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벽이 있던 불국사 좌경루 & 수킬로짜리 목파이프를 지나 석조에 떨어지던 낙수 한국의 사라진 건축

필자가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주로 조선전기까지 심심찮게 등장하던 '벽체가 있던 2층건축 (루)'에 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유명한 '불국사'에도 이러한 루가 우리가 잘 아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불국사는 일제시대까지도 작게나마 축소된 모습으로 모습을 이어왔지만, 한때, 2000칸이라는 무지막지한 칸수를 자랑하던 대사찰이었음은 예전 시리즈글로 자세히 알아본 바 있습니다. 

정확히는 1593년 5월 왜군에 의해 크게 방화를 겪어 대부분의 전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의 기록이 있다면 중세의 불국사를 살필 수 있는 꽤 귀중한 사료가 됩니다. 그런데 이덕홍(李德弘, 1541~1596년)이 쓴 [동경유록]이라는 16세기중반의 경주(동경) 여행기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정해년, 그러니까 1587년 음력 9월의 기록입니다. 임진왜란 5년전의 귀중한 사료지요. 따라서, 여기 나오는 불국사는 현재의 불국사와 거리가 있는 사찰임을 생각하고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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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좌경루 숙박 기록

동경유록(東京遊錄)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0여리를 갔다. 송목정(松木亭)에서 한 식경 쉬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 불국사에 들어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마치 인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돌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큰 바위 가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홈통을 통해 비천(飛泉)이 몇 리를 가로지르며 흘러서 석조(石槽)에 떨어지고 있었다. 

비천 위쪽에 구름다리를 지나니 그 다리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문에 들어서자 금각ㆍ석탑ㆍ옛 불상ㆍ새로 그린 그림이 천태만상으로 기괴했는데, 모두 신라의 유적이었다. 내가 중립에게 말하길, “신라왕이 쓸모없고 허무한 땅에 백성의 힘을 다 끌어 썼으니, 애석하구나!” 

양산(梁山) 사람 김생함(金生緘)이 도보로 스승을 따라서 들어와 배알하니, 그 스승은 바로 견응기(堅應箕) 어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견응기와 함께 여행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했으며, 또 그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뜻을 가상히 여겼기에 인하여 함께 술을 몇 잔 마시고 자리를 마쳤다. 

좌경루(左景樓)에 묵었는데 벽 위에 걸린 현판(懸板)들은 대부분 근대의 이름난 유학자와 시인들이 지은 것이고, 그 아래에는 각각 과등(科等)의 품평이 있었다. 이는 필시 뒤늦게 태어난 짓궂은 아이가 희롱한 것일테지만, 그 사이의 시 한 수만은 유독 그렇지 않았으니, 곧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것이었다. 오호라! 선생의 덕업이 멀리 후세에까지 미쳐 비록 짓궂은 아이와 뽐내는 무리들도 오히려 놀리고 업신여길 수 없었으며, 게다가 당시에 직접 교화를 받은 사람에 있어서야! 또 한 편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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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 문단의 굵은체로 표기된 부분들입니다. 이 중 우선 마지막 문단의 '좌경루에 묵었는데...'라는 구절을 보면 이덕홍이라는 인물이 이 곳에서 '숙박'을 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현재의 좌경루같은 구조의 건축물은 사방이 뚫려 있는 경치감상 전용루로 숙박을 할 구조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때는 늦가을인 음력 9월, 산중의 불국사에서 이렇게 사방이 뚫린 건물에서 잘 리가 없지요.그래도 억지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연이어 나오는 구절 때문입니다.

'벽위에 걸린 현판들은 대부분 근래의 유자들이 지은 것들이고, 그 아래에는 과등의 품평이 있었다' 

즉, 16세기까지의 불국사 좌경루에는 분명 '벽체'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현재의 좌경루

해석의 여부를 확실하게 보기 위해 원문을 다시 볼까요. 분명히 '宿 잘 숙' 좌경루에서 자고 갔다고 되어 있고, '벽 위'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의역이 아닌 것이지요.
16세기 당대의 좌경루 역시 어느 시점에서 재건되거나 증축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즉 처음 지을 때)의 모습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좌경루가 처음에는 3칸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시다시피 일제시대까지도 임진왜란 이후 그동안 건물터만 남아있던 것을 1973년 복원공사를 해서 현재의 좌경루 모습이 된 것이지요.
일제강점기까지 비어있던 좌경루 터 (오른쪽 동그라미)

아직까지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조선전기의 '2층루' 형식의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그리고 불국사의 원래 모습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애시당초 1973년 복원시 이 기록을 바탕으로 벽체가 있는 건축을 재건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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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불국사 연지(?)의 무지개 다리

이번에는 서두에 소개한 [동경유록]의 첫 부분에 나오는 기록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발췌하자면:

불국사에 들어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마치 인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돌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큰 바위 가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홈통을 통해 비천(飛泉)이 몇 리를 가로지르며 흘러서 석조(石槽)에 떨어지고 있었다. 비천 위쪽에 구름다리를 지나니 그 다리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기록을 보면 약간 의아한 것이 '불국사에 들어선 이후', '돌다리를 하나 건너자', 그 다음에 '연못'이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현재의 불국사 지도를 잠깐 살펴보지요.
보시다시피 현재의 불국사 경내에는 어떠한 연못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앞쪽에 두 개의 연못이 존재하는데 그중 붉은 원부분이 유명한 '연지'입니다 (이 연지에 대한 글은 다음 글- 불국사 연못에 대하여).

쉽게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가지입니다. 모두 대담한 가설이니 흥미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불국사의 중심사역이 16세기까지도 현재 보다 넓었다. 즉, 최소 현재의 천왕문내, 혹은 만약 현재의 연지로 불리우는 동그라미 연못이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연못이라면 그 연못 바로 앞까지 모두 경내였다.

2) 현재의 추정처럼 청운교 아래에 큰 연지가 있었다 (영조대까지도 이 곳의 연지 기록이 나오고 있지요). 그리고 그 연지를 건너 중심건물로 들어가는 무지개 다리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당시 불국사 진입로에는 현재의 연지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홍예석교가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록을 보고 이 다리를 후세에 건립했다고는 쉽게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공교롭게도 딱 들어맞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이 다리 모습이 '虹' 무지개로 표현되고 있지요. 붉은 부분중 오른쪽에서 세번째 줄 중간입니다.
"비천 위쪽에 구름다리를 지나니 그 다리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
당시에도 이런 장관을 연출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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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을 연못으로 옮겨나르던 수Km짜리 목통 수로

마지막으로 매우 흥미로운 그리고 한국 '목파이프'의 중요한 문헌사료로 사료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못 북쪽에 나무홈통을 통해 비천(飛泉)이 몇 리를 가로지르며 흘러서 석조(石槽)에 떨어지고 있었다."
기록에 분명하게 나오고 있지요. '나무 홈통을 통해' '수 리'를 흘러 비천의 물이 석조에 떨어진다. 이 물을 '비천'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공중에 떠 있는 나무 홈통을 통해 흘러다니는 물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더 장관은 아까 소개한 '무지개 석교'가 이 나무홈통의 위로 걸쳐져 있다는 구절. 정말 아름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장이 섞였다 치더라도 '나무 홈통' 즉 '목조 파이프'를 통해 수 리, 즉 수km (1리는 3.9키로미터)를 돌아다닌다는 이 구절이 시각적으로 현대의 우리에게는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애시당초 '나무 홈통'이 대체 뭘까요?

현재도 그 모습들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여러 곳이 있습니다. 우선 전남 선암사 약수터 사진을 보시지요.
오른쪽에 보이는 나무 홈통이 보이시지요. 저런 구조입니다. 여기서도 보이듯 '석조'에 약수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놈의 플라스틱 바가지. 산통 다 깹니다 (약수터 바가지 제안)

그런데 이 나무홈통만 가지고는 저 불국사의 16세기 수킬로짜리 긴 녀석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모습을 현대한국에 가장 오랫동안 보여주고 있는 녀석이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수타사의 장거리 목홈통과 소쇄원의 그것입니다.

우선 아래 보이는 사진이 수타사의 약수터입니다.
수타사 나무홈통

척 보기에도 꽤 길지요.  이런 식으로 구불구불 흘러갑니다.
그런데 최소 200년이상을 버텨온 더 긴 녀석이 있습니다. 바로 담양 소쇄원의 명물, 나무 홈통입니다.
소쇄원(瀟灑園)은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입니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조선 중후기 정원의 하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약 1530년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정유재란때 역시 피해를 입고 다시 복구된 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럼 이 나무홈통은 임란 이후에 만들어 진 후대의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존재입니다. 1548년에 씌여진 현전하는 시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이라는 임란 이전의 소쇄원의 전성기 절경을 찬사한 시가 남아 있습니다. 즉 소쇄원의 절경 48가지를 선택해서 차례로 쓴 시인데, 이중 제 7영이 바로 '나무 홈통의 비천' 기록입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제7영 
나무 홈통을 뚫고 흐르는 물
木通流

샘 줄기의 물 홈통을 뚫고 굽이쳐 흘러
높낮은 대숲 아래 못에 내리네
세차게 쏟아져 물방아에 흩어지고
물 속의 인갑들은 잘아서 들쭉날쭉 해

즉, 16세기중반 당시에도 소쇄원에는 따로 싯구를 잡아 써야 할만한 경치로 나무 홈통들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현재의 소쇄원에도 이 나무 홈통은 엄청나게 먼 거리를 달리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두점을 보시면 숲을 가로질러 물을 운반하는 이 홈통들을 느낄 수 있지요.
소쇄원의 현전하는 나무홈통들

이 소쇄원의 나무홈통도 1548년 기록, 그리고 저 불국사에 나오는 '수킬로 짜리 나무 홈통'으로 물을 흘러 연지에 떨어뜨리던 비천도 1587년의 기록으로 고작 30년차의 동시대기록들입니다.따라서, 저 동경유록의 불국사에 존재하던 16세기의 수 리 짜리 나무홈통 역시 실제로 이런 모습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불국사 하나만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전통건축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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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진보만세 2016/06/04 06:25 #

    한잔 시원하게 마시고 싶어지는 기분이 절로 나네요..

    이번에도 한국 건축사와 관련한 역사관심님의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여름 되시길 ^^
  • 역사관심 2016/06/05 00:47 #

    감사합니다. 진보만세님도 즐겁고 상쾌한 여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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