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화루와 민무구의 이층집개조로 보는 조선전기 목장들 능력 (15세기) 한국의 사라진 건축

세종실록을 보면, 당대 '건축전문가'들에 대한 정보가 간접적으로 담겨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 '중층건축'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하나 나눕니다. 

1430년, 세종은 사신들을 접대하는 누각인 '모화루'가 단층이고 낮고 비좁으니, 2층집으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월16일 (을유)
12-04-16[01] 모화루에 거둥하여 영조하는 상황을 보다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영조(營造)하는 상황을 보고, 악차(幄次)로 돌아와서 위사(衛士)들에게 센 활[强弓]을 당겨서 2백 보(步)를 쏘게 하고, 잔치를 베풀어 조성 도감 제조(造成都監提調) 안순(安純)ㆍ홍리(洪理) 등을 악차 안에서 위로하고, 낭청 감역관(郞廳監役官) 등에게도 잔치를 베풀어 주고, 공장(工匠)ㆍ군인들에게까지 모두 술과 과실을 내렸다. 연회를 마치자 임금이 다시 살펴보고 그 규모가 낮고 어두움을 책망하며, 이층집[重屋]으로 개조하라고 명하였다.

○乙酉/幸慕華樓, 觀營造之狀, 還御幄次, 令衛士挽强弓射二百步。 宴慰造成都監提調安純ㆍ洪理等于幄內, 賜郞廳監役官等宴, 下至工匠軍人, 竝賜酒果。 宴訖, 上復觀之, 責其規模低暗, 命改構重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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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루는 1407년(태종 7년) 송도(松都)의 영빈관(迎賓館)을 모방하여 서대문(돈의문) 밖 서북쪽에 건립한 것으로, 처음에는 모화루 (慕華樓)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모화관'으로 개칭합니다. 

세종대왕이 모화루를 2층집으로 개조하라는 부분에서, 흥미로운 단어로 '重屋'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루'가 아니라 '중층가옥'이라는 느낌이 더 드는 단어선택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형태의 전각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화루'의 형태에 대한 조그마한 단서랄까, 아니면 간접적인 느낌을 주는 기록이 같은 해 약 두 달뒤의 기록에 등장합니다. 다음은 세종실록 1430년 6월 5일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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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6월7일 (병자)
12-06-07[01] 이승직 등이 상소하여 모화루 영선 감독관인 안순 등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듣지 않다

대사헌 이승직(李繩直) 등이 상소하기를,
모화루는 사신을 영접하는 곳이온데 쓰러질 위험이 있으므로 인하여 부득이 고쳐 짓는 것이온즉, 다른 공사[營繕]에 비할 것이 아니온데, 안순(安純)ㆍ홍리(洪理) 등이 감독하는 명을 받았으니 진실로 마땅히 자세히 살피고 삼가며 조심하여 집 짓는 제도를 규격에 맞도록 하여야 옳을 것이온데, 이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높고 낮음을 맞지 않게 하여 고쳐 지었으며, 개천에 이르러서는 돌을 쌓은 지 며칠이 안되어 한번 빗물이 닥치자 거의 다 무너져서, 허망하게 재력(財力)을 낭비하되 전혀 감독할 뜻이 없었던 것이 명백합니다. 

윤린(尹麟)과 오해덕(吳海德)은 오랫 동안 건축 공사를 하여 집 짓는 체제를 상세히 다 알 것이온데, 이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망령된 생각으로 재작(裁作)하여서 체제에 맞지 않게 하였사오니, 그 죄가 가볍지 아니하온데, 더욱이 홍리(洪理)와 윤인(尹麟)은 죄책을 면할 길을 엿보아서 심문할 때에, ‘민무구(閔無咎) 평집[平家]을 층집[層閣]으로 고쳐 짓고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곧 불경(不敬)함이 이에서 더할 것이 없사온즉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디어 바라옵건대, 순(純)ㆍ리(理)ㆍ린(麟)ㆍ해덕(海德) 등의 죄를 법에 따라 시행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丙子/大司憲李繩直等上疏曰:

慕華樓迎接使命之所, 乃緣傾危, 不得已改造, 非他營繕之比也。 安純、洪理等受命監督, 固當詳察謹愼, 使造家之制合於繩墨, 乃不用心, 使高低失中, 以致改造。 至若開川, 則築石不日, 一遇雨水, 圮毁殆盡, 其妄費財力, 專無監督之意明矣。 尹麟、吳海德久於工作, 造家體制, 靡不詳知, 乃不致慮, 妄意裁作, 體制失中, 厥罪匪輕。 況理、麟窺免罪責, 推劾之際, 以無咎平家改造層閣爲辭, 此乃不敬之大者也, 不可不懲。 伏望將純、理、麟、海德之罪, 依律施行, 以戒後來。

不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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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면 윤린(尹麟), 오해덕(吳海德), 안순(安純) 과 홍리(洪理)라는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안순(安純)은 문신이었고, 홍리(洪理) 역시 관리직의 인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두번째 문단에 나오듯 윤린과 오해덕은 분명 당시 전문건축가격인 편수(목장)였다고 보면 됩니다. 즉, '윤린과 오해덕은 건축공사를 오랫동안 건축체계를 상세히 아는 전문가인데, 모화루처럼 중요한 건물의 (세종 명으로 중층으로 만드는) 공사에 매진하지 않고 대충 돈만 많이 받고 허비했다'라는 것이 상소의 요지입니다. 재작(裁作)했다는 말은 '대충 짐작지어 만들었다'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윤린' (과 관리직인 홍리가) 변명하는 부분이 재밌습니다. 
以無咎平家改造層閣爲辭, 

'민무구' 그러니까 조선초기의 무신이자 외척으로 민변의 손자이고 민제의 아들이며 원경왕후의 동생인 인물이죠. 그 민무구의 집이 '단층(平家)'인데, 그걸 '중층집' (층각, 層閣)으로 만드느라 바빴다는 식의 해명을 하는 겁니다. 평가(平家), 평옥(平屋)은 평평한 집, 즉 단층집을 뜻합니다. 

모화루의 경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사방이 뚫리고 기둥으로 올린 조선식 루인지 혹은 벽체가 있는 2층루 (단어로만 보자면 '층옥'의 뜻은 이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 '민무구'의 평집을 층각으로 고친다는 것은 확실히 중층의 가옥을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승직의 상소내용을 보면 이러한 공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윤린이나 오해덕같은 목장들은 중층가옥에 대한 전문 이해도가 꽤 높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사택을 올리는 공사'를 한다고 충분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춘 건축가가 감히 공공건축인 모화루의 2층올리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고 질책하는 투에서 그러한 맥락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전기까지는 사실 건축가들 (그러니까 관련 목공들과 지금으로 치면 목장들)에 대한 대우가 조선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관직도 높았고 녹봉도 높았으니 대우가 좋았지요. 그리고 전문직으로써의 목장들의 능력도 역시 이에 따라 더 높았으리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동욱 선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종 때까지만 해도 나라의 주요 건축을 책임 맡은 기술자는 정 3품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1447년 숭례문을 수리할 때 공사를 주관한 대목은 정 5품 무관벼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성종 때 다시 수리할 때 대목의 지위는 정 3품 무관이었다. 그러나 기술자들에게 주어지는 관직 수여는 양반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나날이 커지는 신하들의 목소리는 급기야 건축 기술자들이 관직에 오를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17세기 이후 건축 장인들은 소수만이 군영이나 관청에 소속되어 관리들이 정해 놓은 작업 범위안에서 기량을 발휘하는데 그쳤다. ... 불교 사원의 경우에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사이 사원 건축이나 수리에 종사한 승려 장인들은 선사 또는 대선사와 같은 법계를 지니고 대목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7세기를 지나면서 승장들이 특별한 법계를 지니는 사례는 거의 사라졌다. ... 민간인 장인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확보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이나 되어서야 가능했는데, 이들이 영업 조직을 갖추고 (중국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창조적인 건축 활동을 펼쳐나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버렸다. 조선의 건축 장인들에게 17, 18세기는 결코 녹녹한 시기가 아니었다."


세종 실록의 이 기록을 보면서, 조선전기 당시 '층루'형 가옥에 대한 편수(목장)들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민무구와 같은 외척들의 저택에서도 '중층건축'이 꽤 존재했음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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