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원院'에 대한 인식 한국의 사라진 건축

한국의 전통 숙박시설중 고려시대의 '원院'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려의 [역참제]중 하나로 우선 관리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던 시설이 '참역', 일반대중에게도 개방된 '원', 그리고 외국인들을 위한 '객관'이 존재했습니다. 매우 발달된 시스템이었는데 예를 들어 참역은 전국에 걸쳐 22로에 간선역의 수가 525개소에 달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객사', '객주', 그리고 '주막'이 그러한 역할들을 맡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예전에 알아본 조선후기의 '주막'에서 민간의 숙박을 맡게 되었다는 점인데, 맥락상 주막은 '원'의 후속시설이 되겠지요. '원'은 보통 사찰에서 한 부분을 개방하고 시설을 짓거나 확장, 대중들에게 제공하곤 했습니다. 고려는 한국불교의 가장 전성기에 해당하는 국가였으므로 이러한 시스템은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원 역시 고려대후기-조선초기에 가면 '점'이라는 시설로 확장됩니다. 이게 '주점'인지 아닌지.... 꽤 흥미로운 토픽입니다. 

각설하고. 이러한 고려대의 관민 포함 숙박시설인 '원'에 대한 연구는 그간 한국에서 꽤 미진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의 건물일지언정 그 건물들이 건재한 '객사'나 회화등으로 존재가 전하는 '주막'등에 비해, 남아있는 자료가 턱없이 미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왕실의 숙박시설인 혜음원이 10여년전 발굴되어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최근에 해당하는)에 발표된 나윤중의 논문에도 이렇게 설명되고 있지요.

고려시대 원(院)에 대한 연구 (2012)

교류 또는 교통과 관련된 역사 연구는 항상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일반 역사학계의 고려와 조선 시대의 驛站制나 驛傳制에 대한 연구 등에서 숙박 등의 호스피탈리티에 관련된 부분의 연구가 진행되어져왔다. 역참(驛站), 관(館), 객사(客舍)등에 관한 물리적 실측이나 사료의 발굴 등에 관련된 연구가 그 예라 할 것이다.

이들 驛站制나 驛傳制에 대한 연구의 중심은 제도 자체나 관련 토지제도, 또는 건축학적 관심 등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그 당시의 호스피탈리티 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호스피탈리티 학자로서 일차적 사료를 발굴하고 분석하면서 새로운 연구결과를 생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원(院)은 역참(驛站), 관(館), 객사(客舍) 등의 제도에 비해서도 거의 연구가 되지 않았던 영역이다. 우선 불교라는 특정한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적인 역사학 연구에서도 쉽게 간과될 수 있는 영역이고, 불교학 연구에서도 ‘院’에서 이루어진 교단의 역사나 교리적 문제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어,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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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도 지적하듯, '원院'에 대한 구체적 실상보다는 제도자체라든가 종교적 접근이라든가 하는 쪽의 접근이 대다수라 '원'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매우 옅은 것이 사실입니다 (본 블로그를 들려주시는 분들은 지금쯤 느끼시겠지만, 이는 필자가 종종 지적하는 한국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큰 문제점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짧지만 현재 학계에서 거의 보고한 적이 없는 구절이 있어 나눕니다. 다음은 [동문선]에 실린 '홍인원기'라는 기문입니다 (기문은 건축물을 짓고 감상평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홍인원'이라는 '원'을 만들고 지은 글이지요).

동문선
인원기(홍인원기(弘仁院記)
 
이첨(리첨)

삼경거사 배덕표군과 전조(전조 고려) 무신년(공민왕 17년) 이후로, 병으로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와 김해(금해)의 주촌에 살면서 작은 집을 지었다. 그 집 남쪽에 정자를 지으며, 또 정자 남쪽에는 작은 못을 파고 매화ㆍ대ㆍ잡목들을 그 사이에 심으니, 그 규모가 사삿집과 같지 않고 배군이 잠시 출입하는 것이 길손의 기숙하는 것 같기 때문에 ‘원()’이라 이름한 것이다. ‘홍인’이란 명칭은 배군이 스스로 부르는 것이다.

배군이 이 집에 있을 때면 분향하고 조용히 앉아, 매화를 대하고 《주역》을 읽으면서 사덕의 원(院)에 마음이 노닐고, 사단의 첫째를 연구하니, 인에 뜻을 두었다고 할 만하다. 거문고와 비파를 옆에 놓고 노래부르고 혹 휘파람도 불며 즐거워 근심을 잊으면서 늙음이 오는 줄을 모르니 인을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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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의 문장가인 이첨(李詹, 1345~1405년)이 지은 것입니다. 따라서 '홍인원'은 14세기말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과 배덕표라는 사람이 함께 김해에 살면서 어떤 건물을 지었는데 이 곳을 '원'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곳이 원래 '원'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그 '생김새'가 원과 비슷하고 배덕표라는 사람이 자주 기숙하기 때문에 마치 손님들이 머물다가는 '원'의 기능을 하는 것같아 이름을 아예 '원'으로 지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기 묘사된 '생김새'가 고려말 당시 민중의 숙박시설인 '원'의 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 묘사된 원은 이러하죠.

...집을 지었다. 그 집 남쪽에 정자를 지었고, 정자 남쪽에는 작은 못을 파고 매화ㆍ대ㆍ잡목들을 그 사이에 심으니, 그 규모가 사삿집과 같지 않고 배군이...길손의 기숙하는 것 같기 때문에 ‘원()’이라 이름한 것이다. 거문고와 비파를 옆에 놓고 노래부르고 혹 휘파람도 불며 즐거워 근심을 잊으면서 늙음이 오는 줄을 모르니 인을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혜음원같은 대규모 왕실시설을 제외한) 당시의 일반적인 원은 큰 규모는 아니나 일반 살림집보다는 크고, 특히 '정원시설'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매화, 대나무, 꽃나무, 그리고 작은 연못등을 가지고 손님들이 기거하다 가는 곳이라 이를 '원이라 칭했다라고 하고 있어 이러한 '휴식공간'을 중히 여긴 시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배덕표가 출입한다는 사실때문에 원이라는 이름을 아예 붙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다음 구절에 '매화'를 보면서 거문고나 비파를 타고 노는 모습에서 '원'이라는 시설이 단순히 잠만 자고 가는 누추한 시설이라기 보다, 규모와 관계없이 어떤 휴식을 주는 기능을 중히 여긴 느낌이 강하게 풍기지요.

이것은 대규모의 '혜음원'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혜음원의 구조를 설명한 구조도로 보시다시피 건물의 중간중간에 '연못'을 배치해 두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는 매우 운치있는 것으로 그냥 정원에 못을 배치한 위의 설명과 달리 '건물'사이사이에 배수로를 이용, 인공 연못을 둔 것으로 파악됩니다 (최근의 전통건축에서나 시도하는 기법이지요).
현재 구글링을 해보면 '고려시대 숙박'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검색되지 않습니다. 그저 혜음원지 터만 몇장 나올 뿐이지요. 문화재청이 못하더라도 관심있는 화가들이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 상상화라도 그려 알려지면 어떨까 싶습니다.

일반 소규모 '원'에 대한 그림이 아직 사료부족으로 힘들다면, 혜음원이라도 언제가 최소한 회화로 구현되기를 기대합니다.


현재 네이버에서 연재중인 웹툰 [호랑이형님]에 나오는 여말선초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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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신병훈련행성알바리움 2016/03/25 05:10 #

    여기 이글루스 알고나서 처음으로 1댓글 달고 가게되네요 까마구님의 여관특집(?)은 보면

    볼수록 흥미깊군요 여관이란 개념이 주막 외엔 존재한적도 없는줄알았던 한국역사에서도

    현재 아시아권 전문숙박업의 창시국이자 정점으로 통하는 일본 못지않은 전문숙박없소

    체계가 존재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자료 부탁드려요~ ^^
  • 역사관심 2016/03/25 11:41 #

    감사합니다. ^^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 응가 2016/03/28 19:50 #

    사찰에서 한 부분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숙박지로 이용하게 했다는건 조선시대에도 동일하군요.
    큰 절의 경우에는 손님들이 묵는 건물들이 있었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금강산 표훈사에는 판도방이란 객실이 현재에도 남아있고 그외 다른 금강산의 대사찰인 장안사, 유점사, 신계사에도 많은 손님이 묵을수 있었다고 전해지며, 외금강과 내금강은 연결해주는 마하연, 정양사에도 손님이 묵을수있는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금강산 외에는...수덕사 앞 수덕여관이나 대흥사앞 유선여관 같은 건물이 비슷한 역할을 해주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 글에서 수목을 가꾸었다는점에서는 왼지 유선여관이 떠오르네요
  • 역사관심 2016/03/30 23:29 #

    그렇습니다. 고려대 기록이나 조선초중기까지 유람시 빠지지 않는 관광겸 숙박처가 사찰이었지요. 이런 문화가 사실 템플스테이로 연계된다는 느낌도 드는데 단절된 눈화가 아닌 연계성을 잘 살려보면 좋겠어요.
  • 역사관심 2016/03/30 23:30 #

    유선여관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궁금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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