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환원적 물리주의와 뇌과학. 물질과 정신. 독서

17년전 고원석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피력했다.

우선 심과 신을 존재론적으로 이원론의 입장에서 보는가 아니면 일원론적인 입장인가 하는 물음으로 편가르기를 시작해보자. 오늘날 심리철학의 현황을 보고하자면, 이원론편에 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달리 말하면 물리적인- 혹은 물질적인- 영역에 의존하지 않는, 그것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혹은 영적 실체의 존재를 상정하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재권교수로 대표되는 비환원적 물리주의란 다음 네가지를 토대로 하는 입장이다.
1. 존재론적으로 물리주의적 일원론, 즉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구체적인 개별자는 물리적"이다.
2. 인식론적으로 반환원주의, 즉 "심적 (혹은 정신적)인 속성들은 물리적인 속성에로 환원 불가능하다.
3. 물리적 실현 논제 (The physical realization thesis, 즉 "모든 심적인 속성들은 물리적으로 실현되어 (physically realized)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유기체 혹은 어떤 체계가 심적속성 M을 나타낸다면, 이는 그것이 그 종류의 유기체에 M을 실현하는 그런 어떤 물리적 속성 P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4. 심적 속성들이란 단지 습관적 표현이나 논의늬 편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대상들 혹은 사건들이 갖는 실재적인 속성들이다.

비환원 물리주의에서 데카르트와 같이 심신이 각각 실체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이원론은 부정된다. 구체적인 개별자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리적인 것들 뿐이다. 다만 심적인 속성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이들은 물리적인 속성들에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슬픔'이나 '고통'을 물리적인 상태에 대한 서술로 번역해 낼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환원불가능성은 심적상태 (혹은 사건)과 물리적 상태 (혹은 사건)를 연결하는 인과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심적인 속성들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오늘날의 심리철학이 사용하는 설명의 틀이 이른바 ‘물리적 실현의 논제’이다. ‘마음’은 ‘몸’이라는 물리적인 체계를 통해 구현되고 (realized) 또 그럼으로써만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생물체의 물리적인 상태 혹은 속성이 주어지면, 그것에 의하여 그- 또는 그 종에 속하는- 생물체의 심적상태 혹은 속성 또한 따라서 주어진다. 즉, 심-물 관계에 대한 “수반의 테제 (The Supervenience Thesis)”의 한 가지 표현이다. “물리적인 차이없이는 심리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No difference without physical difference)”는 명제로 집약되는 수반의 테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긍정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김재권 교수는 “실재한다는 것은 인과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To be real is to have causal powers). X가 어떤 의미로든 실재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X는 스스로 인과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스스로’이다. 즉 X는 스스로 인과의 사슬을 시작할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깔고 있는 첫번째 가정 즉 물리주의는 물리적인 세계가 인과적으로 닫혀 (causally closed)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즉 순수하게 비물리적인 원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성 (mentality)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결론적으로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존재론적 일원론과 인식론적 이원론이란 실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일관적인 일원론, 즉 철저한 물리주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이 결론을 받아 들일 것인가? 

이러한 일원론적 입장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견해가 이른바 부수현상론(epihenomenon)이다. 이는 우리가 심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물리적 사건들에 의해 야기되는 물리적 사건의 부수현상들일 뿐 그것들은 그 자체로 다른 어떤 사건도 일으킬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정신이 물질에 인과적으로 작용한다는 심적 인과 (mental causation)이란 실지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포더 (Jerry Foder)가 던지는 반론은 간결하면서도 단호하다. “내가 손을 뻗는 일이 인과적으로 볼 때 내가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 또 간지러움이 내가 긁는 행위에 대한 까닭이고, 내가 어떠하다고 말하게 되는 인과적인 책임이 내가 그러하다고 믿는데 있다는 이런 사실들이 만일 문자그대로 참이 아니라고 모조리 부정되어야 한다면,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믿는 것 전부는 거짓이나 마찬가지고, 세상은 끝장이다” (1990). (필자, 즉 고인석)은 이에 동의한다는 뉘앙스의 문장 뒤에-> 여기서 우리는 정신성에 대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정신성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주체 역시 인간의 정신이고, 탐구의 주된 방법은 사유이다. 우리는 정신성으로써 정신성을 탐구하며, 또 그러할 수 밖에 없다.
=====

→ 1999년에 나온 이 논문이 그로부터 17년이나 지금 나온 현 시점에서 볼때, 하지만 이 글의 결론부분 즉 고원석의 반론에 필자는 결코 동감할 수 없다.

이미 21세기의 뇌과학의 성과는 제리 포더의 저 질문에 근원적인 반박을 하고 있으며, 고원석이 질문하고 있는 “정신성으로써 정신성을 탐구해야 하며 그럴수 밖에 없다”는 말은 마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복기처럼 보인다.  다만, ‘우리는 뇌를 사용해서 뇌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라는 통구조딜레마의 구조자체에는 동의한다. 또한 고원석이 질문한 '스스로 시작할 사슬'이 무엇인지도 어느정도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최근의 뇌과학에서 밝혀내고 있는 자유의지 (즉 마음)과 행동 (물질적 행위)에 대해 한 가지 연구사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뇌과학자 이케가야 유지 (2013)의 최신 저서에서 발췌한다.

대체 뇌에게 자유의지란 무엇일까? 독일의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한스 요헨 하인츠 박사팀은 다음과 같은 연구를 실행했다. 실험자의 양손에 레버를 쥐게 하고, 레버에는 단추가 달려 있으며 피실험자는 눈앞의 모니터에서 무질서하게 알파벳이 등장한다. 이 변화되는 문자를 보면서 마음이 내킬 때 양손의 버튼중 어느 한쪽을 누르도록 한다. ‘누르고 싶을 때 누른다’, 오직 그것뿐인 실험이다. 단 ‘누르고 싶을 때’라는 의지가 생길 때 모니터에 표시된 알파벳을 외우도록 한다. 예를 들어 q라는 글자가 나올 때 오른쪽 단추를 누르고 싶어졌다는 식으로 기억해 둔다. 이 작업동안 뇌는 관찰되었다. 단추를 누르고 싶어지는 요컨대 자유의지는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당연히 ‘누르고 싶은 마음’이 먼저 솟아나고, 그 생각에 따라 누른다는 행위가 일어나겟지만 애초에 누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어떻게 싹트는 것일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본인이 누르고 싶어지기 이전에 이미 뇌는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의식에 ‘누르겠다’는 의도가 생기기기도 전에 무의식의 뇌는 이미 ‘의도의 원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평균 7초전부터 활동이 시작된다. 물론 ‘이런 뇌의 사전 활동이 의지와 관련은 있지만, 행위의 원인이라는 보증’은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나 행동의 뇌의 활동인 이상, 의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을 더욱 확장하면 다음과 같다.

뇌가 어떤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어떤 활동’의 원형이 되는 활동도 뇌의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활동에는 원인 즉 상류의 활동이 있는 법이다.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반대로 마음과 몸, 또는 마음과 뇌는 별개라는 이원론적 입장을 취한다면, 이런 실험 데이타따위야 상관없이 자유의지의 존재는 무사하다. 그러나 나는 뇌 연구자로서 일원론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대체 무엇일까? 의식에 나타나는 ‘자유롭다는 마음’은 ‘잘 만들어진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는 어디까지나 뇌 활동의 결과이고 원인이 아닌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의지(자유의지)는 뇌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과 신체의 상황으로 결정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행동한 본인은 어떤 실험에서건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선택했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롭다라고 여기는 감각’이 당사자에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변화가 ‘반사’ 일뿐 (척추반사와 같은 협의의 단순반응뿐 아니라 그 상황에 대응되는 넓은 의미에서의 반사) ‘의지’가 아니라면 당사자가 의지라고 느끼는 감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버드대의 알바로 파스쿠알 레오네 박사팀은 우뇌를 두개외부에서부터 자기자극해 보았다. 물건을 양손중 하나로 가리키라는 이 실험에서 처음 결과 (자극없는)와 달리 오른쪽을 선택하는 비율이 앞선 실험의 60퍼센트에서 무려 20퍼센트로 떨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사자는 자극을 받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이번에는 왼손을 선택했다고 완벽하게 그리고 완고하게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유의지란 본인의 착각에 지나지 않고 실제 행동의 대부분은 환경이나 자극에 의해, 혹은 평소 습관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판단했다, 내가 해석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착각한다. 그 착각이야말로 인간이 빠지는 사고의 함정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무자각하다고 하는 사실에 무자각하다.” 버지니아대의 티모시 윌슨의 이 말은 인간은 자신에게 ‘남’이라는 것을 간명하게 묘사해 준다.
=====


간접적이지만 구조주의나 여타 철학까지 가기 전에, 이미 조선시대의 한려학파의 거목인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이 시에 필자는 깊이 공감한다.
 
육신은 형체가 있고 貌有形
정신은 형체가 없으니 神無形

형체가 있는 것은 모사할 수 있으나 其有形者可模
형체가 없는 것은 모사할 수 없다 其無形者不可模

형체가 있는 것이 안정되면 有形者定
형체가 없는 것은 완비되고 無形者完

형제가 있는 것이 쇠잔하면 有形者衰
형체가 없는 것은 시들며 無形者謝

형체가 있는 것이 다하면 有形者盡
형체가 없는 것은 떠나간다 無形者去


덧글

  • 레이오트 2016/01/24 10:23 #

    1. 그래서 저는 사이버네틱스 공학에 기반한 인간 두뇌와 컴퓨터의 결합 수준의 소극적인 트랜스 휴머니즘에 최하 반대하지않는 입장입니다.

    2. 요즘에는 기계가 판단의 중심이 되는 인공지능보다는 인간이 중심이 되고 기계가 판단을 위한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판단을 보조하는 식의 연구가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3. 인공지능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인공지능 발달이 컴퓨터 발달에 비해 많이 지체되는 이유는 인간 두뇌의 정밀성이 아닌 장황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6/01/24 02:07 #

    세 항목 모두 충분히 이해되고 흥미있게 (하지만 우려의 시각과 함께)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히 1번은 '소극적'이라는 말씀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고 있구요.

    본문은 사실 인공지능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생각과 맞닿은 부분을 정리한 글인데, 아주 흥미로운 주제 감사드립니다 ^^.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6/01/25 22:20 #

    요즘 양자역학도 의식에 관심이.많죠 과연.양자가.이리 복잡할까 인간의 의식이 영향을.끼쳐(사이코메트리가 아닌 단순한 인풋 아웃풋 문제입니다.) 복잡한거일수도 있

    란 것도 있고요 자연측정오차는.연구돠야.할.문제지만 분명히 의식과 연관된 논문이.있겠죠 솔직히.제목보고 양자역학인줄 알았습죠...
  • 역사관심 2016/01/26 12:46 #

    오오 양자역학까지!
    저야 이쪽은 잘 모릅니다만, 역시 여러방면으로 연결되겠죠.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