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 ≠ 만두, 쌍화점은 어떤 가게? 음식전통마

예전에 우리의 만두에 대해 조금 알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웃이신 적륜님의 교자의 유래 글밥과술님의 중국군만두 궈티에 글에서 우리나라의 군/물만두와 중국의 여러 만두와 교자들, 그리고 일본의 교자에 대해 알아 본 바가 있지요. 이 당시 1930년대에 '중국음식'으로 소개되던 만두에 대해 글을 쓴바가 있는데, 이 글의 내용중 만두의 유래가 틀렸음을 이번 포스팅을 통해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에 나오는 전문가의 글에도 나오듯 흔히 한국의 만두의 유래를 따질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기록으로 드는 것이 고려시대의 "쌍화점 (상화점)"기록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한국의 음식전문가분들이 만두에 대해 유래를 따질 때도 예외없이 이 상화떡(상화병)을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정작 고려시대 당시의 '상화'라는 만두형식의 음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이었는지 맛은 어땠는지에 대한 상식은 대중적으로 별로 없습니다. 

고전번역원측의 주석을 보면 "밀기울에 막걸리를 타서 쑨 죽에 가루 누룩을 넣어 하룻밤을 지낸 다음 이것을 걸러 밀가루를 넣고 반죽해서 잰 뒤에 꿀팥소를 넣고 다시 재어서 물에 담가 거기서 뜨는 것을 건져서 시루에 쪄낸 떡"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모습은 사실 우리가 지금 즐겨 먹는 한 음식형태를 연상시킵니다.

[주방문(酒方文)]이라는 1600년대 말(추정, 혹은 1700년대초)의 요리서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상화를 만드는 법'이 나오는데 이 방법과 거의 같지요.
"밀가루를 곱게 쳐서 알맞게 반죽해 놓았다가 부풀어 일면 시루에 증편처럼 찐다. 소로는 팥이나 콩가루에 꿀을 섞어 쓰고 또 채소를 넣어도 좋다."

이제 감이 좀 오시겠지요. 그 음식이 무엇인지는 글 말미에 (이미 아시겠지만) 쓰도록 하고, 문헌을 조금 살펴보지요.
주방문 (17세기말~18세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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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병의 기록

우선 고려시대의 '쌍화점'기록을 제외하고 시기적으로 이른 조선중기 허균(許筠 1569~1618년)의 [성소부부고]부터 살펴보지요.

성소부부고

약밥[藥飯]- 경주에서는 보름날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이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해서 배워서 해 먹는데 고려반(高麗飯)이라 부른다.
서울에서 철따라 먹는 음식으로는 봄에는 쑥떡ㆍ송편ㆍ괴엽병(槐葉餠)ㆍ두견화전(杜鵑花煎)ㆍ이화전(梨花煎)이 있고, 여름에는 장미전(薔薇煎)ㆍ수단(水團)ㆍ쌍화(雙花)ㆍ만두(饅頭)가 있고, 가을에는 경고(瓊糕)ㆍ국화병(菊花餠)ㆍ감과 밤을 섞어 만든 찰떡[糯餠]이 있으며, 겨울에는 탕병(湯餠)이 있는데 자병(煮餠)ㆍ증병(蒸餠)ㆍ절병(節餠)ㆍ월병(月餠)ㆍ삼병(蔘餠)ㆍ송고유(松膏油)ㆍ밀병(蜜餠)ㆍ설병(舌餠) 등은 사시 내내 만들어 먹는다.

밀병(蜜餠)은 약과(藥果)ㆍ대계(大桂)ㆍ중박계(中朴桂)ㆍ홍산자ㆍ백산자ㆍ빙과(氷果)ㆍ과과(瓜果)ㆍ봉접과(蜂蝶果)ㆍ만두과(饅頭果) 등으로 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사용한다. 실국수[絲麪]는 오동(吳同)이란 사람이 잘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온다.

대만두(大饅頭) : 의주(義州)의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

석용병(石茸餅) : 내가 풍악(楓岳 가을 금강산의 별칭)에 구경가서 표훈사(表訓寺)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절의 주지가 저녁상을 차려 왔다. 상에 떡 한 그릇이 있었는데 이것은 구맥(瞿麥 귀리)을 빻아 체로 여러 번 쳐서 곱게 한 뒤에 꿀물을 넣어서 석용(石茸)과 반죽하여 놋쇠시루에 찐 것인데, 맛이 매우 좋아 찹쌀떡이나 감떡[柹餠]보다도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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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의 이 기록을 보면 '쌍화'와 '만두'를 따로 구별하고 있음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두' 즉 '왕만두'가 이미 따로 구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지요. 더 후대의 기록인 한치윤(韓致奫 ,1765~1814년) [해동역사]에 이 '대만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것이 현재의 큰 만두 (왕만두)가 아닌, 현재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음식임을 추정케 합니다. “큰 만두의 껍질을 갈랐더니 그 안에는 작은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다. 크기가 호도(胡桃·호두)만 하여 먹기에 아주 좋았다”고 되어 있어, 현재에도 한번 살려볼 만한 음식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기록들로 '쌍화'는 '만두'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언론에서 잘못다루는 예중 하나가 바로 아래의 기록인데, 사실은 이 기록은 '상화(쌍화)'라는 음식이 어떤 종류의 음식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해유록
有曰饅頭。如我國霜花餠。而外白內黑味甘
또 만두라는 것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상화떡(상화병)같은 것으로 겉은 희고 안은 검으며 맛은 달다.

이것은 1719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문인 신유한(申維翰, 1681〜1752년)의 [해유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즉 일본의 '만두'를 소개하면서 조선의 상화병(상화떡)과 같이 겉은 하얗고 속은 검고 맛은 단 음식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지요.

필자는 이 기록은 실은 '만두'가 아니라, 바로 일본에서는 만쥬 (만주)라고 부르는 같은 한자의 饅頭(まんじゅう)를 따서 '饅頭' (만두)로 소개한 것이라 봅니다. 조선의 '만두'는 일본에서는 현재 '교자'라고 불리우는 음식입니다. 이 에도시대에도 교자의 형태에 가까운 음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교자의 어원은 꽤나 근세의 일임을 이웃블로거이신 적륜님의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쥬'를 같은 한자인 '饅頭'를 그대로 해석, '만두'라고 하기때문에 현대의 한국언론에서 우리가 먹는 만두와 같은 의미로 생각없이 가져다 쓰는 경우가 있더군요. 이는 오류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신유한 선생은 당시 조선의 '상화'는 오히려 일본의 '만쥬' (만주)와 비슷하다고 본 것이지요.
비슷한 시기인 1720년 이번에는 일본이 아니라 청나라를 다녀온 이의현(李宜顯, 1669년 ~ 1745년)의 [경자연행잡지]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경자연행잡지

이른바 유박아(柔薄兒)라고 하는 것은 밀가루로 만드는데, 우리나라 떡 상화(霜花)와 같고, 
그 합쳐지는 곳에 주름을 잡은 것은 우리나라 만두와 같다. 이것은 대개 옛날 만두이다. 그 속은 돼지고기에 마늘을 섞어서 만든다

또 밀가루로 둥근 떡을 만들고, 돼지나 양의 기름에 볶아서 가볍고 무르고 쉽게 부스러지게 만드는데, 우리나라 건정(乾飣, 주: 乾飣 이란 건 '강정'과 같은 것입니다) 모양과 같다. 그중에 좋은 것은 사탕가루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 비록 깔끔하고 거칠거나 좋고 나쁜 차이는 있어도 점포에서 파는 것은 모두 이 종류이다. 

또 사탕, 밀가루, 깨 같은 것을 합쳐서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대략 우리나라 백자병(柏子餠)과 같다. 박산양(薄饊樣)이라는 것은 너무 달지도 않고, 또한 기름기도 없어서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대체로 연중(燕中)의 반찬은 모두 돼지나 양의 기름으로 튀겨서 만들기 때문에 누린 기운이 많아 먹기에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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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청의 유박아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밀가루로 만드는 것은 상화떡과 비슷한데, 속을 넣고 '합치는 곳이 주름이 많은 모양'은 상화가 아니라 당시 조선의 '만두'와 비슷하다고 하고 있어, 18세기 당시 조선의 '만두의 모양'이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상화'와 '만두'는 전혀 다른 음식임을 알 수 있지요. 만두 속으로 마늘과 돼지고기를 넣음도 나옵니다.
만두의 기록

만두가 당시 상화와 같이 '팥'이나 단속을 넣지 않았음은 거의 같은 해에 나온 (1720년에 집필시작) 이익(李瀷, 1681~ 1763년)의 [성호사설]에는 아예 '만두'라는 챕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기록에는 '물만두'기록이 나와 흥미를 끌지요.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만두ㆍ기수ㆍ뇌구(饅頭起溲牢九)

식품(食品) 중에 떡 따위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에 따라 바꿔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꼭 알맞게 할 수 없지만, 지금 기억나는 대로 대충 적어 본다. 속석(束晳)은, “만두는 봄철에 알맞고, 박장(薄壯)은 여름철에 알맞고, 기수(起溲)는 가을철에 알맞고, 탕병(湯餠)은 겨울철에 알맞은데, 뇌구(牢九)는 사시(四時)에 다 알맞다.” 하였다.

그러나 노심(盧諶)의 제법(祭法)에는, 만두와 뇌구를 봄 제사에 쓰는 제물(祭物)로 삼았으니, 이 뇌구도 봄철에 알맞다고 해야 마땅하겠다. 양용수(楊用修)는, 《유양잡조(酉陽雜爼)》에, “농상 뇌환(籠上牢丸)ㆍ탕중 뇌환(湯中牢丸)이다.”는 말을 인용하여, “뇌환을 뇌구(牢九)라 함은 시인(詩人)이 운(韻)에 따라 잘못 인용한 것이요 뇌환이 옳다.”고 했는데, 이는 염소나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생강ㆍ계피ㆍ난초ㆍ파 등속의 양념과 섞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겉으로 싸고 둥글게 만든 다음, 솥에 쪄서 더운 탕국에 타서 먹으니 역시 만두의 유이다. 만두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노수(瀘水)에서 제사 지낼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역시 겉은 떡이고 속은 고기이다. 다만 뇌환은 작고 만두는 크며, 뇌환은 밀가루로 뭉쳐서 만들고 만두는 떡으로 만드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자서(字書)》에, “담(餤)은 떡의 유인데, 얇은 떡에 잘게 썬 고기를 싸서 만든 것을 담이라 한다.” 하고, 또 “홍릉담(紅綾餤)과 영롱담(玲瓏餤)이 있다.” 하니 이도 위에서 말한 뇌환ㆍ만두와 서로 비슷한데, 다만 그 만든 모양이 같지 않을 뿐이다. 박장(薄壯)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여름철에 알맞다고 했으니, 이는 반드시 냉한 원료로 만들어서 입맛을 시원하게 하는 것으로, 지금 세속에서 말하는 물만두[水團]의 유에 불과한 듯하다.

기수(起溲)란 것은 밀가루를 반죽해 깨끗이 쪄서 익힌 것으로 이름을 기수라고 했으니, 이는 필시 주효(酒酵)로써 벙그렇게 일구어 만든 것이리라. 《자서(字書)》에, “부투(餢)는 밀가루로 부풀게 만든다.” 했으니, 이는 밀가루에 주효를 넣어 부풀어 오르게 한 것이고, “포는 상자에 찐만두다.” 했으니 역시 밀가루에다 주효를 넣어 부풀게 한 것이다. 이 모두가 기수의 종류로, 지금의 소위 상화병(霜花餠)이란 것이 이런 것인 듯하다.

탕병(湯餠)이란 것은 당인(唐人)들은 불탁(不飥)ㆍ부탁(餺飥) 또는 습면(濕麵)이라 했다. 산곡(山谷)의 시에, 탕병 한 그릇에 은사가 어지러워 / 湯餠一杯銀線亂 라고 하였으니, 그 형상이 어지러운 실 같다는 것이요, 엄주(弇州)가, 습면(濕麵)은 맺어진 것을 뚫을 수 있다 / 濕麵可穿結 라고 한 말도 또한 이런 뜻이었으니, 지금의 수인병(水引餠)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도 뇌환(牢丸)을 탕병(湯餠)이라 했으니, 모두 더운 떡국에 타서 먹는 것은 통틀어 탕병이라고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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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는 염소나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서 생강, 계피, 난초, 파등의 양념을 섞고, 밀가루 반죽의 겉을 둥글게 만든 다음 솥에 쪄서 '탕국'에 넣어 먹는다라는 기록으로 이 당시 먹던 '만두'의 모습이 지금의 만두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갈공명의 만두기록 역시 등장하고 있어 18세기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기록의 중간 부분을 보면 물만두[水團]라는 것이 지금의 '군만두'의 반대로 탕속에 넣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몸을 차갑게 하는 속 (혹은 찬 물을 이용한)을 넣어서 먹는 시원한 만두류였음을 알 수있습니다. 당시 '군만두'는 아예없고, 쪄서 먹거나 탕속에 먹는 것이 그냥 '만두'고, 시원한 재료를 이용한 만두를 '물만두'라고 했음을 알 수 있죠.

성호사설보다 약 200년전의 '水饅 수만 (물만두)'는 이런 기록도 있어 여러 재료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응희(李應禧, 1579~1651년)
옥담사집
음식류(飮食類)

만두(饅頭)

우리 집 며느리 솜씨가 좋아 / 吾家巧媳婦
맛있는 물만두를 잘 빚누나 / 能作水饅

옥가루(옥설)로 노란 알갱이 소를 만들어 / 玉屑鞱金粟
하얀 껍질로 싸서 솥에다 삶는다 / 銀包泛鐵鍋

쓴맛은 생강을 많이 넣어서요 / 苦添薑味勝
짠맛은 간장을 많이 넣어서지 / 鹹助豆漿多

한 사발을 새벽에 먹고 나면 / 一椀呑淸曉
아침 내내 밥이 안 먹히네 / 崇朝飯不加

여기 수만 (물만두)의 재료로 쓰인 옥설(玉屑)은 한약재의 일종으로 광물이죠. 옥설은 '음기'를 기르고 폐를 시원하게 적셔주고 위를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니, 앞서 말한 '냉한 기운'을 키워주는 재료로 만든 만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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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주제로 돌아가 '쌍화점'의 기록으로 인해 고려시대에 '상화병'이 존재했음은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만두' 기록도 고려시대에 있었을까요? 즉, 조선인들처럼 고려인들도 '상화'와 '만두'를 구별하고 있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음은 이색(李穡, 1328~1396년)의 [목은시고]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목은시고 
여흥음(驪興吟)
대서(代書)하여 이 향상(李向上)에게 받들어 답하다.

은어는 비를 얻어 장천을 거슬러 올라오고 / 銀魚得雨遡長川
솔 아래 새 버섯은 맛이 온전해지려는 때 / 松下新芝味欲全
양곡의 만두 쪄 내오면 맛이 또 그만이리니 / 暘谷饅頭蒸得好
가을쯤엔 남쪽으로 나도 놀러갈 생각이오 / 南游準擬及秋天

여기 보면 '양곡' (아마도 충남의 양곡)이라는 곳의 만두를 '蒸 (찔 증) 쪄내 온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 이미 만두라는 음식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지요.

이색선생은 만두를 좋아하셨는지 다른 문집에서도 또 다시 만두애호에 대한 표현이 나옵니다.

목은집
금주음(衿州吟)
관악산 신방사(新房寺)의 주지(住持)는 무급(無及)의 도반(道伴)이다. 그가 삭방(朔方)에서 돌아와 이 절간에 머물면서 노숙(老宿) 아무 아무와 함께 먹을 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먹여 주었다.

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 / 檀越齋僧是故常
산승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넘어질 만 / 山僧饗俗可驚惶
흰 눈처럼 쌓인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 / 饅頭雪積蒸添色
기름이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 豆腐脂凝煮更香

[목은집]의 이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의 만두 역시 색깔이 상화처럼 눈처럼 하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쪄낸다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두부지짐이 나오고 있어 고려시대에 두부지짐이 있었음도 알 수 있지요). 

만두라는 음식이 조선시대처럼 고려왕궁에서도 먹던 음식이라는 증거는 [고려사]의 충혜왕 4년, 즉 1343년 10월조의 만두 도둑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내주'는 궁궐안의 부엌을 말합니다. 간이 큰 도둑이죠.

충혜왕 4년 (1343) 10월 (겨울)
갑인일. 왕이 새 궁궐로 거처를 옮겼다.
정사일. 새 궁궐의 완성을 백관들이 하례하는 자리에서 감찰대부(監察大夫) 신중전(申仲佺)이 먼저 채단(綵段) 2필을 바치니 사람들이 그가 아첨한다고 비웃었다. 어떤 자가 내주(궁궐 부엌)에 들어가 만두(饅頭)를 가져가자 노한 왕이 도둑질을 한 것이라 여겨 그를 죽이게 했다.

위에서 조선중후기 기록을 보았다면, 고려의 바로 다음인 조선전기에는 어땠을까요? 세종실록을 보면 '만두'와 '병 (상화병이 속한)'류 음식에 대한 엄연한 구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종 4년 임인(1422,영락 20)
5월17일 (계유)
수륙재의 인원을 정하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종친과 본조의 관원은 모두 전일에 정한 숫자에 의하고, 대언(代言) 1명, 각전(各殿)의 속고치[速古赤] 합 8명, 별감(別監)ㆍ소친시(小親侍) 합 10명, 행향사(行香使) 및 종친(宗親)ㆍ본조(本曹)의 당상(堂上)ㆍ낭청(郞廳)과 축사(祝史) 1명이 참예하는데,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면(麪),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초재(初齋)를 올릴 때에 거의 수백 명이나 모였으므로, 이러한 계가 있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인 중종 실록 1524년 기록에도 창덕궁내에서 만두를 먹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할 정도로 잘 알려진 음식이었지요.

중종 19년 갑신(1524,가정 3)
2월6일 (신축)
정원이 이곤의 죽음에 대해 계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가위장(假衛將) 이곤(李坤)이 창덕궁(昌德宮)에 입직(入直)하여 지난 5일 아침에 만두(饅頭)를 먹고서 갑자기 죽었고 그때 함께 먹은 몇 사람도 토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신 등의 생각에는 독을 넣은 듯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한때에 만두를 먹은 사람이 다 정신을 잃었다면 독을 넣은 것이 분명하다. 곧 금부(禁府)를 시켜 이곤의 집 종[奴]을 가두고 그 만두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게 하고, 한성부(漢城府)를 시켜 은비녀로 독을 시험하라.” 하였다.

(사실 이 기록은 흥미로운 것이 '만두를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를 묻고 있어, 당시에 만두를 전문으로 궁중에 대던 곳이 있었을 가능성도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궁중에서만 먹은 것이 아닙니다. 문인들의 기록에도 조선초기, 중기, 후기 할 것없이 만두는 계속 나옵니다. 일상의 음식으로 말이지요. 우선 초기의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 이색선생기록처럼 당시 만두는 눈처럼 하얀 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통에 담긴 하얀 색감대비도 멋지지요.

사가집
김자고(金子固)가 만두(饅頭)를 보내준 데에 사례하다.

붉은 통을 처음 열어보니 / 朱榼初開見
만두가 서릿빛처럼 희어라 / 饅頭白似霜

보드라움은 병든 입에 딱 알맞고 / 軟溫宜病口
달착지근함은 쇠한 창자를 보하네 / 甛滑補衰腸

항아리엔 매실 간장을 담았고 / 甕裏挑梅醬
쟁반엔 계피 생강도 찧어 넣었네 / 盤中搗桂薑

어느덧 다 먹고 나니 / 居然能啖盡
후한 뜻을 참으로 못 잊겠구려 / 厚意儘難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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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저자 허균(許筠 1569~1618년)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살펴본 후기 기록인 [성호사설(18세기)]처럼 조선초중기에도 만두의 속에 고기를 넣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부  궁사(宮詞)
갈잎 빻고 고기 다져 만두를 만들어라 / 糝蘆泥肉製饅頭
참외와 과일들을 걸교루에 벌여놓았네 / 瓜果爭陳乞巧樓
밤이 들자 나인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 入夜內人爭指點
은하수 서쪽 가라 견우에게 절 드리네 / 絳河西畔拜牽牛

이러니 한 개를 먹고나도 '거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다음은 장유(張維, 1587-1638년)의 [계곡선생집] 기록입니다.

계곡선생집
즉흥시[卽事]

점심을 잘 먹었더니 저녁은 생각 없어 / 午飯飽來晡飯厭
만두 하나로 떼우니 속이 마냥 편안하네 / 饅頭一顆覺輕安

뜻이 족하면 그만이지 뭐가 또 필요하랴 / 人生意足更何待
늙은이 쇠한 위장 잘 보살펴 주어야지 / 老子胃衰須得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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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흥미로운 '메밀만두'기록. 18세기 김정희(1786~1856년)의 선생의 [완당전집]을 보면 현대의 '메밀만두'의 (아마도) 시초기록으로 보이는 기록이 나옵니다.

완당전집
양근 군수를 보내다[送楊根守]
용산(龍山)

배에 싣는 나무다발 여기저기 무더기라 / 船裝不盡缺缺堆
농사 이익 옹글기는 땔감만 못해설레 / 農利全輸柴利來
메밀꽃 희끗희끗 은조는 눈부시니 / 蕎麥星星銀粟白
온 산에 뒤덮힌 게 다 만두의 재료로세 / 滿山都是饅頭材
메밀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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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 모든 당대의 기록들은 고려시대부터 "쌍화점"의 상화병(상화떡)이 '만두'를 혼용하거나 헷갈려 쓴 기록이 아님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상화와 만두는 엄연히 다른 음식임을 잘 구별하고 있었죠 (오히려 '상화'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 현대에 더 헷갈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그리고, 현대한국에도 '만두'는 우리가 아는 그 '만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서두의 질문, '상화떡'과 아주 (아마도 거의 똑같은) 닮은 현재 우리의 음식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호빵' 혹은 '찐빵'입니다 (호빵과 찐빵, 둘은 같은 음식입니다).
재현된 상화병
현대의 찐빵

우리가 흔히 하는 틀린 추측이 호빵의 '호'가 호떡의 '오랑캐 호胡'자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나라출신의 '호떡(胡-)'과 달리 호빵은 원래 '찐빵'이라는 우리 고유의 음식입니다.

그리고 '호빵'이라는 말은 1971년 삼립제과에서 '호호 불어먹는 빵'이라는 뜻의 '호빵'을 고유상표로 개발하면서 나온 현대단어일 뿐이지요. 엄밀히 당시 정의를 그대로 옮기자면 "호빵이라는 이름은 ‘뜨거워서 호호 분다’, ‘온 가족이 웃으며 함께 먹는다’는 의미의 중의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가 되는 바로 1971년 광고입니다.


그러니까 '쌍화점'은 '찐빵집'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 우리가 먹는 '찐빵' (혹은 호빵)이 바로 '상화병'의 직계후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기록으로 보았듯 '상화'라는 디져트가 마치 '쌍화점'의 강력한 존재로 인해 중세음식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도되는 느낌인데, 18세기까지 꾸준히 등장하고 있어 현재의 '찐빵'을 상화라고 계속 부르다가 근대에 오면서 상화> 찐빵으로 바뀌어 나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입니다. 다만, 이는 좀 더 살펴 봐야 하겠군요.

쓰다보니 길어졌는데 앞으로 찐빵 (호빵포함)을 소개할 때 '상화'를 이용해서 마켓팅을 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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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정약용(1762~1836년) 선생은 어지간한 떡국애호가이셨나 봅니다. 만두를 제치고 떡국을...

만두가 비록 동글동글하다지만 / 饅頭雖團圓
떡국이 있는데야 누가 후회하리 / 湯餠誰噬臍



덧글

  • Fedaykin 2016/05/30 15:33 #

    오...쌍화점이 만두방이 아니었군요!! 호빵이었다니!!
    지금처럼 설탕 왕창 들어간 단팥이 아니라 꿀로된 팥으로 만든 호빵이라...먹어보고 싶네요

    근데 상화병=호빵=찐빵이 고유 음식이었으면 왜 김씨아재가 아니라 회회아비가 팔았을까요 흐음...
  • 역사관심 2016/05/31 09:16 #

    상화라는 녀석의 기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으니, 어쩌면 아랍권이나 위구르쪽에서 넘어논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2008년의 신문기사에서는 박유덕교수라는 분이 쌍화점의 상화는 이런 떡종류가 아니라 아랍쪽의 보석류인 '솽화'의 음역이라는 정보도 있긴 했습니다.
  • Nocchi 2016/05/30 16:11 #

    아니 그렇다면 회회아비는 오늘날 호빵을 파는 편의점 사장님이었다는 말인가요?
  • 역사관심 2016/05/31 07:58 #

    찐빵집 공장주인...에 더 가까우려나요 ㅎㅎ 아랍 편의점 사장님의 그림이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 JOSH 2016/05/30 16:56 #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
  • 역사관심 2016/05/31 07:59 #

    쓰면서도 재밌었던 주제의 글입니다 ^^ 감사합니다.
  • 나인테일 2016/05/30 16:58 #

    처음에 잘못 읽고 팥소를 쓴다고 해서 부꾸미 같은 것인줄 알았습니다;;
  • 역사관심 2016/05/31 08:01 #

    사실 부꾸미도 이런 '병'과에 들어가는 떡이라고 보는데, 다만 상화나 만두처럼 밀가루위주가 아니라 찹쌀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좀 다른 것 같아요.
  • 레이오트 2016/05/30 19:03 #

    문제는 이제 쌍화점이 불륜의 장소가 아닌 고기를 돌리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 역사관심 2016/05/31 08:01 #

    ㅎㅎㅎ -_-;
  • 천하귀남 2016/05/30 21:10 #

    먹음직스런 글 잘봤습니다. ^^
  • 역사관심 2016/05/31 08:01 #

    저도 호빵, 만두, 호떡이 급 당기는;; ^^
  • 가녀린 맘모스 2016/05/31 00:12 #

    찐빵 파는 외국인 노동자였군요...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데요 ㅋㅋㅋㅋ 만두를 좋아해서 읽는 내내 배고파오는 맛깔스러운 글 잘봤습니다~!!
  • 역사관심 2016/05/31 08:02 #

    꽤나 이용할 거리가 많은 고려가요같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남중생 2016/05/31 02:40 #

    상화의 정체가 조금 더 뚜렷해졌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6/05/31 08:02 #

    궁금한 녀석이었는데, 저도 자료를 통해 많이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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