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5세기 백제 사다리발굴과 고대의 수십미터 사다리들 역사


지난 주에 의미있는 발굴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6세기 신라 금석문이 발견된 것이고 또 하나는 5세기의 백제 사다리가 고대시대 최초로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된 것입니다. 

발굴지는 21세기 들어 명문갑주등 많은 중요한 문화재가 나오고 있는 공주 공산성의 사각 연못지입니다.
=====


건물지 북쪽에서는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 형태의 너비 10m, 바닥면 6m, 깊이 2.6m의 대형 연못도 확인했다. 연못 바깥에는 1.5m두께의 점토를 발라 물이 새는 걸 방지하고 있다. 연못 바닥에서는 백제 시대의 나무 사다리가 출토됐다. 

길이 6m, 너비 70~80㎝이고, 발판은 50㎝간격으로 11개가 있다. 대전 월평동유적 내 목곽고에서 유사한 형태의 사다리 파형이 발견된 적은 있지만 완전한 형태의 백제 시대 사다리는 이번이 최초 발견이다. 연못 내 진흙 속에 놓여 있어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발판의 양쪽 끝 부분에 장방형의 촉을 내어 결합한 형태로 백제의 목재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수종(樹種) 분석을 통해 사다리 재질은 참나무인 것이 밝혀졌으며, 앞으로 정확한 연대측정을 위한 분석을 진행할 예정이다. 
====

약 6미터의 높이 사다리이고,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형태입니다. 사다리의 목재가 '참나무'인것도 흥미로운데, 이 부분에 대해서 예전에 포스팅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애국가는 위험해도 황룡사의 수종은 소나무가 아닌 참나무). 이 포스팅에서 다시 소나무의 시대가 가고 참나무등 활엽수의 시대가 삼국시대처럼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1500년을 뛰어넘어 참나무 사다리의 등장은 꽤 묘하네요.

이 발굴은 백제 관청 건물터 발굴과 함께 이루어진 성과로 약 31동의 건물터가 발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백제 관청 건물이 확인됐다.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 일대에서 발견된 문화제가 백제시대 관청 건물군으로 분류됐다. 문화재청, 충청남도, 공주시는 11일 제8차 공산성 발굴조사 성과 현장 설명회를 연다. 이에 앞서 내놓은 자료에서 공산성의 옛 성안마을 북서쪽 대서지 1만2000㎡를 조사한 결과 백제 시대 관청 건물군을 비롯한 건물지 31동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발굴지는 공산성 동남향 완만한 구릉 사면부로 5단의 계단식 축대를 쌓고 180cm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보강했다. 대지 중앙부는 마당을 중심으로 'Г(ㄱ을 엎은 꼴)'모양의 건물지가 분포돼 있다. 주목할 지점은 건물지 중 다른 건물보다 두배 이상 큰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인데, 발굴단은 3차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관청 건물군으로 의견을 모았다.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육각형 건물지와 취사시설이 없는 대형건물, 별도의 전용 부엌을 갖춘 건물지 등도 나왔다. 

건물지 사이에는 6m 너비의 남북 방향 도로와 3m 너비의 동서 방향 도로를 발견했다. 도로 양 측면에는 길도랑형의 배수로가 놓였다. 건물지 북쪽에는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사각형 형태의 너비 10m·바닥면 6m·깊이 2.6m의 대형 연못을 확인했다. 연못 바깥에는 1.5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물이 새는 것을 막았다. 중략.

사다리가 묘사된 삼국시대의 회화로는 유명한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의 널방 서벽에 고상식 창고인 '부경'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바지입은 여인이 보입니다. 408년의 고분이므로 발굴된 5세기 백제사다리와 같은 시기입니다. 어쩌면 이 그림의 사다리가 바로 저 백제사다리와 거의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발굴된 사다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새삼 느껴집니다.

45미터 전쟁용 고수전쟁 사다리와 고려의 30미터 사다리

약간 후대인 7세기 기록에는 매우 높은 전쟁용 사다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613년 고구려-수 대전중 요동성공략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613년 04월(음))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요하를 건너와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註 093을 보내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병력 수만이 대항하여 싸웠다. 왕인공이 날쌘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아군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다.註 094 비루註 095동(飛樓橦)운제(雲梯)註 096·지도(地道)註 097로 네 방면에서 함께 진격하고 밤낮을 쉬지 않았다. 우리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 막으니 20여 일에도 공략하지 못하고 아군과 적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 전투용 사다리) 장대의 길이가 15장(丈)이었는데, 효과(驍果)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아군과 싸워 짧은 병기로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아군이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떨어뜨리니 땅에 닿기 전에 마침 장대에 달린 줄이 있어 심광(沈光)이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註 100의 벼슬을 주었다.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 주머니 백여 만 개를 만들어 보내 흙을 가득 채워 그것을 쌓아올려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드는데, 넓이는 30보, 높이는 성과 같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또 팔륜루거(八輪樓車)를 만들어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보며 쏘게 하였다.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므로, 성 안이 매우 위태롭고 긴박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글이 도착했다.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고, 또 고관의 자손들이 모두 양현감의 처소에 있음을 듣고 더욱 걱정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평소에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도망쳐왔다.

衝梯竿長十五丈驍果沉光升其端臨城與我軍戰短兵接殺十數人

竿長十五丈 즉, 장대의 길이가 15장이라는 뜻으로 1장은 약 3미터. 즉 거의 45미터급 장대위에 사람이 올라간 것입니다. 충제, 즉 돌격용 사다리인데, 내용을 그대로 보자면 45미터급 사다리 끝까지 올라가서 짧은 병기로 고구려병사와 직접 전투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성벽높이입니다. 즉, 전투가 벌어진 '요동성벽'의 높이가 최소 십수미터이상급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겠지요. 사료대로라면 이런 느낌의 전투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고수전쟁 상상화
=====

다음 기록은 [동문선] 중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의 '남월행 일기'중 일부입니다. 즉 12세기말의 기록입니다.

동문선
남행월 일기(南行月日記)

그해 8월 20일은 나의 선군(先君)의 기일(忌日)이다. 하루 앞서 변산(邊山) 소래사(蘇來寺)에 가니, 벽(壁) 위에 고(故) 자현거사(資玄居士)의 시(詩)가 있어, 나도 2수를 화답하여 벽(壁)에 썼다.

다음날 부령현(扶寧縣) 현령(縣令) 이군(李君)과 다른 손[客] 6ㆍ7명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짚 앞의 계단과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나 표범이 부여잡고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 하였다. 곁에 한 암자(庵子)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의하면 뱀포[蛇包] 성인(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인데, 원효(元曉)가 와서 살았으므로 뱀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걱정을 하자 이 물이 바위 틈에서 문득 솟아났는데 물맛이 매우 달아 젖같아서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의 늙은 중 한 명이 거처하는데, 삽살개 눈썹과 다 해진 누비옷을 입은 모습이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외실(內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內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을 모셨고, 외실(外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어, 다만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를 참예할 뿐이라 하였다. 나의 배리(陪吏)가 슬그머니 내게 말하기를, “이 사(師)가 일찍이 전주(全州)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힘을 믿고 횡포하여 사람들이 모두 성가시게 여겼습니다. 그뒤 간 곳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바로 그 사입니다.”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개 중(中)ㆍ하(下)의 사람은 그 그릇이 일정(一定)하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옮겨지지 않으나, 무릇 악(惡)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는 그릇이 보통 사람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한번 선(善)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드높고 탁월(卓越)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 사냥하던 장수가 우두(牛頭) 이조(二祖) 대사(大士)를 만나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아 마침내 숙덕(宿德)이 되었고, 해동(海東)의 명덕대사(明德大士)도 매사냥을 하다가 보덕성사(普德聖師)의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이런 유(類)로 미루어본다면, 이 사가 마음을 결단하여 행실을 고치고 특이하게 이상한 행실을 한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이른바 불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 구경하여보니, 그 높고 험함이 효공(曉公)의 방장(方丈)의 만배(萬倍)는 되었다. 높이가 백 척(百尺)쯤 되는 나무 사다리가 바로 절벽(絶壁)에 의지해 있는데, 삼면(三面)은 다 아득한 구렁이라, 몸을 돌려 층(層)을 헤아리며 내려가야 방장에 이를 수 있는데, 한 발만 실수하면 다시 어쩔 수 없다. 내가 평일(平日)에 한 대(臺) 한 다락[樓]에 오를 적에 높이가 심(尋)ㆍ장(丈) 정도만 되어도 신경이 약해 머리가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빼어난 곳에 대해 익히 들었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왔으니, 만일 그 방장(方丈)을 들어가보지 못하고 진표대사(眞表大士)의 상(像)에 예(禮)를 갖추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에 머뭇거리며 기어 내려가니, 발은 사다리에 있는데도 벌써 몸이 굴러 떨어지는 듯하였으나 마침내 들어갔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를 갖추었다.
===

[남월행일기]는 이규보가 반도남쪽으로 여행을 떠난 기행문입니다. 여기 보면 원효방(元曉房)이라는 곳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 곳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 뒤 울금바위(높이 40m)에 있는 석굴(石窟)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곳입니다. 
원효방 (울금바위)

전라북도 부안군 일원의 옛 지명이 바로 부령(扶寧)입니다. 지금도 흔적이 있는 원효방이 있던 절벽 (울금바위)는 약 40미터 높이에 있지요. 이 곳에 12세기말 고려말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약 30미터이상 (백 척(百尺)의 나무사다리가 기대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짚 앞의 계단과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나 표범이 부여잡고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표범과 호랑이가 올라오려다가 너무 높아서 포기한다고 되어 있어 흥미롭지요. 그리고 동굴안에는 내외실을 갖춘 고승이 머무는 암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사다리를 최근에는 구경하기가 힘든데, 원효방에 30미터급 나무 사다리를 다시 갖추는 것은 올라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장관일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제 사다리의 발굴은 단순하지만 5세기 당시 목조의 가구결합방식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핑백

덧글

  • Nocchi 2015/12/24 12:55 #

    잘 읽었습니다

    맨 밑의 글 보니 오래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에서 어느 산에 절벽에 붙은 형태로 공중에 달린 암자 글 읽었던 것 같네요 그거랑 비슷한 느낌입니다
  • 역사관심 2015/12/24 15:43 #

    아마도 금강산표훈사 보덕암을 말하셨던 것 같군요. 한번 가서 보고 싶은 곳입니다.
    즐거운 성탄절 되시길~.
  • kiekie 2015/12/24 13:04 #

    백제시대 사다리가 신기하네요. 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5/12/24 15:44 #

    저도 신기하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즐거운 성탄절 되시길~
  • 아빠늑대 2015/12/24 15:51 #

    재미있는게 나왔네요
  • 역사관심 2015/12/24 15:52 #

    정말입니다. 저렇게 오래된 사다리는 처음인지라...
  • 레이오트 2015/12/25 09:14 #

    목제 자체 특성상 시대와 국가 막론하고 해당 소재를 주로해서 만든 유물유적 절대적 수가 적은데 그것도 마이너한 백제 목제 유물이라, 흥미롭군요.
  • 역사관심 2015/12/25 16:11 #

    말씀대로입니다. 처음에는 사다리 상태를 보고 눈을 의심했네요 ㅎㅎ.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길!
  • 노송인 2015/12/25 15:30 #

    귀한 역사자료 보여주시기 감사드립니다. 삼국시대 우리 선인들의 놀라운 역량을 찬탄합니다.
    혹 저 귀한 자료 옮겨갈 수 없나요?
  • 역사관심 2015/12/26 01:31 #

    노송인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기사글은 저도 퍼온 것입니다- 기사 링크로 가시면 글과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제 블로그는 카피는 사정상 금하고 있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 뜻깊은 성탄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