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庫, 조선전기의 복층건축의 하나의 팁, 1950년까지 현전하던 오대산 사고 한국의 사라진 건축

몇 차례에 걸쳐 고려-조선전기의 층루 (복층건축)에 대해 다루었지만, 사실 17세기 (1600년대)까지도 그 회화나 기록에 전하는 '실물'의 복층건축물의 형태가 남아 있지 않아, 사실상 한국민들은 조선의 복층건축의 형태를 근정전과 장광루등 몇몇 궁궐건축의 한정된 형태로만 인식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방향'으로만 보통 파고들고 있는 귀한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라는 건물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보통 '사고'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 어디서건 보통 사고에 들어있던 컨텐츠, 즉 '실록'(책들)의 역사와 행방, 그리고 분석에 집중되어 '史庫'라는 2층 보관건축물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의나 연구가 매우 미비한 실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고'라는 건축물은 제대로 살펴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왕조에서 직접 심혈을 들여 관리해 온 건축이고, 또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보존'을 최대의 미덕으로 하는 보관물의 성격으로 인해, 건물의 외형과 기본구조의 변형을 (필자의 판단으로는) 최소화하면서, 보존/보관과 관련된 부실한 부분만 개수해가며 보존해온 건축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중간에 전파(완전한 파괴)되지 않는 한, 원래 세워진 시점의 그 기본적인 형태가 이어져 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史庫 건축의 역사

史庫, 그러니까 역사를 보관하는 곶간집이라는 뜻의 사고는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고려대부터 춘추관이라 불리던 정식 역사관련 관청에 보관하는 본외에 '삼대사고'라 불리우는 충주, 청주, 전주사고가 있었습니다. 이중 충주사고는 1412년 태종대 이전에 이미 존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곳을 1439년, 세종대에 건립한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러던 것이 (역시나, 또다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에 전주사고만 한 곳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져 버립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이 만약 이렇지 않았더라면 일제시대까지 (즉 사진시대로 접어들 때까지도) 조선전기에 세워진 기본 형태를 우리는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전쟁종결후 8년째인 1606년, 선조는 살아 남은 전주본을 기본으로 실록 4부를 더 만들어 냅니다. 이 때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4개동의 사고를 건설하고 춘추관을 더하여 실록을 다섯 곳에 나누어 보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얼마 안된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춘추관사고가 없어졌고, 묘향산사고 역시 겨우 건립 27년째인 1633년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파괴를 염려, 1614년 광해군이 전북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이전했으며 (선원각은 1641년 인조가 건립), 1636년 병자호란으로 마니산사고는 박살이 나버립니다. 이에 전쟁후 적상산 사고를 다시 정족산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1678년이었습니다. 이 정족산사고는 계속 버티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집니다 (지금 있는 것은 1980년대에 다시 세운 것이죠). 다만, 정족산사고의 경우 오늘의 주제인 조선중기의 2층건축의 형태가 아닌 전형적인 고상곶간형 건축인지라 제외합니다.


태백산 & 오대산사고

태백산과 오대산의 사고는 이에 반해 2층건축물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무려 300년 넘는 역사를 끌고 갑니다. 이 두 사고건축의 경우, 기록을 살펴보면 별 다른 사고나 파괴없이 개수만을 거치면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살펴 볼까요. 위에서 소개한 듯이 1605년에 건물이 세워지지요. 그러니까 17세기 극초반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약 30년, 40년 후의 승정원일기 기록들중 일부입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11)  9월 11일
태백산(太白山), 적상산(赤裳山), 오대산(五臺山) 등지의 사고(史庫)에서 수직하는 참봉을 전에는 예조에서 차송하고 임기를 정하여 급료를 주고 지키게 - 원문 빠짐 - - 원문 빠짐 - 근년 이래로 사정(私情)이 너무 기승을 부려 - 원문 빠짐 - 부정하게 사사로운 청탁을 따르니 사고를 중하게 여기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중략"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7월 13일
오정일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전일에 본조에서 올린, 원손(元孫)의 책봉례(冊封禮)를 설행할 길일을 택하는 일, 관례(冠禮)를 거행하는 일, 도감을 개설하는 등의 일에 대한 계사와 관련하여, ‘실록을 등사하여 온 뒤에 품정(稟定)하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사고(史庫)에 나아간 사관의 장계를 보건대, ‘태백산(太白山)에 있는 실록을 먼저 살펴서 별단을 올려보냅니다. 중략"

이로부터 약 20여년이 흐른 1660년대의 기록으로 편지에 실린 내용중 일부입니다.

송자대전 제123권
서(書)
중씨(仲氏)에게 올림 - 병오년(1666, 현종 7년, 선생 60세) 4월 13일
한림(翰林) 임선보(林選甫)가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에서 《실록(實錄)》을 꺼내 말리러 내려갔을 적에 안동(安東)의 조비(祖妣) 지문(誌文)과 고조비(高祖妣)의 만사(挽辭)를 구해 와 저에게 보였는데 놀라움과 기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럼 1700년대로 넘어가 볼까요. 세워진 지 약 120년후인 1725년이 되서야 '개수'기록이 등장합니다. 영조대의 기록입니다. 비로 태백산 사고가 무너져 개수를 요청한 기록입니다. 그 후 바로 개수되죠. 개수라는 것은 망가진 부분만을 고치는 것으로 '재건' 이나 '중건'과도 의미가 다릅니다.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5월 11일(무신) 비가 옴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가 무너져 개수하는 일이 하루가 급한데, 만약 신로로 하여금 내려가서 개수하게 한다면 그동안에는 실제로 사진하는 관원이 없게 되고, 만약 새로 천거되는 자를 기다린 뒤에 내려가게 하더라도 사고를 개수하는 일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다시 40년후, 이유원(李裕元 1814(순조14)~1888)의 [임하필기]를 보면 1761년의 '태백산 사고 열람'기록이 나옵니다.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왕세손의 관례
영종(英宗) 37년(1761)에 왕세손의 관례를 행하였다. 사관(史官)을 시켜서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의 《실록(實錄)》을 상고하도록 하였는데, 열조(列朝)에서 모두 이에 대한 예법이 없었으므로 《국조오례의》의 세자의 관의(冠儀)를 참작해서 이를 행하였다.

또다시 30년 후인 정조대인 1790년대의 기록으로 왕의 일기나 다름없는 [일성록(日省錄)]의 기록입니다.

정조18년 갑인(1794,건륭 59)
2월16일(갑술)
부전지(不剪紙)로 만든 것 1건은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에, 예단지로 만든 것 1건은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에, 백지로 만든 것 1건은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백지로 만든 것 1건은 외규장각(外奎章閣)에, 중략.

1864년, 즉 고종 원년의 기록에도 태백산 사고는 멀쩡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高宗) 원년(1864)
정월 14일
이번에 도부한 봉화 현감(奉化縣監) 유지희(柳芝熙)의 첩정에, “전에 춘추관(春秋館)의 관문(關文)에 따라 사각(史閣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이 무너진 곳은 매년 봄과 가을의 맹삭(孟朔 정월과 7월)에 지방관이 직접 살핀 뒤 감영에 보고하여 등문(登聞)하는 것이 이미 정식(定式)이 있었으므로 현감이 급히 가서 봉심(奉審)하니, 선원각(璿源閣)과 실록각(實錄閣)이 모두 무너진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연유를 치계(馳啓)하오니 이런 내용을 잘 아뢰어 주소서.

오대산 사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와 비슷한 기록들이 연대별로 이어집니다. 파손되었다거나 중건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영조 즉위년 갑진(1724, 옹정2)
11월 29일(기사) 눈
지방 네 곳에 봉안(奉安)하는 건(件)으로 말하자면,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 건은 현재 봉안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도 잘못 쓰여 있고,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 건은 전에 이미 봉안하였는데 다시 봉심하지 않더라도 이 장과 같을 듯합니다.

순조 11년 신미(1811,가경 16)  3월30일 (무인)
각화사(覺華寺)의 승군(僧軍)에게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 승군의 예(例)에 의해서 특별히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눈여겨 볼 기록으로 1808년 오대산 사고를 직접 유람한 기록이 남아 있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년)의 [경산집(經山集)]의 일기입니다. 아직 원문을 찾지 못했는데, 현재 찾은 기록은 이렇게 간단한 사실만을 적어두고 있습니다.

1808년 
4월, 正祖의 誌狀을 奉安하고 實錄을 曝曬하기 위해 五臺山史庫에 가다. 겸하여 金剛山을 유람하다. 
====

이렇게 잘 보존되던 300년 이상의 역사를 담은 이 복층건축물들은 그러나, 각각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양축인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전소됩니다. 

태백산사고의 경우 1906년까지 실록이 보관되었는데, 1908년 의병장 변학기, 성익현, 김상태등이 이끈 300여명이 각화사에 쉬고 있다가 일본군수비대의 기습으로 격전이 벌어집니다. 의병부대가 철수하자, 일본수비대가 각화사와 태백산사고에 방화, 1605년이후 정확히 303년을 버틴 건물들이 일순에 잿더미가 됩니다. 오대산사고의 경우 50여년을 더 버티다가 1950년대 터져버린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됩니다.

태백산사고의 폐허터


두 사고史庫의 살아남은 사진들, 그리고 복원

원래의 오대산 사고는 실록각(實錄閣)과 선원각(璿源閣), 별관, 수호사찰인 영감사(靈鑑寺)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50년대 전소되었다가 터만 덩그러니 있다가, 1989년 선원각(璿源閣)이 복원되고, 1992년 선원각 앞 사고 터에는 영감사(靈鑑寺) 법당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여러분이 보시는 건축물들입니다 (포스팅 말미에 사진을 소개하지요). 

그렇다면 이 건축물들은 20세기의 모습일뿐일까요? 아닙니다. 두 사고의 완파이전의 모습들이 다행하게도 일제시대 사진에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그대로 재건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들은 그러니까, 1605년의 건축형태를 어느정도 (아니 기본적으로는 거의 그대로) 유지해 오던 17세기 초, 궁궐 복층건물의 하나의 프레임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인 복층건축인 '층루'의 형태가 가장 잘 보이던 두 곳, 태백산 사고와 오대산 사고의 모습입니다. 우선 태백산 사고의 1912년 모습입니다. 

선원각(璿源閣) 및 실록각(實錄閣)
태백산 사고 1908년 직전추정
시대미상 (일제시대) 태백산 사고의 모습
이 사진들은 너무 원경에서 찍었지요. 아래의 사진들은 근접촬영한 것들입니다. 우선 선비가 서있는 뒤쪽 건물이 '선원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앞쪽의 건물이 실록각입니다. 잘 보면 앞의 선원각의 경우, 1, 2층에 모두 벽체와 창문이 보입니다. 창틀은 전형적인 격자살. 실록각의 경우 아래는 비어있고 2층에 벽체와 창문(역시 격자살)이 있습니다.
실록각을 더 제대로 보여주는 각도의 사진입니다. 
당시 실록각 내부, 2층에 실록을 실제로 보관하던 모습
이 두 건물을 알기 쉽게 전시해둔 모형입니다. 선원각의 경우 전형적인 2층 누각(루)이며, 실록각의 경우 변형 복층건물이라 하겠습니다 (아마도 아래층은 통풍이 쉽도록 비워둔 것이라 추정합니다).
필자는 이 선원각과 실록청 (태백산사고)의 모습이 조선전기의 숱한 문헌에 등장하는 '복층건축'의 실체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1층과 2층사이에 따로 처마를 내지 않은, 덕수궁 승화루 (현재 사라짐, 아래사진)같은 모습도 있었지만, 이런 형식의 이중지붕을 가진 건축물도 분명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덕수궁 승화루 (일제시대 사진)
좋은 비교상대로 역시 일제시대에 그 흔적을 남긴 월산대군방 (현재의 석어당(昔御堂) 추정)의 모습을 보시면, 느낌이 옵니다. 상층과 하층의 비례가 다르며, 각각 처마를 가지고 있죠.
건물의 비례로 보자면 현재의 석어당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

이렇듯 멋지던 태백산사고의 경우 전소후 폐허가 된 반면, 오대산사고의 경우 더 가까운 50년대에 파괴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대에 재건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기 전에 우선 1910년대의 일제강점기 시절의 원래 모습을 소개해 드립니다.

오대산 사고 1912년
뭔가 태백산사고와 셋트처럼 닮아 있으면서도 약간 다른 모습이지요. 실록각(實錄閣)과 선원각(璿源閣)이라는 이름도 같습니다. 태백산사고보다 사진수가 적어 확실치는 않지만, 대비해 볼때 아마도 사진 뒷쪽이 선원각, 그리고 앞쪽 (인물에 더 가까이 있는 건축)이 실록각이라 생각됩니다. 실록각의 경우, 태백산사고와 달리 현판에 '사각'(역사 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귀한 연대미상 사진이 아래에 있습니다.

이 사진으로 알수 있는 것은 태백산사고의 실록각과 달리 아랫층이 완전히 비어있지 않고, 안쪽으로 벽체를 두었다는 점입니다.

오대산사고- 실록각 시대미상 (조선말기)

마무리

사고라는 곳은 그냥 저서만 넣어두고 접근하기 어려운 산중에 있다고 내버려 둔 곳이 (당연히) 아닙니다. 예를 들어 태백산사고의 경우 1606년 5월 이래로 총 90회에 이르는 접근이 있었지요. 봉안, 환안, 고출, 포쇄등 보존업무등을 위해 끊임없이 접근한 건축물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이 건축의 형태가 완전히 무너져 중측하거나 재건할 정도의 사고가 있었다면, 당연히 실록이나 문헌기록에 남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태백산과 오대산사고의 경우 그러한 큰 사건이 없이 300년 이상을 견딥니다. 그리고 저렇게 완파되기 전에 우리에게 소중한 모습을 '사진시대'에 남기고 떠납니다. 이러한 소중한 유산을 조선중기 건축, 특히 복층건축 (궁궐및 저택)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이용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의아합니다 (물론 필자가 건축학계의 모든 연구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다만 짧은 지식과 정보로 파악하는 것임을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지식이 축적되면 이 글은 언제든 수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실록자체에 대한 연구는 수없이 많은데 비해, 이 하드웨어에 대한 접근은 너무나 부실한 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989년과 1992년에 각각 복원되어 현재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25년이상의 세월이 흘러 어느정도 아름다움이 더해진) 오대산사고의 모습니다. 위의 사진과 비교해보시면 알겠지만, 일제시대의 사진을 근거로 한 복원입니다. 이 건축물은,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듯 그저 또 다른 20세기의 복원건축물들과는 다릅니다. 17세기초의 복층건축양식중 하나를 볼 수 있는 정말 귀한 건축들이라 사료되며, 앞으로 이에 대한 그 실체에 접근하는 치열한 연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으로 답답한 점은 왜 오대산사고의 선원각을 (또다시, 창덕궁, 덕수궁의 예에서 몇번 본 것처럼) 아래층을 비워둔 형태로 재건한 것인지 이해불가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면 엄연히 1층에 벽과 창문이 있는 건물입니다. 이런 형태의 복원을 주장하는 어떤 특정 인물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네요.
오대산사고 선원각 (현재)
오대산사고 선원각 (1912년)



덧글

  • 레이오트 2016/02/29 23:42 #

    1. 전 이런 사고와 같은 기록물 보관소를 보면 그 외양보다는 기록물 보존이라는 기능에 얼마나 더 충실한가, 그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서 어떤 과학기술이 쓰였는가에 더 집중합니다.

    2. 사고를 2층으로 만든 이유는 당연히 기록물 보관이라는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겠죠?

    3. 전쟁이라는게 문화재 파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네요. 일본은 전국시대와 메이지 유신 시기라는 극심한 내전상태에 빠졌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커티스 르 메이의 소이탄 폭격에 중소도시마져 말그대로 잿더미가 되어버렸음에도 수많은 목조건축물이 보존되었으니까요.
  • 역사관심 2016/02/29 23:28 #

    말씀대로 이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보존을 위한 어떤 설계가 있었는지, 많은 연구거리를 던져줄 건물인데... 잘 버티다가 안타깝습니다.
    저쪽나라 일은 궁금하긴 합니다만, 건축상태는 정말 말씀대로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은 부럽습니다.
  • Nocchi 2016/02/27 12:39 #

    잘 읽었습니다
    말씀대로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의미있는 건물인 거 같네요
    우선 복원 되었으면 좋겠네요
  • 역사관심 2016/02/29 23:29 #

    오대산사고가 복원되기는 했는데, 글 마지막에 나오듯...이해가 안되는 구석이 있네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