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건축 (18)- 조선전기 2층 다락방, 누방(樓房) 한국의 사라진 건축

예전에 조선전기 경복궁회화를 소개하면서 글 중간에 지나가듯 다룬 현재는 쉽게 보기 힘든 형식의 전통건축이 있습니다(링크글). 우리가 흔히 '다락방'이라고 이야기하는 '누방'입니다. 글의 말미에서 이 누방을 따로 다뤄보겠다고 말씀 드린바가 있지요. 오늘은 당시 글중 관련부분과 새로 쓰는 글을 더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조선중기이후 다층생활건축의 부재로 인해, 흔히 전통'다락방'이라고 하면 우리 뇌리에는 부엌방이나 창고방등의 부속시설인 '꿀단지나 보관하는 간이형식의 벽에 있는 작은 보관공간'같은 곳을 떠올리기 쉬울 겁니다. 아이 한둘 숨을 정도의 공간이 떠오르는 그 다락말입니다. 그런데 한자로 樓房을 검색하면 여타 아시아국가들에서 이 단어의 정의가 꽤나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건축으로는 보통 중국의 고층아파트가 검색되고, 전통건축으로는 다층건축이 나옵니다. 이런 식이지요.
명대누방

현대누방

樓房 (누방, 다락방)

과연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진 조선전기까지의 누방은 부엌의 다락일까요, 혹은 몇번 소개한 것처럼 우리가 보는 사방이 훤히 뚫린 현재의 정자형태의 '**루'의 2층공간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태조실록에는 확실히 당시 경복궁에는 동루와 서루라는 건축물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상하층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나옵니다. 

태조실록 4년 (1400)
東隅有連排三間 西隅有連排樓五間 (중략) 東樓三間 有上下層 (중략)西樓三間 有上下層 (중략) 東西角樓各二間 중략) 東西樓庫之類總三百九十餘間也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중략)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중략) 서루(西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중략) 동·서각루(角樓) 각각 2간 (중략)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태조실록의 1400년 기록을 보면 이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합니다. 또한 이 누각들은 정자형 누정이 아닌 사방이 막힌 '누각'들로 추정됩니다. 아래 기록을 보면 '이 동서루 (용문루, 융문루)'안에 궁궐의 중요서책들을 보관하고 있지요. 다만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부분은 의역같습니다. 원문에는 '西隅有連排樓五間' 이라고 되어 있어, '누방'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누(루)'라고 되어 있지요. 

다만, 문맥상 '동쪽 구석에 세 칸, 서쪽에 잇달아 있는 루가 5칸, 이라고 되어 있고, 바로 다음에 동루, 서루가 모두 상하층으로 되어 있다고 되어 있어, '방'형태로 짐작되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기록을 보면  이 두 2층 건축물들 (융문루, 융무루)에 양쪽다 벽으로 둘러싸인 '방'들이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이 나옵니다.  樓 (동루)-樓 (서루), 조선전기의 문무의 발란스를 보여주는 루 이름이라 꽤 흥미롭죠. 정도전은 [한경지략]에서 이 두 누각에 대해 말하면서 "문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무로써 외란을 제압, 나라를 평온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문무의 발란스를 확실하게 강조합니다.

아래 1503년의 이 기록은 말씀드렸듯 이 융무루와 융문루가 모두 벽체를 가진 2층건축임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燕山 49卷, 9年(1503 癸亥 / 명 홍치(弘治) 16年) 3月 28日(乙未) 
경복궁 용문루의 책을 융무루로 옮기게 하다     

傳曰: “景福宮隆文樓所藏書冊, 竝移隆武樓。 且東武樓開鑰, 同守宮內官開閉。”
전교하기를, “경복궁 융문루(隆文樓)에 간직한 서책을 모두 융무루(隆武樓)로 옮기고, 또 동무루(東武樓)의 자물쇠를 수궁 내관(水宮內官)으로 열고 닫게 하라.” 하였다.

즉, 전기 경복궁에 있던 융문루에는 '서책'을 보관하고 있었고, 이를 융무루로 옮기고, 동무루(아마도 융무루)의 자물쇠를 맡기는 장면입니다. 이 곳은 지금 복원되어 있습니다만, 이를 또 이런 식으로 (예전 창덕궁의 2층루에서도 지적했듯), 2층으로 보이지 않는 기둥으로 만든 이상한 모습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복원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다음 기록은 조선전기 공식 2층창고의 규모를 보여줍니다. 1425년 세종대의 기록에 나오는 이 '루고樓庫' (누고)라는 것은 직역하면 2층창고(다락창고)라는 뜻이 됩니다. 역시 임란직후인 광해군대를 마지막으로 사료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는 조선전기대 기록에만 나오는 건축형태로 루고 역시 2층이었음이 다음 기록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세종 28권,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6월 23일(신유) 
前朝司宰魚物庫在松都, 纔單三間而已, 五百年間經國之費, 未嘗闕乏也。 
今司宰監則樓庫三四, 巍嶪宏壯, 猶未能盡容, 多作假庫。

전조(前朝) 사재(司宰)의 어물고(魚物庫)가 송도에 있었사온대, 겨우 단층 세간뿐이었사오나, 그래도 5백 년 동안 국가에서 소용되는 데 모자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재감에는 이층 창고가 서너 채가 있어 높디 높고 크기가 굉장하오나, 그래도 다 들여넣을 수 없어서 가창고(假倉庫)를 많이 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누고(樓庫)가 巍 (높고 클 외) 嶪 (높고 험할 업) 宏 (클 굉) 壯 (장대할 장) 즉 높고 높고 굉장히 크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그 규모를 엿보게 합니다. 창고이니 당연히 사방이 막힌 건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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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방'이라는 단어는 실록에서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직전인 명종대 기록을 마지막으로 조선궁궐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즉 후대의 경복궁에서는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저런 형태로 복원해 두었겠지만). 이 다락방의 기록은 역시 조선전기인 연산군대에도 등장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연산 61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1월 26일(병오)
경복궁의 가면극 하는 곳의 가가를 온돌로 급히 짓게 하다     
丙(辰)〔午〕/傳曰: “景福宮山臺處假家, 令該掌司急造, 幷設樓房及溫堗。”
전교하기를,
“경복궁의 산디놀음하는 곳의 가가(假家, 임시거처방)를, 해사(該司)에 명하여 급히 짓게 하고, 아울러 누방(樓房)과 온돌을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현재 번역본에는 '누방과 온돌로 만들라'라고 이상하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設樓房及溫堗" 이라는 말은 문맥상 '누방을 온돌로 만들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가(假家 임시방)를 누방과 더불어 온돌로 만들게 하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역시 조선전기인 임란직전시대인 명종대에도 누방이 나옵니다.여기서 '초책'이라는 것은 초벌로 거칠게 기록한 문서를 말합니다, 즉 초본원고정도 되지요. 

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7일(정묘)
臣初入經筵而退, 與王希傑。在政院樓房, 憑修草冊, 相與言曰
신이 처음으로 경연에 들어갔다가 물러나와 왕희걸(王希傑)과 더불어 궁궐정원의 다락방(樓房)에 앉아 초책(草冊) 을 증빙 정리할 때 서로 말하기를... 중략.

궁궐정원의 다락방에 앉아 초본원고를 정리했다는 말은 이 곳도 '실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누방'이라는 곳은 확실히 상층에 존재하던 실내의 방임을 보여주는 역시 임란전인 1525년 중종대 기록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탕빙이라는 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당시 한량이던 윤탕빙(尹湯聘)을 말합니다.

중종 53권, 20년(1525 을유 / 명 가정(嘉靖) 4년) 3월 14일(계유) 5번째기사
유세창의 공술 
    
유세창을 국문(鞫問)하니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나이는 32세입니다. 신은 서소문 밖에서 살고 한량 윤탕빙은 아이고개(阿伊古介)에서 사는데 갑신년 12월부터 반송정(盤松亭)에서 서로 만나 그대로 함께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탕빙이 매양 신의 집에 왔고 더러는 반송정에서 함께 활쏘기를 하였습니다. 이달 초승 무렵에 폐문(閉門)할 때쯤 탕빙이 충찬위(忠贊衛) 김말진(金末珍)과 신의 집에 왔다가 신이 말진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평소 침실로 쓰는 행랑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도록 했습니다. 중략.

아우 세영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4경 무렵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도 각각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탕빙이 신에게 ‘함께 다락방으로 올라가 이야기하자.’고 하며 탕빙이 신에게 ‘전시(殿試) 보이는 날 함께 놀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신이 ‘어떤 놀이를 하며 노느냐?’고 묻자, 탕빙이 ‘반송관(盤松館) 뒷동리에 각기 술과 과일·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소혁(小革)) 을 쏘며 놀이한다.’고 하기에, 신이 ‘좋다.’고 했었습니다. 중략.

원문을 보면 이렇습니다.
共上樓房, 作話。같이 다락방 (누방)으로 올라가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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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寢室 (누침실- 루의 침실)
또한 좀 더 전대인 세종대에는 예전에 고려시대의 침루기록으로 살펴본 '침루' 기록까지 경복궁에 등장합니다. 즉 '침실이 있는 루'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종 107권, 27년(1445 을축 / 명 정통(正統) 10년) 1월 28일(임인)
거처를 연희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승정원에 전지하다     
昨日左議政等以衍禧宮多蟲蛇(중략)若蟲蛇果多 恐未安心過夏 且松木鬱密 而北垣低微 樓寢室遮陽朽破 將伐松築垣 修葺遮陽 予欲移御他處 畢修而還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어제 좌의정 등이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이 있다고 하여 초수리(椒水里)로 가기를 청한 것을 듣지 않았고, 또 개성으로 가기를 청한 것도 또 듣지 않았으나, 문득 생각하니 만일에 벌레와 뱀이 과연 많다면 안심하고 여름을 지내지 못할까 싶다. 또 소나무가 울밀하고 북쪽 담이 낮고 미약하며, 다락(루)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환자(宦者) 전길홍(田吉弘)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을 가 보고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樓寢室 (루침실), 즉 '누의 침실'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침루에 '차양'이 있었음도 나옵니다. 여기서는 '누침실'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역시 조선전기인 성종대에도 '寢樓' (침루)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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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외 조선전기 문헌에 등장하는 누방기록들

조선전기의 사료들이 속속 소개되면서 조금씩 그 실체가 보이는데, '누방'이라는 단어는 실록뿐 아니라 일반문집에서도 조선전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후기에는 사라집니다. 대부분 사찰기록입니다. 우선 김수온(金守溫, 1409(태종 9) ~ 1481(성종 12)년)의 [식우집]의 기록입니다.

식우집(拭疣集)
原文图片 記類
奉先寺記 

奉先寺者。我大王大妃殿下爲世祖大王而創之者也。成化紀元之四年。我世祖大王升遐。群臣擇地於楊州之地。東距州治三十有餘里。山曰注葉。原曰雲岳。以其年十二月有日。奉葬世祖大王玄宮于此。禮也。大王大妃殿下懿旨。以爲我大行大王躬遭大亂。克正大憝。聖德隆功。自有東方。莫之與京。國家不造。奄棄群臣。嗚呼痛哉。稽諸古制。先王陵寢之所。必有精廬之設。今大事已畢。卿等其相造寺之基以聞。於是。上命河城府院君臣鄭顯祖,上黨府院君臣韓明會,綾城府院君臣具致寬等爲提調。陵室之南。有一奧區。山回水冽。允宜佛宇之壤。臣顯祖等奏蒙允可。經始於己丑六月。告訖於秋九月。正殿層閣三間。四面附楹。名曰大雄寶殿。睿宗大王所命也。東上室三間。四面有退。名曰普應堂。西上室三間。四面有退。名曰海空堂。東曰僧堂三間。前後有退。名曰訪迹堂。西曰禪堂三間。前後有退。名曰雲霞堂。常距長廊六間正門一間。名曰圓寂門。鍾樓層閣三間。名曰淸遠樓。中行廊十三間,內天王門一間。名曰證眞門。門東廊三間。名曰雲集寮。次三間。名曰猿歇寮。西廊三間。名曰海納寮。次三間。名曰塵靜寮。

東樓房三間名曰虛寂寮西樓房三間。名曰燕寂寮。佛供殿六間。名曰香積堂。正廳二間,房一間。名曰興福寮。正廚二間幷五間辦都房。前後有退四間。名曰轉熟堂。庖廚之所。有樓庫地庫幷十六間。傾廊造餠廳,湯子房,洗閣幷十五間,沙門三間。名曰離幼門。以楹計者。摠八十有九間。塗堲黝雘。極其鮮明。佛殿僧寮。暉映洞達。鈴鐸琴筑。風至自響。以至薦席簦榻。無不精麗。楗椎道具什器之類。悉贍悉備。諸山寺刹。無與爲比。其出田奴婢錢谷常住之資之數。永爲佛僧供養。則別有文簿。玆不及。以其年九月初七日。大設薦世祖以落成。懿旨又以爲寺則旣立。然距陵寢岡巒相隔。宜構眞殿于寺側。使大行在天之靈。亦得遂歸依之。敬以利樂冥遊。乃立影殿于寺東。名曰崇恩殿。設參奉二員。以備晨昏之謁。朔望必遣獻官。與陵室同體。於是。提調臣鄭顯祖等還奏事畢。睿宗大王賜額奉先寺。大王大妃殿下親幸謁陵所。駐輦于寺。周咨覽觀。仰瞻眞殿。覩大行幀影。悲哽嗚咽。不勝哀痛。侍從群臣。莫不洒淚。時節別薦。大王大妃殿下或親詣陵下行祭。嗚呼痛哉。臣聞。自古王者之興。未有不自后德之賢。夏之塗山。周之太姒。見於經傳。其事章章有之。我大王大妃殿下佐我世祖。爰自晉邸及登寶位。英謀果斷。裨贊聖德。化家爲國。景命有僕。求之史籍。聖德之隆。內助之功。卓冠百王。雖塗山之於夏后。太姒之於成周。無以過之矣。臣聞。全生事之敬者。必盡死事之禮。遵處世之敎者。必奉出世之法。此忠臣孝子所以事君親能全其德之道也。我大王大妃殿下爲先王哀痛之誠。追慕薦禱之志。旣有以盡其誠敬。而至於創大伽藍。密邇瑩域。張皇三寶之敎。以起超升之便。此又事君事親。尤全其德而班諸后德之賢。亦前代帝王罕有之盛事也。

이 기록은 봉선사(奉先寺)라는 사찰에 대한 기록인데, 봉선사는 원래 969년(고려 광종 20) 국사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때(15세기초) 절을 혁파했다가, 1469년(예종 1)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尹)씨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고 칭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저자 김수온의 생몰시대인 15세기, 즉 세종대왕대의 봉선사 중창기록입니다. 위에 '종루각'을 만들었다는 굵은 체 부분은 정확히 1469년의 중창기임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봉선사는 1848년(헌종 14)에는 화주 성암(誠庵)과 월성(月城)이 중수한 모습입니다). 

樓房三間名曰虛寂寮西樓房三間。名曰燕寂寮
즉 동쪽누방은 세칸이고 (이름은 허적료), 서쪽누방도 세칸(이름은 연적료)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역시 전기문인인 주세붕(周世鵬) , 1495년(연산군 1)년 ~ 1554년)의 [무릉잡고]에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명찰 개경 영통사(靈通寺) 대한 기록입니다.

武陵雜稿卷之一○原集 原文图片
贈六全上人 

天磨萬古靑未了。幾年夢想空回首。今春始佩耤田印。獨喜玆山落我手。瘦馬西指坡州道。眼驚衆峭如畫出。橫飛直欲凌絶頂。愧無列子御風術。十步九望到分司。相親已識眞面目。竊念聖主孝如禹。祭享最重粢盛穀。判農特命白髮臣。遊賞必須耕種畢。霖雨流膏播告訖。振衣豈待諧朋匹。使喚天和指路僧。縱靶直抵花潭歇。有僧追至名六全。澄眸藍碧眉如雪。謂僧汝家本宗空。號宜萬空胡六全。曰眼耳鼻舌身意。未有不全能空焉。欣然携入靈通寺。飄飄杖錫氣彌天。斜陽共讀大覺碑。明月對酌毗盧堂。儒談釋語雜今古。終宵枕流西樓房。渠凌絶險我由麓。分溪半日會朴淵。朴淵飛瀑天下奇。

終宵枕流西樓房 
"밤새도록 서쪽 누방에 베개를 누이다." 라고 되어 있어 조선전기까지의 영통사에는 누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원된 개성 영통사


다음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11권의 原文图片의 경기도 양주목 대사찰 '회암사'기록입니다.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
회암사(檜巖寺)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윗 부분(원문)입니다. 현재 회암사 소개를 보면 중심건물인 '보광전'만 중층으로 유추할 뿐, 다른 다층건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이 기록은 여러가지 루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우선 '남루'라는 건물은 '동서'벽이 갖춰진 건축임이 나오고, 또다른 건물인 '객실의 서루'에 글씨가 남아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당대의 회암사 객실에는 글씨를 쓸 수 있는 '벽체'가 있는 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시대 '객사'건축의 기록을 예전에 살펴보았듯, '손님이 머무는 객관은 전망이 좋아야하고 따라서 '루'에 침실을 마련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 기록 역시 그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기록은 흥미롭게도 조선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대전인 '임진왜란'의 주역, 충무공의 기록입니다.

李忠武公全書卷之七
原文图片 

 亂中日記三
十一日庚戌。晴。早上樓房。終日看役。
十六日乙卯。晴。曉。上新樓房。○右水使及臨淄,木浦等官出去。因宿新樓房

亂中日記三
[乙未]九月 
二十五日甲午。晴。未時。鹿島下人失火。延及大廳與樓房。盡爲燒燼。軍粮,火藥,軍器等庫。不及火。而樓下長片箭二百餘部燒燼。可歎。

유명한 [난중일기]에 나오는 부분들입니다. 
早上樓房 이른 시간에 누방(다락방)에 오르다.

11일 기록을 보면 위의 기록이 나오는데, 사방이 뚫린 공간을 '누방'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근거가 5일뒤인 16일을 보면 나오죠. 
上新樓房。누방에 새로 오르다.
延及大廳與樓房 대청과 더불어 누방이 연이어 있다.
因宿新樓房。누방에서 다시 잠을 자다 (혹은 묵다).

사방이 뚫린 정자형 누각에서도 잠이야 잘수 있다고 하면 의미없는 기록이 되겠지만, 조선전기의 많은 기록들을 살펴볼 때 문맥상 '침루'형태의 2층에서 잠을 주무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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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펴본 '누방'들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 연구된 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어떤 경우는 궁궐의 서책보관장소로, 어떤 곳은 고려시대처럼 일반저택의 '침루'로, 어떤 곳은 사찰이나 객관의 손님을 위한 '침루'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형태의 건축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한 당대 동아시아 건축이라는 Macro view아래 새로운 연구시도들이 많아지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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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레이오트 2015/12/13 10:16 #

    제가 아는 한에서 지금도 남아있는 한옥에도 누방은 아니어도 이런저런 물건들 보관하려는 공간이 지붕과 들보 사이에 있는 경우가 꽤 있다네요.

    다른 이야기지만 서양의 최고급 아파트를 가리키는 펜트하우스라는 말의 펜트는 5를 뜻하는 펜타에서 나온 말인데 이게 일반적인 최고층 방과 삼각형 누방이 공간적으로 어떤 방해도 없이 연결된 모습이 오각형을 이룬다고 해서 그런 접두사를 붙인거라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5/12/14 07:16 #

    그게 꽤 넓어진 모습이 아마도 일본의 고야구미가 아닐까 합니다 (하네기의 영향이지만). 누방은 그런 공간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말씀하신 공간에 들보를 올리는 상량식에 쓴 기념품을 넣어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

    펜트 하우스... 몰랐는데 재밌는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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