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왕자, 공주, 고위관자 저택의 누각높이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전기까지 이어지던 잠을 자는 2층루, '침루' (침방 포함)에 대한 기록은 여러 차례 글을 통해 알아 본 바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러한 누각들이 얼마나 높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나눈 적이 없었지요. 오늘은 그런 종류의 누각들의 '높이'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자 합니다.

세종(1397~1450년)과 성종(1457~1495년)은 할아버지 손자관계로 두 분의 재위기간은 15세기 전체라고 보면 됩니다. 중간에 예종이 2년여를 잠시 재위했을 뿐, 세종이 15세기전반부, 성종이 15세기 후반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다음의 세종-성종 실록으로 이어지는 기록은 15세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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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재

예전에도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우선 세종대의 '침루'기록으로 유명한 것은 1445년의 실록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 1월 28일[임인(壬寅)] (1445)

어제 좌의정 등이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이 있다고 하여 (중략) 만일에 벌레와 뱀이 과연 많다면 안심하고 여름을 지내지 못할까 싶다. 또 소나무가 울밀하고 북쪽 담이 낮고 미약하며, 다락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昨日左議政等以衍禧宮多蟲蛇(중략)若蟲蛇果多 恐未安心過夏 且松木鬱密 而北垣低微 樓寢室遮陽朽破 將伐松築垣 修葺遮陽 予欲移御他處 畢修而還

이것은 세종대 연희궁에 있던 '2층에서 잠을 자는 루'인 '침루'의 기록입니다. '누의 침실의 차양'이 썩어서 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樓寢室遮陽朽破 다락(루)의 침실의 차양이 썩고 부서져

樓寢室 누의 침실이라고 되어 있어 세종은 종종 이런 침루에서 잠을 주무셨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것이 태조 (1335~1408년)가 세운 동, 서루, 혹은 침방등을 묘사한 것인지, 그 후 증축된 다른 침루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태조 실록의 중층건축에 대한 기록은 몇개가 있지만, 예를 들어 1394년 고려왕조의 수창궁을 개조한 2층건물을 짓는 기록은 인상적입니다.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1월 2일(임인)
수창궁의 서쪽 침실을 헐어 2층 전각을 건축토록 명하고, 김사행에게 감독케 하다    
명하여 수창궁의 서쪽 침실(寢室)을 헐고 2층 궁전을 건축하게 하고, 김사행(金師幸)에게 역사(役事)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壬寅/命毁壽昌宮西寢室, 營二層殿, 以金師幸督役。

사실 이런 건축은 저 세종대로부터 불과 4-50년전의 기록이므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전란이 있던 것도 아니고). 

사실 이로부터 26년전인 세종 1년 (원년, 1419년)과 바로 이전인 태종대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411년 창덕궁에 비슷한 기록이 나옵니다.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10월 4일 을해 1419년 
새로 수강궁루의 침실을 짓다
○新作壽康宮樓寢室

"새로 수강궁의 '누침실'을 짓다". 여기 나오는 수강궁(壽康宮)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입니다 (현재의 창경궁자리). 따라서, 태종이 머물기 위한 궁에 '궁루의 침실'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3월 18일 무인 2번째기사 1411년
창덕궁의 누침실과 진선문 밖의 돌다리 공사에 박자청을 감독관으로 하다
원문
○搆樓寢室于昌德宮, 又作進善門外石橋, 以工曹判書朴子靑董其役。

태종실록의 경우 이 부분을 현재 국역으로 '누각, 침실'이라고 각각 해석하고 있는데, 사실 세종대처럼 '누침실(樓寢室)'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죠. 자, 그럼 당시 궁궐의 이런 '2층루'등은 높이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 사료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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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와 성종대의 대군방이하 저택 규정

궁궐의 2층루보다 규제가 더 심했을, 즉 더 낮게 지어져야 했을 건축들로 대군 (세자), 왕자, 공주, 부마, 그리고 각종 신하들의 저택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규정이 실록에는 자세하게 나옵니다.

1440년 
세종실록 90권, 세종 22년 7월 27일 정묘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소 신민(臣民)이 제택(第宅)을 꾸미는 데에 사치하기를 숭상하여서 상하(上下)의 등급이 없는 까닭에, 선덕(宣德) 6년에 교지(敎旨)를 내려 1품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게 하였는데, 지금 대소 신료(臣僚)의 제택이 자못 제도에 지나쳤사오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각(樓閣)의 간살과 보·기둥의 잣수[度尺]를 마감(磨勘)하여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대군(大君)의 제택은 60간 내에 누각이 10간이고, 친형제(親兄弟)와 친자(親子)·공주(公主)는 50간 내에 누각이 8간이며, 2품 이상은 40간 내에 누각이 6간이고, 3품 이하는 30간 내에 누각이 5간이며, 서인(庶人)은 10간 내에 누각이 3간입니다. 공주 이상은 정침(正寢)과 익랑(翼廊)의 보(栿) 길이가 10척, 도리 길이는 11척, 기둥 높이는 13척이고, 나머지 간살은 보 길이 9척, 도리 길이 10척, 기둥 높이 12척이고, 누각기둥 높이는 18척입니다. 1품 이하는 정침과 익랑의 보 길이는 9척, 도리 길이는 10척, 기둥 높이는 12척이고, 나머지 간살은 보 길이 8척, 도리 길이 9척, 기둥 높이 7척 5촌, 누각기둥 높이는 13척입니다. 그리고 서인의 집들의 간살은 보 길이 7척, 도리 길이 8척, 기둥 높이 7척, 누각기둥 높이 12척으로 하되, 모두 영조척(營造尺)을 쓰게 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大小臣民第舍, 競尙侈靡, 上下無等, 故宣德六年敎旨內, 自一品至庶人, 皆有定制, 而今大小臣僚第舍, 頗踰制度, 甚爲未便。 其樓閣之數及栿柱尺度, 磨勘謹錄于後。大君六十間內樓十, 兄弟親子公主五十間內樓八間, 二品以上四十間內樓六間, 三品以下三十間內樓五間, 庶人一十間內樓三間。公主以上正寢翼廊栿長十尺, 行長十一尺, 柱高十三尺, 其餘間閣栿長九尺, 行長十尺, 柱高十二尺, 樓高十八尺。 一品以下正寢翼廊栿長九尺, 行長十尺, 柱高十二尺, 其餘間閣栿長八尺, 行長九尺, 柱高七尺五寸, 樓高十三尺。 庶人間閣栿長七尺, 行長八尺, 柱高七尺, 樓高十二尺, 皆用營造尺。"
從之。


1449년
세종실록 권123, 세종 31년 1월 26일[정미(丁未)] 

대군(大君)은 60간인데, 내루(內樓)가 10간이고, 정침·익랑·서청(西廳)·내루·내고(內庫)는 매간(每間)의 길이가 11척, 너비가 전후퇴(前後退) 아울러서 18척이며, 퇴 기둥이 11척이고, 차양(遮陽)과 사랑(斜廊)이 있으면 길이가 10척, 너비가 9척 5촌, 기둥이 9척이고, 행랑은 길이가 9척 5촌, 너비가 9척, 기둥이 9척이며, 공주는 친형제·친아들은 50간인데, 내루(內樓)가 8간이고 (중략) 종친 및 문·무관 2품 이상은 40간인데, (중략) 3품 이하는 30간인데, 내루가 5간이고, (중략) 서인(庶人)은 10간인데, 내루가 3간이다.

大君 六十間 內樓十間 正寢 翼廊 西廳 內樓 內庫 每間長十一尺 廣前後退竝十八尺 退柱十一尺 有遮陽斜廊長十尺 廣九尺五寸 柱九尺 行廊長九尺五寸 廣九尺 柱九尺 公主親兄弟親子 五十間 內樓八間(중략)宗親及文武官二品以上 四十間(중략)三品以下 三十間 內樓五間(중략)庶人十間 內樓三間 


앞의 두 기록은 세종 22년, 즉 1440년과 세종 31년, 즉 1449년의 당시 세력가들의 저택규모를 규제하는 기록입니다. 우선 1440년의 大君 대군, 즉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 그리고 공주까지 저택은 누의 기둥 높이가 18척을 허용합니다. 3품이상 관리에게는 13척으로 낮아지고, 庶人 서인, 즉 보통 사람들은 12척까지 허용합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높이일까요? 우선 기록을 모두 참고한 후 보겠습니다.

세종 31년, 1449년의 기록에는 '내루' (저택내의 루)의 규모는 10칸이며, 공주는 8칸 등으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는 침루를 비롯한 누각에 대한 높이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약 29년뒤인 1478년 성종대 기록에는 '누주'라고 되어 있어  그 높이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종 22년의 경우, 기둥높이가 정침-익랑등의 건물을 설명하다가 '누각높이'라고 되어 있어 누주라는 문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성종대의 경우 '樓柱 루(다락)의 기둥'이라는 기록이 명확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1478년
성종실록 권95, 성종 9년 8월 22일[신해(辛亥)]

대군(大君)의 집은 60간(間) 안에 정방(正房)·익랑(翼廊)·서청(西廳)·침루(寢樓)가 전후퇴(前後退) 아울러 12간인데, (중략) 누주(樓柱)의 길이가 15척이고, (중략) 왕자(王子)·제군(諸君) 및 공주(公主)의 집은 50간 안에 정방·익랑·별실(別室)이 전후퇴 아울러서 9간인데, (중략) 누주(樓柱)의 길이가 14척이고, (중략) 옹주(翁主) 및 2품 이상의 집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 안에 정방·익랑이 전후퇴 아울러 6간인데, (중략) 누주의 길이가 13척이고, (중략) 서인(庶人)의 집은 10간 안에 누주의 길이가 11척이고, (중략) 모두 영조척(營造尺)을 씁니다.

○工曹啓: "前日司憲府受敎: ‘近來民風俗習專尙華侈, 僭踰無制, 凡家舍間閣尺數, 令該曹詳定以啓’, 臣等參詳。 大君家六十間內, 正房、翼廊、西廳、寢樓竝前後退十二間, 高柱長十三尺, 過樑長二十尺, 脊樑長十一尺, 樓柱長十五尺, 其餘間閣柱長九尺, 樑長、脊樑長各十尺。 王子、諸君及公主家五十間內, 正房、翼廊、別室竝前後退九間, 高柱長十二尺, 過樑長十九尺, 脊樑長十尺, 樓柱長十四尺, 其餘間閣柱長、樑長各九尺, 脊樑長十尺。 翁主及二品以上家四十間, 三品以下三十間內, 正房、翼廊竝前後退六間, 高柱長十一尺, 過樑長十八尺, 脊樑長十尺, 樓柱長十三尺, 其餘間閣柱長、樑長各八尺, 脊樑長九尺。 庶人家舍十間內, 樓柱長十一尺, 其餘間閣柱長各八尺, 脊樑長九尺, 竝用營造尺。" 從之。
庶人

여기보면 대군, 즉 세자의 경우 누각의 기둥높이가 15척이며, 왕자와 공주저택의 누각기둥은 14척, 2-3품은 13척, 그리고 보통 일반저택은 12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종대에 바로 [경국대전] 공전 도량형전에 영조척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1척이 30센티였죠. 15척이면 정확히  4.5미터. 14척이면 4.2미터, 13척이면 3.9미터, 11척이면 3.3미터입니다.

그럼 앞서 본 세종 22년의 기록은 어떨까요? 세종대에는 아직 연구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보통 영조척이 더 깁니다. 1척을 성종대보다 더 긴 30.8 센티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면 대군(세자), 왕자들, 그리고 공주들 저택까지 모두 18척을 허용했으니, 6.84미터가 됩니다. 그리고 2-3품이상 고위관직자의 저택의 경우 13척으로 4.94미터, 약 5미터가 됩니다. 이것을 정리한 책이 있으니 현재 중앙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시고 있는 최상헌교수의 [조선상류주택의 내부공간과 가구](2006)입니다. 여기 나오는 표가 이 기록을 잘 정리해고 있어 표부분만 발췌합니다.

보시다시피 누주(누각기둥)의 경우 세종대에서 성종대로 가면서 조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척이니 15척이니 해도 인식적으로 잘 와닿질 않습니다. 이것을 잘 느낄 수 있으려면 역시 글자보다는 그림-사진입니다. 

전통건축이나 건축물로 이 높이를 비교하면 좋겠지만, 결국 정확한 높이가 더 중요하므로 비교건축물이 없는 경우 같은 높이의 다른 구조물을 소개하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1440년 세종대의 대군(세자), 왕자, 그리고 공주들의 저택의 누각기둥 높이는 18척으로 6.84미터, 가장 근접한 사진으로 아래의 풍차사진을 보시면, 나무로 되어있는 구조물만의 높이가 거의 비근할 겁니다 (풍차의 가운데 부분이 7미터). 
1440년 세종대 대군방의 누각기둥 규정높이

다음으로 2-3품이상 고위 관료의 저택은 13척으로 세종대 영조척으로 계산하면 4.94미터입니다. 아래 사진이 정확히 바닥에서 천정까지 5미터입니다. 그러니까 누각기둥의 높이가 정확히 저 기둥과 비근하게 됩니다.
1440년 세종대 2-3품 누각기둥 규정높이

하나더 비교해보자면, 이 성벽의 높이가 약 5미터입니다. 아래 서면 이런 느낌이겠죠.

5미터 성벽

다음으로 1478년 성종대의 누각기둥(누주)높이입니다. 세자저택의 경우 누각의 기둥높이가 영조척 15척이니 4.5미터입니다. 4.5미터면 딱 이정도입니다. 층고 4.5미터짜리 건물 내부입니다. 즉, 누각기둥이 바로 저 뒤에 보이는 기둥과 같은 길이로 보면 되겠습니다.
1478년 성종대 세자저택 누각기둥 규정높이

하나 더 보자면, 보통 육교의 규정높이가 4.5미터입니다. 아래 육교가 정확히 4.5미터 높이입니다 (사인이 보이시죠). 저기까지가 저택내의 누각기둥의 높이가 됩니다.
4.5미터 규격화된 육교높이

성종대 왕자와 공주저택의 누각기둥은 14척, 2-3품은 13척, 그리고 보통 일반저택은 12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14척이면 4.2미터, 13척이면 3.9미터, 11척이면 3.3미터입니다. 아래 보이는 건축도면의 아랫 기둥이 정확히 4미터입니다. 그러니까 최소 옹주 및 2품이상, 그리고 3품이하까지도 상부포함 약 이 건물 정도의 높이의 저택내 누각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1478년 성종대 왕자와 공주 저택 누각기둥높이

재미로 하나만 더 실례를 들자면, 아래 가로등이 정확히 4미터정도 됩니다. 누각 기둥이 이 정도가 됩니다.
4미터짜리 가로등

이 기록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비근한 시대의 기록이 하나 존재합니다. 바로 세종기록(1440년)보다 103년전 기록인 1337년, 고려 충숙왕 6년의 기록입니다. 고려후기 당대인물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년)의 [익재난고]에 나오는 기록으로 고려후기의 세도가중 하나인 권겸이 자신의 주저택외에 마음에 드는 정원(별원)을 정해 루를 하나 짓습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익재난고
후(後)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정축년(충숙왕 6, 1337) 여름 연꽃이 만발했을 때에 현복군(玄福君) 권겸(權廉)이 보고는 사랑하여 바로 못 동쪽에 땅을 사서 누樓을 세웠다. 높이는 두 길이 되고, 연장(延長)은 세 발[丈]이 되는데, 주추가 없이 기둥을 마련하였음은 썩지 않도록 한 것이요, 기와를 덮지 않고 띠로 이었음은 새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서까래는 다듬지 않았지만 굵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며, 벽토는 단청(丹靑)하지 않았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대략 이러한데, 온 못의 연꽃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直池之東。購地起樓。倍尋以爲崇。參丈以爲袤。不礎而楹。取不朽。不瓦而茨。取不漏。桷不斲不豐而不撓。堊不雘不華而不陋。大約如是。而一池之荷。

여기 나오는 尋 수라는 글자는 보통 '길'과 동급이거나 그보다 약간 짧은 8촌정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누주를 약 4.8미터정도로 보면 안전할 듯 합니다. 이 경우 세종대의 2-3품 저택의 규정 (4.94미터)과 거의 들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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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다시피 조선전기 건축물중 세도가들의 저택에 있었던 누각의 경우 (침루포함) 그 높이가 개인적으로는 생각보다 꽤 높습니다. 그런데, 이 저택들의 누각높이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비교기록이 하나 더 존재합니다. 

바로 조선전기의 경회루 (3층설이 있는)의 돌기둥 높이 기록입니다. 유득공(柳得恭, 류득공, 1748~1807년)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는 다음의 나름 잘 알려진 구절이 나옵니다.

"근정전을 돌아서 북쪽으로 가자 일영대(日影臺)가 나타났다. 일영대를 돌아서 서쪽으로 가니 경회루 옛터가 바로 여기다. 이 옛터는 연못 가운데 있어, 부서진 다리를 통해 그리고 갈 수 있다. 다리를 덜덜 떨며 지나가노라니 나도 모르는 새 땀이 난다. 누각의 기둥은 높이가 세 길이나 된다. 무릇 48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여덟 개가 부서졌다. 바깥 기둥은 네모난 기둥이고 안쪽 기둥은 둥근 기둥이다.  기둥에는 구름과 용의 형상을 새겼는데 이것이 바로 유구(琉球)의 사신이 말한 세 가지 장관 가운데 하나이다"

乃慶會樓古址也。址在潭中。有敗橋可通。兢兢而過。不覺汗焉。樓之柱石也。高可三丈。凡四十八。折者八。外柱方。內柱圓。刻雲龍狀。琉球使臣所謂三壯觀之一也。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경회루 누주의 길이를 주목하는 이는 의외로 드뭅니다. 당시 폐허가 되어있지만 남아있던 경회루 누주가 3길, 즉 어림잡아 9미터였습니다. 즉, 조선전기의 경회루 돌기둥입니다. 
之柱石也。高可三丈 누의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가 가히 3장(세 길)이다.

원래 돌기둥의 크기가 세길이라면 대강 8척-10척을 한길로 칠때, 24-30척정도가 됩니다. 현재의 돌기둥 길이가 15.5척이니 거의 두배정도가 됩니다.

과장했을지 모르겠지만, 약 9미터면 아래 보이는 유리고층건물의 중간 층까지의 높이가 됩니다. 당시 경회루 누각기둥의 높이가 지금보다 상당히 높게 되지요. 아무리 과장이나 대강 감으로 말했을지언정, 적어도 이 기록은 위의 세종대, 성종대의 궁궐건축외의 세도가 고급저택의 누각기둥의 높이와 일괄적인 문맥을 보여줍니다. 대강 잡아도 궁궐이니 그보다 높게 되는 것이지요.
현대식 빌딩 (2층까지 9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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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그러니까, 성종대에 이런 기록에 나오는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꽤나 높은 누각을 보고 사치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성종실록 권271, 성종 23년 11월 14일[신사(辛巳)] 1492년.

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 한치형(韓致亨)·정문형(鄭文炯)이 와서 아뢰기를, “왕자(王子)·옹주(翁主)의 집이 대전(大典)에 실린 간살[간가(間架)]의 수(數)가 많지 아니하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누(樓)를 세워서 사방을 두르니, 사람들이 보고 높고 크다고 하여 비난합니다.
繕工監提調韓致亨鄭文烱來啓曰 王子翁主家舍 大典所載間架之數不多 故不得已起樓四周 人見之者以爲高大而非之

즉, 성종 23년이니 성종이 위의 규제를 만든 1487년으로부터 정확히 14년후, 즉 1492년, 왕자와 공주가 저 규제의 넓이정도로 (칸수) 저택을 짓는 것이 억울해서, 부득이하게 저택의 사방에 '누각 (이층건축)'을 좍 세우니 이 건물들이 너무 높고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14년전 나온 규정한계보다 높이를 더 올렸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누각기둥이 4.2미터보다 높은 건축물들이 당시 왕자와 공주의 저택에 들어섰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한계보다 더 올렸음은 다음의 또 다른 기록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저택들의 규모가 대단했던 것은 이 상소가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있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성종 23년 임자(1492,홍치 5) 4월21일 (신유)
여러 군과 옹주의 집을 짓는 규모를 정해 영구히 정식을 삼게 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허집(許輯)이 아뢰기를,
“여러 군(君)과 옹주(翁主)의 집이 지극히 높고 큰 것을 힘쓰므로, 그전 옛집의 재목과 기와는 모두 버리고서 쓰지 않으며, 반드시 아름다운 재목을 탐내니, 하나의 나무를 운반하는 데도 백성의 힘이 이미 곤고(困苦)해 집니다. 만약 침실(寢室)과 객청(客廳)이라면 그만이겠지만, 그 나머지는 비록 그런 재목을 쓰더라도 또한 가합니다.”
諸君、翁主之家, 務極高大, 其舊家材瓦, 皆棄而不用, 必得美材, 一木之輸, 民力已困。 如寢室客廳已矣, 自餘雖用舊材亦可也。

諸君, 翁主之家, 대군들과 옹주들의 집들이
務極高大, 극히 높고 크다.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조선전기 저택들의 중층건축의 높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한 감이 있어, 포스팅을 올려 봅니다. 물론 이 높이들은 최대한계의 규정이니 더 작은 루도 많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전혀 보거나 느낄수 없는 조선전기 당대 세력가저택내에 '가루(樓)'로  어느정도의 건축들이 건축되고 있었는지 간접적이지만 시각적으로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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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6/06/11 15:1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6/11 16:0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Scarlett 2016/06/13 11:35 #

    오 확실히 참고자료가 있으니까 이해하기가 훨씬 쉽네요.ㅎㅎ 주로 조선전기 기록을 참고로 작성하신 듯 한데, 조선후기로 가면 또 이와는 조금 달라지겠죠?
  • 역사관심 2016/06/14 10:39 #

    후기쪽은 따로 사료를 아직 살피지 못했습니다. 워낙 벽체가 있는 루는 임란이후로는 거의 사라진 추세라 말이지요. 요즘 보는 누정은 이미 여러 다른 분들이 공식적으로 다 분석해 놓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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