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13)- 분황사 전탑의 9층설 사료추가, 그리고 이십미터 전각의 불곡사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조선전기의 홍성민(洪聖民, 1536~1594년)의 [계림록(鷄林錄)]에는 임진왜란(1592년 발발) 직전의 경주부 사찰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분황사, 불곡사)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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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焚黃寺)

부府 북쪽 5리에 있는 사찰을 백률사栢栗寺라 하는데, 산기슭에 서서 북천北川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 동쪽 5리에 있는 사찰을 분황사焚黃寺라 하는데, 들의 가운데이자 길의 가장자리에 있다. 금불金佛의 높이가 10척이고, 전탑甎塔의 높이가 백 인仞이다. 

부의 동쪽 5리에 있는 무덤은 신라 명신名臣 김유신의 묘이다. 돌로 무덤을 만들고 소와 말로 장식한 의물儀物도 모두 돌로 만들어서 난간 아래를 두르니, 12신辰에 속하는 동물을 새겼다. 태로원太櫓院의 남쪽에 사우社宇가 있으니, 바로 신라의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이 기록은 1580년 가을, 홍성민이 관찰사자격으로 경주부 외곽을 둘러보던 여행기록입니다. 고려시대까지 활발하던 통일신라 경주모습을 내려다보던 백률사(예전 포스팅)가 간략하게 나오고 그 다음으로 유명한 황룡사 옆의 대사찰 분황사에 대한 16세기 당대의 묘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 흥미로운 부분이 나옵니다. 
금불金佛의 높이가 10척이고, 전탑甎塔의 높이가 백 인仞이다. 

즉, 1580년 당시 분황사에는 지금은 사라진 '금불'이 있었고, 100인짜리 전탑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척 ‘尺’은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했으나, 세종 12년의 개혁에 따라 31.22cm로 바꾸어 사용해 오다가 구한말(1902년)에 일제의 곡척(曲尺)으로 바뀌면서 30.303 cm로 통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31.22센티미터로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분황사에는 약 3미터 10센티짜리 금불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당히 큰 크기죠 (현재 국내의 최대 철불크기가 대부분 2미터 중반대들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분.
즉 현재 분황사 3층전탑으로 추정되는 전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탑甎塔의 높이가 백 인仞이다.". 여기 나오는 즉 1 인(仞)에 대한 스탠더드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최소 성인의 키, 원래 중국에서 나왔을 때의 의미는 당시 기준으로 7-8척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7-8척을 기준으로 했을때는 2.32미터에서 2.49미터가 되고, 사람키고 잡으면 1.6-7미터 정도가 되겠지요. 꽤 큰 차이입니다만, 최소 1.6미터정도로 잡으면 될 듯 합니다.

그런데 전탑은 100 인(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말이 안되게 높은 게 됩니다. 즉 최소 160미터가 넘어간다는 뜻이니, 1) 10인을 오타로 적은 것이거나, 2) 아주 높은 전탑이라 과장된 표현이거나 둘 중 하나로 사료됩니다.

1)번을 근거로 한다면 16~25미터급의 높이가 되겠지요. 그런데 현재의 분황사 전탑은 고작 3층에 그 높이는 10미터가 채 안됩니다. 필자는 따라서 이 기록이 예전에 추정해 본 분황사 모전탑 9층설에 힘을 실어주는 기록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이 가설을 채택할 경우, 10인 즉 16미터정도의 크기는 기단부포함 완벽하게 들어 맞지요.
아무튼 분황사 전탑연구에 매우 흥미로운 구절로 보입니다. 윗 포스팅링크글에서도 소개한 [동경잡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동경잡기
<화주(火珠)> 분황사(芬皇寺) 구층탑(九層塔)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 반을 훼손하였다. 뒤에 어리석은 중이 개축(改築)하려고 하다가또 그 반을 훼손하고서 구슬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바둑돌 같고 빛은 수정(水精) 같았으며, 들어서 비추면 그 바깥까지 꿰뚫어 볼 수가 있다.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 는 솜을 가까이 대면 불이 일어나 그 솜을 태운다. 지금은 백률사(栢栗寺)에 보관되어 있다.

규모상 저 기록(10인으로 가정할 경우)과 거의 정확히 들어 맞습니다. 임란 때 반이 날아갔다는 설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뒷받침 됩니다. 1580년 홍성민의 온전한 전탑구경후, 정확히 80년뒤인 1660년, 즉 임진왜란 이후인 이해 3월 김수흥(金壽興, 1626-1690년)이 다시 분황사를 찾습니다. 

남정록(南征錄)
분황사는 성 동쪽 몇 리쯤에 있는데, 절은 폐한 지 이미 오래이다. 다만 불당佛堂 두어 칸만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동불銅佛이 우뚝 홀로 서 있으니, 이 또한 옛 물건이다. 절 앞에 탑이 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다만 한 층만 남아 있다. 둘레가 거의 6ㆍ7간에 이르고, 사면에 모두 석문을 지었다. 문 곁의 돌 위에 사람의 형상을 새겨 만든 것이 매우 공교하였다. 쌓은 돌의 형상은 마치 벽돌 같고, 그 색은 푸르고 검었다. 두드리니 강철소리가 나서 승려 무리에게 물으니, 이 돌은 평범한 돌이 아니라 전단토旃檀土로 부의 동쪽 해변에 있는데, 이것으로 불상을 만들 만하기에 먼 지방의 사람이 또한 많이 실어갔다고 하였다. 여기로부터 1리 쯤에 있는 냇가에 선덕왕릉이 있는데, 물이 반을 할퀴었고, 멀리서 보니 크기가 산이나 언덕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일컫기를 영험한 이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백율사栢栗寺는 부의 동북쪽 7리 금강산 위에 있는데, 산세가 지극히 높거나 크지는 않지만, 암석이 기이하고 오래되었으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다. 법당의 오른쪽에 작은 누대가 있는데, 아래로 보면 큰 들과 가깝지만, 그늘진 수목 때문에 실컷 볼 수는 없었다. 절 뒤에 순송筍松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으나, 가서 보지는 않았다. 기거하는 승려가 말하기를, 절 가운데 있는 분황사탑 안에서 사리를 얻었는데 볼 만하다고 하였다. 가져오게 하니 궤櫃 안에 비단 보자기 10벌로 싸고 그 안에 은합銀盒을 넣었는데, 이른바 ‘사리舍利’이다. 색이 푸른 것이 있고 색이 흰 것도 있으며 모두 3개로, 그 크기는 노란 콩 같았으며, 작은 구슬 4~5개와 함께 그것을 갈무리하였다. 또 수정 하나가 있었는데, 둥근 형태가 고자鼓子 같은 원형으로, 빛이 사람을 비추어 밝게 꿰뚫어 볼만하였다. 또 금침金鍼과 은침銀鍼이 각각 하나가 있었는데, 푸른 유리로 된 작은 통에 갈무리되어 보기에 기이하였다. 채주부와 함께 잠시 법당에 앉았다가 해가 저물려고 하자 파하였다. 금장재金藏臺를 가려고 말을 달려 금천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았으나, 다만 하나의 황폐한 언덕이 물가에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오르지 않고 되돌아왔지만, 그 조망은 봉황대보다 낫다고 하겠다.

이 김수흥의 [남정록]을 보면 [동경잡기]와 거의 비슷한 기록이 나옵니다. 즉, 원래는 9층이었던 이 모전탑을 왜군이 반을 훼손하고 즉 약 4층정도로 낮아지고, 그 후 다시 어리석은 승려 한명이 '반'을 훼손, 그러니까 1-2층만 남게 됩니다. 또한 왜군의 피해를 살필 수 있는 것이 '불상'의 모습입니다. 분명 김수흥의 1560년 기록에서는 '10척 금불'이라고 되어 있는데, 1660년의 이 기록에서는 '동불'로 되어 있습니다. 그 형상은 여전히 우뚝하지만 금칠이 다 벗겨진거죠.

또한 [동경잡기]의 백률사의 투명하고 불을 일으키는 '수정구슬'이 원래 분황사에서 왔다는 더 자세한 기록이 나오며, 무엇보다 전탑안에 모셔져 있던 '사리'가 백률사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흥미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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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원래 기록인 김수흥의 1580년 그러니까 임진왜란 12년전의 기록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생소한 사찰인 '경주 불사'입니다.

불곡사 (佛谷寺)

사당의 북쪽에 오릉五陵이 있는데, 곧 신라왕의 침원寢園으로서 언덕 같기도 하고 밭두둑 같기도 하여 다섯 개인지 분간할 수 없다. 부의 동북쪽 5리쯤 황량한 들판에 고릉古陵이 있는데, 물로 깎이고 들쥐가 구멍을 내어 침원이 무너져 사람들이 다투어 금옥을 캐내어 돌구멍 속이 텅 비고 돌문이 기울어졌다. 엿보면 석실石室이 장엄하고 일월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나 어느 왕의 능인지 알 수가 없다. 동해 가에 세워진 대를 이견대利見臺라 하고, 바다 가운데에 세워진 돌을 대왕암大王巖이라 하는데, 바로 신라왕의 효성을 추모하는 곳이다. 

동북쪽 40리 끊어진 산기슭 사이에 있는 대찰은 불곡사佛谷寺라 한다. 사찰의 문 행랑은 돌을 엮어 사다리 계단을 만들어 층계를 놓았는데, 절의 앞면에 가로로 늘어뜨려 건너 간 것이 거의 수백 보에 이른다. 뜰 가운데 석탑은 올려다 바라보면 아득하며, 탑의 위는 대臺로 눌렀고, 대 위는 난간으로 둘렀는데, 모두 돌을 사용하였다. 절의 뒷면에는 또 누각이 있는데 층층이 거의 10인仞이며, 또한 돌을 사용하였다. 
우선 불곡사(佛谷寺)는 현존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대방동에 위치한 불곡사는 아닐 겁니다. 창원의 위치는 기록의 경주 동북 40리 산기슭에 반대 방향입니다. 저 기록의 불곡사가 될 수가 없지요.

이 기록에 나오는 불곡사는 '경주' 북쪽에 있던 사라진 대사찰로 보입니다. 이 사찰은 꽤 흥미로운 구조를 보여주는데 우선 사찰의 문옆에 늘어선 행랑에 돌로 사다리 계단을 만들어 층계를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가로로 거의 수백보 (1보가 최소 1.2미터 (정보링크글)이니 수백보면 수백미터)입니다. 그리고 석탑이 사찰정원내에 서있는데 '아득하게 높고' 탑 윗부분을 '대臺'로 누르고 난간을 만들어 두었다는 모습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연상시킵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부분.
"절의 뒷면에는 또 누각이 있는데 층층이 거의 10인仞이며, 또한 돌을 사용하였다"라는 부분입니다. 즉, 16세기말의 불곡사에는 다층건축이 있는데, 그 높이가 약 10인이라는 것입니다. 10이면 아까 살펴본대로 최소 16미터에서 20미터 이상이 됩니다. "幾 (몇 기)"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것이 '층수'를 말하는 것인지 '인'앞에 붙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층과 기 사이의 글자는 알아보기가 힘든데,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글에 첨부하겠습니다.

더 알아볼 구석이 있지만, 이 기록은 임란전까지 존재하던 경주 불곡사라는 사찰의 규모와 다층불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임진왜란 이전의 기행문들은 한국건축을 포함한 훼손되기 이전의 문화재의 모습들을 살필수 있는 타임머신같은 귀중한 기록들입니다. 오늘 소개한 '분황사 금불상과 원래모습의 고층 전탑', 그리고 현대한국에서는 완벽하게 잊혀진 경주 불곡사나 예전에 소개한 '봉황장식이 있던 '대 숭복사' 등에 대한 더 활발한 연구와 알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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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아래 부분은 [계림록]의 후반부로 저자의 경주유람 소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제와 큰 관계가 없기에 여기에 소개합니다.

남은 자취와 오래된 유물을 거의 다 탐방하니, 국가의 흥망에 대해 회포가 있기고 하고 상심이 들기도 하여 나도 모르게 울적한 마음에 우두커니 서서 깊이 탄식하였다. 해동海東의 나라 중에 오직 신라가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하였는데, 그때에 재력을 소진하고 백성의 목숨을 다하여 토목과 금석으로 궁궐을 짓고, 성황城隍을 짓고, 산릉을 만들고, 불찰을 지어서 옥으로 치장하고, 비단으로 장식해서 가무를 열고, 잔치를 열어 천년 동안에 풍성하고 화락한 즐거움을 누리며 스스로 동해가 손 안의 물건으로 천지가 다하고 만고가 끝나도록 바뀌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가, 하루아침에 거울 속으로 옮길 수 없는 글과 같이 되어서 계림鷄林의 누런 잎이 곡령鵠嶺의 푸른 솔에 양보했으니, 지금 여기에 남은 것은 흙덩이와 돌조각이고, 태반은 파묻혀 있다. 

송악松嶽의 상서로운 구름도 겨우 오백년 만에 흩어졌으니, 마침과 흥망이 두 언덕에서 황량한가? 아니면 천지의 기수氣數는 끝내 바꿀 수 없는가? 당시에 뛰어난 재주와 큰 지략으로 업적을 남겨서 이름난 자, 충렬로 이름난 자, 문장으로 이름난 자가 얼마였던가? 참소하고 아첨한 자, 영화와 총애를 고집한 자, 선량한 사람을 배척한 자, 부귀를 쥐었던 자는 얼마였던가? 난초 같은 마음에 비단 같은 자질로 총애를 다툰 자, 치장하는데 힘쓴 자, 말 많은 자는 몇이나 되는가? 향기를 남겼던 이나 악취를 풍겼던 이나 함께 죽음으로 돌아갔다. 

별이 지고 안개가 사라지듯 그들의 그림자조차 황천길 속에 묻혀 버렸으니, 어찌 당시에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명성이 천년도록 없어지지 않을 이로 업적은 김유신金庾信이 그러한 사람이고, 충렬은 박제상朴堤上이 그러한 사람이고, 문장은 최고운崔孤雲이 그러한 사람이다. 아! 신라 왕조의 역년歷年이 길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천년의 사업이 다 사라져서 남은 것이 없어서 처량한 오릉五陵에는 소타는 자만이 지나다니고 신령에게 빌던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그 부귀와 번화함이 조선시대로 다 들어오니, 금으로 만든 병이 다시 만들어지고, 옥으로 만든 등불이 사방을 고르게 하였다. 계림鷄林 큰 부府는 영남과 전국의 도회지로 동쪽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 붉고 푸른 누대가 기라성처럼 빛나니, 바라보면 신선이 사는 곳 같다. 재주가 없는 사람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붉은 끈을 머금고 옥으로 만든 부절을 쥐고서 10년 사이에 거듭 이곳을 안무按撫하였다. 공무의 나머지에 부윤府尹 윤씨가 화려한 연회를 열어 여러 악기를 갖추고 술을 대접하며 빈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은 촛불을 녹이며 밤을 이으니 반드시 밤새도록 화락하고 실컷 마시고 즐거움을 다하고서야 잔치를 끝마치리라. 임금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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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구둥지 : 분황사 모전석탑 9층 추정, 일제시대 기록추가 2016-02-17 00:53:32 #

    ... 원래는 9층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필자도 두 차례 주장한 바 있습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원래 9층이라는 사료추가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13)- 분황사 전탑의 9층설 사료추가, 그리고 이십미터 전각의 불곡사 아직 확실한 맥락은 모르겠지만, 성급한 추론을 해보자면 아마도 [동경잡기]등의 문헌기록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 ... more

덧글

  • 레이오트 2015/12/06 09:35 #

    분황사 모전석탑은 여러모로 미스터리이지요. 진짜 이 주장대로 9층탑이고 이걸 복원한다면 신라문명을 대표하는 2개의 9층탑 확정이겠군요.
  • 역사관심 2015/12/07 03:48 #

    이제껏 살펴 본 사료로는 개인적으로 9층설이 합당해 보입니다만, 전문가들의 연구가 있어야겠지요. 탄탄한 가설이 뒷받침된다면 재건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레이오트 2015/12/07 10:55 #

    황룡사 9층 목탑과 달리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3층 정도 남아있지요.
  • 역사관심 2015/12/07 11:39 #

    그렇습니다. 재건이라는 뜻은 그 위에 증축한다는 뜻이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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