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행동, 행동과 감정 (단순한 뇌, 복잡한 나 中) 독서

이케가야 유지의 저서는 쉬운 듯하면서도 진정으로 학제적이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오랜만에 일부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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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옳고 그름
그러니까 우리는 애초에 늘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까 말한 '거꾸로 안경'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갖춘 '거꾸로 안경 (안구의 렌즈)'을 교정해서 있는 그대로의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해 주었다는 말이 된다. 

자 이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의 '올바름'이란 과연 무엇일까? 결국 뇌에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의 기준 같은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방금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세계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올바른지 그른지의 잣대는 '얼마나 거기에 익숙해져 있나'라는 잣대로 바꿔도 좋다. 즉 옳고 그른 기준은 우리의 '기억'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애초에 '올바르다' '그르다'의 절대적 기준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얼룩말이라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은 어떤 무늬를 가지고 있는가? 하얀 바탕에 검은 줄인가, 아니면 검은 바탕에 하얀 줄인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로 대답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주민에게 물어보면 '검은 바탕에 하얀 줄무니'라고 대단한다. 뜻밖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짐작이 된다. 피부색이다. 그들에게 바탕색은 검은 색이며 하얀색은 장식이다. 황인종이나 백인종과는 발상이 다른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 기준을 옳고. 그른. 기준이라고 착각해 버리면 '차별'을 낳는다. 유감스럼게도 인간은 자기가 느끼는 세계를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감정과 행동, 행동과 감정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신체적 사실(행동)이 모순되면 매우 불쾌해진다. 감정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싶어한다. 심신이 괴리된 상태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어떻게 해야 일치시킬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밖에 없다. 즉 행동을 바꿔서 감정에 일치시키거나 감정을 바꿔 행동에 맞추거나. 감정과 행동을 놓고 볼 때 어느 쪽이 바꾸기가 더 쉬울까? 답은 명백하다. 감정이다. 왜냐하면 행동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사실'을 바꾸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떤 경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음은 아주 쉽게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을 행동에 맞게끔 변화시켜서 몸의 사실, 즉 '작업을 하고 있다'라는 사실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낮은 보수로 단조로운 작업을 하는 경우). '나는 이렇게 낮은 보수로 일하고 있다', '이는 곧 이 작업은 결코 재미없고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가치있는 일이다',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원해서 적극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앞서 앙케트 결과가 설명된다.(주: 예를 들어 돈을 들여 어떤 여행지를 가면, 작은 일에도 흥미를 느끼고 새롭다고 느끼는 감정의 차이 (내지인과 외부인) 역시 근본적으로 이런 식이라 볼수 있을지도).
중략.

마음의 출처
행동이나 감정의 이유를 알고 싶다는 욕구는 '사물의 이치'를 알고 싶다는 것과 비슷하다. 원리나 이치를 알고 싶은 것이다. 자신에게 관련된 이유를 알고 싶은 욕구가 타인의 언동의 이유나 이 세계의 존재 원리를 알고 싶다는 소망으로까지 발전하면 그것이 곧 호기심일 것이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거기에서 고차적으로 파생하는 이른바 '마음의 양상'이라고 해도 좋은 내용이다. 일련의 실험을 돌이켜 보면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뇌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주: 항상 주장하듯 '아는 만큼 보이는 것보다, 보이는 것만큼 알게 되는게 더 먼저다').

왜냐하면 자신이 취한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의 근거를 (뇌가 합리화해서) 설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마음의 요소는 뇌 속에 있다기 보다 몸에 있을 것도 같다. 물론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다면 "뇌에 있다"라고 대답해도 좋겠지만,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는다면 뇌만이 아니라 몸에서도 오고 주변환경에서도 온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자유의지
아까 논문을 소개했듯이 원레 레버를 쥐는 손힘은 '뇌의 흔들림'으로 정해진다고 했다. 힘을 세게 줄 때와 약하게 줄 때가 있고, 뇌의 흔들림 상태를 관찰하면 악력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파이팅!'이란 글자가 나오면 세게 쥔다. 이것은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즉 '파이팅!'이라는 글자를 봄으로써 뇌 흔들림이 '세게 쥔다'는 모두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즉, 환경이나 외부 자극이 뇌 흔들림의 패턴을 고정해 주고, 그리서 우리 행동은 완전한 랜덤이 아니라 장면이나 상황이 비슷하면 매번 대체로 동일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의지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반사'다. 환경이나 자극에 대해서 단순히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본인은 '스스로'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환경이 흔들림을 결정해 버리고,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중략.

우리의 행동은 피드백만이 아니라 역모델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외부 세계가 이미 뇌 속에 경험으로 보존되어 있고, 경험이라는 '세계에 대한 복제'를 기초로 목표에서부터 계획을 역산한다. 그것을 흔히 '예측'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에 기초, 그런 예측을 하고 있다. 우리 행동의 태반은 과거의 '학습'으로 습득한 기억에 기초한다. 기억을 사용해서 늘 미래를 읽고 있는 것이다. 뇌는 미래를 느끼려고 온 힘을 다해 늘 노력한다. '움직였다'라고 느끼고 나서 실제로 움직인다는 기묘한 현상이 생기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마무리
내가 최소한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는 않다는 점이다.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고 볼 만한 점들이 분명히 많다. 하지만 '자유'는 느끼는 것이며, 참된 의미에서 '자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자유 의지'를 느끼며 살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라는 말도 할 수 있다. 다만 마음에 솟아나는 감정을 비롯해서 자유롭지 않은 부분도 많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는 있겠다. 좀처럼 제어되지 않지 않는가. 
- 단순한 뇌, 복잡한 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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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새로운 결과는 아니다. 이미 60년대부터 로렌스 바살로우같은 인지심리학자는 개념이 지각적 상징시스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자동차라는 개념은 일반적인 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랭귀지, 텍스트) 기술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김새, 소리, 냄새, 감정등의 감각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들을 뇌과학에서 입증해내고 있는 요즘이다.



덧글

  • 소심한 펭귄 2015/12/18 18:15 #

    주인장님이 흥미로워하실 유물이 발견 되었는데 혹 모르시고 있지 않을까 링크해 봅니다.^^
    공주성 유적조사 중 6세기경 백제의 6m짜리 사다리가 거의 원형 그대로 출토되었다고 하네요
    과거도 그렇고 현재에도 건축시에 사다리의 역할은 큰것을 감안하면 매우 귀중한 발굴성과 같습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197459&ref=A
  • 역사관심 2015/12/19 10:02 #

    소심한 펭귄님> 귀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흥미로운 소식이네요 소개하고 싶어지는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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