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과 과학 (또는 학문) 독서

확률의 과학, 양자역학 (김영사, 이현경, 2006)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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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과학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가지 가능한 대답은 과학이 확실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 이를 생각하면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진리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도 역사적으로 모든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주장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었던 뉴턴의 물리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전혀 근거없는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과학이 진보했고, 또 계속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과거와 현재의 과학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도 있다. 20세기 전반 많은 생물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의사들은 우생학을 과학적인 것이라고 신봉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됐다. 또한 19세기 물리학자들이 너나 할 것없이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에테르'의 존재를 믿었지만, 20세기 이후 에테르를 믿는 물리학자는 극소수였다. 결국 과학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라면 명백하게 잘못된 과학이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설명하기는 어려워진다. 

18세기 영국의 물리학과 프랑스의 물리학은 뉴턴의 힘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놓고 대립했고, 19세기후반 영국과 독일의 전자기학도 그 기본 개념과 기술 방법에 있어서 상당히 달랐다. 과학은 마치 사회와 문화를 초월해 '독야청정'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에도 명백한 사회성과 문화성이 있는 것이다.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이미지의 과학을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면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석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결국 이들은 과학 실험 데이터와 이론등이 모두 인간의 주관적인 이해와 판단 심지어는 믿음에 의해서까지 (예: 이론의존성 등)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이 100퍼센트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믿음에 일격을 가했다. 과학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입장에 최고의 일격을 가한 인물은 바로 토마스 쿤이었다. 쿤은 한 시대의 과학적 가설, 법칙, 믿음, 이론, 실체의 총체를 패러다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는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종교적인 개종과 흡사한 비합리적인 과정임을 보였다. 또 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새롭게 얻는 것도 있지만 잃어버리는 과학도 많다는 것을 보였으며, 이전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과의 관계를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다는 '공약불가능성 (incommensurability)'을 이야기하며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단선적인 진보로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과학이 보편적이라거나 객관적인 답변 자체보다는 그 논의가 이뤄진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덧글

  • 레이오트 2016/06/03 09:51 #

    이런 것의 유명한 사례가 천동설 대 지동설과 뇌과학이죠.
  • 역사관심 2016/06/05 01:29 #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사례로는 전근대와 근대이후의 사유체계도 못지 않은 패러다임 변화로 생각하고 있어요.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6/06/03 14:51 #

    오늘도.잘읽었습니다. 그런데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려고.하거든요?? 어떤 책인지.간단히.설명 가능하긴가요??
  • 역사관심 2016/06/05 01:38 #

    간단히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큰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 책이지만 (그리고 저 역시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고), 몇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면 우선 순수이성비판은 현대철학의 여러 주제를 모두 함의하고 있는 종합철학서라고 생각합니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종합이라는 뻔한 이야기도 안할 수 없지만, 결국 그 종합이란 것이 감성과 지성을 포괄하는 '이성'이라는 녀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근대인'(현대인은 또 좀 달라졌지만)의 보고 느끼고, 사고하고 계산하고, 추론하는 '내용'을 검토하는 것 이전에 그걸 보는 '관' (혹은 인간의 비유하자면 뇌속 구조자체, 하나의 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 주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왜 중요한지는 너무 당연하겠죠. 어찌보면 오늘 쓴 저 '패러다임'이라는 것 자체도 이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룬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각주라고 이야기한 화이트헤드선생도 있지만 현대철학사로 좁혀보자면 순수이성비판의 각주라기보다는 변주 혹은 에 대한 비판라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너무 나간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대단한 것은 '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이 최고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결국은 이성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 (휴머니티)라는 귀결로, 현대 AI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해 줍니다.

    참고로 여러 철학책으로 단련이 되신분들은 바로 읽어도 괜찮으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완역서를 바로 잡고 읽기에는 책 자체가 너무 힘들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국내에도 좋은 해석본 (완역이 아닌)이 많으니 쉬운 접근 저서부터 들어가도 좋으시리라 생각되네요 ^^

    저도 완역서를 시작해놓고 자꾸 손에서 놓고, 다른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융통성없는 칸트선생입니다.ㅎㅎ
  • 파란 콜라 2016/06/03 23:15 #

    과학 발전은 why 혹은 순수한 학문적 열의에 의해서 발전도 되지만 대체로 그 당시 유행하는 트렌드에 의해서 발전하는 거 같아요.결국 자본주의를 따라가는 거 같아요..
  • 역사관심 2016/06/05 01:38 #

    동감합니다. 그 역시 패러다임이론이 지적하는 바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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