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조선시대 주점에도 '등'을 매달았을까? (주등酒燈의 기록) 역사전통마

요즘 전통주막, 혹은 전통주점에 가보면 이런 '제등 (거는 등)'으로 장식해 놓은 곳이 꽤 됩니다. 

간판 말고 위에 달아 놓은 등입니다 (물론, 이건 전통적인 제등이라기 보다는 그냥 모양만 청사호롱의 변형에 가까운 모습).

그런데 과연 이런 물건이 진짜 우리의 전통인지, 혹은 중국이나 일본등의 술집에서 변형되서 다는 것인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건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지요. 

이런 '제등'은 과연 '전통'적인 물건일까요, 혹은 근대나 현대에 만들어진 것일까요? 과연 우리의 주막에는 '등'이 있었을까요?

오늘은 이 '주점의 등'에 대한 이야기.


주등 酒燈

영조대인 1770년의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영조 46년 경인(1770,건륭 35)  1월26일 (갑진)
형조에 술을 많이 빚는 자에게 장형을 가하고 주등 켜는 것을 금하게 하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승지 조정(趙晸)이 술기운이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강(講)하는 막중한 자리에 참찬관(參贊官)에게서 술 냄새가 나니, 서용치 않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한익모(韓翼謨)에게 묻기를,

“민간에서 술로 발생하는 화(禍)가 자못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하니, 한익모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문(下問)이 이에 미치시니, 백성들에게 다행스런 일입니다. 국가에서는 다만 사전(祀典)에 술을 사용하나, 민간의 경우 대수롭지 않은 잔치에도 모두 술에 빠져 크게 술을 빚는 일이 서로 잇따르고, 곳곳에 주정하는 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술을 즐기므로 원례(院隷)도 취하여 액속(掖屬)에게 모욕(侮辱)을 가하기까지 하는데, 나라의 기강과 관계가 되므로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이에 더욱 불량(不良)하여 개전의 정이 없는 자는 장형(杖刑)을 가하고 유배(流配)하였다. 

임금이 또 대궐문에 나아가 각방(各坊)의 부로(父老)를 불러 보니, 어떤 자가 말하기를, “술에 대한 폐단이 병자년 이전보다 심합니다.”하니, 형조(刑曹)로 하여금 술을 많이 빚은 자에게 장형을 가하고, 또 주등(酒燈)키는 것을 금하였으나, 끝내 금할 수가 없었다.
===

술을 빚는 자들에게 형을 내리고, 주등(酒燈)을 다는 것을 금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는 이야기지요. 영조판 금주령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주등'은 뭘까요? 말 그대로 '술을 뜻하는 등' 즉 술집 문간에 다는 지등롱(紙燈籠 종이로 겉을 만든 등불)을 뜻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或曰: "酒弊甚於丙子以前。" 令刑曹, 杖其大釀者, 又禁酒燈, 然竟莫能禁也。(확실히 '주등'이라는 단어가 보이죠).

그러니까 이런 등이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형태는 꼭 술 주자를 썼다기 보다, 술집에 다는 '등'일 것입니다).
위의 실록 기록을 보면 영조임금이 '술집의 등'을 켜는 것을 금해도 소용없다고 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용이 없었다는 증거가 다음의 사료에 나오지요. 윤기(尹愭, 1741~1826년)의 [무명자집]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명자집 시고 제2책  시(詩)
권경인의 죽음을 애도하며〔哭權景仁〕

불우한 삶 누구나 싫어하는데 / 棲遲人共厭
그대는 초연하여 담소 잘했지 / 談笑子眞能
가슴속에 편 가르는 마음이 없어 / 胸裏無畦畛
술동이 앞에 늘 벗이 있었네 / 樽前有友朋

시명(詩名)이 북소리처럼 울렸건만 / 詩聲騰似鼓
살림살이는 얼음처럼 차가웠네 / 身計冷如氷
반수(泮水)에 가을바람 부는 밤이면 / 璧水秋風夜
주막의 등불 차마 어이 지날꼬 / 忍過酒肆燈

이글은 본서의 편차 순서로 보아 작자 나이 49세 때인 1789년(정조13) 가을의 작품입니다. 즉, 위의 실록기록에서 19년후의 기록이 됩니다. 마지막을 보면 '酒肆燈' 주사(즉 술가게)의 등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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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저서의 다음 부분은 더 명확하게 당시의 주막의 등모습을 보여줍니다.

무명자집  시(詩)
성안의 저녁 풍경 5수〔城中暮景 五首〕

길마재에 봉화 피고 인경 치기 전까지 / 鞍燧纔過未及鐘
북적이는 인파들 바쁘게 오가네 / 往來人客不從容
저녁 어둠 속에서 태평 소식 보나니 / 暗中忽見平安報
자각봉 꼭대기에 네 개의 봉홧불 / 紫閣峯頭列四烽

분분한 인마들 저마다 동서로 가고 / 紛紛人馬各西東
낙엽 진 청산엔 어둠이 내리는구나 / 寒樹靑山暝色籠
까마귀들아 캄캄하다 좋아하지 말아라 / 鴉隊莫誇昏得意
이제 곧 동봉에 뜨는 붉은 해를 보리라 / 會看東峀日輪紅

맑은 달 떠오르고 별들 많아지니 / 淡月初升星漸多
곳곳 누대마다 노랫소리 들리누나 / 樓臺處處起笙歌
구름 너머 들려오는 또 다른 곡조 / 別有搖搖雲外響
낙산 모퉁이서 부는 태평소 가락 / 太平簫弄駱山阿

거리에 행인 줄고 점포도 닫았는데 / 人稀街路市垂簾
안개는 짙게 끼어 여염에 자욱하네 / 煙霧深籠撲地閻
멀리서도 술집만은 분별할 수 있으니 / 惟有酒家遙可辨
문 앞에 홍등 걸린 곳이 주막이라오 / 紅燈揭戶是靑帘

기방에서 술 데울 기약 그 몇 곳이며 / 華堂幾處煖鑪期
백마 타고 청루 가는 이 또 몇이랴만 / 繡戶何人白馬馳
가장 좋은 이 맛을 그 뉘 알리오 / 最是整襟明燭地
단정히 등촉 켜고 글 읽는 재미 / 咿唔滋味有誰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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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윤기가 52세에 지은 작품으로 즉 위의 시보다 3년후인 1792년의 한양의 저녁모습을 담은 시입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봉화대에 불이 들어오는 시점부터 인경 종이 쳐서 통금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시간 순서대로 읊어서 문화사적으로 꽤 의미가 있습니다.

이중 셋째 시는 달이 뜨고 별이 점점 많아지며 유흥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풍경을 읊었고, 필자가 주목한 넷째 시는 어둠이 짙어져 인적이 거의 끊기고 술집에 홍등이 걸리기 시작하는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18세기 당시 술집의 일부에는 '주등'중에서도 '붉은 홍등'을 단 집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원문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데, 
紅燈揭戶是靑帘 즉, '홍등을 높이 건 곳이 즉 술집'이다. 라는 것으로 바닥이 아니라 높이 매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높이 매단' 형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거의 같은 시기인 18세기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賣酒者。稱酒保。【伊尹爲酒保】 酒家幟。謂帘。
【韓非子曰。宋人酤酒。懸幟甚高。酒市有旗。始見於此。或謂之帘。
今稱靑帘。後世或揭燈。名曰酒燈。我東酒肆。懸燈揭竿。】

"술을 파는 사람을 일컬어 '주보(酒保)'라 한다" 로 시작하는 이 글은 꽤 의미가 있어 보이는데, 이는 이전에 소개한 '주막의 푸른 깃발'보다 후대, 그러니까 이규경(李圭景, 1788~?) 의 시대에는 적어도 유행을 타던 '주등'으로 주점/주막의 상징이 바뀌거나 공유되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분부터 그러니까 "酒家幟。謂帘。즉 주가의 깃발을 일컬어 '렴'이라고 한다"의 바도 다음부분부터 저 '한비자'가 한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나라 시대의 술에 관한 책인 '酒譜주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확히 어디까지냐 하면 "韓非子曰부터 或謂之帘"까지가 인용한 부분이지요. 참고로 이 '주보'라는 책은 7세기중엽 인물(당태종 시대)인 왕적(王績)이 병으로 은퇴한 후 봄가을로 술을 빚어 주경(酒經), 주보(酒譜) 각 1권씩을 지었다고 당재자전(唐才子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책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조선의 당시' 그러니까 18세기말-19세기초의 모습이 나옵니다.

後世或揭燈。名曰酒燈 후세에는 간혹 그렇지 않고 '등'을 높이 걸기도 한다. 이것의 이름은 '주등(酒燈)'이라 한다.
我東酒肆。懸燈揭竿。우리 동(국, 조선)의 술가게는 낚시대같은 장대에 등을 높이 매달아 건다.

"懸燈" 현등 그러니까 등을 높이 매달고, 懸燈 그러니까 장대(낚시대 혹은 대나무대)에 건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현등이라는 말은 행군할 때 높이 등을 걸고 다닐 때도 쓰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18세기말에는 주막등에 기존의 푸른 깃발과 함께, '주등'이라는 등을 긴 장대에 매달았음을 알 수 있지요. 이게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같은 시기에 결정적인 (거의 복원 활용이 가능한) 회화가 한 점 전합니다. 

바로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나오고 있는데 이 모습은 별로 주목하는 글을 본 일이 없습니다.
단원 김홍도 공원춘효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18세기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과 그대로 일치하는 시대지요. 당시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모인 과거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이 그림을 잘 살펴보면 당시 등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수많은 등롱을 높이 매단 (懸燈揭竿 현등게건)한 모습이 보이시나요. 또한 등마다 모두 아마도 각 유파나 집단을 나타내는 글자가 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확대해 보면 그 형태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손잡이가 있고 직육면체인 '제등'형태입니다. 보시다시피 위의 동그라미를 보면 손잡이가 붙어 있고 휴대용으로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어있고, 아래를 보면 긴 장대에 (아마도 나무나 쇠) 걸개가 있어 거는 형식입니다.
등롱 (燈籠)이라는 말은 대바구니나 통에 등을 넣어 만든 요즘 우리가 일본 술집에서 보는 '제등'과는 그 쓰임새는 비슷하지만 모양은 다른 직육면체의 고유한 물건입니다. 아래는 조선후기의 물건으로 위의 모양과 거의 비슷한 제등입니다 (다만 종이가 아닌 유리입니다).
최근에 보면 '술 주'라든가 하는 하나의 글자가 아닌, 많은 문장을 겉면에 새긴 멋진 등도 많습니다. 아래의 사진같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등은 옛날 조선에는 없었을까요.
그런데, 이런 등도 이미 16세기에 있었습니다. 연산군 실록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10-05-22[11] 승지들에게 대비 헌수의 일을 묻다

그러나 혹 취하게 되면, 성이 나 대비 앞에서 욕설하였는데, 언젠가는 밤에 술이 취하여 흥청(興淸) 중에 재주 있는 자 수십 명을 뽑아따르게 하고, 사람을 시켜 종이 등롱(燈籠)을 들게 하되, 등롱 위에 가사(歌詞)를 썼는데, 모두 전두(纏頭)를 바라는 말이었다.
使人持紙燈, 籠上書歌詞, 皆乞纏頭之語。

여기 나오는 '歌詞 가사'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몇줄짜리 '가요가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조선중기 (연산군대)의 가사는 아무리 짧아도 100행, 길게는 수천 행의 글자를 가진 장편가사까지 긴 문장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대 기록을 보면 궁중에 이런 등롱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위의 기록 이듬해인 1505년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1년 을축(1505,홍치 18) 4월7일 (임술)
성 쌓는 군인 8백을 시켜서 등롱을 날라 들이게 하다

전교하기를, “오늘 저녁에 성 쌓는 군인 8백을 시켜서 등롱(燈籠)을 날라 들이라.”
당시 궁중에 쓰던 등롱의 어마한 숫자를 짐작케 합니다. 또한 일본인들이 16세기에 일본의 신사에 걸 '제등'에 글자 써 넣어주기를 부탁한 일도 있습니다. 

효종 5년 갑오(1654,순치 11)
7월21일 (무신)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등롱의 주조와 일광산의 명을 청하다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등롱(燈籠)의 주조(鑄造)를 요청하고. 또 일광산(日光山)의 명(銘, 글을 새겨넣기)을 청하니 대제학 채유후(蔡裕後)에게 명하여 그 명을 짓게 하고, 판서 오준(吳竣)에게 명하여 써서 보내게 하였다.

채유휴가 글을 짓고, 오준이 그 글을 써 넣었다는 것인데, 그 오준(吳竣, 1587~1666년)의 [죽남당고(竹南堂稿)]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죠. 

효종 5년 1654년 갑오 順治
○ 7월, 대사헌이 되다.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日光山 사당의 燈籠과 그 銘을 청한 일로 銘의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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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이미 '그림을 그린 등'도 많았습니다.
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 이미 18세기에도 2012년의 위의 등축제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정교전교(政敎典故)

이에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큰북[大鼓]을 치면 악공ㆍ광대ㆍ기생이 몸을 흔들며 발을 움직이다가 조금 후에 파한다. 이리하여 연화대놀이[蓮花臺戱]가 시작되는데, 이보다 먼저 향산(香山)과 지당(池塘)을 설치해 놓고 둘레에 채색꽃[彩花]을 꽂아 놓는데, 높이는 한 길[一丈]이 넘으며, 좌우에 역시 그림 그린 등롱[畫燈籠]이 있어 거기에 달린 꽃술[流蘇]이 그 사이로 어른거리며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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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등롱'을 '걸어서' 제등으로 썼음은 17세기의 숙종실록에도 아주 잘 나오고 있습니다.

숙종 18년 임신(1692,강희 31)
11월28일 (계유)

상소한 사람 김일진(金日晋)을 무산부(茂山府)에 귀양보냈다. 김일진은 고부(古阜) 사람인데, 그의 상소에 이르기를, 중략
"...시험삼아 항간(巷間)에서 비웃고 있고 온 조정에서 다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자는 한 번의 잔치를 열흘이 넘도록 하면서 노랫소리가 하늘에까지 시끄럽게 되고 사등롱(紗燈籠)을 길에까지 걸고서 밤을 낮삼아 하고 있으며, 혹자는 그전 명상(名相)의 집을 강압하여 사 놓고는 이쪽 저쪽으로 증축하되 한없이 높고 사치스럽게 하고 있고, 혹자는 한 해 동안에 갑제(甲第 대저택)를 두 채씩이나 마련하기도 하는데 한 군데 것의 값이 다같이 천금(千金)이나 들게 되고, 큰 벼슬아치나 작은 벼슬아치나 집 짓기와 수리하기를 되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해 놓고서 방탕하게 멋대로 잔치놀이를 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이 하는 것을 이루 다 꼽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보면 당시 한양도 아닌 무산부, 그러니까 현재의 함경북도 무산군의 길가에도 사등롱 (紗燈籠), 즉 색색의 비단으로 겉은 싼 등불을 '걸어서' 길가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고 되어 있지요. 물론 이는 당시 사치의 풍조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맥락입니다만, 이러한 '길가에 매다는 등롱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17세기의 주점에서도 달았겠지요.
=====

16세기의 주등기록

17세기, 18세기의 주막이나 주점에서 전에 소개한 깃발이나 이런 주등(주점의 등)을 밝혔음을 알아 봤는데, 사실 1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16세기 조선중기에도 주등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장유(張維, 1587-1638년)의 [계곡선생집]의 기록입니다.

계곡선생집 오언율시
천장이 역마(驛馬)를 타고 가다 집에 들렀기에 헤어질 때 이 시를 지어 선물로 주다[天章乘傳過弊廬 臨別贈此]

먹고 마시기도 고달픈 생활 / 飮啄殘生困
환대(歡待)할 멋진 길손 만나기도 어려워 / 逢迎好客稀
그런데 내 친구 급히 역마 몰고 가다 / 故人驅使傳
흥에 겨워 내 집까지 찾아와 주었구나 / 乘興到林扉

술잔 주고 받는 사이 주등 심지 떨어지고 / 把酒燈花落
시론(詩論) 펼치노라니 눈빛이 날리도다 / 論詩雪色飛
한 해도 다 가는데 그대 떠나 보내려니 / 別君當歲暮
웬지 엇갈리는 서운한 마음 / 怊悵寸心違

把酒燈花落 
그러니까 주막에 매달아 둔 주등이 꺼질 때까지 마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15세기초입에도 적어도 비슷한 형태의 등이 있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세종 9년 정미(1427,선덕 2)
명나라 사신 창성과 윤봉이 청한 물건들을 모두 주게 하다

창성(昌盛)이 구리 주전자[銅鑵子]ㆍ쇠가죽 옷농[牛皮衣籠]ㆍ도금 구리부처[鍍金銅佛]ㆍ통대 등롱[筒竹燈籠]을, 윤봉(尹鳳)이 말 안장[鞍子] 두 벌을 청하므로, 명하여 모두 주게 하였다

1427년의 기록으로 당시 명나라 사신이 이것저것 좀 갖춰달라고 하는 장면인데, 이 중 통대등롱 (筒竹燈籠)이란 물건이 나옵니다. 해석하자면 통대 그러니까 대통으로 만든 등롱이라는 것이 되지요. 기다란 대나무 끝에 등을 매단 형식일 것 같습니다.

같은 세종대의 인물인 성현(成俔, 1439∼1504년)의 [용재총화]에 그 쓰임새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합니다. 4월 8일 석가탄신일의 연등식에 쓰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요.

용재총화
명절

4월 8일은 연등인데 석가여래가 탄생한 날이라 한다. 봄에 아이들이 종이를 잘라서 깃발을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고는 무리지어 골목을 다니며 연등도구를 빌리니, 이를 호기라 한다. 이날이 되면 집집마다 장대를 세우고 등을 단다부잣집은 크게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층층이 여러 등잔을 쌓으니 별과 보석이 펼쳐진 듯하다.

도성 사람이 밤새 노닐며 구경하는데 못된 젊은이는 혹 돌로 맞히며 즐기기도 한다. 지금은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간혹 설치한다 해도 예전의 흥성함과는 다르다. 

여기보면 민간에서는 집앞에 모두 장대에 등을 매다는 모습이 나오며, 부잣집에서는 채붕(綵棚 비단 채, 사다리 붕)을 합니다. 그러니까 채붕은 한자사전의 정의를 빌자면 "임금이나 중요인물이 행차(行次)하는 곳의 성문(城門)이나 다리 또는 가가(假家, 가게)등에 내걸어 장식하던 색실ㆍ색종이ㆍ색 헝겊. 결채(綜綵, 비단뭉치)"이 되는데, 이렇게 집앞을 장식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5세기중기 조선전기의 연등행사가 이럴진대, 고려시대에는 더 화려했겠지요. 이 기록에서 세종대에도 '집앞에 장대를 세우고 등을 매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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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어떤 주막들의 경우 이전에 소개한 주막의 푸른 깃발을 낮시간에는, 밤에는 같은 장대에 주등을 달았다면 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전통주점을 여시는 분들도 이런 등을 사서 다시면서 우리 선조들도 이런 걸 썼었지라고 한번쯤 생각하시고, 거기서 마시는 분들도 이런 등을 보시면 이제는 '우리 전통 술집등'이구나 라고 여기시고 마음껏 즐기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사족:

이외에도 '주등'이 나오는 기록은 최소 열권이 넘는 17-18세기의 사료에 번역되지 않은 문헌이 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가 닿는대로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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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신병훈련행성알바리움 2016/04/18 00:36 #

    딱히 우리만 없었다거나 한건 아니었네요 의외로 주점 문화에 관련해선 동북아 3국이 공통점이

    많았었네요 우리가 하도 박살나고 작살나느라 남아나는게 없었어서 그렇지... -_-
  • 역사관심 2016/04/18 03:38 #

    이 글을 쓰면서 중간중간 든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었습니다. '등롱'이라는 단어와 맥락을 공유할 수 있는 한자문화권내의 국가들이었구나...라는 생각. 새삼스럽지만요.

    전통주점에서도 그냥 구하기 쉬운 원형등 보다는 기왕이면 저런 형식의 등을 달면 더 좋을 것 같네요.
  • Scarlett 2016/04/18 13:51 #

    김홍도의 저 그림은 처음 보는 그림이네요.
  • 역사관심 2016/04/19 13:18 #

    명작인데 미국개인소장이라 소재때문에 인터넷시대이전에는 널리 알려질 길이 없었던 작품중 하나입니다.

    더군다나 2007년 정병모 경주대 교수가 발굴해서 당해 국악누리 4월호에 공개한게 최초이니. 10년도 안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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