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불국사 의문의 돌물통(石槽)에 대해- 16세기 비천(飛泉)기록 재고찰 한국의 사라진 건축

며칠 전 지금은 없는 불국사의 '수킬로미터짜리 나무홈통'기록에 대해 알아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이보다 예전에 쓴 아래의 글을 링크로 걸고 일부 내용을 발췌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전글에서 이미 중요한 구절이 있었음을 오늘 다시 살펴보면서 알았기에 새삼스레 새로운 포스팅을 쓰려 합니다. 다름아닌 '비천과 나무홈통'에 대한 기록입니다. 또한 이 기록들을 통해 현재 불국사에 존재하는 미스테리한 지정'보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우선 윗 두 포스팅에 나오는 문헌사료는 간재 이덕홍(李德弘, 1541~1596년)이 쓴 [동경유록]이라는 16세기중반의 경주(동경) 여행기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정확히는 정해년, 그러니까 1587년 음력 9월의 기록입니다. 대단한 규모의 사역이 거의 전소되는 159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 6년전의 귀중한 사료지요. 따라서, 여기 나오는 불국사는 현재의 불국사와 거리가 있는 사찰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한 가지 사료를 오늘 발견해서 추가합니다. 우선 한가지는 저자는 역시 간재선생이지만, 또다른 저서인 [간재집]에 나오는 '불국사'라는 시가 있습니다. 번역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처음 포스팅을 올릴때 썼던 [추채집]의 불국사는 다시 해석해보니 금강산 표훈사의 암자였던 백화암 혹은 양주 봉선사의 말사였던 '불곡사'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정 판단으로, 일단 제외했습니다).

이 다른 기록들로 '교차검증'이 어느정도 이뤄지는 느낌이라 중요하다 사료됩니다. 차례로 소개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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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록은 위의 두 포스팅들을 조금 수정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지요. 

一. 1587년 동경유록(東京遊錄)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0여리를 갔다. 송목정(松木亭)에서 한 식경 쉬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 불국사에 들어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마치 인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돌다리 하나를 건너자마자 큰 바위 가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홈통을 통해 비천(飛泉)이 몇 리를 가로지르며 흘러서 석조(石槽)에 떨어지고 있었다. 

비천 위쪽에 구름다리를 지나니 그 다리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문에 들어서자 금각ㆍ석탑ㆍ옛 불상ㆍ새로 그린 그림이 천태만상으로 기괴했는데, 모두 신라의 유적이었다. 내가 중립에게 말하길, “신라왕이 쓸모없고 허무한 땅에 백성의 힘을 다 끌어 썼으니, 애석하구나!” 

양산(梁山) 사람 김생함(金生緘)이 도보로 스승을 따라서 들어와 배알하니, 그 스승은 바로 견응기(堅應箕) 어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견응기와 함께 여행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했으며, 또 그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뜻을 가상히 여겼기에 인하여 함께 술을 몇 잔 마시고 자리를 마쳤다. 

좌경루(左景樓)에 묵었는데 벽 위에 걸린 현판(懸板)들은 대부분 근대의 이름난 유학자와 시인들이 지은 것이고, 그 아래에는 각각 과등(科等)의 품평이 있었다. 이는 필시 뒤늦게 태어난 짓궂은 아이가 희롱한 것일테지만, 그 사이의 시 한 수만은 유독 그렇지 않았으니, 곧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것이었다. 오호라! 선생의 덕업이 멀리 후세에까지 미쳐 비록 짓궂은 아이와 뽐내는 무리들도 오히려 놀리고 업신여길 수 없었으며, 게다가 당시에 직접 교화를 받은 사람에 있어서야! 또 한 편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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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7년 동경유록(東京遊錄)

暮入佛國寺
날이 저물어 불국사에 들다

雲烟蒙翳
구름같은 연기로 어둑한데

若無人跡
인적은 없고

然纔過一石橋
석교하나를 지나고보니

有巖上蓮池
연지(연꽃연못)위에 바위가 솟아있네

飛泉橫流數里
빠른 물이 수리를 가로질러 나는듯 흘러

池北刳木
연못북쪽의 나무홈통을 통해

瀑下於石槽
폭포아래 돌로 만든 돌물통(석조)로 떨어지누나

踰飛泉上雲橋
샘물위로 구름다리 높이 떠 넘나드네

橋刻石以成若雲虹然
다리(교각)는 돌로 만들었는데 마치 무지개같구나

旣入門
이윽고 문에 들어서니

金閣石㙮
금으로 꾸민 누각과 석탑

古佛新畫
옛 부처님을 새로 그린 그림 (또는 옛불상과 새그림)

千態萬狀 奇奇恠恠 
천태만상 기기괴괴 

이 부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東轉十餘里。憇松木亭一餉間。暮入佛國寺。雲烟蒙翳。若無人跡。然纔過一石橋。有巖上蓮池。池北刳木。飛泉橫流數里。瀑下於石槽。踰飛泉上雲橋。橋刻石以成。若雲虹然。旣入門。金閣石㙮。古佛新畫。千態萬狀。奇奇恠恠。皆新羅遺躅也。僕謂中立曰。羅王盡民力於無用虛無之地。

그런데, 예전 포스팅에서는 '나무홈통'기록을 중요한 줄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여기서 말하는 연지를 바로 불국사 경내(현재)의 사라진 곳으로만 단순하게 해석했었지요. 

다시 한번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하나의 석교를 지나서, 연지위를 가로지르는 또 다른 석교를 지나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 '석교'가 하나 있고, 연지위를 지나는 무지개모양의 석교가 있는데 이 바로 아래를 장거리 나무홈통이 물을 실어 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싯구에 나오는 것을 보면 '비천'이라는 묘사를 통해 나무 홈통을 지나는 유속 (물의 빠르기)가 상당히 빠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콸콸 흘러 폭포처럼 (아마도 북쪽 연못가에 잠겨있었거나, 이를 통해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던) 돌로 만든 석조로 쏟아지고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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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또다른 이덕홍 선생의 16세기 싯구입니다. 이 분은 불국사를 굉장히 인상깊게 보셨는지, 따로 시를 또다시 남깁니다.

三. 16세기 간재집 (艮齋集)

艮齋先生文集卷之二
佛國寺 

步入蓮花上。香風襲我裳。飛泉刳木咽。石橋帶虹長。
壯麗千間屋。丹靑十分光。堪嗟佔畢齋。壁上空留芳。
恨我未摳衣。白首猶迷方。遠期尙未酬。惕若悲亡羊。
對君三歎息。高林鬱蒼蒼。

이 기록에도 나무홈통도 그대로 나오고, 석교도 나오면서 또한 무지개 다리 역시 등장합니다 
飛泉刳木咽。비천 (나는듯한 물)은 나무홈통을 가르고
石橋帶虹長 석교는 무지개를 두른듯 뻗어있다

그런데, 영조대 (18세기초) 기록에 불국사의 연꽃을 뒤집다 라는 기록이 불국사 연지의 연꽃에 대한 유일한 묘사로 알고 있었는데 이 기록에 '연꽃'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첫구로 나옵니다.
步入蓮花上 연꽃위를 걸어 들어가

또한 아마도 임란전의 장대한 불국사의 모습을 묘사한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壯麗千間屋 장대한 천칸의 집

불국사가 원래 전성기에는 약 2,000칸의 대사찰임은 여러 번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조선중기, 그것도 임란 직전에 이 곳을 다녀간 선비가 이렇게 묘사한 기록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은유로만 천칸집이라고 썼던 것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구절이 사실 앞서 소개한 글 (동경유록)에 등장합니다.
羅王盡民力於無用虛無之地。

즉 "신라왕이 백성의 힘을 이런 쓸모없는 곳에 (이 사찰을) 짓는데 모두 쏟아 소진하다니 애석하구나"라는 유학자 특유의 감상으로 역으로 불국사의 모습이 임진왜란 직전 당시까지 대단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사실 현재의 불국사가 화려하긴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정도의 규모를 보면서 이런 표현을 썼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백성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통 규모에 관한 느낌일 경우가 많지요.

또한 당시 불국사 건축들의 단청 역시 지금처럼 화려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丹靑十分光 단청은 열배 (혹은 열가지로) 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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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전하고 있는 불국사의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 세 개

기록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우선 느껴지는 것은 현재의 불국사와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연지'가 나오고, '연꽃'위를 무지개 석교를 지나 수 리나 되는 긴 나무홈통을 통해 연지로 떨어지는 것을 감상하면서 경내로 들어가 그때까지 남아있던 경내의 그림과 중세건축을 감상하던 훨씬 큰 규모의 불국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포스팅의 제목은 '현존하는 의문의 석조'.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불국사에는 최근 보물로 지정된 1523호 석조 세 개가 존재합니다. 우선 문화재청측의 이 석조들에 대한 설명을 살펴볼까요.
우선 이 석조들은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의 물건들임을, 즉 저 싯구에 나오는 불국사에는 당연히 존재했을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그림의 첫번째 문장에 나오듯이 현재 이 석조들의 당대의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입장입니다.
세 개의 석조를 한번 훑어 볼까요. 우선 가장 큰 규모인 현재 토함산 옥로수라고 이름 붙여진 (여느 동네 약수터처럼 뻘건 바가지들이 놓여 있는), 대형 수조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나무 홈통'을 통해 물을 운반하고 있지요.
다른 석조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한 8-9세기 현전하는 신라의 최초 석조인 홍륜사 석조(수조)에는 구멍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수조 중간에 배수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석조안에는 연꽃무늬가 보입니다.
불국사 경내에도 석조가 있습니다. 그다지 사람들에게는 감흥도 관심도 없는 구석에 박혀 있습니다. 역시 석조안에 화려한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지요.
역시 이 수조도 가운데 배수구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수조입니다. 
이 수조옆에 서 있는 안내문인데, 읽어보시면 '통일신라대의 것으로...원래 위치가 어느 곳인지 확실치 않은' 물건입니다.
이 수조의 경우 석조앞에 있는 돌은 뚜껑이 아니라 석조에 담긴 물이 아랫쪽에 나 있는 출수구를 통해 흘러 나갈때 아래 파인 돌에 홈을 따라 물이 흘러내려가도록 하는 용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석조를 비롯한 세 개 모두 '연꽃을' 새긴 특이한 수조들입니다. 아까 앞서 기록에 '연꽃이 가득한 연지를 무지개 다리로 건너던' 그 아래 석조가 위치하고 있었던 기록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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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감으로는 아마도 이 세 수조중 하나가 저 싯구에 등장하는 원래의 '연지에 북쪽가에 있으면서 몇킬로 길이의 나무 홈통을 통해 콸콸 쏟아지던 빠른 물'을 받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有巖上蓮池
연꽃호수위에 바위가 솟아있네

飛泉橫流數里
빠른 물이 수리를 가로질러 나는듯 흘러

池北刳木
연못북쪽의 나무홈통을 통해

瀑下於石槽
폭포아래 돌로 만든 석조로 떨어지는구나"

순전히 대담한 가설입니다만, 이 16세기의 기록들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는 글이 없는 듯하며 또한 현재 이 석조들의 '쓰임새'에 대해 공식적으로도 '모른다'인지라 혹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글을 나눕니다.


덧글

  • 레이오트 2016/06/07 09:41 #

    종교 관련 시설물을 보면 저런 돌물통과 같은 물건이 있던데 아무래도 들어가기 전에 손이나 얼굴 혹은 둘 다 씻으라고 있는게 아닐까 싶네요. 물론 종교적 의미로요.
  • 역사관심 2016/06/08 08:17 #

    국내의 저런 수조는 대부분 '약수'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마시는 물이 많고, 말씀하신 손씻는 곳은 보통 일본의 경내에 많더군요.
  • 어쩌다보니 바다사자 2016/06/09 05:59 #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기에 천년동안 살아남았겠죠. 저 같은 날라리불자는 '가져다가 욕조로 쓰면..?'이라는 불순한 상상을 잠깐 했음을 고백합니다ㅋㅋ
  • 역사관심 2016/06/09 08:54 #

    듣고보니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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