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 여우요괴를 잡을 뻔한 이야기 설화 야담 지괴류

우리에게 친숙한 '여우요괴' (요호)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들 아시는 [산해경]의 '청구의 구미호'기록도 있지만, 한대에서 북송초까지의 야화를 10세기인 송대에 엮어낸 대작 [태평광기]에 이런 기록도 전하는 것은 최근 들어서야 알려지고 있습니다.

汧阳令, 太平廣記, 卷449
당(唐) 나라 도사(道士) 나공원(羅公遠)이 유성(劉成)으로 둔갑한 천호(天狐)를 죽이지 않고 멀리 신라로 내쫓아 보냈더니 지금도 신라(新羅)에서는 유성신(劉成神)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건히 모신다.

이 부분의 전체 원문은 이렇습니다. 굵은 체가 위의 해석부분입니다.

汧陽令   
唐汧陽令不得姓名。在官,忽云:「欲出家。」念誦懇至。月餘,有五色雲生其舍。又見菩薩坐獅子上,呼令歎嗟云:「發心弘大,當得上果。宜堅固自保,無為退敗耳。」因爾飛去。令因禪坐,閉門,不食六七日。家以憂懼,恐以堅持損壽。會羅道士公遠自蜀之京,途次隴上。令子請問其故。公遠笑曰:「此是天狐,亦易耳。」因與書數符,當愈。令子投符井中。遂開門,見父餓憊。逼令吞符,忽爾明晤,不復論修道事。後數載,罷官過家。家素郊居,平陸澶漫直千里。令暇日倚杖出門,遙見桑林下有貴人自南方來。前後十餘騎,狀如王者。令入門避之。騎尋至門。通云:「劉成,謁令。」令甚驚愕。初不相識,何以見詣?既見,升堂坐。謂今曰:「蒙賜婚姻,敢不拜命。」初令在任,有室女年十歲,至是十六矣。令云:「未省相識,何嘗有婚姻?」成云:「不許成婚姻,事亦易耳。以右手掣口而立,令宅須臾震動,井廁交流,百物飄蕩。令不得已許之。婚期克翌日,送禮成親。成親後,恒在宅。禮甚豐厚,資以饒益,家人不之嫌也。他日,令子詣京,求見公遠。公遠曰:「此狐舊日無能,今已善符箓。吾所不能及,奈何?」令子懇請。公遠奏請行。尋至所居,於令宅外十餘步設壇。成策杖至壇所,罵老道士云:「汝何為往來,靡所忌憚?」公遠法成,求與交戰。成坐令門,公遠坐壇,乃以物擊成,成僕於地。久之方起,亦以物擊公遠,公遠亦僕,如成焉。如是往返數十。公遠忽謂弟子云:「彼擊餘殪,爾宜大臨,吾當以神法縛之。」及其擊也,公遠仆地,弟子大哭。成喜,不為之備。公遠遂使神往擊之。成大戰恐,自言力竭,變成老狐。公遠既起,以坐具撲狐,重之以大袋,乘驛還都。玄宗視之,以為歡矣。公遠上白云:「此是天狐,不可得殺。宜流之東裔耳!」書符流於新羅,狐持符飛去。今新羅有劉成神,土人敬事之。(出《廣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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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당나라의 도사인 나공원이란 자가 '유성'(뜻은 모르겠습니다)으로 둔갑한 천호(하늘여우?)를 신라로 내쫓았는데, 신라에서는 '劉成神'(유성신)이라는 이름으로 이 여우를 모신다는 것입니다. 이 '유성신'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연구나 관심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필자는 이런 구절을 고전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民具劉神何福。
興槁族沃灾魃。

이 구절은 채팽윤(蔡彭胤, 1669~1731년)의 [희암집(希菴集)]에 나옵니다. 즉, 백성이 '유신'(劉神)에게 복을 구한다. 라는 뜻에 가깝다고 보이는데, 여기서 '유'자는 사실은 '죽이다'와 '예쁘다'의 중의적인 뜻이 있는 글자입니다. '유성신'에서 '될 성'자가 빠졌지만, '유신'이라는 글자는 분명 당시 어떤 민간신앙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고대신라에서 내려오던 여우귀신에게 복을 구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주인공 이야기는 다음의 기록입니다. 17세기 조선중기 지괴류라 할만한 [천예록]에 나오는 기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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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倪錄
여우요괴기담

이회는 정승의 자제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그의 아버지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었기에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평양 감영의 관아에서 지냈다. 감사에게는 정실이 없고 다만 첩 하나만이 내실을 지켰다. 마침 지방순시를 나가게 되어 감영 안은 텅 빈 상태였다. 

관아의 후원 담장 밖에 정자 하나가 서 있었는데, 산정이라고 불렀다. 작은 문 하나를 만들어 관아 내부와 통하도록 해 놓았다. 이회는 어린 통인 하나를 데리고서 혼자 이 산정에 머물며 독서를 일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밤이 깊었다. 마친 어린 통인은 밖에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즈음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쳐다보니 한 어린 소녀였다. 

입고 있는 옷이 조촐하면서도 깨끗하고 자태와 맵시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이목구비를 잘 살펴보았으나 여태껏 본 적도 없었고, 기생 중에서도 이런 아이는 없었다. 불현듯 의구심이 일어 말없이 아이가 하는 짓을 살폈다. 

그 애는 방으로 들어와 한쪽 모퉁이에 앉아서는 아무 말도 않았다. 누구냐고 물어도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회는 그녀를 불러 가까이 오라고 하자, 대뜸 일어나 다가와서 무릎 앞에 앉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사랑한다는 시늉을 하자, 그녀 또한 좋아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이회는 속으로 이는 요물로, 마귀가 아니면 여우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 제압해야 할 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 그녀의 몸을 잡아채 등에다 걸치고 꼼짝못하게 붙들고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후원 문을 통해 관아의 대청으로 들어가 화급히 서모와 하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밤이 깊은 때라 모두 자는지 대답하고 나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등에 붙들려 있던 아이는 주둥이로 이회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깨물었다. 그때서야 그것이 여우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물린 목덜미의 고통을 참을 수 없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손이 조금 느슨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여우는 바로 등에서 땅으로 뛰어내려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회는 항상 그때 누군가 나와서 도와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잡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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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7세기초의 이회(李禬,1607~ 1666년)로 그는 163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실존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혼자 평양관아의 후원에 있는 산정이라는 정자에 앉아서 늦은 밤에 책을 보고 있는데 어린 소녀가 들어와서, 그를 꼬시는 겁니다.

여기서 흥미롭게도, 이회는 그녀가 '여우요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즉, 17세기 당시에 일반적으로 '여우'에 대한 인식이 요즘과 다르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죠. [천예록]이 후대에 씌여진 것이 아닌 17세기 당대의 동시대 저서이므로 이는 당대의 여우요괴에 대한 인식이 확실합니다.

이 이야기가 여타 여우기담과 차별화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이 요괴를 거의 붙잡을 뻔 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요괴가 이회의 목덜미를 깨무는 액션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즉, 카더라가 아닌 이회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담에 가까운 이야기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흥미롭게 생각하는 기록인데, 언젠가 이회나 그 주변과 요호(여우요괴)의 어떤 접점이 있으면 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신라의 '유성신' 기록 역시 더 알아보고 싶은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예전 여우요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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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관련글은 남중생님의 제보덕분에 삭제할 수 있었습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17세기 조선, 멧돼지 인간 요괴 기담 2017-02-06 05:51:54 #

    ... 을까 싶군요.=====사족: 아예 17세기 요괴와 귀신들을 모아서 드라마화해도...16-17세기 햔양 남산 요괴지도16-17세기 거대뱀 기담들17세기 여우요괴를 잡을 뻔한 한 기담17세기 까치요괘와 훼훼귀 ... more

덧글

  • 레이오트 2016/06/24 11:12 #

    그 여우요괴가 아리같은 미녀였다면 그 전개와 결과는 심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ㅠ^;;;;;;
  • 나인테일 2016/06/24 15:03 #

    랑이. 랑이님 도입이 시급합니다. ㅠㅠ
  • 역사관심 2016/06/25 02:57 #

    동감...합니다 ㅎㅎ
  • 존다리안 2016/06/24 14:55 #

    타마모노마에 생각도 나네요.
  • 역사관심 2016/06/25 02:58 #

    타마모노마에가 결국 구미호인게 맞죠? 일본에 와서 만들어진...
  • 나인테일 2016/06/24 15:03 #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 같은 작품도 있었죠 아마...
  • 역사관심 2016/06/25 02:58 #

    몰랐는데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 동사서독 2016/06/24 16:16 #

    여우귀신과 신라라고 하니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진성여왕 시대 배경)과 이후 리메이크된 정준호 김혜리 김효진 출연작 천년호를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유성... 성은 유, 이름은 성... 사람 이름 아닐까요?
  • 역사관심 2016/06/25 02:59 #

    그런 영화도 있었군요. 참고자료로 쓸만하겠는데요? ^^ 저 이름에 대해선 차차 좀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좀 급하게 올린 글이라...
  • 아빠늑대 2016/06/24 16:22 #

    여담인데 여우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보면 여성성을 보이거나, 영리하거나 뭐 그런 이미지를 그린게 많지 않습니까? 예전에 동물들을 보면 다른 동물들도 다 똑같이 영악한데 왜 하필 여우냐? 싶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람손을 탄 여우를 보니 "그렇겠다" 싶더만요... 아주 살랑살랑... 어휴...
  • 역사관심 2016/06/25 03:00 #

    저도 사실 동물원가서 여우 표정과 행동보고 약간 충격받은 느낌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아 괜히 여우가 아니구나! 했던 ...
  • 남중생 2016/06/25 02:22 #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사는 여우요괴와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유 신부(劉神父), 나 신부(羅神父)는 모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가톨릭 "신부"를 일컫는 말입니다.
    역사관심 님께서 소개해주신 기사는 말씀하신 대로 아직 국역되지 않은 듯 하지만,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3 > 서학(西學)" 기사에 거의 동일한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10&gunchaId=&NodeId=&setid=730139
    위는 고전db의 링크입니다. "정하상"을 검색(ctrl+f)하시면 대충 해당 부분이 나옵니다.
    나신부, 유신부가 각각 누구인지 주석도 링크되어 있으니, 찾아보시기 편하리라 봅니다.^^
  • 역사관심 2016/06/25 03:01 #

    누군가 도움을 주시길 기대했는데, 남중생님이 역시. 저도 '서학'이라는 부제가 보여서 뭔가 아닐거 같다라는 생각은 했는데, 저 아비부가 그 뜻일줄이야...저 부분은 과감히 지웁니다 ^^ 고맙습니다.
  • 앞서나가는 아이스크림 2021/08/03 17:42 #

    전우치전에서는 구미호가 전우치에게 협박을 당해서 도술책을 들고 와서 도술을 알려주는 역할로 나왔어요.(이후에 전우치를 속이고 책 가지고 튀지만.(책에 표시한 부분 제외하고)

    그리고 전우치전 결말에서 전우치가 자신에게 도술을 알려준 구미호를 서화담과 같이 석갑에 가두는 내용이 있더라구요.
    이후남이라는 사람의 해석(pdf)을 보니까 전우치가 서화담에게 패배한 것도 구미호에게서 힘을 받았기 때문에 요사스러운 힘은 사용하면 안된다는 해석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구미호를 굳이 죽이지는 않고 가두어서 외부랑 단절시킨다는 점에서 구미호를 교화(개심)시킬수 있다고 해석했더라고요.
    (그 pdf에서 전우치전과 옥루몽을 제외하고는 구미호는 완전히 퇴치당하는(죽음)이라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근데 전우치전 각색물에서 구미호가 히로인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이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역사관심 2021/08/05 00:30 #

    전우치전의 초반부에 나오는 여우요괴이야기는 예전에 한번 다룬 것 같은데 찾질 못하겠네요...

    서화담이야기는 조선전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성리학의 나라에서 이율곡의 스승인 서화담의 도력이 요괴에게 전수받은 도술보다 뛰어나야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전우치에 대해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http://luckcrow.egloos.com/2300376
    (이런 전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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