으로써의 부활
이렇게 20-30년대에 걸쳐 서민들과 아이들의 사랑받는 음식/간식점이기도, 온갖 범죄와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던 급증하던 호떡집의 기세는 신기하게도 40년대가 되면서 말끔히 사라집니다.
이것은 아마도 1931년에 일어난 (그러니까 포스팅 맨 처음 기사에 나오는) 만보산 사건이 도화선이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적륜님의 제보). 관심있는 분은 링크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사진은 만보산 사건이래 평양의 화교거리에 대한 린치후의 처절한 1931년 사진입니다. 그리고 1937년이 되면 호떡과 탕수육등을 먹을 수 없어 심각한 요리계의 위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 당시까지는 탕수육등을 조리하는 한국인들의 식당이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이 사건 이후 3만명의 중국인이 귀국했으며 무려 80%의 중국음식점이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기사말미에 보면 '호떡집은 거의 전부가 자취를 감추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55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끝나고 다시 조금씩 부활하지요. 물론 주인들도 중국인들이 아닌 한국인들이 자리를 잡게 되고 말이지요 (이는 61년의 외국인토지소유 금지법과 62년 2차통화개혁등의 영향도 클 겁니다). 대담하게 추정하자면 '만보산 사건'과 60년대 법제정이 '현재의 '한국식 중화요리''를 만들어 낸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또한 아직 찾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이것이 청나라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간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사실 구한말에 이미 우리가 먹는 형태의 호떡이 자리잡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을 보면 조선아이들이 호떡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모습이 있는데 형태가 지금과 같습니다. 따라서 위에 '찍어 먹는 호떡'은 하나의 다른 '이형'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가능성 (즉 두세가지 호떡이 공존했을 가능성)은 이 38년의 소설에서도 살필 수 있습니다.
삽화에서 보이듯 만돌이가 먹는 호떡은 현재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글을 보면 "겉은 누르스름하고 속은 검은 사탕물이 후물후물하는 호떡, 보름달처럼 둥그런 호떡- 지금 만득이가 먹는 호떡은 그런 호떡입니다" 라는 부연설명이 나옵니다. 호떡이란 것이 저 한가지 형태밖에 없다면 굳이 이런 설명을 붙였을까 싶군요.
청나라사람들이 운영하던 당시의 호떡집 사진은 구할 길이 없어 아쉽습니다. 살펴 본 것과 같이, 지금도 남대문시장이나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되는 호떡집은 근대시기에는 현재와는 사뭇 다른 무대였습니다.
근대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의 하나의 무대로 써도 좋은 곳이 근대의 호떡집인듯 합니다.
한국의 호떡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호떡호떡하다보니 호떡먹고 싶네요.
덧글
실은 조선의 화교는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수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예를 드신 신문 기사가 대부분 실은 20년대 기사인 것도 31년 이후의 상황과 맞물려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불판에 바로 구워 토티야나 인도의 난처럼 겉이 바슬바슬한 호떡도 있더군요. 본문 마지막의 신문에 등장하는 보름달처럼 둥근 호떡이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런 호떡도 있나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당시 호떡의 인기를 가늠해보면 거의 지금의 자장면이나 양꼬치 수준의 인기였던 듯합니다.(일제시대 때를 다룬 소설이 많은 문예지를 뒤져보면 호떡집 묘사는 필수적으로 들어가더군요.)
저 당시 신문을 동아일보밖에 못봐서 아쉽지만, 한가지 신문에서도 저정도 빈도로 나오는 것을 보면 소설에서 지금의 중국집이나 제과점처럼 나온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또 무언가의 트랜드가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인지도 잘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